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63)
길이 열리는 시간
“지하로 향하는 안전한 길을 완전히 확보했습니다.”
신관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나 주교는 의문을 갖고 재차 물었다.
말하는 그의 표정에 그늘이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도 있는가?”
“예, 그것이….”
달칵- 허공에 반투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유저의 시야를 통해 바라본 지하의 광경이었다.
뱀파이어처럼 생긴 검고 사악한 마물이 마음껏 천공의 유저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현과 아인의 모습이지만, 성왕국의 신관들은 그것이 마물이 아닌 ‘유저’란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저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저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것 때문에 유저들은 어둠의 길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신관의 말뜻은 이러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마련되었지만, 그 입구 너머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른다.
모든 유저들은 저 검은 형체의 마물을 넘지 못했으니.
“허어… 큰일이구나. 어둠인가? 아니면 어둠의 수하인가…?”
“무엇이든 유저의 힘으로 넘기엔 역부족이겠지요. 정체를 알아낸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조사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 어둠의 싹을 잘라야만 한다는 빛의 신탁이 있었다.
저 칠흑의 마물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알 수 없어도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는 운명에 기대는 수밖에….”
“하오면?”
“출전이다.”
주교가 명했다.
“성왕께서 허락하셨으니 기사단을 준비하라.”
주교는 다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검은 형체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은 확실했다.
저토록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 평범한 마물일 리 없으니.
“또한, 저 마물은 지하에 도착하는 즉시 처리해야만 한다.”
“어둠….”
“그래. 너도 보았구나.”
긴장어린 표정의 신관에게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운은 어둠의 것이니라.”
***
유성의 비가 내렸다.
밤하늘에 수천 개의 빛줄기가 늘어지는 광경은 성왕국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장대했다.
“빛께서도 지켜보고 계시는가….”
성왕국의 기사들을 지하로 보내는 것은 유저를 보내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신성이란 지하의 기운과 상반되는 힘.
즉, 신성력을 지닌 자를 지하로 내려 보내기 위해서는 신력의 반발을 넘어설 필요가 있었다.
한 명의 성기사를 지하로 내려 보내는 노력으로 수천의 유저를 내려 보낼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천공의 이들을 지켜주소서.’
기사단은 약 200의 성기사와 50이 신성 마법사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이번의 출정은 성왕국으로써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한 것이었다.
성왕국이 보유한 신성석의 1/3을 소모했으니 말이다.
주교는 초조하게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성기사들에게도 수십 분간 지속되는 시야공유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주교는 그들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검은 태양이 저물며 붉은 석양이 서서히 차오르는 동시, 수백의 기사들은 말을 타고 거침없이 돌격하는 모습을.
“거슬리는군.”
샤크론 네이제르.
성왕국이 보유한 5대 기사이자, 지하로 향하는 기사단을 이끌기로 한 단장의 이름이었다.
그는 한데 얽힌 천공과 심연의 유저들을 보며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것들.”
휘리릭!
그의 손에 들린 사슬 검이 20미터까지 늘어났다.
얼핏 채찍처럼 보이는 기다란 무기엔 날카로운 칼날이 잔뜩 달려 있었다.
강철의 뱀이 춤추고 지나가자 빛의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나갔다.
자신이 죽인 유저가 천공인가? 심연인가? 샤크론에게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둠은…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에게 유저란 약하기만 한 존재들이었으니.
“하찮은 것들에게 공을 넘길 순 없지! 돌격하라!”
샤크론의 명령은 신성의 파장을 타고 모든 기사단의 뇌리에 직접 박혔다.
화아악-!
빛이 터지며 군마(軍馬)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현실의 말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속도.
200레벨도 안 되는 유저들에게 그 돌격은 거스를 수 없는 재해와도 같았다.
몇몇은 돌격에 그대로 휩쓸렸고, 몇몇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샤크론의 기사단이 ‘검은 마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하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검은 것은 없군.’
샤크론의 날카로운 안광이 사방을 훑었다.
어둠의 기운을 가진 형체. 주교로부터 반드시 그 마물을 처치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인가?’
마을의 크기는 작으니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 안 되면, 보이는 것들을 전부 죽여 버리면 된다.
샤크론은 가장 편한 방법을 택했다.
