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21)
천공 침범
“황제 카를로스가 공표한다! 본국은 아스라에 뿌리내린 심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천공 세력의 유저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
“성왕국 또한 천공의 신도의 유저들을 원조하겠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위협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세계관의 국가들 중 가장 큰 두 나라가 천공 ‘유저’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나섰다.
그들이 제도를 마련하자 근처의 약소국들도 뜻을 같이했다.
그렇게 인간 세력은 소수를 제외하고 하나로 뭉쳐가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기사의 거리’는 패치 전만해도 유저에게 허락되지 않던 장소였지만, 제국 황제의 전언 이후 천공 세력의 유저들에게 개방되었다.
“천공 세력의 유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라!”
황제 카를로스의 공표 이후부터 천공 유저들은 제국의 훈련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유저에게 있어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
NPC에게 ‘제국 기초 검술’ 등의 스킬을 전수받을 수 있었으니까!
검뿐만 아니라 궁술, 마법, 신성마법 등의 수준을 다양하게 높일 수 있었기에 천공 세력의 유저라면 누구나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NPC의 인력도 무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스라 주민의 숫자가 많더라도 제국의 인력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50레벨 이하인 초보 유저들까지는 적극적인 원조를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도 간단한 ‘천공 퀘스트’가 주어졌으니 불만은 적었지만, 상위권 유저들에 비해 지원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최상위 랭커에 속하는 천공의 유저들은 웬만한 명문 길드보다 우수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모두는 높은 곳으로 올라서려 노력했다.
***
미나상. 노리스.
둘은 모두 일본 유저이면서 현실의 자매이기도 했다.
미나상은 마법사.
노리스는 전사.
패치 직전 50레벨을 달성하고 천공 세력을 선택한 덕분에 제국 기사의 거리에 입장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특별대우를 받는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기사의 거리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기회임이 틀림없다.
무려 스킬을 배울 수 있는 퀘스트를 얻었으니까!
[천공 퀘스트 : 제국 기초 검술을 배우자!]-허수아비를 때리며 검술의 숙련도를 올리세요 (현재 49%)
-숙련도가 꽉 차면 ‘제국 기초 검술 Lv.0’을 익힐 수 있습니다.
노리스는 검술, 미나상은 마법에 관련된 스킬 퀘스트를 받은 상태였다.
미나상은 언제나 마법의 개수가 부족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퀘스트 보상으로 얻는 스킬에는 포인트도 소모되지 않았기에 미나상은 더욱 행복했다.
“이제 50퍼센트 끝냈다아! 후…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될 줄이야….”
노리스는 한동안 허수아비를 때리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게임 속의 유저는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일은 없지만, 하루 종일 허수아비만 때리는 것은 그 자체로 몸이 지치는 노동이었다.
“에? 벌써 50퍼센트? 빨라!”
이제 막 30퍼센트의 숙련도를 채운 미나상이 감탄했다.
그녀 역시 꾸준히 마법으로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중이었다.
노리스와 달리 미나상은 마법사.
마나가 고갈될 때마다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진도가 느렸다.
“언니 굉장하네요!”
“한 시간에 20퍼센트 정도 오르네… 하지만 말야, 이런 지루한 시간은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노리스는 중얼거리며 연무장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유저가 제국 병사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쳇- 그 광경을 보는 노리스는 부러운 마음에 혀를 찼다.
“나도 1대1로 개인교습 받고 싶다고!”
혼자 연습하는 것보단 누군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이 진도가 빠른 것은 당연한 사실.
제국의 병사에게 개인교습을 받는 유저들은 10배 빠르게 숙련도가 올라갔고, 순식간에 스킬의 숙련도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지루해, 하루 종일 허수아비만 때리는 건 싫단 말야.”
“하지만 언니… 우리는 어쩔 수 없어요. 저 유저는 아마도 결투장에서 다이아몬드 이상의 등급을 달성했을 걸요?”
NPC들이 유저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두 가지다.
명예의 전당 랭킹. 그리고 결투 랭킹!
하지만 명예의 전당 1000위권 이상의 랭커가 아닌 이상 NPC의 인상에 남지 않는다.
즉, 결국 결투 등급으로 대부분의 판단이 이루어진다.
