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45)
쉐도우 링커
‘동화 때문인가…?’
루이즈는 자신이 최초로 동화한 NPC였다.
감정을 공유하니 그녀의 생각까지 자연스레 읽어내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루이즈는 마음이 죽어 있었다.
마치 인형처럼, 그녀는 자신에게만 매달렸다.
일루나에서 다시 만나 동화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5년 동안 여러 감정들을 배웠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이즈가 보였던 감정의 변화들은, 어쩌면 정교한 뇌파 조정기술의 산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스리안은 NPC들에겐 진짜 세상일 터.
재미로 즐기는 유저들과는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 당연했다.
‘후… 만약 다른 NPC에게 동화해야 한다면,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서현은 대충 샤워를 마치고, 캡슐에 묻은 땀까지 닦아낸 뒤에 곧바로 다시 누웠다.
[아스리안에 접속합니다.]현의 신형은 길드의 프라이빗 룸에 나타났다.
어제 새벽의 일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길드를 만들고, 루이즈를 그 안에 숨겨두었던 것까지.
‘크… 잘 지었다.’
쉐이드 길드.
현은 어젯밤 자신이 설계한 프라이빗 룸의 풍경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건물은 현대와 판타지가 융합된 양식으로 지어졌다.
중세의 느낌이 물씬 담긴 건축 양식임에도 건물을 이루는 재질은 새하얀 광택이 감도는 합금이었다.
그리고 저택을 둘러싼 정원.
숲, 거목, 들판 등의 자연경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 구석엔 거대한 폭포까지 흐르고 있었으니 일반적인 스케일의 저택을 뛰어넘은 것이 분명했다.
‘현실에서 이런 집은 얼마나 하려나…? 아마 억 단위로 안 되겠지?’
프라이빗 룸에 투자한 금액은 약 7만 골드.
현실의 가치로 환전하면 5천만 원 정도다.
몇 명 안 되는 길드원에 비해 굉장히 크고 비싼 프라이빗 룸이었지만, 현은 일부러 공간에 여유를 주었다.
골드는 원래부터 넘쳐났고, 요즘엔 현금도 엄청나게 쌓이는 중이었다.
돈 걱정보단, 나중에 추가될 길드원을 고려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넓어서 나쁠 건 없겠지. NPC든 유저든, 언제든지 받을 수 있게 하려면.’
아스라 시절 현이 길드에 속해있던 것은 초창기의 아주 잠깐이었다.
그 이후로는 쭉 솔로 플레이. 가끔씩 아인과 함께하는 정도였다.
아스리안에서도 길드를 만들 예정은 없었고, 루이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의 가치관은 그때랑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실제로 몇몇 퀘스트를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그게 견딜 수 없다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누군가의 목숨과 직결되는 상황이 온다면… 헌데 그 목숨이 하나뿐이라면?
그 때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드는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그의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언제 뭐가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확실히 준비해 둬야지.’
건물에 들어가니 루이즈는 로비의 소파에서 새근거리고 있었다.
유저인 자신보다 그녀가 훨씬 피곤할 것이다.
현은 루이즈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자, 그럼 드디어 때가 왔군.’
현은 조용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새로운 직업의 자세한 것들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쉐도우 링커.
그것이 새롭게 얻은 직업이었다.
현은 그 이름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서포터보단 훨씬 간지가 넘쳐흘렀으니까!
아인의 엘리멘탈 버서커와 비교해도 그리 꿇리지 않는다.
‘여기서 스킬만 좋으면 완벽한데 말이지.’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라면 기사단장이 아닌 루이즈를 통해 전직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점일까?
퀘스트 설명에 따르면, 강한 NPC에게 인정받을수록 강력한 힘이 깨어난다고 했다.
인정을 얻어낸 당시 루이즈의 레벨은 200이었다.
어째서 레벨이 올라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100레벨보다는 그나마 오른 것이 다행이었다.
‘일단 내 상태부터 점검해야겠지.’
현은 간략 설정으로 상태 창을 띄웠다.
새로운 직업의 스킬을 배우기 앞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었다.
현 (Lv. 102)
체력 : 6324/6324
마나 : 930/930
직업 : 쉐도우 링커 (히든)
성향 : -94 (심연)
[힘 32] [민첩 94] [생명력 62] [마력 93] [공감력 286] [1초 흡수 Lv.8]-1초간 대상의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킵니다.
