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52)
경험치 던전
“현, 무슨 일이야?!”
“오우, 드디어 첫 길드 임무인가?”
“잠깐, 저 저녁 먹은 거 정리도 못 했다고요…!”
시차 탓에 가장 불리한 타르타르가 조금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특별히 불만을 가지진 않는 듯했다.
루이즈는 바로 옆의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으니 쉐이드 길드의 다섯 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자 그럼.”
소파에 둘러앉은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루이즈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자신이 길드장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이렇게 길드장의 권한까지 사용해 길드원들을 모은 이유는 오직 하나! 공작의 퀘스트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주말에 시간 내기 힘든 사람 있나요?”
“으응… 난 괜찮아.”
“후후, 우리가 남아도는 게 시간이지. 주말엔 그냥 노예처럼 부려먹어도 상관없어. 가끔씩 동화만 해 준다면….”
“네…? 노예요…?”
타르타르가 잠깐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조금 어려운 퀘스트가 하나 있어요.”
“흐응…? 현이 어렵다고?”
“오, 고난이도 퀘스트인가!”
살론이 흥분하던 와중 현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못 깨요.”
후후, 아인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현이 ‘절대로’라는 말을 꺼낸 이상 그 퀘스트의 난이도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대라는 것을 현이 보기 좋게 깨부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두근거렸다.
“왜냐면 이번 퀘스트는 스케일이 좀 많이 크거든요… 그래도 준비하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이번엔 타르타르의 귀가 솔깃해졌다.
유트브 조회수는 유저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스케일이 클수록 조회 수가 크게 늘어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루나에서 있던 활약을 편집한 영상은 역대급 조회 수를 기록하지 않았나.
“야, 좀 일어나 있어라. 너도 들어야 하는 이야기야.”
“끄으음…? 뭐어, 벌써 저녁 사냥 시간인가?”
한쪽 구석에서 자고 있던 루이즈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현은 루이즈 또한 파티에 넣을 계획이었다.
일반적으로 NPC와는 파티가 불가능하지만, ‘조력자’의 포지션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니, NPC용병처럼 루이즈를 써먹을 계획이었다.
경험치가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쉽지 않겠지.’
바히미르가 만용이라며 비웃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100레벨 근처의 네 명과 200레벨 한 명. 심지어 그 200레벨짜리도 딱히 믿음직스러운 녀석은 아니었다.
그런 오합지졸끼리 성을 공략한다 말하면 누가 비웃지 않으랴.
수천 이상의 정예 병사들이 대동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성의 공략인데 말이다.
하지만 공작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성의 지도를 비롯한 모든 공략법이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단 사실!
그리고 정보를 바탕으로 세웠던 아스라 시절의 공략이 전부 어떠한 결과로 끝났는지를 말이다.
‘준비만 완벽하게 하면 충분히 가능해.’
찬찬히 모두의 면면을 살펴보던 현의 시선은 타르타르에서 멈추었다.
좀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전력에서 가장 구멍을 꼽으라면 타르타르가 아닐까?
현은 진지하게 설득을 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타르타르, 혹시 지금 직업 마음에 들어?”
“직업이요? 괜찮은데 왜요?”
“너도 곧 100레벨이잖아. 전직은 뭐로 하게.”
“살론 형처럼 저도 소드 댄서로 하려고요!”
현은 천천히 머리를 짚었다.
아직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나? 조금 현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너 결투 등급이 뭐였지?”
“잠깐 마스터인 적도 있었어요. 스킬 다시 찍은 뒤론 결투장에 안 갔지만요.”
“그래. 마스터… 마스터면 일반인 치곤 굉장히 높은 등급이겠지만 우리 길드에선 아니야. 오히려 랭커들 기준으로 보면 PvP에 재능이 없는 편이지.”
“네…? 그렇긴 하죠….”
“근데 살론처럼 사냥을 잘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혼자서 1000콤보 넘겨 본 적 있어?”
“아뇨…?”
“그럼 아마 사냥에도 큰 재능은 없는 편이겠지. 요즘 올라오는 유트브 동영상 보면 슬슬 1000콤보 찍는 사람들 많이 보이잖아.”
“아마도 그렇… 겠죠….”
사실만 콕콕 짚어 이야기하는 현의 말은 은근히 자신을 높게 평가하던 타르타르에겐 잔혹한 이야기였다.
가끔씩 연락만 하고 지내는 형들은 자신을 칭찬만 했으니 실력적인 면에서 이런 쓴 소리를 듣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옆에서 듣던 살론이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터뜨렸다.
타르타르가 소심해지려는 기색이 보이자 현은 재빨리 그를 다독여 주었다.
“아니, 널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 파티를 이루게 되면 모두가 한 뜻으로 움직여야 되잖아? 지금은 그 밸런스가 어긋나 있다 이거지.”