“몰살하라. 우리 기사단을 제외한 것들 전부.”
“예!”
사방에서 죽음을 알리는 비명이 일었다.
심연 유저들은 성벽을 끼고 버텨 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쓸데없는 것을 세워 놨군.”
콰드드득-! 샤크론의 사슬 검이 허공을 휘젓자 굳건해 보이던 성벽은 두부처럼 부수어졌다.
높이 쌓인 석재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뭐, 뭐야!”
“천공 기사단 아니야? 왜 우리까지 공격하는데…!”
천공 유저들이라 해서 무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샤크론의 사슬 검에 산산조각났고, 겨우 도망치던 몇몇은 성기사의 검에 찔리거나 검은 안개 속에 삼켜졌다.
“허탈할 만큼 약하군.”
“유저니까요.”
“정확하다 하이테르,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자들이지.”
기사단이 마을을 점거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분!
마을을 점거하자마자 샤크론은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어둠의 기운을 지닌 마물을 찾아 봐라. 특히, 그 검은 형체를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도록.”
“예!”
성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숨소리 죽여.」
여관의 다락방.
현은 루이즈에 동화한 채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누구더라? 어디서 본 녀석인데…?」
「샤크론이야…!」
현의 외침에 아인은 ‘그게 누구지?’라며 재차 중얼거렸다.
아스라 시절에도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어 NPC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빠르게 숨길 잘했어. 들켰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그러나 현은 저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탐욕스런 성기사 샤크론 네이제르.
스토리 네임드 NPC인 그는 지금쯤 390~400레벨 사이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함께 온 기사들도 최소 300 레벨은 넘을 것이다.
멀리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곧바로 맞서 싸우려는 생각을 버리고 숨은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저 자도 본 적이 있다…!」
숨죽여 밖을 지켜보던 때, 갑자기 루이즈가 말했다.
「일루나에서 본 얼굴이다!」
「샤크론을…?」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이즈도 그의 얼굴을 아는 모양이었다.
샤크론의 기사단은 무언가를 찾기 위한 듯 마을 안팎을 뒤적였다.
일행이 머무르는 여관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땐 모두 다 바짝 긴장했다.
평범한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한 기사들의 감각은 숨소리조차 알아챌 수도 있었으니까.
소리가 멀어진 뒤에 아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빼곤 다 죽었으려나?」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기사들의 수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참 뒤, 샤크론의 성난 외침이 들렸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듯한 분위기.
그 직후.
콰과과과-. 마치 지진이 이는 것처럼 땅울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현은 슬쩍 다락방의 창문으로 고개를 빼고 상황을 살폈다.
아…! 진동의 원인을 깨닫는 찰나. 곧장 파티 대화로 소리쳤다.
「아인, 로그아웃 해!」
충격파가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
콰아아아아-!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에 휘감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대소각.
기사단이 데리고 온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발동시킨 그 마법은 신성력을 갖지 못한 모든 존재를 불태운다.
유효범위는 무려 시전자의 시야에 담기는 모든 광경에 이른다고 한다.
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소각의 빛은 점점 커져나가 마을 바깥을 둘러싼 안개의 경계선까지 이르렀다.
빛의 반구가 마을을 통째로 잡아먹었으니, 여관에 있던 현과 루이즈는 그 힘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383729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초월자가 그대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3초간 체력이 1로 고정됩니다] [‘신체결손 : 융해’가 취소되었습니다!]‘크으으…!’
현은 온몸이 재로 돌아가는 감각에 신음을 흘렸다.
방금은 루이즈에게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기도하는 자의 사제복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리라.
마을 전체가 대소각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초토화가 되었다.
콰르르르!
빛이 그쳤을 땐 모든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뒤였다.
여관 꼭대기의 다락방에 있던 루이즈도 잔해와 함께 추락해 돌무더기에 파묻혔다.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잠시 뒤였다.
“이 정도면 모두 죽었겠지?”
“마기를 지닌 것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란한 방법이긴 하지만… 문제는 없겠지.”
기사단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신관들의 마법으로 그 마물의 수준을 확인했다.
고작 유저보다 조금 강해 보이는 마물이 대소각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둠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샤크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빛께서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는 것은 아직 어둠이 건재하다는 뜻.