-흡수한 피해와 동일한 비전 검을 생성합니다.
[반탄 Lv.0]-공격한 대상을 기절 상태로 만듭니다.
[무력화의 파장 Lv.2]-근처 적들의 방어력을 [공감력]X2 만큼 감소시킵니다.
-바람의 벽을 생성합니다.
[기도 Lv.8]-정신이 맑아집니다.
-사망 패널티가 24시간이 됩니다.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을 시 3초간 무적 상태에 돌입합니다.
[증폭의 파장 Lv.3]-근처 아군의 데미지를 2배 증가시킵니다.
[투명화 Lv.2]-2초간 투명해지며, 모든 공격이 치명타 판정을 얻습니다.
[생체리듬 가속 Lv.3]-3초간 250%만큼 빨라집니다.
[천사의 기초 검술 Lv.5]-8초 동안 공격하지 않을 시 다음 평타가 210%만큼 강력해집니다.
마지막으로, 궁극기가 0에서 1레벨로 올라 있었다.
현은 전직하자마자 ‘각성 스킬 포인트’ 하나가 자동으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은 궁극기를 강화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데 사용되는 포인트다.
어차피 동화라는 궁극기를 바꿀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없지만… 제멋대로 포인트가 사용된 것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다.
궁극기는 특별히 상세 창으로 살펴보았다.
[동화 Lv.1]-30미터 근처 대상과 동화합니다. (대상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스탯 20%만큼 대상의 스탯을 상승시킵니다.
-[공감력]의 50%만큼 대상의 주력 스탯을 상승시킵니다.
-대상의 모든 일반 스킬 레벨을 1만큼 상승시킵니다.
-대상의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을 20%만큼 빠르게 감소시킵니다.
-동화한 대상의 스킬 이펙트가 색채를 잃어버립니다.
-동화 중엔 쉐도우 링커의 스킬 또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변화한 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동화 사거리가 20에서 30미터로 증가.
스탯 상승률이 10에서 20퍼센트로 상승.
거기에 재사용 대기시간 20퍼센트 감소라는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었다.
같은 스킬을 더 자주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스킬 이펙트가 색채를 잃는다는 건 뭐지?’
별 쓸데없는 부가 기능까지 추가된 듯하다.
알록달록한 마법들이 흑백이 된다는 뜻일까?
아인에게 동화한다면, 그녀의 불꽃도 검정색으로 변한다는 것 같다.
마치 그림자처럼.
‘간지는 좀 나겠군.’
현은 잠깐 칠흑의 불꽃을 휘두르는 아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검은 불꽃이 휘몰아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멋질 게 분명했다.
이펙트가 바뀌어도 성능만 같다면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긴 하지만.
상태 창 점검을 마친 뒤엔 새로운 스킬을 찍을 시간이었다.
현은 가장 중요한 내용부터 살폈다.
바로, 공격스킬이 있는지!
하지만 예상대로 쉐도우 링커에겐 대부분 지원이나 유틸 전용 스킬밖에 없었다.
서포터로부터 이어지는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스킬목록을 샅샅이 뒤져도 효과적인 공격스킬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냐, 하나도 없지는 않아.’
딱 하나.
예전의 비전 검처럼, 간접적인 공격 스킬 한 가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림자 방패 Lv.8](※주의 : 해당 스킬을 익힐 시 ‘1초 흡수’와 통합됩니다!)
-1초간 어둠의 방패를 둘러 최대 [공감력] X 150의 피해까지 흡수합니다.
-흡수한 피해를 ‘마기’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최대 [공감력] X 500의 마기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된 ‘마기’와 동일한 공격력의 ‘어둠의 검’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마기가 최대로 충전되면 다음 ‘어둠의 검’ 사거리가 대폭 증가합니다!
그림자 방패라는 스킬은 한눈에 봐도 1초 흡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똑같은 메커니즘을 가진 스킬도 찾기 힘들지 않을까?
배우자마자 8레벨에 도달하는 것도, 1초 흡수의 레벨을 그대로 이어받기 때문일 것이다.
1초 흡수가 방어력을 증가시켜주던 것과 달리, 그림자 방패는 고정 피해를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공감력 수치라면 약 43000정도의 피해까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피해를 마기로 저장한다라….’