직접 유저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없는 NPC들에겐 유저들의 결투 등급이 가장 객관적인 지표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천공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결투 붐이 일어나는 추세였다.
“다이아몬드 가고 싶어….”
“저도요… 하지만 우리 레벨로는 무리에요….”
“알고 있다고.”
노리스는 이미 결투장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처참할 정도로 현실을 깨달았다.
무려 200판 동안, 영혼을 갈아 넣듯 싸워온 결과 간신히 플레티넘 5에 턱걸이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들은 건데, 다이아몬드정도 되면 상위 1퍼센트라고 하나봐.”
“대단하네요. 그 사람들 정도면 프로게이머인가 뭔가 하는 분들인 건가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간신히 올라간 플레티넘만 해도 괴물들 천지였다고. 아, 플레티넘은 상위 5퍼센트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에요. 저희는 그냥 여기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제국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가능성이 높은 유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결투 등급을 보는 것이 가장 명확한 방법이었다.
다이아몬드보다 높은 등급의 특혜 또한 존재했다.
상위 0.05퍼센트라 불리는 마스터 등급의 유저는 단장 급의 기사에게 직접 지도를 받게 된다.
훈련 시간은 더 길지만 얻는 스킬은 하위 티어의 것보다 더욱 강력했으니 누구나 탐낼 만한 보상이었다.
만약 그랜드마스터인 유저라면?
천상계의 끝이라 불리는 상위 1000명.
이제부터는 NPC들의 대우 자체가 달라진다.
그랜드마스터인 유저들은 준 귀족에 가깝게 취급되어 하급 병사들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출 정도였다.
아스리안의 NPC들은 무서울 정도로 현실의 인간과 닮아 있었다.
유저가 마음에 드는 NPC의 호감도 작업을 하는 것처럼, NPC역시 유저들의 호감을 사려 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그랜드마스터의 유저라면!
유저의 성장 속도는 NPC에 비해 우월하다.
NPC역시도, 지금은 자신보다 약한 유저가 훗날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훗날 성공한 유저가 자신에게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남성 유저가 여성 NPC와, 여성 유저가 남성 NPC와 일반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특혜를 누리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바로 ‘천공’의 세력이어야 한다는 것!
아무리 결투 등급이 높고 명예의 전당 랭킹이 높다고 하더라도 심연이여선 천공 세력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지원은커녕 NPC들에게 공격 받고 살해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기사의 거리 입구에는 문지기와 함께, 고레벨의 신관이 한명씩 붙어 있다.
그 신관은 입장하는 모든 유저의 손등에 떠오르는 룬(Rune)의 모양을 확인한다.
천공은 푸른 번개.
심연은 붉은 불꽃.
고위 신관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진실된 룬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심연의 유저가 룬을 바꾸다 걸려서 사망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도 우린 천공이라서 다행이네요.”
미나상이 중얼거렸다.
“심연 분들은 아무리 등급이 높아도 이런 특혜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마 그렇지?”
“네, 안타까워요….”
“하긴, 심연에서 최상위 NPC는 악마라고 하잖아? 악마가 인간을 열심히 도와주진 않을 것 같아.”
“NPC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네요. 악마는 몬스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노리스와 미나상이 잡담을 나누던 때, 연무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두 자매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응? 무슨 일이지?”
연무장에 있는 수십 명의 유저들이 각자 수련을 멈추고 입구로 무언가를 구경하듯 몰려들었다.
유저 뿐 아니라 NPC들의 이목도 같은 쪽으로 집중되었다.
잠시 후 병사 몇몇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의 유저가 인파 사이를 걸어 나왔다.
검정색의 물감을 전신에 뒤집어쓴 듯한 칠흑의 로브는 이제 유저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해진 코디.
노리스가 검정색의 소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 나 쟤 누군지 알 것 같아!”
“언니도 알아보는 걸 보면 굉장히 유명한 분인가 봐요?”
“맞아, 유명해! 인터넷에서 봤었나…?”
노리스는 일본 유저였지만 해외 방송인이나 랭커들의 동영상도 자주 찾아보는 편이었다.
저 소녀는 해외 커뮤니티에서 소란이 된 한 결투 동영상에서 모습을 드러냈었고, 그 장면은 노리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굉장하네요… 아이디도 기억해요?”