그리고 드디어.
불안해하는 타르타르를 달랜 현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넌 운이 좋은 편이야. 왜냐면 실력과 재능을 동시에 극복할 방법이 있으니까 말이지!”
현은 타르타르가 공작에게 인정받은 직후 하나의 히든 직업을 해금했음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
아스라 시절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히든 직업이지만 히든 직업인 것 치곤 인기가 낮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된 타르타르도 해당 직업 대신 콤보 도적의 상위 계열인 ‘소드 댄서’를 노리고 있었다.
‘지금 파티 조합엔 죽음의 기사가 딱이야!’
그것이 히든 직업임에도 인기가 낮았던 이유는 100~300레벨의 초중반 구간이 쓰레기처럼 약하기 때문이었다.
마기를 제대로 다루기 전까진 팔이나 휘적거리는 샌드백인 직업이 인기가 많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동화로 극복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게 단점 빼고는 개사기 직업이거든!’
루이즈와 타르타르.
마기를 사용하는 두 직업들이 이번 공략의 열쇠가 될 것이다.
“자, 결정이 끝났으면 이걸 써.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고… 내 말대로 하면 우리에게 꿇리지 않는 위치에 단번에 도달할 수 있다 이거니까.”
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타르타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잠재력의 역행서!
일반스킬을 초기화시키는 그 물건 때문에 자신은 여태껏 영상 편집의 정산을 받지 못하고 있지 않았나.
“자, 선택의 시간이다.”
‘설마….’
타르타르의 머릿속에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빚을 다 청산했기 때문에 다시 이걸 건네준 건가? 그걸 또 다 청산하면 다음에도 또…?
어쩌면 자신은 끝없는 빚의 수렁에 빠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후후, 선물이다. 이 형이 특별이 공짜로 이걸 쓰게 해 준다니깐?”
걱정과는 달리,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현의 말에 타르타르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악독한 형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뭐, 얼마 되는 물건도 아니고.”
“네?”
순간 타르타르의 입가에서 의문이 터졌다.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론 가격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은데….”
“후후, 괜찮아. 나중엔 가격이 내려갈 물건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
영혼 복제 엘릭서라면 몰라도, 잠재력의 역행서는 사실 그렇게까지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200레벨 이상의 퀘스트에선 극히 드물게, 300레벨이 넘어가는 구간에선 간간히 획득 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니니 현은 타르타르에게 선심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전직 결정한 거지? 그럼 이번 주말 전까지 100레벨 찍어 두라고!”
현은 역행서를 타르타르에게 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것은 아마 타르타르에게도, 자신에게도, 길드에게도 득이 되는 선택임이 분명했다.
그동안 소홀했던 것들을 신경 써 준 것만 같아 현은 흐뭇해졌다.
“후후, 무슨 생각인지 다 알아. 이 형이 나중에 죽음의 기사 컨트롤, 운용법 다 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웃음을 지으며 공략의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럼 슬슬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해 볼까?’
타르타르는 회의 도중 계속 역행서를 만지작거리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쏜살같이 다가온 주말 저녁.
타르타르는 현의 의도대로 전직을 마치고 스킬까지 알려준 대로 다시 찍은 뒤였다.
쉐이드 길드에 더 이상 100레벨 미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루이즈는 무려 200레벨!
‘아직 멀었어.’
그럼에도 현은 아직 공작의 퀘스트의 공략이 불가능하다 보았다.
‘최소한 50레벨은 더 올려야겠지.’
스펙 업은 당연했고, 거기에 다른 것들이 추가되어야만 간신히 공략을 성공할 견적이 나왔다.
‘전체적으로 실력도 더 향상되어야하고… 무엇보다 합이 완벽하게 맞아야 돼!’
전장에서의 자신은 모두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가 되어야만 했다.
아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을 테니 직접 신경 써서 지도해 볼 생각이었다.
우선, 첫 단추는 루이즈의 실력을 나머지 일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
‘가능할까…?’
현은 신나서 밤거리를 뛰어다니는 루이즈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냐,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현은 일행과 함께 텔레포트했다.
무대는 마도국의 미궁도시 ‘라비린스’로.
마도국은 천공의 3강에 속하는 나라지만 천공의 세력들 중엔 심연 유저들이 가장 지내기 편한 곳이었다.
현대의 자유경제를 가장 닮았기 때문에 마도국의 NPC들은 특별히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심연 유저들의 존재마저 묵인해 주었다.
또한, 신관이 거의 없어 룬을 속이는 것에도 부담이 없었으니 대부분 심연 유저들의 활동은 마도국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전에 우리도 여긴 한 번도 와본 적 없지?”
“맞아, 그래도 뭐가 있는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 나만 따라오면 돼.”