또 다른 변화는 ‘비전 검’이 ‘어둠의 검’으로 바뀌었다는 점.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편의성까지 향상되었다.
1초 흡수는 단 한 번의 스킬로 경감시킨 데미지를 비전 검으로 변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림자 방패는 ‘마기’라는 자원을 도입함으로써 여러 번에 걸친 피해를 누적하여 저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대부분 상황에서 어둠의 검이 비전 검보다 강력할 것은 분명했다.
‘일단 이건 무조건 배워야 되겠군.’
1초 흡수의 완벽한 상위호환이자, 유일한 공격 스킬!
썩혀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림자 방패를 익혔습니다!] [1초 흡수와 통합됩니다!] [그림자 방패의 레벨이 8에 도달했습니다!]현은 단 5의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으로 8레벨에 달하는 그림자 방패를 익힐 수 있었다.
스킬 포인트는 아직도 넘치도록 남았다.
이제 다른 스킬을 배워볼 차례.
스킬 초기화 물약도 가지고 있으니, 자칫 쓰레기 스킬을 배울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나쁘지 않은데?’
스킬트리를 살펴보던 현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루이즈에게 인정받고 전직한 탓에 구린 스킬셋을 얻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쉐도우 링커의 스킬들은 생각보다 뛰어난 것들이 많았다.
역시, 어둠과 관련되었기 때문일까?
대악마를 상징하는 그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스킬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전직이었다.
현은 뷔페의 메뉴를 탐색하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스킬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현은 하루 동안 스킬 연구에만 힘썼다.
최고의 시너지를 찾기 위해 여러 조합을 시도했고, 스킬 초기화 물약까지 하나 사용했다.
길드 프라이빗 룸에 있는 연습장은 새로운 스킬들을 시험하기에 딱 적합한 장소였다.
훈련용 인형에 스킬을 난사하는 도중, 루이즈가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멋지구나!”
입을 벌리는 루이즈의 반응에 현은 피식 웃었다.
루이즈를 보면 정말 순진한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열다섯 살이라 말했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정신연령은 그보다 어리다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스킬을 확정하고 남는 시간은 루이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어느덧 일루나 퀘스트로부터 48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아인이 부활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접속하자마자 길드의 프라이빗 룸으로 달려왔다.
“와, 이거 다 현이 만들었어?”
아인은 넓은 야외 연무장을 보고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오자마자 결투장부터 살펴보는 것이 너무나도 아인다운 행동이었다.
여기서 평소라면 아인이 먼저 결투에 관련된 화제를 꺼낼 타이밍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현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아인, 결투 한 번 할래?”
“으응?!”
깜짝 놀란 아인이 현을 돌아보았다.
현이 먼저 결투를 하자고 말을 꺼냈다니!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아인의 입가에 급작스런 미소가 번졌다.
“진심이야?”
“그래, 오랜만에 한판 붙자. 덤벼.”
“나야 좋지! 근데 웬일이래?”
“후훗, 새로운 스킬을 좀 익혔거든.”
“흐응, 전직했어? 그래봤자 서포터 계열이면 날 못 이길 텐데….”
“어쨌든 해 보자고.”
훗- 현은 미소를 삼키며 속으로 웃었다.
아인은 여느 때처럼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허나, 이번엔 현도 자신이 있었다.
이길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결투하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꼼수라고 해도… 수단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PvP에 꼼수가 어딨어. 당하는 쪽이 잘못이지.’
결투한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아인은 그런 현의 속셈을 눈치 치지 못했지만.
결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3, 2, 1 카운트가 끝나고 나서도 현과 아인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스텝만 밟았다.
탓- 탓-.
양쪽의 민첩은 수치는 약 100!
접근도 후퇴도 한순간이니, 최소 5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안전거리가 확보된다.
두 신형은 빠르게 얽혔지만, 쉽게 부딪히진 않았다.
‘그새 또 늘었나?’
‘역시, 현은 달라! 그래도, 아직 나한텐 못 이기겠지만…!’
양쪽 모두 서로의 실력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함부로 거리를 내주면 위험하다는 사실도.
그렇게 조금씩, 결투장의 공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현과 아인의 결투는 일반적인 유저들이 겪는 결투의 양상과는 많이 달랐다.