“음… 뭐더라 A… 뭐였는데. Ain…? 맞아, 그랬던 것 같아!”
***
몇 시간 전.
현은 아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스라 온라인에서는 현과 아인, 모두 천공 세력이었으니, 아인을 가만히 놔두면 생각 없이 이전과 동일한 천공세력을 선택할 것이 틀림없었다.
세력이 서로 갈리지 않으려면 서둘러 자신의 세력을 알려 주어야만 할 것이다.
‘잠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인에게 연락을 보내기 직전이었다.
‘꼭 같은 세력으로 할 필요가 있나? 만약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현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귓속말을 보낼 때 마침 아인은 결투장에서 나와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AIN : 아, 왔어?
아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결투에서 한 번 패배한 탓에 원하는 만큼의 코인을 모으지 못했던 탓이었다.
아무리 아인이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승 패널티를 극복할 수는 없던 것이다.
LeeSeoHyun : 뭐야, 어디 아파?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AIN : …음, 내 연승이 깨져버렸거든.
LeeSeoHyun : 그래? 하긴 아무리 너라도 질 때도 있겠지. 그래서 몇 연승이었는데?
아인이 커플링을 사기 위해 코인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어지는 아인의 말에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랐다.
AIN : 60연승정도…. 아, 바보같이 오히려 깊게 생각해서 말렸다니까? 그냥 때려잡았으면 됐는데!
LeeSeoHyun : 뭐?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던 거야! 60연승이라고? 앗, 잠깐…!
대화 도중 현은 아까전의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아인의 결투 등급이 높다면 자신이 원하는 계획을 더욱 쉽게 실행할 수 있지 않은가?!
LeeSeohyun : 그래서 지금 결투등급은?
AIN : 그랜드마스터.
LeeSeoHyun : 오우,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티어 좀 올려두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AIN : 알아. 천공 퀘스트 자격 맞추려는 거지?
LeeSeoHyun : 당연하지!
AIN : 현도 올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LeeSeoHyun : 아니. 난 괜찮아.
AIN : 으응? 왜?
LeeSeoHyun : 난 심연이거든.
자신의 세력을 답하는 현의 말에 아인은 깜짝 놀랐다.
현은 예전부터 불확실한 것을 싫어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예전과 같은 천공을 택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IN : 웬일로 세력을 바꿨대? 그래도 빨리 알아서 다행이야! 나, 듣지 않았다면 아마 천공으로 택해 버렸을 걸?
LeeSeoHyun : 너는 천공이 맞아.
AIN : 응? 방금 현은 심연이라고….
LeeSeoHyun : 그래, 난 심연이고, 넌 천공. 알아듣겠어?
아인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에 현은 딱 잘라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알 수 있으려나?
아니, 조금 더 설명하는 편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한 현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 아인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AIN : 자, 잠깐만…!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데?
LeeSeoHyun : 뭐가?
AIN : 혹시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 아니지?! 그… 어떤 여자가 끌어들였다거나!
어떤 여자? 의외로 맞는 말이긴 하다.
자신의 세력이 심연으로 선택된 것은 온전히 루이즈의 영향이었으니까.
LeeSeoHyun : 뭐, 천천히 들어 봐.
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인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떠올린 발상은 다음과 같았다.
동화를 사용해 아인의 몸속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심연 세력이라 할지라도 천공의 세력에 섞여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설령 고위 신관이라도 동화로 타인의 몸에 숨은 영혼을 꿰뚫어보지는 못할 것이다.
영혼을 직접 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초월자들 뿐이다.
즉, 심연인 자신이 아인의 몸속에 숨는다면 천공의 영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LeeSeoHyun : 세력이 달라진다고 해서 우리 파티가 해산되는 게 아니야. 오히려, 한 몸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쓸 수 있는 거라고.
현은 제법 오래 대화를 나눈 끝에 다급함이 가득하던 아인의 목소리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
기사의 거리.
이제 유저들은 이곳을 ‘천공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NPC들이 천공 유저들을 가르치며 도움을 주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천공에 속한 유저들을 지원하기 위해 제국에서 파견 나온 NPC들이 머무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NPC의 지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현은 천공이 가진 15퍼센트 경험치 부스터보다 NPC의 지원 유무가 더욱 값진 어드벤티지라 생각하고 있었다.