“현, 여행 가이드 같잖아!”
아인의 킥킥거리는 웃음을 들으며, 현도 라비린스의 거리를 만끽해 보았다.
‘모래가 좀 많긴 하지만… 제법 괜찮은 풍경이야.’
석재로 지어진 라비린스의 건축물들은 고대의 사막도시를 연상시키지만, 문명수준은 현대와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았다.
도시의 겉모습이 거칠어진 이유는 500년 전만 해도 이곳이 거대한 미궁이었기 때문이다.
모험가들에 의해 미궁의 탐험이 끝난 이후 부산물로 남은 수천 개의 마법진들.
지금에 와선 그 마법진들이 라비린스의 존재 의의가 되었다.
고대의 유적들이 후대엔 관광지가 되듯, 라비린스에 남겨진 마법진들도 이제 와선 도시의 명물로써 자리 잡은 것이었다.
경험치 던전 역시 그 중 하나.
마법진의 기억을 불러와 만들어낸 인스턴트(Instant) 던전.
유저들은 편의상 ‘경험치 던전’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행의 목적지 역시 그곳이었다.
“여기로군.”
현이 도착했을 때는 많은 유저들이 경험치 던전 주변에서 파티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던전의 입구에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NPC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을 이용하는 것 같아 현은 웃음이 나왔다.
5인 파티 기준, 한 번의 입장료는 무려 500골드!
평범한 유저들에겐 손이 덜덜 떨릴 만한 거금이지만 지금의 누구에게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경험치 던전에 오게 된 이유는, 레벨 업과 동시에 일행들의 실력을 단기간에 상승시키기 위해서였다.
‘퀘스트 전에 파티의 합을 완벽하게 맞춰야 하니까.’
경험치 던전은 가상전투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던전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망할 염려도 없었고. 레벨업도 하며, 파티의 합까지 맞출 수 있으니 연습장소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었으니 현은 500골드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 아인이다!”
“진짜? 나 실제로 처음 봤어!”
“팬이에요! 싸인 해 주시면 안 돼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자, 유저들의 시선이 아인에게 쏠렸다.
아인은 유명 인기인에다, 외모와 분위기까지 독특했으니 유저들은 금방 알아보았다.
살론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기대감을 부풀리며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평범한 그의 외모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들에게 싸인을 해 주지 않는 거냐…?”
“….”
팬이라 자처하는 유저들을 그냥 지나치는 아인의 행동을, 살론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팬이었다면 싸인해주는 도중 짧은 무용담까지 하나씩 들려줬을 텐데.
하지만, 살론을 마주보며 잠깐 눈을 가늘이던 아인은 곧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어쨌든 모두는 별 소란 없이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NPC의 안내를 따라가니 천장이 까마득한 넓은 공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50레벨에 들어갔던 ‘각성의 방’처럼 어둡고 은은한 분위기의 장소. 마력 등불이 홀을 장식하는 가운데 바닥 중앙엔 커다란 마법진이 웅웅거리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법진을 한 번 발동시키는 데 500골드입니다.”
미궁 관리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갔다.
“전체적으로 실력 좀 점검해 보죠? 어떻게 합을 맞출지는 봐야 알 것 같으니까.”
“현, 네 지적이라면 믿을만하겠지.”
“지금 바로요?”
타르타르의 물음에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얼마나 처참한 상태인지 알고 가야 하잖냐.”
달칵.
현이 마법진의 발동 스위치를 누르자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던전의 난이도는 Lv.50부터 Lv.200까지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었다.
“우선 100레벨부터 시작하죠.”
화아악-! 단숨에 터져 나와 일행을 뒤덮는 광휘.
빛이 사라진 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어두컴컴한 홀이 아닌 500년 전 미궁의 모습이었다.
과거, 라비린스는 몬스터들의 소굴이었다.
모험가들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미궁의 십자교차로마다 거점을 만드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미궁을 공략해 나갔다고 한다.
교차로의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기둥. 코어.
사거리의 동서남북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로부터 코어를 최대한 오래 지켜내는 것이 목표였다.
띠링-!
[모든 몬스터들이 Lv.100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0분간 코어를 방어하세요!]짧은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현이 모두에게 지시했다.
“각자 통로 한 군데씩 맡아요.”
“이… 이 몸도 말인가…?
“어, 너도.”
루이즈가 울상을 지어도 현은 봐주지 않고 지시했다.
과거의 흔적을 재생하는 것 뿐, 진짜 몬스터들은 아니니까.
“현은 뭐하게?”
“어…? 일단 난 가만히 있게.”
그 대답에 아인은 일행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중얼거렸다.
“음… 왠지 절대 못 깰 것 같은데.”