양쪽 모두 끊임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몇 십 초가 지나도록 한 번의 공격조차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복잡한 무빙 속에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한 수읽기가 얽혀 있다.
균형이 깨진 것은 찰나와도 같이 짧은 순간.
화륵!
아인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화염이 치솟았다.
여러 번의 페이크가 겹쳐진 공격이 막거나 피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들었다.
씨익- 동시에 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전의 내가 아니거든!’
콰득-!
칠흑의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는 순간 현의 전신이 어둠에 삼켜졌다.
조금의 회색조차 섞이지 않은 완전한 검정이었다.
그림자 방패.
절대수치의 데미지를 흡수하는 그 스킬은 아인의 화력마저 삼켜버릴 수 있었다.
높은 데미지는 엘리멘탈 버서커의 가장 큰 장점!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했다.
불꽃은 맥없이 사그라졌다.
아인의 높은 공격력은 오히려 현의 공격력을 높여 주는 셈이다.
어느새 현의 신형은 각성 퀘스트 당시의 그림자들처럼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마기를 흡수할수록 현은 칠흑에 가깝게 변하는 것이었다.
‘뭣…!’
아인의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마치 그림자처럼 변한 뒤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현의 신형.
아인은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피했다…!’
부웅-!
암흑의 대검은 옷깃을 스쳤다.
아니, 스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림자는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영혼이 그림자에 속박당했습니다!] [모든 속도가 10초간 30% 감소합니다!]어둠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 아인은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디버프 스킬이야?’
돌진했다고 생각한 것은 진짜 현이 아니라 현의 그림자인 듯했다.
그것에 살짝 스치니 폭발해 버렸고, 디버프까지 걸리고 말았다.
‘끝이 아니야…!’
아인은 연이어 현의 그림자가 다시 돌진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엄청난 속도였다.
똑같은 스킬을 또 당하면 여기서 더 느려지는 걸까?
그렇다면 위험하다!
화르르륵-!
아인의 전신에 불꽃이 붙었다.
30미터만큼 불꽃의 자취가 그려지는 것과 함께 아인의 신형도 그만큼 이동했다.
화신의 걸음을 사용하니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현의 그림자는 그대로 아인을 지나쳤고, 이번에는 폭발하지 않았다.
‘뭐야 또?’
아인은 황당한 기분이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형상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쓸 수 있는 스킬인 거야!’
이번엔 움직임이 굼떠진 탓에 쉽게 피할 수 없었다.
‘잠력 폭발!’
아인은 어쩔 수 없이 민첩을 끌어올렸다.
찰나, 몸이 가벼워지며 기동력이 복구되었다.
덕분에 간신히 몸을 비틀며 세 번째 그림자를 겨우 피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아인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팟!
이미 지나간 그림자가 갑자기 방향을 전환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고선 다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이번 것은 아인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순식간에 쇄도한 그림자의 손이 흑색의 반월을 그렸다.
영락없이 공격을 허용한 아인의 체력은 1까지 줄어들었다.
거기까지가 승부였다.
[결투가 종료되었습니다!]‘후우… 역시 완벽하군!’
현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망연자실한 아인이 주저앉은 가운데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옆에선 구경하던 루이즈가 마구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서포터란 직업으로 시작해서 아인을 이기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는가.
그래서인지 쉐도우 링커라는 직업이 더욱 마음에 드는 현이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뭐가?”
한참 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인이 묻자 현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그거 스킬 재사용 시간 이상하잖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평범한 스킬들이구만….”
“방금 1초도 안 돼서 같은 스킬 3번 쓰지 않았어? 현, 버그 쓴 거 아니야?!”
아인은 쉽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현은 은근한 미소를 숨기며 자신의 상태 창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정 보고 싶으면 마음껏 봐.”
아인은 쉐도우 링커의 새로운 스킬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불꽃을 흡수했던 그림자 방패.
그 뒤에 사용되었든 모든 스킬들까지도 빠짐없이 말이다.
하나씩 설명을 읽어갈수록 아인은 자신의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앞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흑령 질주 Lv.2]-어둠의 영혼을 전방으로 쏘아 보냅니다.
-적에게 닿으면 폭발합니다.
