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44)
그림자를 따라서
방송 화면에서 루이즈의 몸이 사라지는 순간 아인은 벌떡 일어났다.
동화의 대상이 사라지면 서포터는 혼자 남거나, 혹은 함께 죽는다.
아인은 현의 죽음을 염려한 것이었다.
‘아직 접속 중이야!’
현과 아인의 서로의 캡슐 계정은 친구로 등록되어 있었다.
계정을 확인한 아인의 눈이 빛났다.
현의 상태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면 어디로 갔을까?
방송이 끝나버린 탓에 현이나 루이즈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 버렸다.
AIN : 현… 살아 있어?
아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AIN : 현?!
걱정 되서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현은 아인의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기도의 효과로 인해 현의 의식은 잠에 빠진 듯 잠겨버렸기 때문이었다.
“…….”
현의 영혼은 암흑으로 뒤덮인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아니, 루이즈의 상태가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고통은 이제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감은 전부 차단된 채 생각만 떠돌아다녔다.
빛이 없는 우주에 홀로 떠다니는 기분이 이럴까?
가끔씩 현은 정신을 떠올리려 노력해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깜짝 놀라 다시 의식을 놓았다.
태양은 아직도 루이즈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중일까?
루이즈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몇 배를 느낄 것이다.
굳이 그런 감각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분…? 어쩌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의식이 깊게 가라앉은 탓에 게임과 현실의 경계마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현은 지금의 순간을 현실에 대입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루이즈는 다른 NPC와 분명히 달라.
어스름의 신전에서 루이즈를 만났을 때부터 줄곧 이상하게 여겨오던 사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NPC들 중 그녀만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감각동조가 적용된 게임이라 해도, NPC들은 실제의 인간과는 다르다.
미묘하게 어긋난 그들의 감정들은 결코 완벽하지 못했으니까.
허나, 루이즈는 일반적인 NPC들이 갖지 못한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저 느낌뿐이 아닌 특별한 무언가를….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즈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루이즈가 사라진다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혼자 주위를 둘러봤을 때, 자신 혼자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
무의식 속에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은 덜컥 겁에 질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영혼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음성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떨렸다.
그래도 루이즈는 멈추지 않고 힘겹게 속삭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에게 나의 모든 걸 맡기고 싶구나.」
그 순간.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현도, 루이즈도, 이 상황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승급 절차가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루이즈는 당신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가호를 받아 전직하시겠습니까? Y/N]어둠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만 들려왔다.
NPC에게 인정을 받는 전직 퀘스트.
강력한 존재에게 인정받을수록 강한 힘이 깨어난다고 했다.
사실, 루이즈의 레벨이나 스탯은 대단하다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은 무의식적으로 루이즈라는 존재를 기억에 남기고 싶다 생각했다.
400레벨이 넘는 기사단장을 놔두고 100레벨의 루이즈를 택한다는 것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생각조차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녀의 육신은 데이터의 집합에 불과할 터.
그렇기에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게임의 세계에서 그녀의 흔적은 남지 않을 것만 같아서 더욱 두려웠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한 가지, 바로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
메시지를 승낙한 순간 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몸속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고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경련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의식이 수면 위까지 떠올랐고, 서서히 감각이 되살아났다.
[인과의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당신의 존재가 미약하여 완전한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남은 조각들은 무질서의 안쪽에 숨겨집니다.] [누적된 경험치가 반영됩니다!] [레벨 업!] [레벨 업!]선명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쉐도우 링커’로 승급하였습니다!]현의 귓가엔 메시지의 홍수가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
현은 한참 만에 눈을 떴다.
붉은 색채의 공기가 주위에 가득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빛 대신 어둠을 내뿜고 있었다.
대칭세계.
문득 현은 이 상황이 퍽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았을 땐 지옥이 연상되던 풍경이었다.
어두운 핏빛이 이처럼 아늑하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안도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현은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로 감각을 확장했다.
여전히 루이즈의 온몸은 욱신거리고 있었다.
잠깐이긴 하나 태양빛에 닿았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웃….”
루이즈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현은 즉시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루이즈의 생명력은 5퍼센트 정도만 남기고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대칭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대로 태양에 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 잘못 봤나?’
현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루이즈의 상태창을 바라봤다.
‘진짜?!’
창으로부터 확인되는 루이즈의 레벨은 200.