“연습이잖아. 여유가 되면 다른 사람들 좀 도와줘. 그래도 내가 제일 믿는 게 너니까.”
“후후, 역시 그렇지…?!”
현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대답한 아인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현은 코어의 정 중앙.
나머지 넷은 교차로의 통로마다 한 명씩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일종의 협동 디펜스.
벽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각 파티원은 다른 쪽 통로의 상황을 쉽게 확인할 수가 없었다.
또한, 통로가 한 군데라도 뚫리는 순간 몬스터는 코어까지 도달해 공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유일하게 파티를 조율할 수 있는 자가 교차로 중앙에 선 유저였지만, 현은 첫 시도엔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던전의 공략보다 각 파티원의 실력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신입인가?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하던 참이었거든!”
코어의 위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NPC가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마법진의 기억 속에 남겨진 경계대장. 500년 전 이 미궁의 전투 속에 사라졌을 영혼이었다.
“공세가 벅차다면 나의 지시를 따르게! 기초적인 방책을 세우는 방법 따위를 알려주지!”
“필요 없어.”
NPC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현의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경계대장은 인공지능이 아닌 프로그래밍 된 NPC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구시대의 NPC들은 전부 이런 방식이었다고 하니 현은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모두 방어!”
경계대장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아인이 맡은 통로엔 한 마리의 청늑대.
살론에겐 고블린 암살자 세 마리.
타르타르에겐 한 무더기의 해골 바가지들이.
루이즈를 향해선 붉은 슬라임 떼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 방향의 통로를 지키는 일행들은 곧 각자의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현은 가운데서 각 통로의 상황을 둘러보며 쯧쯧 혀를 찼다.
자신의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인과 살론은 좀 낫고, 타르타르는 불안불안한 정도.
반면 루이즈의 상태는 처참했다.
후우우우웅-!
루이즈의 통로에는 끊임없이 거친 바람만이 몰아쳤다. 날카롭고 매서운 바람이 아닌 그저 세기만 한 바람이었다.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몬스터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때문에 루이즈의 담당 구역엔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쌓이는 중이었다.
“으으… 이 녀석들 죽지 않는다!”
“야, 그걸 가까이서 때려야 죽지! 멀리서 쓰면 선풍기밖에 더 되냐?!”
“선풍기…?”
슬라임이란 마기를 불어넣지 못하는 루이즈라도 어렵지 않게 터트릴 수 있는 연약한 몬스터인데.
하지만 루이즈는 지레 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슬라임의 떼가 쌓이고 쌓여 바글거리는 수준이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 현…! 빨리 나에게 동화하거라!”
화륵-!
순간, 불꽃이 루이즈의 전방을 뒤덮었다.
불타는 슬라임의 잔해들 사이로 아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인은 자신의 통로의 적들을 모두 해치운 틈에 루이즈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야, 네 쪽은?”
“후후, 난 괜찮지.”
화르륵-!
화염의 자취가 생겨나는 동시. 슬라임을 몰살시킨 아인은 한순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루이즈와 아인은 서로 맞은편.
‘화신의 걸음’으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고, 고맙구나!”
루이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쪽에선 타르타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형! 이 녀석들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해요? 데미지가 약해서 아무리 때려도 안 죽어요!”
“스킬을 미리 아꼈어야지. 너무 빨리 써서 그런 거잖아.”
“아니, 이 직업 오늘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다니까요? 으, 어억…!”
타르타르에게 조언을 좀 해주었다 생각하면 또 그 사이에 루이즈가 다시 위기에 빠졌다.
“우우… 번개를 쓰는 슬라임이 나왔다! 번개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단 말이다…!”
“이봐 현…! 나에게 동화해 줘! 회피 계열 정예 몬스터라 콤보 도적으론 조금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조 요청에 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동화가 있었더라도 이걸 클리어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특히 루이즈가 맡은 통로는 그냥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아인이 빠르게 왕복하며 그 구멍을 메우고는 있지만… 한 번 생겨난 균열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경계대장은 친절하게도 구멍이 생겨난 위치를 목소리로 알려주고 있었다.
“서쪽의 방어가 뚫렸다! 서쪽을 강화하라!”
[코어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남은 내구도 95%)]아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탓에 푸른 늑대의 ‘마력포효’가 허공을 격해 코어를 살짝 스쳤다.
“아차…! 실수!”
재빨리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이미 코어 내구도의 1/5이 날아간 뒤였다.
“으아… 세 마리 놓쳤어요!”
타르타르의 통로로부터 해골 전사 세 마리가 추가로 달려왔다.
코어의 방어 마법진이 그것들을 처리하는 동안 내구도는 절반까지 깎이고 말았다.
“현! 귀환 스크롤이 안 써진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선 못 써. 아니, 쓰지 마!”