-마기에 휩쓸린 적들의 이동속도를 20초간 30% 감소시킵니다.
[환영 질주 Lv.2]-마지막으로 사용한 스킬의 이펙트를 따라하는 그림자를 생성합니다.
-그림자는 아무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림자 질주 Lv.3]-제자리에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돌진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공감력] X 30의 마기가 충전됩니다.
어둠의 방패를 제외하고, 새롭게 배운 스킬은 그렇게 세 가지였다.
원래의 명칭은 다른 것이었지만, 현은 세 스킬의 이름에 모두 ‘질주’를 넣어 통일시켰다.
아인이 눈에 불을 켜고 설명을 읽어나가는 동안, 현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으, 정말 완벽한 연계였어.’
현은 세 스킬의 이펙트가 모두 동일하다는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잡았다.
흑령 질주란 사용자와 똑같은 생김새의 그림자를 쏘아 보내는 디버프 스킬이다.
환영은 이전 스킬의 이펙트를 따라하는 것.
그림자 질주는 자신이 직접 돌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세 가지 스킬 모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현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인은 돌진해 오는 흑령을 현의 본체로 착각하고, 그것을 건드려 버렸다.
이동속도가 30퍼센트나 느려져 잔뜩 경계를 세운 아인.
아인은 연이어 똑같은 그림자가 달려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일한 이동스킬인 ‘화신의 걸음’까지 사용하며 이어지는 환영을 피하긴 했지만….
‘하긴, 모른다면 나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
현이 두 번째로 사용한 스킬은 환영 질주.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껍데기뿐인 스킬이었다.
그런 속임수에 걸린 아인은 ‘환영’을 피하기 위해 화신의 걸음을 사용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날아든 세 번째 그림자.
이어지는 세 번째 공격이 현의 본체일 거라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완벽한 심리의 허점!
현은 마지막으로 직접 달려가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었다.
‘흑령, 환영, 그리고 본신까지… 완벽한 3지선다라는 거지.’
여기까지가 결투의 수읽기였다.
현은 뿌듯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스킬만을 사용해 아인에게 승리를 따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었다.
‘여기서 기존의 스킬들까지 더해진다면?’
앞으로 펼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전략에 현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러다가 일대 일 결투도 내가 다 해먹는 거 아니야?’
“…….”
아인은 가만히 바닥에 앉은 채 녹화된 방금 전의 결투를 돌려보고 있었다.
영상을 응시하는 아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일대 일의 결투는 아인이 가장 자신있어하던 분야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은 단판이긴 했지만, 아인에게 일대 일 결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이 어떤 심정일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구경꾼이던 루이즈도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현과 루이즈 모두 아인을 곁눈질하며 살피던 순간, 아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현… 다시 하자.”
“응…?”
“이펙트 차이를 좀 알 것 같아. 비슷해 보여도 구분하는 방법이 있네. 이제 알겠어.”
아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씨익 웃었다.
“다시 하자니깐?”
“지금 말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스킬도 충분히 시험했고, 딱히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새로운 스킬을 이용해 일대 일 결투에서 아인을 이겼다는 그 성취감과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고 싶었던 현은 그렇게 말을 끌었다.
“더 하자!”
“하자니깐?”
“진짜 안 하게?!”
하지만 아인은 포기를 몰랐다.
역시 결투광이라고 해야 할까, 아인이 집요하게 따라붙자 현은 난감해졌다.
“한번 진 것 가지고 그렇게 심각해하지 마. 어차피 친선결투라 진심으로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럼 PK로 할래?”
“응…?”
“서로 봐주는 거 없이 진짜로 말이야.”
현의 스킬에 대단히 흥미가 돋았는지, 씩 웃으며 제안을 하는 아인의 눈을 바라본 현은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끝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 현은 아인에게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호승심을 넘어 살기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녀의 눈빛에 현이 당황하며 수습했다.
“아니, 그… 그럴 필요까진 없고….”
“역시 친선결투가 낫겠지?”
“그래, 그게 좋겠다!”
결국, 아인의 성화에 못 이겨 결투는 몇 시간 더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아인은 쉐도우 링커의 새로운 스킬들에 금방 적응한 듯했다.
아인이 스킬에 적응하자, 전투는 현이 기존의 스킬들까지 꺼내들어야 할 정도로 박빙으로 흘러갔다.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한 가지.