심연 세력에서는 이런 호의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스라에서 천공을 택했던 것도 경험치 때문이 아닌, NPC와의 관계를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가자고.」
기사의 거리로 향하는 입구에는 문지기와 함께 최고위 신관이 버티고 있었다.
현은 동화를 사용한 채로 아인이 입구를 통과하도록 두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들었고 마침내 아인의 차례가 다가왔다.
문지기가 길을 막는 동시, 옆의 신관이 말을 걸어왔다.
“손등을 보여주게. 형식적인 절차이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아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관에게 장갑을 벗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문지기에겐 결투등급이 적힌 상태 창 일부를 공개했다.
“그랜드 마스터….”
순간 문지기 기사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호오, 나 안드로가 본 그랜드마스터 유저는 자네가 세 번째로군!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자도 기사의 거리에선 자신이 천공의 신도임을 증명해야만 하지. 이것은 제국의 황제도 예외가 아니라네.”
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아인의 손등을 확인했다.
순간, 눈이 커지고 손등을 가까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것은…?!”
손등에 새겨진 천공의 문양을 보는 순간, 대신관은 경악했다.
대신관의 옆에 서있던 기사는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검을 빼들었다.
대신관이 심연 세력이 정체를 숨긴 것을 발견했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검을 집어넣어라!”
이어지는 대신관의 호통에 즉시 기사의 움직임을 멎었다.
입구에서 큰소리가 들리자 몇몇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대신관은 문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아인의 손을 살며시 잡고 훑어보았다.
소녀의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신관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인만이 자신의 손을 더듬는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을 뿐.
“천공, 이것은 완벽한 천공의 문양이다!”
한참 만에 대신관이 입을 소리쳤다.
“천인의 룬이야!”
대신관이 놀란 이유는 당연했다.
일반적으로 유저들에게 새겨진 천공의 문양은 푸른 빛깔의 번개 모양 문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 새겨진 룬은 전격과 냉기를 머금었을 뿐만 아니라 문양 전체가 의지를 가진 듯 스스로 발광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천인’의 상징이었다.
아인에게 천인의 룬이 나타난 이유는 간단하다.
이전에 수상한 노인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 한 이후 ‘천인’의 칭호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대신관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천인이란 평범한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
그들은 천공. 즉, 하늘 위에서 살아가지만 아주 가끔씩 지상에 강림하기도 했다.
초월자인 천사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지만, 인간보다는 상위의 존재였다.
당연히 유저가 천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 천인의 룬을 가진 소녀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상식을 배반하는 이 상황에 대신관은 고민에 빠졌다.
「아까 말해준 거 기억하지? 실수하지 말고.」
동화하고 있는 현의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현은 아인의 대답을 미리 준비해 주었다.
솔직히 아인은 연기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은 현이 시킨 대로 따르기로 했다.
“나, 짐작 가는 게 있어.”
“흐음…? 무슨 뜻이지?”
“룬이 다른 이유 말이야.”
대신관은 갑작스런 아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인은 현이 지어내준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마물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마물들은 너무 강력해서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어. 그리고 마법 한 방에 수십의 마물들을 일거에 소멸시켜 버렸지.”
아인은 아스라의 한 장면으로부터 떠올린 천인의 마법을 묘사했다.
“마치 얼음이 회오리치는 것처럼 보였어.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굉장한 마법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마물들이 사라진 자리엔 수천 개의 얼음 파편들이 흩뿌려져 있었으니까.”
“과연 천인이시다. 마법만 들어도 어떤 분인지 알 것 같군.”
대신관이 아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분이 그 다음 무엇을 했지?”
아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기억을 떠올리듯 말했다.
“음… 내게서 가능성을 봤다고 했던가…? 날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했어. 왜냐면 그땐 상당히 바빴거든.”
“이런….”
옆에서 아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기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천계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소녀의 실수가 마치 자신의 실수인 양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인의 말은 좀 더 이어졌다.
“그래도 나중에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겠냐고 물어 보길래 알았다고 했지. 그러더니 갑자기 내 머리에 손을 얹었고….”
“흠…?”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게 굉장히 춥고 찌릿한 감각이 온 몸을 난도질 하는 것 같았어. 아무튼 정신을 차리니 그 사람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지.”