루이즈는 안간힘을 쓰며 바람으로 슬라임의 홍수를 밀어냈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화악-!
슬라임의 수가 바람으로 막지 못할 만큼 늘어나는 순간 루이즈는 몬스터들에 삼켜졌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빛으로 흩어졌다.
“루이즈 죽었어요?!”
“…진짜 죽은 건 아니니까. 자리나 지켜.”
어쩔 수 없이 현이 루이즈가 있던 장소를 맡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살론의 구역으로부터 날아온 얼음 마법 때문에 코어 내구도에 추가 손상을 입었고.
타르타르마저 머지않아 루이즈를 따라 빛으로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코어가 파괴되었습니다!] [각자 획득한 경험치에 5퍼센트의 보너스가 추가됩니다!]화악-!
시야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모두는 홀의 마법진 위로 돌아가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력등불이 일행을 어둡게 비추는 장소로.
‘생각보다 심각한데….’
현은 슬쩍 경험치 바를 살펴봤지만 딱히 경험치가 오른 것 같지는 않았다.
500골드… 지금 현실의 가치로 따져 3~40만원을 투자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뜻이다.
루이즈는 현과 눈을 마주치자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동화한 현이 자신의 몸으로 무쌍을 찍는 광경만을 봐온 그녀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더욱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선 이 녀석을 좀 봐 줘야겠어.’
현은 일행이 한숨 돌리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다들 일어나요. 다시 갈 겁니다.”
“곧바로 하는 거야?”
“후후. 좋군. 이래야 재밌지.”
달칵-.
곧장 500골드를 추가로 소모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경험치 던전은 안전하게 루이즈의 실전경험을 쌓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광휘가 터지는 순간 일행은 십자가 형태의 통로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현은 임무가 시작되자마자 루이즈의 몸에 동화했다.
“아인, 자리 좀 바꿔 줘. 괜찮아?”
“내가 슬라임 상대야? 좀 기분 나빠서 별론데….”
“음… 그럼 타르타르한테 자리 바꿔달라고 하자.”
이번엔 루이즈가 푸른 늑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슬라임과 달리 한 마리씩만 리젠되기 때문에 루이즈의 연습에 딱 좋은 상대였다.
‘여전히 겁이 많은 게 문제란 말이야.’
한평생 바람을 신체의 일부처럼 다루며 살아온 루이즈였으니 스킬 숙련도는 웬만한 유저들을 부쩍 뛰어넘을 것이다.
검은 바람.
자신도 컨트롤이 어려웠던 그 스킬을 루이즈는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으니까.
지금 루이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몬스터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루이즈는 즉시 최고 전력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잘 봐.」
부웅-!
늑대의 앞발이 시야를 휩쓸었다.
현은 순간, 루이즈가 상황을 외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루이즈가 공포를 극복해온 방법이었을까.
하지만, 이제부턴 그래선 의미가 없었다. 보이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크아앗…!”
눈 밑에 발톱 공격을 허용당하는 동시, 루이즈가 비명을 질렀다.
현은 데미지가 크지 않도록 스치듯이 치명타를 허용했다.
동화한 채 사냥할 때는 거의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던 루이즈의 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네가 움직여서 끝까지 피해.」
루이즈는 아마도 열다섯 살 근처.
세계관 설정에 따르면 성인에 들어서는 나이다.
조금 잔인한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루이즈의 앞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치명타! 156의 피해를 입었습니다!]현은 고통, 혼란, 공포가 순식간에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동화를 통해 느껴지는 루이즈의 감정.
결코 NPC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생생해서 자칫 정신을 놓으면 그것들의 혼합물에 자신까지 휩쓸릴 것만 같았다.
[치명타! 171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치명타! 298의 피해를 입었습니다!]늑대 한 마리를 빠르게 처리하지 못하자 그것은 곧 두 마리로 늘어나게 되었다.
양방향에서 휘몰아치는 은빛의 발톱들.
현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모든 공격을 스쳐가게 만들었지만 일부러 완전히 피해내지는 않았다.
피부가 욱신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루이즈의 몸엔 계속해서 날카로운 상처가 새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해!」
“우… 우으…! 크으읏!”
「아니면 죽이던가.」
공포, 혼란, 거기에 동정심이 섞여들었지만 현은 애써 그 감정을 내려놓았다.
이곳은 게임 속의 게임.
여기가 아니면 루이즈의 공포를 극복할 장소는 없었다.
크르릉!
늑대는 이제 세 마리가 되었다.
복도의 폭은 10미터 정도로 넓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 횟수는 그대로 세 배만큼 늘어났다.
한 줄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루이즈의 안색이 창백해졌을 찰나.
“으아… 죄송합니다…!”