뱀파이어를 닮은 검은 마물은 어둠이 아니라 어둠의 힘을 하사받은 부하쯤 되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어둠이 그토록 닿기 쉬운 곳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저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신관들은 쓸데없는 것에도 무척이나 꼼꼼하니까요.”
성기사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누군가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샤크론님, 저기 길이 있습니다.”
현이 기다리던 ‘어둠의 유적지’로 향하는 길.
샤크론은 안개에 잠긴 외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쪽이 유적지로 향하는 길이던가? 어둠이 있다면 저곳이겠군.”
“신관들의 말론 그렇습니다. 곧 안개가 걷힐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안개가 걷히자 어두운 골짜기로 이어지는 외길이 드러났다.
“이동한다. 다들 준비해라.”
“예!”
샤크론의 기사단은 등장할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칠흑의 등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부스럭 부스럭. 한참 뒤 잔해가 들썩인 곳에서 빠져나온 인영은 루이즈.
현이 회복속도를 대폭 향상시키는 엘릭서를 먹여준 덕분에 빈사상태였던 루이즈의 체력은 절반이상 차오른 상태였다.
“여기는….”
폐허의 한 가운데 서서, 루이즈는 마을의 흔적들을 둘러보았다.
인간도, 마물도, 유저들도… 광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가지 흔적이 아니었더라면 어제 본 평화롭던 마을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완파되어 불타는 건물의 잔해들만 흩어져 있었다.
‘…….’
과거, 루이즈는 일루나의 도시가 멸망해가던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은 지금 동화를 통해 루이즈의 기분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공포와 절망이 아닌 다른 종류의 감정… 말을 잇지 않아도 루이즈의 감정만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한 절규를 내지르고 있다고.
AIN : 갔어?
LeeSeoHyun : 응.
팟-!
아인이 지상에서 떨어진 허공에서 번쩍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 다락방에서 황급히 로그아웃을 한 탓이었다.
어렵지 않게 균형을 잡고 착지한 아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다 뭐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의 모습엔 아인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소각이 발동됐어.」
“대소각?! 마법사가 몇 명이나 온 거래…?”
「서른 명… 그 정도였던 것 같아.」
정예 NPC들의 스펙은 동 레벨의 유저에 비해 월등하다.
마법의 위력으로 보건데 기사단 마법사들의 레벨은 300에서 350 사이로 추측되었다.
‘퀘스트는… 실패는 아닌가?’
다시 퀘스트 창을 펼쳐보았다.
-그대는 천공의 위협을 피해 어둠을 데려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요.
-심장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어둠은 새로운 힘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을 지켜내지 못했음에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메인 퀘스트가 여전히 진행된다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연, 중요한 것은 천공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루이즈를 특정 장소에 데려가는 일인 듯했다.
‘결국, 저쪽으로 가라는 거군.’
한 달 주기로 움직이는 안개가 완전히 열리며 어두운 협곡으로 향하는 외길이 드러나 있었다.
그 길이 유적지가 있는 방향. 길의 끝에 루이즈에 관한 모든 해답이 놓여 있을 것이다.
‘가더라도 당장은 아니야.’
타이머를 보면 약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기사단의 뒤꽁무니를 마주칠 지도 모르니 최대한 늦게 출발하는 편이 좋겠지. 루이즈가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기다릴 겸.
그렇게 현이 계획을 짜던 도중, 돌연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것 같다.」
「뭐…?」
「여태까지 언데드는 무서운 것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좀 달라… 그대는 어떤가? 이런 기분이 드는 까닭은 내가 이상한 것이냐…?」
동화를 통해 루이즈의 감정이 전해져 오니 현은 그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루이즈에겐 과거의 기억이 없다. 자신이 악마인 것조차 모른다.
악마는 마물들의 죽음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루이즈는 아무것도 모르니 연유 없이 감정이 들썩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째서 나만 이상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후우… 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은 루이즈가 악마인 걸 몰랐다 쳐도 이젠 확실해졌다. 이젠 그녀에게도 진실을 알려주어야 할 때가 온 거겠지.