아인은 자신의 손등에 떠오른 천공의 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내 몸에 룬을 새긴 걸까? 당시에는 날 공격한 것인 줄 알고 한마디 따지려고 했었는데.”
“그렇군. 이제 알겠다.”
대신관은 마침내 확신했다.
그가 거짓말에 걸려들 수밖에 없던 이유는 현과 아인이 이전 ‘아스라 온라인’의 정보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때, 완벽했어?」
대신관이 입구 안쪽의 누군가를 부르는 틈에 아인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현에게 말했다.
칭찬해 달라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현은 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 말투부터 좀 어떻게 못 하냐?」
「뭐가?」
「저 대신관이라는 분, 대충 봐도 쉰 살은 넘어 보이잖아. 그런 어르신께 반말이라니.」
「뭐 어때, 어차피 진짜 사람도 아닐 텐데.」
괜히 반말을 지껄여 NPC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그런 현의 걱정은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우이기도 했다.
존댓말은 한국어를 비롯한 몇몇 언어들만의 특징이다.
자동으로 모든 언어가 번역되는 아스리안의 시스템 내에서는 그다지 상관이 없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한국인 유저끼리 대화하는 순간뿐.
그렇게 현과 아인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천공의 NPC들도 행정 처리를 마친 모양이었다.
아인에게는 병사로 보이는 한 명의 병사가 따라붙었다.
“안내 역할을 맡은 루다스입니다! 궁금한 것은 저에게 물어보세요!”
대신관의 특별한 전언 덕분에 루다스는 마치 상사를 모시는 듯 공손한 태도로 아인을 대했다.
천공 세력에서 천인의 영향력이란 이토록 거대하다.
문지기의 역할의 기사는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루다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천인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유저다. 예의를 갖추도록.”
“물론입니다!”
“그리고 여기, 대신관 안드로님의 인증이다. 이 정도면 확실하겠지.”
천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말단 병사인 루다스는 빳빳이 허리를 세웠다.
NPC 역시 유저의 성장 속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있다.
이만한 영향력을 지닌 유저라면…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거물일 지도 몰랐으니, 루다스가 긴장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안내 역할을 맡은 루다스의 나이는 성인의 나이를 한참 넘어서 보였음에도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아인에게 깍듯한 자세를 취했다.
“신분증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유저님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지요!”
아인은 병사가 내미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구슬을 건네받았다.
“유저님은….”
“아인.”
“아, 네 아인님, 기사의 거리에 관해 설명을 드릴까요?”
“음… 좋아.”
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현도, 아인도 이전에 기사의 거리에 와 본 적이 있으니 딱히 그의 설명이 없어도 대부분의 것들은 파악할 수 있었다.
병사가 신나서 혼자 떠드는 동안 아인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현과 대화했다.
「대단하네… 역시 현은 꼼수를 잘 쓴다니까?」
「훗, 이 정도는 쉽지.」
현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 안심이었다.
대신관 같은 고위 NPC는 자주 마주칠 정도로 많지도 많았고, 여차하면 다시 아인의 몸속으로 동화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누구도 심연의 존재가 기사의 거리에 침입했다곤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현은 거리 안쪽의 광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유저가 많이 모여들었군.」
「NPC들도 많은 걸?」
「하긴, 제국의 도시니까.」
기사의 거리는 세련된 분위기라 그런지, 귀족들도 자주 왕래하는 장소였다.
중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도시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거리 전체에 갖가지 마법진이 깔려 있는 덕분이었다.
그 중에는 현실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것들도 있었다.
「와, 이걸 여기서 다시 타볼 수 있다니.」
아스라에서 탔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스리안의 세계는 정교했다.
현과 아인은 ‘구름 배’를 타고 맞은편 건물로 이동했다.
‘구름 배’란 장치는 마법으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로써 창공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운송 수단이다.
구름배의 고도가 높아지자 기사의 거리가 모든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시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현은 압도되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경관이 생생하게 펼쳐지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인 역시 입을 벌린 채 구경하느라 말이 없었다.
“기사의 거리는 저희 제국의 수많은 자랑거리들 중 하나죠.”
병사의 목소리에선 제국 시민의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왔다.
몇 분 지나자 구름 배는 하늘까지 닿을 듯 어마어마한 크기의 어떤 건물에 도착했다.