[코어가 파괴되었습니다!] [각자 획득한 경험치에 6.7퍼센트의 보너스가 추가됩니다!]타르타르가 맡고 있던 구역이 뚫리며 순식간에 중앙까지 스켈로톤의 무리가 몰려들었다.
코어가 파괴되는 동시 일행은 어두운 마법진의 홀로 되돌아와 있었다.
“우으으….”
눈물을 머금은 루이즈를 일행 몇 명이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할 건가?”
우려가 섞인 살론의 물음에 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루이즈는 당장 집에 가겠다며 난리를 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다섯의 루이즈는 열 살의 루이즈와도 달랐다.
그녀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고만 있을 뿐 불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현은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되어서 루이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별거 없어. 너보다 훨씬 약한 녀석들이야.”
끄덕.
“정 무서우면 눈 딱 감고 후려갈기면 된다고….”
화악-!
잠시 후 마법진의 빛이 일행을 다시 삼켰고, 루이즈의 앞에 청늑대 한 마리가 크르릉거리며 나타났다.
루이즈는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깨물었다.
얼마 전엔 몬스터가 아무리 많아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동화하고 있는 현이 어떻게든 다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혼자.
정확히 말해 혼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가만히 있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 해보자구나.
루이즈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기로 결정했다.
***
처음으로 늑대에게 공격을 성공시킨 것은 5회 차 만이었다.
[치명타! 204의 피해를 입었습니다!]늑대의 발톱이 루이즈의 뺨을 스치는 동시.
[치명타! 7183의 피해를 입혔습니다!]루이즈의 손아귀도 늑대의 주둥이를 후려갈겼다.
쿠웅-! 녀석이 벽에 처박혀 비틀거리는 가운데 루이즈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안 끝났어! 완전히 죽여!」
「아, 알겠다…!」
파앙-!
그 순간 마력의 응집체가 날아들었다.
청늑대의 포효에 담긴 공기의 탄환.
현은 특별히 그 공격만큼은 자신이 처리해주려 했지만, 이윽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루이즈가 먼저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파앙! 파앙!
루이즈의 신형은 V자의 자취를 그렸고, 마력의 탄환은 루이즈의 옷깃만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힘껏 허리를 젖힌 루이즈. 손바닥으로 전방을 내려찍었다.
콰지지직-!
풍압은 늑대와 벽면을 함께 쥐어뜯었다.
루이즈의 첫 사냥은 불필요하게 거칠었다.
잠시 후 부서진 벽면이 재생성되고 나서야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듯 물었다.
「죽은 건가…?」
「그래.」
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직 더 연습해야 돼.」
9회째 도전.
“신입인가? 마침….”
일행은 경계대장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통로를 하나씩 맡았다.
루이즈는 세 마리 늑대를 처치하고 네 번째 늑대와 마주하고 있었다.
막혔던 장애물 하나가 뚫리니 그 때부터 루이즈의 성장은 눈부시도록 빛났다.
바람은 본래 그녀의 손발과 같았다.
반작용의 원리를 사용하는 무빙이란 누군가에겐 난해하겠지만 루이즈에겐 그것이 가장 익숙한 방식일 테니.
퍼엉-!
어느 순간, 천장까지 뛰어오른 루이즈는… 다시 천장을 박차고 지상에 안착했다.
단 두 번의 움직임만으로 청늑대의 등 뒤를 잡았다.
적의 후방이 안전지대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동화하고 있던 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기도 했다.
‘감을 잡았어!’
곧바로 바람의 손아귀가 늑대의 등을 후렸다.
루이즈의 손이 늑대에 닿기 직전, 현은 전신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콰아아-! 바람에 어두운 기운이 섞여들었다.
풍압이 전방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곳엔 거친 파괴의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단단하던 청늑대의 몸체가 산산이 찢겨나간 것이었다.
“아…?”
루이즈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이것이 자신의 스킬로 만들어낸 위력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기가 휘몰아치는 것이 ‘검은 바람.’
200레벨의 루이즈가 가진 진짜 힘이었다.
[코어가 파괴되었습니다!] [각자 획득한 경험치에 15.1퍼센트의 보너스가 추가됩니다!]다만 이번에도 다른 쪽에서 구멍이 뚫린 탓에 일행은 처음의 마법진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어두운 홀 아래에는 타르타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놓쳤어요.”
‘그래, 봐줘야 하는 녀석이 또 있었지.’
현은 계속 줄어들어가는 인벤토리의 골드 수치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당분간은 조금 돈이 제법 깨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쉬어야겠어.’
경험치 던전에 온 지 벌써 4시간. 루이즈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당연하다. NPC인 루이즈에겐 통각을 비롯한 대부분의 필터가 적용되지 않으니까.
남들보다 수배의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내일 다시 하죠. 다들 시간 되죠?”