결단을 내린 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악마를 어떻게 생각해?」
「악마…?」
「그래, 솔직하게.」
예전에 루이즈는 악마를 사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무서워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악마라고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겠다. 악마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무서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마물도 왠지 두렵지 않게 되었으니, 악마를 봐도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좋든 싫든, 루이즈도 언젠간 알아야 했다.
「큰 의미 두지 말고 들어.」
「응…?」
「너 악마일 거야.」
약간의 의심은 남겨 두었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루이즈가 마물의 죽음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악마…?」
그렇게 악마라는 단어를 곱씹던 루이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현은 그녀가 마음을 가다듬을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
아스리안은 루이즈에게 현실이다. 난데없이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면 누구나 황당한 기분일 테니.
「내가, 악마…?」
「걱정하지 마. 난 앞으로도 네 편이니까.」
갑자기 솟아오른 불안감을 느낀 현이 곧바로 중얼거렸다.
악마는 미움 받는 거 아닐까? 루이즈는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길을 가기로 택한 유저에겐 천사가 적이고, 악마가 아군이다. 루이즈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를 제외하면 루이즈의 반응은 우려했던 것보다 적어 보였다.
「그대는 악마를 미워하지 않는가…?」
「그렇다니까.」
「현, 그대만 떠나지 않는다면… 난 악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현은 그 외에도 여러 사실을 알려 주었다.
메인 퀘스트, 어둠의 유적지로 향하려는 이유도… 루이즈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쉐이드 길드원들의 도움, 대칭세계에 넘어와 고생했던 것이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적지로 향하는 길의 끝에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까지 알려주었을 때, 루이즈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이나 힘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이대로 평범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루이즈는 마물의 죽음을 또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그렇다…!」
「그건 안 돼.」
하지만 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루이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미래가 찾아올 것인가? 전작의 경험으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메인 퀘스트란 숨는다고 늦출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어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빛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진다.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곳을 먹어치울 것이고 결국 루이즈는 어디에도 있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언젠간 해야 할 일이야.」
「그렇, 구나….」
지금 진행하는 것은 메인 퀘스트, 아스리안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퀘스트 결과에 따라 세력도의 균형이 단숨에 기울 테니까.
성왕국이 먼저 움직였으니, 어둠도 그에 대응해야만 한다. 그것이 어둠으로서의 운명이었다.
「힘들겠지만 참아… 널 위해서기도 하니까.」
결국 루이즈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
천공은 모든 악마를 배척한다.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 빠질 테니. 그 전에 움직여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이야기 다 끝났어?”
「그래. 가자.」
‘어떻게 해야 하나.’
현은 앞으로의 수를 모조리 떠올려 보았다.
기사단의 발을 붙잡거나, 수를 줄이거나. 혹은 앞지르는 것.
그 중에서도, 앞질러서 먼저 유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뭘 하든 늦기 전에 출발해야만 했다.
일행은 안개의 틈에 뚫린 외길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
현이 어둠의 길을 향하고 몇 분 뒤.
팟-!
메이데이는 아스리안에 접속하자마자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엑? 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다 죽었나…?!’
대소각이 지나간 칠흑의 등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메이데이가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아인의 충고 덕분이었다.
‘미리 접속을 끊은 게 천만 다행이야!’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로그아웃은 사망과 동일한 패널티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전투상태의 기준은 상대가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아인의 경고가 없었다면 메이데이는 꼼짝없이 성기사단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날 살려준 건가…? 그 아인이…? 진짜?’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인은 남에게 충고를 건넨 성격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물론, 현이 심연의 전력 보존을 위해 경고한 것이었으니 메이데이의 위화감은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메이데이?」
돌연, 길드장 엑스라지로부터 귓속말이 날아온 것은 그 때였다.
메이데이의 온라인 상태를 확인하고 놀라 연락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거예요?」
「네, 여기 검은 마을에 있어요. 아니… 마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지만요.」
「정말 살아있었군요! 하지만 그곳의 유저들은 전부 죽었다던데 어떻게….」
「아아, 그게 말이죠.」
메이데이는 상황을 요약해 설명했다.
아인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보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인의 세력이 바뀐 것도.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엑스라지는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정말인가요? 아인이 경고를…?」
「네, 신기하죠?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잖아요.」
아인은 여태껏 만나온 어느 유저보다 마이웨이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피아스가 영입을 제안했을 때에도, 난데없이 싸움이 벌이지지 않았나.