‘무슨 일이지.’
일루나에 있을 당시 루이즈는 100레벨이었으니, 정확히 100레벨이 더 오른 것이다.
마물을 잡고 경험치가 오른 것인가?
그러나 일루나에서 루이즈가 직접 처치한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루이즈의 스펙은 보잘 것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현이 적을 쓰러뜨린 것은 전부 아인이나 살론의 몸에 동화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 갑자기 100레벨이나 상승한 것인가.
‘천사의 힘을 되찾기라도 했나…?’
현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이즈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기다렸다.
“이 몸은 또 살아남았구나….”
그녀의 안전이 확인된 이후, 기억이 돌아왔는지를 물었다.
초월자에게 기억이란 자아와 연관되어 있다.
기억을 되찾아야지 자아. 즉, 천사의 힘을 일부라도 되찾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현이 물었을 때 루이즈는 도리도리 고개만 저었다.
“모르겠다… 별로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현은 누워서 한참 생각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순 없었다.
더 생각해도 결론이 나올 것 같진 않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윽고 루이즈도 대칭세계의 풍경을 인지한 모양인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긴 좋구나.”
「그래…?」
“공기가 제법 상쾌하다.”
루이즈가 기력을 회복한 것은 다행이었다.
현이 대충 인벤토리에 넣어 두던 물과 음식을 건네주자 루이즈는 옛 생각이라도 났는지 금세 화색이 돌았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엔 동화를 해제해 두었다.
루이즈의 컨디션을 회복시키기 위해선 익숙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 틈에 현은 자신의 상태 창도 점검해 보았다.
‘쉐도우 링커(Shadow linker)라… 그림자를 잇는다는 뜻인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직업이었다.
새롭게 얻은 직업의 아래에는 하나의 문장이 부연설명 되어 있었다.
현 (Lv.102)
직업 : 쉐도우 링커 (히든)
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그 문장이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곧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기만, 혼돈, 어둠.
아스리안에서 이 세 가지 단어들은 각각 한 마리 대악마를 상징한다.
기만을 상징하는 존재는 물론 케이드리알.
현이 가장 잘 아는 악마이기도 했다.
혼돈은 현조차도 명확한 실체를 알지 못했다.
관련 스토리가 진행되기 전에 아스리안이 출시되었고, 아스라 온라인은 서비스가 종료되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어둠은… 아직 스토리에 등장할 때가 아니었다.
어둠이 이토록 빨리 등장한 것은 예상외였다.
만약 자신의 상태창에 언급된 ‘어둠’이 그 악마를 뜻한다면 말이다.
루이즈의 레벨이 증가한 기현상도, 대악마가 연관되어 있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맞아, 루이즈에게 어둠이 심어져 있다고 했지.’
현은 괴짜 신관, 루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루이즈가 태양에 닿지 못하는 이유는 무의식에 심어진 어둠이 태양빛에 발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의 상태 창에 어둠이 등장한 이유도 그런 루이즈의 인정을 받고 전직했기 때문일까?
‘이건 나중에 더 알아봐야겠어.’
현은 식사를 마친 루이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대칭세계의 시간이 끝난다면 루이즈는 다시 일루나에 떨어질 것이다.
태양이 내리쬐고, 마물이 가득한 그 땅에 말이다.
이곳도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는 없으니 슬슬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할 때였다.
‘이번엔 루티아는 없나…?’
그 신관이 지난번처럼 갑자기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대는 빗나갔다.
‘하긴, 언제까지만 남에게 기댈 수도 없지.’
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칭세계는 악마에게 가까운 세계.
음산하고 척박한 장소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나무도, 산도, 강도 있었다.
핏빛의 색채만 걷어낸다면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현과 루이즈는 근처의 강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비슷비슷한 풍경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불안함을 해소시켜 주었다.
루이즈는 찰랑거리는 물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물의 색깔은 바뀌지 않았구나. 마실 수도 있을 것 같다!”
“피가 흐르지 않아서 다행이네.”
꼬리에 불꽃이 달린 작은 새들이 간간히 물을 튀겼다.
대칭세계엔 동물들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마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가는 것이냐?”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루이즈의 물음에 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태양의 힘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기에,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오, 강에 큰 물고기도 있는 것 같다.”
루이즈의 목소리는 어느새 기운이 살아나 있었다.