한국 시간 기준, 지금은 새벽이었으니 현을 제외한 나머지 파티원들의 피로도도 상당히 쌓인 상태였다.
파티가 해산되기 전 타르타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요 형, 오늘 녹화 본도 편집하나요…?”
“아니, 이걸 왜 올려…? 고작 100레벨짜리 몬스터들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면 누가 보겠냐.”
“그쵸?”
타르타르가 화색이 돈 채 접속을 종료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 놓친 건 졸려서 실수한 거였어.”
아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에 잠깐 청늑대 한 마리의 공격을 허용했던 것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 너도 몸이 여러 개는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 도와주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것도 원래는 안 놓치는 거라니깐?!”
“그, 그래… 어쨌든 내일 다시 하자.”
아인과 살론까지 접속을 종료하자 곧 마법진 위엔 현과 지친 듯한 루이즈밖에 남지 않았다.
루이즈가 조금 어리광을 부리듯 달라붙어 온 탓에 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접속을 종료하기 전에 그녀를 프라이빗 룸에 데려다 주어야겠다.
내일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빨리 자는 편이 좋겠지.
그 때였다.
“여기 전세 냈어?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거야?”
누군가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현이 루이즈와 함께 막 홀을 나서려던 때였다.
‘응? 뭐야?’
루이즈가 뒤편으로 몸을 숨기는 가운데 현은 홀의 내부에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남자가 기다란 창을 비스듬히 든 채로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매너가 참 부족하네.”
“뭐라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한 번 하고 나오는 게 매너잖아. 당신이 연속으로 마법진을 발동시킨 덕분에 우리 넷의 15분이 날아가 버렸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단 뜻이야?”
“이제 좀 알아듣는군.”
현은 잠깐 듣고 어이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연속으로 마법진을 가동시킨 것은 맞긴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관리 NPC는 마법진의 이용시간을 통제하지 않았고, 기다리는 파티가 있으면 곧바로 자리를 비켜야 한다는 규칙도 없었다.
마법진의 이용시간은 파티장끼리의 상의 하에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애초에 경험치 던전의 마법진은 바로 옆에 10개나 더 있을 텐데. 왜 이곳에 와서 갑자기 시비조로 말을 건단 말인가.
“고작 15분 기다린 것 때문에 그런 거였냐? 이제 끝났으니까 마음껏 써.”
상대의 말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외국인으로 보였으니 현도 마음껏 반말을 쓰기로 했다.
피곤한데다 이상한 녀석의 짜증을 마주하니 가는 말투도 곱지 않았다.
엮이기 싫은 마음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창을 든 남자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고작 15분? 우리 다섯의 15분이 네 한 달을 살 수 있단 사실을 알려나 모르겠네.”
자꾸 시비를 거는 탓에 현은 그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았고, 자세히 보니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창을 든 남자의 정체는 피아스.
명예의 전당 랭킹 20위 권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다크니스 길드의 최고 간부진 중 한명이었다.
‘뭐야, 이 녀석이었어?’
현은 언젠가 아인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투장에서 피아스라는 녀석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고.
길드에 권유받았지만 거절한 뒤에 혼쭐을 내 줬다며 당당하게 웃던 아인이었다.
‘아인에게 듣던 대로 좀 성격이 이상한 녀석이군.’
이런 놈하고 엮이면 피곤해지는 것은 상식이다.
현은 “그래.” 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뭔가 쏘아붙이는 목소리를 못 들은 채 하면서.
“저 자식 저거…! 끝까지…!”
“야, 그만 좀 해라 피아스.”
그의 옆에 있던 동료, 베어실드가 피아스의 행동에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베어실드는 불순한 사건이 터진다면 그 즉시 피아스를 제지하기 위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다행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넌 그놈의 입이 문제야 정말…!”
베이실드의 한숨소리에 주위에 있던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필터가 없다는 것이 피아스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특히 자신을 비롯한 다크니스 길드원들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은 결코 지나치지 못했다.
방금 그가 욱 했던 까닭도, 자신들이 ‘다크니스’임을 알아보고도 상대방은 노골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자식 분명 우리를 알아봤어요. 우리 어깨에 있는 길드 문양 힐끔거린 다음 인상을 찌푸렸다고…!”
나머지 길드원들은 너무도 혈기왕성한 피아스의 성격에 혀를 찼다.
길드를 사랑하는 마음은 좋지만 피아스는 그것이 너무 심했다.
“너무 열 내지 마. 모두가 우릴 좋아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야. 모든 반응에 일일이 반응할 순 없잖아.”
“맞아. 그때 아인하고 척을 지게 된 것도 네 성격 때문 아니었냐.”
피아스는 무어라 반박하려했지만, 자신을 책망하는 누군가의 지적에 순식간에 기가 팍 죽어버렸다.