엑스라지는 곰곰이 생각한 뒤 조심스레 되물었다.
「잠깐만요. 혹시….」
얼마 전 아인에 관해 튀어나온 가능성들 중 한 가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인이 ‘현’은 아니었나요?」
「네…?」
「현이 아인에게 동화했을 가능성은 없는지 묻는 거예요.」
아…! 메이데이는 뒤늦게 그 때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 말을 들어보니 아인의 분위기가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했다.
동화했을 때 상대의 목소리를 빌려서 말을 할 수도 있다면 자신은 쭉 현과 이야기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 어쩌면, 현이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아인의 말투. 발동하고 있던 정체모를 스킬. 어색하게 움직이던 눈동자….
「현이 맞는 것 같아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손익을 고려하는 것에 철두철미한 유저.
자신을 살려두는 편이 이득이라 판단했다면 경고를 건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현을 만났다고?」
「메이데이, 또 무슨 퀘스트 하는 중이야?」
새로운 목소리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길드장인 레이나와 또 한명의 간부진인 베어실드였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높아요. 와, 저, 계속 현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네요!」
「현을 만난 거라면 잘 됐군요.」
엑스라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신에게 충고해 줬다면서요? 이러면 현과는 아인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이가 틀어지진 않겠군요.」
「크크, 피아스 너 말하는 거잖아!」
「적어도 벽을 허물 가능성이 열린 거겠죠.」
현이나 아인을 영입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전 아스라 유저이자 다크니스의 간부진인 케이지는 그렇게 장담했다.
하지만 영입이 아니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고 했다.
예를 들어 거래 상대라면? 케이지는 전작의 경험으로부터 현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현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좋은 아이템을 바치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레어 이하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고… 그래, 100레벨 이상의 유니크가 적당하겠군.」
「뭐야 케이지, 그건 너무한 소리 아니야? 그래도 우린 다크니스인데!」
레이나의 불평을 엑스라지가 달랬다.
「뭐, 우리도 잘못이 없진 않으니까… 아인에게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선물은 괜찮겠지요.」
「아니, 아인에겐 전혀 효과가 없다. 선물은 현에게. 부담될 만큼 거창한 것일수록 효과가 좋아.」
케이지가 계속 여러 가지를 중얼거렸지만, 세부사항은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기로 했다.
「어쨌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단 뜻이군. 아직도 유저 한 명이 그만한 영향력을 지닌단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만….」
「좋아요 다시 만나면 꼭 말해 볼게요. 나중에 연락 할게요!」
그렇게 다크니스 간부진들간의 짧은 논의가 끝났다.
‘우선 만나야하는 게 먼저지만….’
폐허가 된 마을 한가운데서 메이데이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이곳에 온 까닭은 공작으로부터 퀘스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퀘스트가 이토록 큰일일 줄이야… 심지어 퀘스트는 아직도 종료되지 않았다.
이 장소를 벗어나거나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는 걸지도.
어째서 마을이 이렇게 박살났는지. 기사단이 들이닥치기 전에 로그아웃을 했던 그녀는 그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말 무슨 핵이라도 터진 걸까?’
마을에 아인이 남아 있을지. 자신처럼 로그아웃한 생존자가 더 있을지.
‘정말 아무도 없구나.’
쥐죽은 듯 고요한 잿더미 위를 걸어 다니며 곧 그런 기대를 접었다.
스산한 안개 때문에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이었던 곳이 넓지 않은 덕분에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엥? 길이 하나 있네?’
곧 어두운 협곡 안쪽으로 이어지는 외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사단이 지나고, 현의 일행도 지나간 길은 아직도 열린 채였다.
어둠의 유적지로 향하는 길. 그곳을 제외하면 안개 때문에 이동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좁고 무서워 보이는 길이잖아. 공포게임도 아닌데. 결국 저기밖에 없는 건가?’
결국 어두운 틈새로 들어가야 하나 생각하던 순간.
메이데이는 돌 부스러기가 들썩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허물어진 잔해들 사이로 일어서는 인영이 보였다.
‘노인…? 유저인가? 아니, 유저가 아니야!’