발판이 건물 옆면의 발코니에 도킹하듯 멈추는 사이 병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사의 관 4층. 자유 수련장입니다.”
「굉장하네…」
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가상현실을 통해 직접 보니 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거대한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난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건물의 높이는 아무리 못 해도 100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도 고작 4층이라는 말은 한 층의 내부가 그만큼 쓸데없이 넓다는 뜻이다.
마법의 도움이 있기에 현대 건축학의 한계를 뛰어넘은 걸지도 몰랐다.
“여기부터는 제 담당 구역이 아닌지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디서든 신분증을 제시한다면 불편한 일은 없을 겁니다!”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구름 배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새로 안내원을 구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현도, 아인도 아스라의 경험을 통해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동화를 해제한 현이 중얼거렸다.
기사의 관은 제국의 엘리트 기사들만 이용할 수 있는 갖가지 시설들이 갖춰진 장소.
하지만 현재는 제국 황제의 명으로 ‘마스터’ 결투등급 이상의 유저에게까지 출입이 허용되어 있었다.
자격이 된다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사의 관은 유저 입장에서 갖가지 꿀을 빨 수 있는 요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기 때문이었다.
“뭐부터 할래? 업적 작? 스킬 작? 아니면… 레벨부터 올리는 편이 좋은가?”
기사의 관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100레벨까진 애써 사냥을 갈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는 게 평범한 사냥보다 경험치 효율이 좋은데 누가 사냥을 하고 싶을까?
“으음… 업적부터 차근차근 클리어 하는 편이 좋으려나?”
심연세력의 보너스 중 하나는 업적 보상을 30퍼센트 증가시키는 것.
일반적으로 심연 유저는 기사의 관에 입장할 수 없지만 현은 이렇게 이곳에 왔다.
천공 세력의 업적 이득에 심연 보너스 이득까지. 이것은 그야말로 개이득이 아닌가?!
“하지만 아인, 너는 일단 경험치가 우선이겠다.”
근 며칠간 따로 행동한 탓에 현과 아인의 레벨 차이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파티를 한다면 어느 정도 레벨이 균일한 편이 안정적이니 우선 아인의 레벨부터 올리는 것이 먼저였다.
거기다, 천공의 권한을 이용하기 위해선 아인의 신분증이 필수였으니, 현만 따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래 뭐, 까짓것 레벨부터 올리자.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현이 다음 장소로 움직이려는 그 때, 현의 시선을 사로잡는 누군가가 등장했다.
“엇…?!”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녀석의 얼굴에 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엔 얼핏 잘못 본 것일까 착각했지만 자세히 지켜본 결과 그 녀석이 확실했다.
처음에 미심쩍었던 까닭은 이 넓은 아스리안의 세상 속에서 그를 만나는 우연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재훈…?”
마침 재훈 역시도 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도 설마 하는 생각으로 의심하던 중이었다.
현이 먼저 말을 꺼내자 재훈이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피어났다.
“혹시… 너 이서현이냐?!”
정말일까 했는데 재훈이가 맞았다.
아스리안의 세계는 현실 못지않게 넓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유저가 아무리 수천만이 넘는다고 해도 아스리안에는 NPC의 숫자가 훨씬 많았으니 우연한 만남을 예상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잖아!”
“와, 여기서 만나는 일이 다 있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결투등급 덕분이었다.
패치가 끝난 직후, 결투등급이 높은 유저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시기였으니 이런 우연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쳐도 ‘천공 아카데미’라 불리는 장소는 수십 개나 더 존재하는 만큼 둘이 만났던 것은 굉장히 낮은 확률이리라.
게임 속인 만큼 둘은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기로 했다.
“프렉티스? 거 굉장히 프로게이머스러운 이름이군.”
“야 임마, 너처럼 아이디에 실명을 포함해서 만드는 쪽이 더 이상한 거지.”
그 순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프렉티스는 그제야 아인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을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운 나머지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헉…?!”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프렉티스의 눈동자는 현을 만났을 때보다 더욱 커졌다.
그곳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인은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다.
프렉티스는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쪽은….”
아인은 어째선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현이랑 같은 파티야.”
“서현이, 아니, 현이랑 파티라고요…?”
“왜 그렇게 놀라?”