짜증은 한순간에 자책으로 변했다.
“그… 랬죠?”
“우리도 좀 차분해져야지. 자칫 랭커급 길드랑 시비가 붙게 되면 얼마나 귀찮아지는데.”
“자, 다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사냥이나 하자고.”
툭툭- 베어실드가 방패를 바닥에 두드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크니스에서도 최정예인 파티는 경험치 던전의 몬스터들 수준을 180레벨로 설정하고도 클리어가 가능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오늘은 190레벨의 던전에 처음으로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최전선의 파티는 아직 어느 유저도 오르지 못한 길을 먼저 걸어가는 중이었다.
***
190레벨의 경험치 던전.
다크니스의 파티는 여러 번 도전했지만 전부 아슬아슬하게 클리어에 실패했다.
하지만 클리어를 못 했어도 잠깐의 사냥으로 금세 분위기가 달아올랐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상당한 경험치를 획득하고 프라이빗 룸으로 돌아왔을 때.
다크니스의 프라이빗 룸은 조금 심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길드내 최고 랭커, 메이데이의 추측으로부터 얻은 하나의 정보 때문이었다.
곧 여섯의 간부진들만 따로 한 곳에 모였고.
메이데이는 동영상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가지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현’의 존재와 관련된 추측이었다.
“정말이야? 현…을 발견했다고?!”
전작의 랭커였던 케이지가 신음을 흘렸다.
현의 본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는 남들보다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초창기부터 아인과 함께였을 가능성이 높다니… 무슨 그런 일이….”
아인의 동영상은 인터넷에 수두룩했고, 목격담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증거들로부터 현의 존재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헌데 어떻게?
메이데이는 아인과 현이 함께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낸 걸까?
“동화에요!”
메이데이는 하나의 녹화 본을 틀었다.
“저도 몬스터의 몸속에 동화된 적이 있었거든요!”
용암이 바다처럼 흐르는 지하의 고대도시.
베티라는 이름을 가진 몬스터에 동화했던 동영상의 홀로그램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대악마 기만의 퀘스트는 아직도 연유를 알 수 없지만 동화라는 신기한 경험은 쉽게 잊지 못했다.
“제가 경험한 것처럼, 현도 동화와 비슷한 스킬을 사용하는 게 분명해요!”
메이데이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동안 지켜본 아인의 강함은 편차가 너무 심했다.
평소엔 그냥 최상위 랭커 수준… 하지만 종종 아인은 네임드 보스라 생각될 만한 스펙으로 변하곤 했다.
베티와 싸울 때만 해도, 그 불꽃 발톱의 데미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방어력이 높은 네임드 보스를 그토록 순식간에 처치하려면 스탯이 최소 3배는 되거나, 혹은 아주 특별한 스킬을 보유해야만 가능했다.
“게다가 그 멀티태스킹도 동화가 있다면 가능하죠!”
백작 퀘스트에서도.
아인은 근거리 전투를 펼치는 동시에 모든 원거리 공격을 피하는 AI같은 컨트롤을 뽐냈다.
하지만 결투장이나 라티스와의 대결에선 물론 강하기는 했지만, 그때 보았던 압도적인 강함까지는 아니었다.
어떨 때는 약한 척 하면서, 어떨 때는 진심으로 한다?
그것보단 현의 동화를 가정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설명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이거라고요!”
메이데이가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아스리안 초창기, 레오파드라는 네임드를 둘이서 사냥하는 영상이었다.
눈보라와 얼음으로 뒤덮인 화면의 시야엔 아인을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이 누군가와 파티를 맺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희끄무레한 검은 옷의 인영을 보며 베어실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현이었다고?”
“그럴 확률이 높아요. 전작에서도 둘이 함께였다고 하니까 현이 아스리안을 플레이하고 있다면 이번에도 아인하고 같이 하고 있겠죠.”
“대충 알겠습니다.”
길드장인 엑스라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도중부터 메이데이가 할 말을 얼핏 예상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이상하게 여겼던 의문들이 모조리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행이군요.”
엑스라지는 그동안 현에 관한 정보를 상당히 조사한 덕분에 빠르게 대응책을 세울 수 있었다.
정보대로라면, 조금 감정적인 아인과 달리 현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며 냉철한 유저였다.
적어도 아스리안이라는 세계 안에선 가장 차가운 사고를 가졌을 거라 생각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현을 영입하기란 불가능하겠죠. 누군가의 아래에 있을 성격이 아니니까요.”
다크니스는 이상론보단 현실적인 타협을 꺼냈다.
“영입을 시도하기보단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우선입니다. 정 안되면 중립적인 관계가 되더라도… 절대로 적대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현의 존재는 라티스만큼의… 아니, 라티스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니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