그것이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손톱. 긴 송곳니까지. 잔해에서 일어선 것은 칠흑의 등대의 제사장인 뱀파이어였다.
“크… 크으으으… 겨우 나왔다…!”
기사단이 들이닥치자마자 땅속으로 이어지는 은신처에 몸을 숨기지 않았다면, 제사장 역시 다른 마물이나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져 버렸을 것이다.
“으잉…?”
잔해를 헤집고 땅속에서 빠져나온 제사장은 멀뚱거리는 메이데이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뭐, 인간이라고?!”
“웃…!”
갑작스런 외침에 움찔거리는 메이데이.
“유저? 심연 쪽인가?”
“네, 맞아요!”
하지만 바로 상황을 짚어내고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란 심연의 마물. 자신은 지금 심연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군.”
크으으, 뱀파이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메이데이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대신, 허망한 듯 무너진 마을을 지켜보았다.
“천공 놈들의 짓이로구나… 하지만 이 몸이 살아있는 한 어둠을 위한 제사는 그치지 않는다, 이놈들아!”
“저기요… 할아버지?”
“으응?”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메이데이는 안개 사이로 이어지는 외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길은 뭐죠?”
“뭐라고?”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요.”
제사장의 두 눈은 메이데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더니… 곧 경악에 물들었다.
“아뿔싸, 오늘이 안개가 열리는 날이었구나!”
“안개요?”
“천공 놈들이 바로 이걸 노렸구나! 큰일이야, 어둠의 성소에 발을 들여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성소라고요?”
늙은 뱀파이어의 입에서 자꾸만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메이데이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이라도 움직여야겠군! 이 몸을 불살라서라도 어둠의 성소를 지켜내고 말 것 이니라!”
제사장은 비틀거리며 안개의 틈 사이로 열린 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앗, 잠시만요…!”
“귀찮게 굴지 마라 인간! 이 몸은 서둘러 천공 놈들을 막아야만 하니까!”
“제 퀘스트도 그거에요! 공작님께 부탁받았다고요!”
메이데이의 외침에 제사장은 눈을 찌푸리더니.
“퀘스트?”
“맞아요, 함께 천공을 막아내라는 퀘스트라고요.”
“…그래. 심연에 속하는 자라면 누구나 목숨을 바칠 자격이 있지. 다만. 방해가 된다면 안개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
엄포를 놓으며 제사장은 곧 어둠의 길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메이데이도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괜찮을까? 죽진 않을까? 으스스한 어두운 길을 따라가며 오만 생각을 떠올리던 메이데이는 고개를 저으며 불안을 털어냈다.
정 위험해지면 귀환 스크롤을 쓰자고 다짐하면서.
***
현이 인터루프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찾아낸 것은 행운이었다.
여러 키워드를 조합해 운 좋게 발견한 정보였다.
등대라는 단어는 아마도 마을, ‘칠흑의 등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협곡, 그리고 심장이란 단어는 뭘 뜻하는 걸까?’
초입에 존재하는 마을의 이름이 ‘칠흑의 등대’ 였으니, 뒤쪽의 것들은 칠흑의 협곡, 칠흑의 심장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데. 그것들의 의미는 또 무엇일지.
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외길을 따라 나아갔고.
“저기 봐!”
“아….”
이윽고 아인의 외침에 문구의 의미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어둠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으로, 산맥과 이어져 있었다.
검은 안개가 꿈틀거리는 산.
끝없는 산맥을 따라 이어진 성벽과 감시탑은 가히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한 경관이었다.
그리고 산맥의 아래로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거대한 협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협곡이란 게 이걸 말하는 건가…? 저긴 안개가 더 심하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절벽의 틈에 잔도가 나 있는 것을 보면 협곡을 내려가는 길 또한 존재하는 듯했다.
“벌써 부서진 것 같구나….”
“기사단이 지나간 흔적이겠지.”
곳곳의 감시탑들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여기도….”
“보이는 건 다 부수면서 지나간 모양이네….”
깊게 패인 구덩이, 허물어진 탑들.
시체는 남지 않았어도 마물들이 저항한 흔적만은 뚜렷했다.