걸어가는 중에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눈을 반짝였다.
“현…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있으니 이곳도 가꾸면 살 만하지 않은가?”
“여기서 산다고?”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곳에서 같이 사는 건 어떻겠나?”
“같이? 글쎄….”
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뜬 루이즈를 내버려 두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런 자연풍경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스름의 신전에서는 어둡고 좁은 방에 갇혀 있었고, 척박한 일루나에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몇 년 동안 루이즈의 어린 감수성이 피어날 만한 기회는 없었으리라.
‘하필 장소가 문제네.’
현은 이곳이 일루나의 어딘가라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만약 아스라에 있었다면 루이즈를 지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길드를 만들고, 프라이빗 룸에 그녀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면 되는 일이니까.
길드의 프라이빗 룸은 유저의 통제 하에 관리되는 장소이니 루이즈가 NPC들에게 추격당할 일도 없었다.
가끔씩 루이즈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밤중이라도 아스라엔 루이즈가 좋아할 만한 장소가 많았다.
“현 고맙구나.”
“응…?”
“오늘이 가장 즐겁구나! 현을 다시 만날 수도 있었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직 안 죽었잖아.”
“그럼 좀 더 구경해도 되겠는가?”
“그 전에, 물가에서 좀 쉬자.”
현은 루이즈와 나란히 앉아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혼자만의 고민에 빠졌다.
강에 돌멩이를 휙 집어던지자 동심원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대칭세계를 빠져나가는 방법.
하지만 이곳을 나가도 일루나. 태양이 비추는 땅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이 아스라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몇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루나로부터 아스라까진 수십만 킬로미터의 공허한 우주가 가로막고 있었다.
‘루티아라면 방법이 있었을까…?’
단서를 잡은 것은 오히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생각을 비웠을 때였다.
현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상기했다.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지만 지금에 와선 천천히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신탁이 가리켰던 장소는 중앙 마법진.
용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수십 분을 달려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걸어서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루티아가 대칭세계의 길을 안내하고 자신과 아인은 그저 루티아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렇게 대칭세계가 끝났을 때, 자신과 아인은 도시의 탑 꼭대기에 도달해 있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뭐라고 했더라?’
현은 정확한 기억을 더듬기 위해 그 자리에서 그 때의 녹화 본을 재생시켰다.
눈앞에 난생 처음보는 홀로그램 화면이 등장하자 루이즈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오오, 무엇이냐?!”
루이즈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잠시 후, 영상에서 루티아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의 현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대칭되는 두 세계에서 반대쪽의 세계는 일그러진 것처럼 보여요. 이곳에서의 한 걸음이 반대쪽의 한 걸음과 같지 않단 거죠. 더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어요.”
당시의 루티아는 세계를 빠르게 이동하던 비법을 알려 주었다.
현은 오랫동안 머리를 싸맨 끝에 간신히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축지법 같은 건가?’
공간의 밀도가 다르면 똑같은 한 걸음의 거리도 달라진다.
중앙 마법진으로부터 도시에 단숨에 도착한 것도,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루티아는 신전의 탑 꼭대기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에게 하나의 의문이 추가로 떠올랐다.
일루나에서 아스라까지 걸어가는 방법이 존재할까?
대칭세계가 현실의 물리적인 장애물을 무시한다면, 우주마저도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황된 말이 아니야. 가능성이 있어.’
루티아는 양쪽 세계의 길을 전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녀를 찾을 수 있다면… 아니, 그녀가 아는 정보라도 알 수 있다면!
“그래, 그거야!”
“무, 무슨 일인가?!”
갑자기 고개를 드는 현의 모습에 깜짝 놀란 루이즈가 몸을 들썩였다.
현은 천천히 루이즈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딜 말이냐…?”
“바깥에.”
***
[잠시 휴식 상태로 전환합니다!]접속을 끊자마자 서현은 캡슐 저장소를 뒤적였다.
아스라 온라인 시절, 지식의 보고라는 ‘인터루프’로부터 옮겨둔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현은 아스라의 방대한 지식들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기에 텍스트나 스크린샷으로 정보를 저장해 두었다.
바꿔 말하면, 서현의 캡슐 저장소가 바로 지식의 보고였다.
‘대칭세계!’
검색 키워드는 명확했다.