자신을 보고 우왕좌왕하는 프렉티스의 행동에 아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운하게도 그녀가 프렉티스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투장에서 만난 수많은 상대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프렉티스가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흐음, 이상한 녀석이네.”
“야, 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쪽은 NPC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고!”
현이 따끔한 충고를 날리려던 때 프렉티스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내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걸까?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파악을 끝낸 프렉티스가 재빨리 물었다.
“저 기억 안나요? 그때 결투장에서 만났잖아요!”
프렉티스는 결투 당시 사용했던 무빙을 살짝 재현했다.
검로가 두 번 바뀌는 움직임을 보는 순간, 아인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 녀석이구나!”
“그쵸, 알겠죠?”
“기억났어.”
“뭐야? 너희들 만난 적 있었어?”
이쯤 되니 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스리안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녀석은 또 우연히도 아인과 아는 사이란다.
‘무슨 이런 우연이… 아니, 우연이 아닌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마스터 이상의 결투등급을 가진 유저들.
결투라는 하나의 주제로 이어진 만큼 프로게이머 지망의 프렉티스와 결투광인 아인이 이곳에서 마주치는 일은 딱히 불가능하지 않았다.
“근데 저 분은 누구야?”
갑작스런 현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푸른 빛깔의 머리에 안경을 쓴 여성이 서 있었다.
그 여성은 프렉티스가 자신에게 다가온 그 순간부터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프렉티스는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차, 지니 누나를 잠깐 잊었네.”
프렉티스는 곧바로 자신의 동료를 소개했다.
현과 아인이 언제나 함께 다니듯 프렉티스에게도 같이 다니는 파티가 존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친한 동료가 바로 눈앞의 지니라는 유저였다.
그녀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아이디는 지니, 스타더스트에선 사제 역할을 맡고 있어요.”
“아, 프로게이머시군요.”
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푸른 빛깔의 머리에 전형적인 서양인의 이목구비.
딱 봐도 외국인인 그녀가 어째서 ‘한국’ 프로게임단인 스타더스트에 들어가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개에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유럽계 혼혈이지만 한국 국적이라는 그녀는 외국에서 살다가 최근에 한국에 왔기에 한국어가 조금 서툴 수 있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인…?’
그와 별개로 지니는 아인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부터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인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프렉티스의 소개가 없었더라도 곧바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인은 이미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얼굴이 알려진 유저였기 때문이었다.
프렉티스가 아인의 플레이를 참고하여 일취월장했다는 사실은 스타더스트 내에서도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게다가 얼마 전, 아스라 온라인 유저였던 코치를 영입한 덕분에 아인이란 유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녀를 보게 되다니!’
지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레릿에 올라온 아인의 결투 동영상은 이미 빠짐없이 찾아보았다.
과거 아인이 NPC로 여겨지던 당시의 영상들도 전부 확인했다.
긴박한 전투 속에서 춤을 추는 듯 유려한 그녀의 움직임은 예술에 가까웠다.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고, 보면 볼수록 매료되었다.
게임단 코치의 설명에 따르면 아인의 PvP경력과 노하우는 웬만한 프로게이머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지니 역시도 프렉티스처럼 그녀의 동영상을 분석하며 무언가를 배우려 했지만 한계에 다다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불규칙한 동작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조화.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지니라도 아인의 움직임을 분석해 내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난관에 봉착한 때에, 이렇게 우연히 그녀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아인이죠? 만나서 영광이에요!”
갑작스런 지니의 반응에 아인은 약간 당황했다.
“나… 말이야?”
“그래요, 당신 지금 엄청 유명한데 모르나요?”
지니는 단숨에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그 중에는 프라이버시 등의 게임과 관계없는 질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음… 그게 말이지….”
아인은 현의 눈치를 보면서 얼버무리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나이까지 밝히게 되었다.
‘열 여덟이라고?’
어쩌다보니 아인의 실제 나이를 알게 된 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인의 실제나이는 그도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열여덟이면 고등학교 2학년. 즉, 자신보다 두 살 어리다는 뜻인데… 그 키와 외모로 고등학생이라고?
말이 돼?
현이 충격에 빠진 동안에도 지니의 질문 공세는 계속되었다.
이윽고 질문은 스타더스트 영입제안까지 흘러갔다.
“아니…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어.”