고위 마물이 포함되어 있다 해도 감시탑을 지키는 소수로는 기사단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즈는 파괴된 요새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구불구불한 외길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시야각이 좁은 탓에 일행은 보이지 않는 앞길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현은 꾸준히 인터루프의 정보를 뒤적여 보았다.
등대, 협곡, 요새, 심장 등등의 키워드를 이용해서… 머지않아 유용해 보이는 그림 몇 장을 찾아냈다.
‘잠깐 이건… 지도잖아?!’
순간 쾌재를 불렀지만, 지도가 그리 유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지도에는 지형만 담겨있을 뿐 가장 위험한 안개의 위치는 표시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계속해서 움직이는 안개를 지도에 담을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외길이니까. 당분간 지도는 필요 없겠지.’
길을 따라 어수선한 발자국이 이어진 것을 보면 기사단도 이 길을 지나갔음이 분명했다.
최대한 마주치지 말고… 숨어서 녀석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겠지. 계획을 짜는 것은 그 다음이다.
“현….”
길을 따라가던 어느 순간 루이즈가 목소리를 냈다.
“이상하구나… 뭔가….”
“왜, 아직도 마음이 진정 안 됐어?”
방금 파괴의 흔적들을 지나쳐온 뒤였다.
루이즈는 여전히 마물들의 죽음을 신경 쓰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그대 방금 동화를 사용하지 않았지…?”
“응?”
“방금… 이상한 기억이 섞인 것 같아서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일까?
‘동화!’
흩어진 빛의 알갱이들이 루이즈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루이즈의 감각을 공유한 현은 그녀의 말뜻도 이해하게 되었다.
「왠지 이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루이즈가 느낀 것은 데자뷰였다.
검은 안개로 뒤덮인 산맥. 깎아내린 절벽들. 그 사이에 감춰진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까지….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이런 장소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면 그 기억은 필연 어둠의 것이리라.
「뭐 떠오르는 거 있어?」
「모르겠다… 그저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생각나는 게 있다면 말해. 중요할 지도 모르니까.」
「알겠다….」
산의 중턱.
어둠으로 향하는 길엔 칠흑의 등대보다 커다란 마을이 곳곳마다 존재했다.
수십 개의 감시탑을 지나온 일행은 곧 멸망해 버린 도시를 목격할 수 있었다.
변색되어버린 땅 위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건물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앞선 마을과의 차이점은 파괴의 규모가 훨씬 거대하다는 점.
익숙한 흔적에 루이즈가 무언가를 깨닫고 크게 숨을 삼켰다.
“이것은….”
“여기서도 대소각이 사용된 모양이네.”
검은 안개에 감싸인 도시는 말 그대로 천연의 요새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굳건한 요새도 기사단의 화력을 버텨내진 못했다.
‘리치라도 안 되는 건가….’
현은 곳곳에 그려진 익숙한 마법진을 보고 이곳이 고위 마물인 리치들이 머물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리치들은 인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지만, 성기사들을 상대로는 상성이 나쁜 마물이었다.
‘수인들이랑 골렘도 몇 개 있었나 보군.’
그 외에도 여러 종이 도시에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진, 적막만 가득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루이즈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어둠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상 그녀는 마물들의 죽음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동화할게.”
끄덕.
루이즈는 말없이 수긍했고.
‘역시….’
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루이즈의 마음은 여러 감정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따금 가슴을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따가움. 거기에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박동까지 더해지니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다 죽었나?’
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만 없다 뿐이지, 이곳은 수백 마물들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루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못했다.
어둠은 이미 죽은 마물들에게 애도를 보내는 것인가.
‘아니, 아직 안 죽었어! 뭔가 가까워지고 있다!’
갑자기 현은 아인을 데리고 잔해 사이에 몸을 숨겼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음.
무언가가 서로 부딪치고, 마나가 마찰하는 소리가 점점 커져오고 있었다.
쿠르르르-!
소음은 곧 굉음이 되었다.
일행이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거대한 몸체가 바닥을 긁으며 널브러졌다.
짐승의 털, 날카로운 발톱, 뾰족한 주둥이.
볼품없이 쓰러진 것은 아인종, 늑대인간임을 곧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마물이야! 아직 성기사랑 싸우고 있다!」
「우리도 나설까?!」
「아니, 기다려, 조용히…!」
현은 아인의 손을 붙들며 한편으론 루이즈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싸움, 아니 학살을 지켜만 보았다.