서현은 텍스트 검색과 글자 인식을 통해 해당 내용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뭐? 하나도 없다고?’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은 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검색 설정이 잘못되었을까?
하지만 설정을 바꾸고 검색해 봐도 수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현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대칭세계가 아스리안 이후 추가된 새로운 공간이라면 과거의 기록을 뒤적여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키워드를 바꿔가며 한참을 끙끙거리던 현이 수확을 거둔 것은 새로운 단어를 검색했을 때였다.
‘검은 태양…!’
수많은 정보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몇 가지 새로운 점도 알게 되었다.
루티아가 대칭세계라고 말한 공간을 인터루프의 정보는 다른 명칭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바로 ‘지하’라는 단어다.
대칭세계라는 검색어로 아무것도 찾지 못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하라고…?’
설명을 읽을수록 현은 지하가 단순히 땅 속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대칭세계를 지하라고 부르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하’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현은 정신없이 검색을 계속했다.
지하, 일루나, 지도 등의 새로운 키워드 몇 가지를 추가했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쓸 만한 정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현은 한참 만에 자신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검색해 냈다.
‘이건…!’
단서를 잡은 것은 초대 성왕의 이야기였다.
서현은 천천히 문장을 곱씹으며 한 마디씩 해석해 나갔다.
성왕은 아스라와 일루나를 걸어서 왕복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의 안개 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칭세계의 통로를 통해서 말이다.
그 말인 즉, 아스라와 일루나를 잇는 길이 이곳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서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다음의 검색을 이어나갔다.
이번 키워드는 안개 길.
수많은 정보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동시, 서현은 숨을 삼켰다.
방대한 정보들 중엔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도 있었다.
현은 뭔지 모를 그림들까지 스크린샷을 찍어 두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해당 그림을 확대해 보았다.
어느새 현의 입가엔 짙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 아스리안을 시작하기 전, 인터루프에서 했던 5일간의 노가다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천공이 일루나를 빼앗겼단 소식은 NPC들 사이에서도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애초에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확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푸른 위성을 보지 못한 이는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일루나였다.
인간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웃고 떠들었으며, 또 누군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고, 이불 속에서 벌벌 떠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여러 반응이 공존하는 까닭은 NPC들도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NPC들은 일루나의 이변에 관심이 없었다.
살기도 힘든 척박한 땅 하나를 심연에게 빼앗긴 정도가 아닌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하지만 사제들은 근심에 빠졌다.
일루나가 없다면 신성력의 사용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
성왕국의 입지가 약해지고, 자신들의 입지도 함께 약화되는데 어찌 걱정되지 않으랴.
성왕을 포함한 주교들 및 대신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그 중 가장 머리가 어지러운 이가 바로 성왕이었다.
“내 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성왕은 심하게 눈을 깜빡였다.
발코니를 서성이다가 결국 예배당으로 향했다.
“방법을 생각해야 돼…!”
성왕은 대천사들의 조각상 앞에서 양손을 모았다.
오래된 성서의 구절을 떠올렸다.
환영의 땅, 일루나는 천공의 신도들을 인도하는 등대이자, 심연을 멸할 교두보였다.
그런 장소가 넘어간 것은 단순히 신성력을 강화할 장소를 빼앗긴 것 이상으로 심각한 일이었다.
“부디…!”
성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듯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함을 담아도 기도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은 스스로 이해하고 있었다.
초대 성왕에 비하면 그의 공감력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신성력을 활용하는 기술들은 발전했다지만, 타고나는 공감력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성왕들도 마찬가지.
수백 년 동안 천사 소환은 어림도 없었고, 간간히 하급 천사들의 신탁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체념하는 성왕의 앞에, 믿을 수 없는 일어났다.
성왕은 눈앞의 일을 보며, 이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확신했다.
콰르릉-!
번개가 대천사의 예배당의 천장을 뚫고 내리쳤다.
성왕은 대경하여 고개를 들었다.
대천사를 형상화한 세 개의 조각상 중 가운데 동상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조각상의 자리에는 그 조각상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천사, 그녀의 거대한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무지갯빛 크리스탈의 날개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빛은 어두운 예배당을 가득 매웠다.
“아, 아아…!”
성왕은 입을 벌린 채 오열했다.
눈가에선 환희의 눈물이 떨어뜨렸다.