아인은 현을 흘깃거리며 제안을 거절했다.
지니가 현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은 아인이 자꾸만 누군가를 의식하는 기색을 느낀 뒤였다.
‘이 사람은?’
처음 만났던 순간 지니의 관심은 아인에게만 쏠린 탓에 현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인의 모습을 유심히 보다보니, 그녀가 계속해서 의식하는 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인이 자꾸만 옆을 힐끗거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인의 모습은 마치, 모든 주도권을 현에게 맡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지니는 관심을 가지고 현을 살펴보았다.
‘현…?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요….’
첫인상은 프렉티스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프렉티스는 얼마 전 새로운 아스리안 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면 어째선지 대답을 얼버무리곤 했다.
친구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
그 순간,
지니는 아스라 온라인 경력을 가진 코치가 스쳐가듯 중얼거린 내용을 기억해냈다.
전작에서 마치 전설처럼 군림하던 한 유저가 있었단 사실도.
코치가 말해준 이야기들 중 몇 가지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었다.
“잠깐, 당신이 현이라고요?!”
지니가 현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프렉티스가 신음을 흘렸다.
현은 프렉티스에게 되도록 자신의 정체를 숨겨 달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우연히 지니에게 발각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프렉티스는 멋쩍게 웃으며 지니에게 부탁했다.
“현에 대한 사실은 게임단에 알리지 말아 줘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 모양이라….”
“물론이죠, 그 정도는!”
어느새 지니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아인에게서 현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이 유저가 정말로 그렇게 대단할까?
소문으로 들어온 그의 능력은 마치 신화에 가까운 것들이었지만 평범한 겉모습으로 봤을 땐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스타더스트 올 생각 없어요?”
“네.”
지니는 아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엔 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잘한 질문들에 답하는 동시, 한편으로는 한 가지 가능성을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직업이 사제라고?’
그동안 아인과 단 둘이 플레이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은 둘만으로 할 수 없는 퀘스트가 제법 많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제가 있다면?
순간 현의 머릿속에 하나의 퀘스트가 번뜩였다.
굉장한 보상이 걸려 있음에도 그동안은 시도가 불가능했던 천공 퀘스트.
‘스토리대로라면 이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지금밖에 없어. 시간이 지나면 퀘스트는 자연스레 사라지겠지!’
원래 계획은 기사의 관에서 아인의 레벨을 올리고, 업적 보상을 하나씩 차근차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조금 수정해도 괜찮아 보였다.
이 지니란 유저는 아인 혹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조금 계획에 끌어들여 볼 생각이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지니의 말을 끊으며 현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혹시 히든 퀘스트라고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 후후, 이참에 우리 파티랑 합쳐서 히든 퀘스트 하나 하고 가시는 게 어떤가요?”
음침하게 웃는 현의 말에 프렉티스와 지니의 눈이 순간 커졌다.
히든 퀘스트!
프렉티스도 이전에 현에게 히든 퀘스트를 얻어서 급성장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히든 퀘스트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히든 퀘스트라는 걸… 그리 쉽게 타인에게 알려줘도 되는 건가요?”
“맞아, 지니 누나 말대로야! 갑자기 그러면 부담스럽잖아!”
프렉티스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도중에 끼어들었지만 현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조금 생색을 내고 싶은 기분에 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아는 히든 퀘스트만 해도 수백 개는 될 거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프렉티스는 계속 현의 제안을 받을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결국 현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갔다.
지니는 침을 삼키며 진행되는 일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현의 생각대로 결정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크윽… 빚은 언젠가 꼭 갚도록 할게.”
“하하, 빚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렇게 기사의 관 로비에서 4인 파티가 순식간에 결성되었다.
지니는 여유가 가득한 현의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랭커란 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만이 아는 정보를 함부로 공유하지 않는다.
아스라 온라인 시절 랭킹 1위를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는 그 역시 비슷한 성향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니의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가 버렸다.
이 정도로 훌륭한 인성을 갖췄음에도 1위를 뺐기지 않을 만큼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인가?
현의 꿍꿍이를 알 수 없기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좋아, 어쨌든 그의 플레이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기회야.’
아스라 고인물 두 명. 프로게이머 두 명.
얼핏 최강인 것처럼 보이는 이 파티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칠 거라고 예상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