늑대인간은 빠르고 강력했다.
힘, 속도, 무엇으로 봐도 카이단 성 5층에서 보았던 그 늑대인간보다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기사단의 부단장 급도 아닌 일개 성기사가 그런 늑대인간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커르르르르! 늑대인간이 울부짖었지만, 성기사의 얼굴엔 미동도 없었다. 마치 패잔병의 처리를 맡은 병사처럼.
“이걸로 죽겠지.”
화악!
성기사의 검이 얇은 빛을 그렸다.
미약해 보이는 가느다란 빛. 하지만 그것에는 늑대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만한 힘이 담겨 있었다.
콰직! 단단한 발톱은 빛에 산산조각났고, 그 뒤에 늑대인간의 몸체마저 갈라졌다.
거대한 몸체가 빛으로 흩어지는 순간, 루이즈의 가슴에도 날카로운 것이 박혔다.
‘큿…!’
어둠.
악마는 자신을 섬기는 존재의 죽음에 영향을 받는다.
아…! 루이즈의 입술이 벌어지기 직전, 현이 소리를 새어나가지 않도록 붙잡았다.
「현, 정말 안 싸워? 진짜?!」
「절대 안 돼!」
흥분한 아인도 다시 진정시켰다.
「주위에 적이 한 명이 아니야.」
한 발 물러서 둘러본 현은 자신들이 지금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들리는 파괴의 소음, 비명소리.
약 수십의 성기사들이 도시 안에 살아남은 마물을 쥐 잡듯이 소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마리 한 마리. 마물이 죽어갈 때마다 루이즈의 마음이 들썩였기 때문에, 현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적게 잡아도 열 명… 싸움이 성립이 안 돼.’
비명의 메아리 한가운데서 일행은 숨을 죽이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동요하는 루이즈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 뿐.
한참 뒤. 마물의 비명이 모두 끊기고, 성기사들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일행은 무너진 잔해의 틈에서 빠져나왔다.
‘이건 안 좋은데.’
루이즈의 상태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그동안 그녀는 어떤 상황에도 쉽게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동화할 때엔 감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있던 루이즈였다.
“현.”
무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루이즈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목소리였다.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가…?”
「뭐?」
“가슴이 뜨겁다… 나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영혼으로 말하지 않고 직접 소리를 낸 탓에 아인도 루이즈가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처음으로… 강해지고 싶단 생각이 들고 있구나.”
루이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좀 더 컸다.
“악마는 강한 존재라고 들었다. 아닌가?”
「맞아….」
“그럼 난 정말로 악마인가?”
“네가 악마라고?!”
갑자기 아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지만 현은 “자세한 건 나중에….” 라며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상황을 넘겼다.
“허면, 그대의 말처럼 내가 악마라면… 난 어째서 이리도 약한 것이냐?”
초월자는 강력한 자아와 공감을 갖추어야만 한다.
기억을 잃은 루이즈의 미약한 자아는 초월자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초월자의 힘을 행사할 수도 없다.
공감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를 섬기는 자들의 힘을 빌리지도 못한다.
현은 그러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주절거리지 않았다. 지금 루이즈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었다.
‘운명인가.’
루이즈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어둠을 섬기는 마물들은 죽기 직전 어둠의 이름을 울부짖는다.
절망, 고통, 복수심.
부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공감은 그대로 어둠의 몫이 된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화살을 견딜 수 없다면 자아가 약한 악마는 그저 평생을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루이즈가 강해지고 싶다 생각한 것은 그 반작용.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하려는 본능일 것이다.
“나도… 적어도 그대만큼만 힘이 있다면…!”
어린 소녀에게 어둠이란 이름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루이즈가 말을 잇기 전에, 현이 입을 열었다.
「나보다 네가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럴 리 없지 않느냐… 여태껏 사냥해오면서 나도 깨달은 바가 있다. 이 몸은 레벨도 오르지 않는데!”
「올라.」
한번 악마는 영원한 악마.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마물의 감정을 깨달게 된 이상 루이즈에게 선택은 두 가지 뿐이었다.
공감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다스릴 힘을 갖출 것인가?
타인의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루이즈는 결국 어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