눈앞의 존재는 바로 진실을 관장하는 대천사.
역사 속에서도 단 한 번만 모습을 드러냈다던 대천사가 눈앞에 강림한 것이었다.
챙!
바깥에서 창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들도 예배당 안쪽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예배당의 출입을 통제해야만 했다.
“진실의 대천사이시여!”
성왕은 무릎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눈앞의 광경이 현실인가 의심했다.
서번트 급의 천사도 소환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대천사가 강림하는 일은, 꿈에서도 쉽게 보지 못할 일이었다.
성왕인 자신이라도 천사를 소환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대천사는 어떻게 이곳에 강림했을까?
성왕의 궁금증은 천사의 말로부터 해결되었다.
“역시, 자아로는 힘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군요.”
초월자가 힘을 행하는 방법은 두 가지.
기도로써 공감을 받거나, 혹은 자신의 자아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웬만해선 자아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초월자의 자아가 회복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행사한 힘의 크기에 따라 몇 년, 혹은 몇 천 년에 해당할 수도 있었다.
바꿔 말하면, 초월자가 자아를 사용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천사는 앞에 엎드린 성왕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곧바로 신탁을 내려드리지요.”
“오오…!”
성왕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대천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루나의 이변에 관한 대처법을 알려주시려는 걸까?
성왕국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선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대천사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천사의 말은 성왕이 기대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공감력이 뛰어난 유저 한 명이 어딘가에 있어요. 그를 찾게 된다면 저에게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세요.”
“유저… 말씀이십니까?”
성왕은 놀랐다.
아직 유저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성왕은 대천사가 고작 한 명의 유저를 언급하기 위해 자아를 사용해 강림했다는 사실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맞아요, 그가 기도를 계속한다면 언젠가 이 나라에도 방문할 수밖에 없겠지요.”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맹목적으로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성왕은 대천사의 말이 신탁이라기보단 명령이나 부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의아함에 흔들려 대천사에게 되묻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럼, 부디….”
진실의 대천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떠나려는 듯 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왕이 무례함을 각오하고 떠나려는 대천사를 붙잡았다.
그녀는 아직 성왕국의 위기를 해결할 방안을 말해주지 않았다.
국가의 앞길을 밝혀 줄 수 있는 것은 대천사인 그녀뿐이었다.
성왕은 재차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이끌어 주길 빌었다.
“진실이시여 부디, 이 미천한 자의 부탁을….”
“일루나 말인가요?”
성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천사가 끼어들었다.
진실의 천사는 눈앞에 엎드린 성왕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을 읽어내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의 사고엔 모순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루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맞나요? 그대는 목숨이 아까워서 그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순간, 성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실의 천사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녀 앞에 선다면 한 점의 부끄럼도 없어야만 한다는 구절은 그야말로 진실이었던 것이다.
성왕은 바닥에 쾅쾅 머리를 찧었다.
천사의 앞에서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들켰다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부디 용서를…!”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의 과오가 성왕국의 모두에게 영향이 가는 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성왕은 진심으로 과거의 죄를 뉘우쳤다.
자신이 없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성왕은 지금 다시,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머릿속엔 성왕국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을 가득 품었다.
진실의 앞에서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야만 했다.
“이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군요.”
대천사는 다시 성왕의 마음을 살펴보았다.
그의 안에 존재하던 모순이 사라져 있었다.
혼탁하던 더러움은 사라졌고, 굳건함만이 남았다.
천사의 입에서 성왕이 바라던 대답이 나온 것은 그렇게 성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 결심한 순간이었다.
“일루나를 둘러싼 일들은 모두 우리 천공이 해결할 겁니다. 그러니 큰 걱정 말도록 해요.”
“저, 정말입니까?”
성왕은 그렇게 되묻다,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를 깨달았다.
진실의 천사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진실이 말했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네, 아주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 두었죠.”
“그 방법을 여쭤도 되겠나이까…? 혹시 이 몸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혹시 아스리안이란 단어를 아시나요?”
“아스라안…? 아스라 대륙에 사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성왕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대천사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천사는 한참 만에 가만히 중얼거렸다.
“역시, 그대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어요. 허나, 그대가 상관하지 않아도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모두에게 알리세요. 천공을 향한 기도가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오오!”
성왕은 감격했다.
대천사께선 미리부터 나아갈 길을 생각해 두셨다.