그림자 방패가 아인의 공격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가.
쉐도우 링커의 공격 수단은 ‘어둠의 검’뿐이었으니, 그 스킬활용에 모든 결과가 달려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5승 5패.
아인은 더 하자고 졸랐지만 현이 재빨리 말을 돌리며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까지가 양쪽 모두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결과였으니까.
‘얘한테 함부로 결투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자제해야겠어. 그래도 좀 더 시험은 해 보고 싶긴 한데….’
그렇게 새로 익힌 스킬들을 수많은 상황에 활용해보고 싶은 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바로 결투장이었다.
현은 아인이 없을 때 혼자 결투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보다 다양한 유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은 100레벨 이하의 전사, 도적, 마법사, 사제들이었지만 승패보다는 스킬을 시험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현에겐 크게 문제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의 상대로 매칭된 유저들이 스킬과 컨트롤에 경악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왓, 무슨 스킬이야!”
“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이런데서 놀지 말고 빨리 상위 구간으로 가세요!”
기본 4직업이 아니란 사실은 100레벨이 넘어선다는 뜻!
대부분 결투장 유저들은 정체불명의 그림자 스킬을 목격하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거기다 흑령과 환영을 이용한 페이크까지!
고작 세 가지 스킬이지만 그것들의 조합은 무궁무진했다.
아쉽게도 그 모든 조합에 제대로 된 대응을 보여주는 유저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골드 구간이군….’
그렇게 상위 구간으로 올라가던 현은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결투의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쉐도우 링커의 스킬 메커니즘은 상대의 공격을 흡수하여, 그 데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상대의 공격력이 약하면 자신의 공격도 약해진다.
최악의 경우는 극한의 탱커 직업군과 매칭이 잡혔을 때였다.
[제한시간이 초과되어 남은 체력의 비율로 승부를 판정합니다!] [승리하였습니다!]탱커를 상대로 승리를 얻어낸 현이 질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승부가 결착나기까진 약 30분이 걸렸다.
이후로 상대가 너무 단단하다 싶을 때면 현은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항복….”
이처럼 상대의 공격력이 약할 때는 백기를 드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현이 결투장에 온 목적은 다양한 유저들에게 스킬을 사용하며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었으니, 승패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한편 탱커들과 달리, 순간 화력이 높은 마법사 계열들과의 결투는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 나는 편이었다.
“뭐, 뭐얏!”
갑자기 달려드는 현의 모습에 놀란 마법사가 방어 스킬을 영창했다.
반투명한 막으로 전방을 보호하는 마법사.
허나, 그림자는 마술처럼 그를 통과했다.
환영 질주.
환영에서 이어지는 스킬 또한 환영이었다.
마법사가 무수한 환영에 눈이 팔린 사이, 현은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이어서 어둠의 검이 연이어 작렬하는 순간, 마법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빛이 되어 흩어졌다.
[3연승, 22의 결투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그렇게 상위 구간에 연승까지 겹치자, 전직을 마친 암살자 직업과 매칭이 되기도 했다.
메시지에 따르면 그는 25연승 중.
현처럼 뒤늦게 결투장을 찾은 랭커일지도 몰랐지만, 현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이런…!”
흑령에 적중당한 암살자가 신음을 흘렸다.
현은 환영을 이용해 암살자의 눈을 속인 뒤, 흑령을 쏘아 보냈다.
아인도 당했던 페이크에 그가 속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마기의 폭발과 동시에 슬로우가 작렬하자 그의 기동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뭐야 이 그림자들은…!”
사방에 날아다니는 검은 형체들에 암살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그림자라는 이름의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다.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환영에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환영처럼, 자신의 검은 그림자를 통과해 지나갔다.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역시나 검은 허공을 벨 뿐이었다.
“이것도 가짜라고?”
그 허탈한 물음이 암살자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곧이어 환영의 자취를 따라온 현이 거대한 대검을 내리 그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쾌속하고 매끄러운 일격.
그렇게 암살자는, 자신을 죽인 것이 어떤 스킬인지 궁금증도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플래티넘 3를 달성하였습니다!]“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느새 플래티넘까지 올라온 자신을 확인한 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결투장에서 다섯 시간이나 시간을 보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