그 자애로움에 성왕은 하염없이 눈물 흘릴 뿐이었다.
파지직-!
은은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진실은 다시 번쩍이는 뇌전이 되어 사라졌다.
천사가 사라지고 나서도 성왕은 부서진 조각상을 향해 하염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현과 루이즈는 계속 이동했다.
이제 현의 손에는 광대한 대칭세계의 지도가 있었으니 낯선 세계를 지나면서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목적지는 생각만큼이나 멀었다.
현은 루이즈에게 동화한 채 바람을 타고 달렸다.
가끔씩 스쳐가는 마물들이 루이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중엔 현의 지식에 존재하는 마물의 모습도 보였다.
인간의 피를 탐하는 흡혈박쥐나, 흉포하기로 알려진 암흑늑대.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현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째선지 녀석들은 루이즈에게 달려들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현과 루이즈는 마물을 마주치는 것에 면역이 되었다.
어떤 녀석들도 갑자기 공격해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루이즈는 날카로운 가시를 두른 괴조의 무리 옆을 지나는 중이었다.
인간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마물은 현에게도 생소했다.
「유령의 집에 온 것 같네….」
「유령도 집이 있는가?」
「응. 너만 없을 걸?」
「우으….」
이제 현과 루이즈는 어느 정도 웃음과 여유를 되찾았다.
지나치는 세상을 천천히 구경해 봤다.
대칭세계는 의외로 반대쪽의 세상과 별 차이가 없었다.
붉은 공기와 검은 태양도 처음 봤을 땐 불길해 보였지만, 익숙해지니 오히려 멋진 석양처럼 보였다.
대칭세계의 마물… 아니, 생물들끼리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 것도 실제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루이즈가 여기에 산다는 말도, 허튼 소리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
갈 길은 멀었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다.
루이즈의 마나가 다 떨어질 때면 근처에서 경관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현은 거대한 유적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안개 길.
초대 성왕의 산책로이기도 한 이 길은 일루나와 아스라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지도의 정보대로라면 안개 길은 창공을 향해 길게 이어진 계단을 지칭하는 듯했다.
‘이건 누가 만든 걸까?’
현은 계단을 오르며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계단은 인간보다 거대한 어떤 존재들의 사이즈에 맞춰진 듯했다.
루이즈의 보폭으로는 쉽게 걷기가 힘들었기에,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는 쪽이 편했다.
마물이 지나던 길일까?
또한, 이렇게 웅장한 구조물이 세워졌다는 것은, 대칭세계에도 지성을 가진 생물이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인간인지 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반나절 만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지금 서있는 이곳은 일루나가 아닌 성왕국의 어느 장소와 대칭된다.
‘타이밍은 완벽해.’
현은 마지막 계단을 오르기 전에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 성왕국은 새벽.
태양으로부터도 안전한 시간이었다.
현은 대칭세계를 빠져나가는 방법도 마련해 두었다.
인터루프의 정보를 인용하면,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방법은 의식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
대칭세계엔 의식을 강제로 깨우는 스팟이 몇 군데 존재한다고 적혀 있었다.
안개 길의 끝인 이 장소도 그 장소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대칭세계가 끝난다는 것이다.
「아스라에 돌아가면 갈 곳은 있어?」
걸음을 옮기기 전에 현이 물었다.
동시에, 의기소침한 기분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화를 통해 전해지는 루이즈의 감정이다.
역시, 아스라에 그녀가 갈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루이즈에겐 아무런 인맥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주눅 드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현이 웃으며 물었다.
「같이 살래?」
현의 한마디에 루이즈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고백인가?」
「바보 같은 소리 말고… 길드를 만들면 들어올 거냐고 묻는 거잖아.」
「길드의 주인은 그대인가?」
「그래, 외부인에게 출입금지를 걸어두면 더 이상 쫓길 일도 없을 테고… 밤중엔 바깥도 나갈 수도 있어. 태양만 없다면 말이지.」
순간, 현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하지만 결코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많은 일을 견뎌오면서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동화를 통해 전해지는 감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현은 루이즈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집도 크게 지어줄 테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너무 큰 선물이구나….」
「뭐, 좋은 일만 있진 않을 걸? 공짜로 밥을 축내게 놔두진 않을 테니까!」
「그런 것도 좋다!」
현은 루이즈와 동화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상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었다.
휘잉-!
돌연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둘은 산의 정상에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더 이상 대칭세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왕국의 대도시가 장식하는 야경이 발밑으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이 루이즈의 눈을 어지럽혔다.
「아름답다….」
루이즈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일생동안 그녀가 수백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의 밤거리를 내려다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저 거대한 성에는 왕이 살고 있을까?
하지만 지금 루이즈는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문득, 온몸을 간질이는 바람에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일어났다.
「태양이 아니라도 볼거리는 많아. 우물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어.」
「정말 그렇구나….」
산꼭대기에서 위를 올려다봤다.
별이 빛나는 하늘엔 두 개의 위성이 떠 있었다.
하나는 황금빛의 글루나.
그리고 또 하나는 방금 전 자신들이 있던 푸른빛의 일루나.
현과 루이즈는 고개가 아플 때까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메인이벤트, 어둠의 각성을 취소시켰습니다!] [영혼이 어둠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공감력이 32만큼 증가합니다!]***
AIN : 현, 역시 굉장하네! 이번엔 무슨 꼼수였어?
아인과 캡슐 통신이 닿았다.
긴 이야기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현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추려 설명했다.
아인은 걸어서 우주를 건너뛸 수 있다는 것을 신기해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약속하며, 현은 당장 필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LeeSeoHyun : 부활하면 마도국의 도시인 ‘랜턴’으로 와. 그곳에 길드를 만들 생각이거든.
AIN : 길드? 갑자기?
LeeSeoHyun : 길드가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AIN : 루이즈 때문이야?
아인은 곧바로 핵심을 짚었다.
현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너랑 나랑 걔랑… 거기에 타르타르까지.”
“흐음… 우리 둘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갑자기, 아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으로부터 무언가의 기색을 느낀 현은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그…래도 당장 3일 뒤엔 우리 둘 뿐일 거야.”
“아?”
“아마 타르타르는 못 온다는 것 같거든.”
떡밥을 던지자 아인은 곧바로 반응했다.
3일 뒤는 현실에서 아스리안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일루나의 신전에서 현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후, 아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일을 화제로 꺼내곤 했었다.
마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 같아서 현은 아인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현도 기억하고 있구나!”
“당연하지, 벌써 교통편도 마련해 뒀다고.”
축제는 오는 주말,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홈페이지에 중대 발표가 있다고 공표한 것으로 보면 NFM도 이번 이벤트에 상당히 공을 들였음이 분명했다.
세계의 아스리안 커뮤니티들은 벌써 축제 이야기로 들썩였다.
해외에서도 상당한 유저들이 한국을 방문 일정을 잡았다.
“어쨌든, 마도국에 있을 테니까 부활하면 길드로 와.”
“길드 안에 대련장도 있어?!”
“하하, 나중에 지어줄게….”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한동안 아인과 대련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기 전에 마저 일을 끝내자.’
아직 할 일이 남은 현이 바삐 몸을 움직였다.
***
아인과의 연락 후, 현은 루이즈를 데리고 마도국의 랜턴으로 텔레포트했다.
그곳에 본부를 짓기로 결심한 이유는 간단했다.
랜턴이란 도시는 그 이름처럼 밤에도 환하게 등불을 밝히기 때문이었다.
야행성인 사람들이 살아가기 가장 좋은 도시였다.
‘길드명은… 그늘로 하자. 음… 대충 정했지만 마음에 드는데?’
길드는 ‘쉐이드’(Shade)라는 이름으로 결정했다.
도시에서 길드 창설 관리인을 찾고, 등록을 마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길드의 본부를 지을 차례였다.
프라이빗 룸이라는 가상공간이 바로 모든 유저들의 본거지였다.
‘장소는 최대한 편이 좋겠지.’
자금은 넉넉했다. 지금껏 크게 돈을 쓴 적이 없이 모으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현은 3만 골드의 거금을 투자해 저택 등의 건물과 정원이 통째로 설계되어 있던 프라이빗 룸을 구입했다.
‘인공태양도 달아둘까?’
태양을 볼 수 없는 루이즈였으니 사소한 것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추가금액이 들었지만 큰 액수는 아니었다.
아인이 말해둔 결투장도 잊지 않았다.
야외에 복원 가능한 공터를 만들어 두었다.
대충 커스텀이 완료되자, 현은 루이즈를 손짓해 불렀다.
“곧 아침이니까 안에 들어가 있어.”
“여긴 안전한가…?”
“그래. 내 허락이 없다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야. 초월자라도 못 들어와.”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유저든, NPC든 길드원의 동의가 있어야만 프리이빗 룸에 출입할 수 있다.
반대로 NPC의 동의를 받아야 해당 NPC를 고용하거나 길드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현은 일단 루이즈를 ‘하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길드의 규모가 작은 탓에 다른 직책을 주기가 불가능했다.
“수락해야 들어올 수 있어. 빨리 수락하라고.”
현의 목소리와 동시, 루이즈의 눈앞엔 시스템 박스가 떠올랐다.
시스템창에 쓰인 글을 유심히 읽던 루이즈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응? 나, 나는 하녀인 것이냐?”
그 물음에 현은 악랄한 집주인의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맞아, 5만 골드짜리 빌딩이라서 하루 종일 청소해도 다 못할 걸?”
“으윽, 그런!”
“게다가 정원은 저택의 3배 크기지!”
현은 좀 더 루이즈를 놀려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진심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장난을 그만두기로 했다.
“농담이야. NPC는 일반 직책으로 못 받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하루 종일 잠만 자도 뭐라 안 해.”
“아니, 이 몸도 놀고먹을 생각은 없다, 청소를 맡겨 주거라! 해 본적은 없다만….”
루이즈도, 자신에게 집이 생긴다면 자잘한 설정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프라이빗 룸은 자동으로 청소되는데….”
도시, 랜턴의 광장 한 쪽에는 수많은 황금빛 포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장 구석의 포탈이 쉐이드 길드의 프라이빗 룸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현과 루이즈는 동시에 포탈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드의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선 루이즈가 감탄을 터뜨렸다.
“저것이….”
루이즈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환히 빛나는 구체가 자신을 비추고 있다.
온 몸에 빛이 닿고 있는데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태양이구나.”
루이즈는 눈부신 태양을 빤히 마주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바라보는 태양이었다.
빛에 홀린 루이즈를 보며, 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프라이빗 룸에 인공태양을 구매하길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집 안에서 쉬고 있어.”
현은 손가락으로 눈앞의 커다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밥도 어딘가 있을 거야. 알아서 찾아 먹어.”
“현… 그대는?”
“좀 자려고.”
[피로도 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플레이어의 안전을 위해 강제로 게임을 종료합니다!] [12시간 동안 접속할 수 없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 주세요!]현이 루이즈에게 답하자마자, 그러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모든 일을 마치자 안도감이 솟아나며 몸이 확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로 몸을 옮기기도 귀찮았던 서현은 그대로 캡슐에 누운 채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반나절이 더 지난 뒤였다.
서현은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인가 생각했지만, 시계를 보니 저녁이었다.
‘수업은… 또 결석이네. 학사경고만 받지 말자….’
대충 밥을 차려먹으며 어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행운이 겹친 덕분에 루이즈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서도 루이즈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 같았다.
서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안도와 함께 뿌듯한 성취감이 온몸에 가득 차올랐다.
‘NPC 한 명을 구한 걸로 이토록 기쁠 줄이야.’
아스리안에서,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몇몇을 제외한다면 NPC의 죽음에 큰 의미를 두는 유저들은 별로 없었다.
그동안은 서현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의 대회에서 어떤 병사의 자살을 목격했을 때도, 잠깐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그의 죽음이 생생하게 와 닿진 않았다.
허나 루이즈는 달랐다.
루이즈의 죽음을 생각하니, 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바빴다.
일루나에 태양이 다가오던 순간엔 호흡까지 힘들어졌다.
어떻게 진심으로 NPC인 루이즈에게 모든 감정을 쏟을 수 있었던 걸까?
머리가 차가워진 서현은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단순히 정이 붙어서만은 아닌 것 같아.’
아스리안 NPC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해도, 현실과 비교하면 많이 어색했다.
감각동화란 것도 따지고 보면 99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NPC는 정말 사람 같았지만,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 유저들은 바로 그, 게임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을 알았다.
그것이 유저가 NPC의 죽음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현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보아왔던 NPC와는 달리, 루이즈에게서는 그들에게 느꼈던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