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75)
데모니아 협곡에 숨겨진 것
“사, 산개해!”
“우와앗!”
화르르르르!
아인이 손에서 10미터에 달하는 화염의 부채꼴이 퍼져나간 것은 부대장의 외침과 거의 동시였다.
안타깝게도 경고 시점이 너무 늦었다.
방사된 화염에 휩쓸린 길드원 절반은 그 자리에서 빛으로 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무슨 마법이야?!”
“화염 저항 높은 사람들이 전방을 맡아줘요!”
“됐어, 냉기보호막도 걸었다!”
콰득, 콰득, 콰득!
전방으로 쇄도하는 유저들의 몸에 서리가 돋았다.
10만의 피해를 받아낼 때까지 화염 피해를 70% 감소시켜주는 서리방패!
“이 정도면 불꽃은 버틸 만하다!”
그렇게 냉기를 두른 공격대가 적의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돌격하던 유저들은 상대의 손에서 불꽃이 사그라드는 광경을 보았다.
“어…?”
불꽃이 있던 자리엔 바람이 대신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에 휩싸인 두 손이 허공을 그었다.
콰아아아! 무자비하게 여럿의 몸뚱이를 쥐어뜯는 검은 태풍!
이윽고 바람이 멈추었을 때, 돌진했던 유저들은 빛의 알갱이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스킬이야…!”
후방 지원을 맡은 부대장은 지시를 내릴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말도 안 돼….”
“전멸이라고?”
힘이 빠진 그 중얼거림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랭커라도… 이건 평범한 200레벨 유저가 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이건 마치, 예전의 아인을 마주쳤을 때의 느낌이 아닌가.
황당할 만한 강력함에 모두의 전의가 사라져 가는 찰나.
파앙! 잠력 폭발 하나가 더 중첩되었다.
핏빛의 기운이 섞여든 바람.
그 안에서 씩 미소 짓는 여자를 본 순간, 길드원들 중 몇몇은 불현듯 과거의 악몽을 떠올렸다.
‘저 웃음.’
‘잠깐, 설마… 진짜로…?’
외모는 완전히 다르지만, 저 분위기는 백작 퀘스트 당시와 너무나 똑같다.
살짝 이가 드러난 웃음. 양 손가락을 쥐었다 펴는 동작까지.
역사 퀘스트의 아인보다, 지금 이 여자에게서 더욱 아인의 느낌이 피어나는 이유는 왜일까?
아인이 주도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의 평소의 버릇이나 습관이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아인이다!’
일순간, 다크니스의 길드원과 간부진은 똑같이 그러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현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지금, 고삐가 풀린 아인은 말 그대로 살육을 즐기는 광전사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잠력 폭발!’
콰앙! 아인의 몸이 더욱 짙은 혈풍(血風)에 휩싸였다.
‘민첩의 잠력 폭발’이 최대치인 3중첩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이건 좀, 너무 빠르지 않아?」
아인은 안 그래도 루이즈의 이동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
자신도 바람의 반작용에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의 연습이 필요했다.
현은 이렇게 민첩이 증폭된 상태로 아인이 정교한 컨트롤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현의 핀잔에 아인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 실수는 현이 커버해 줄 거잖아!」
「일단은 그렇긴 하겠지만….」
「후후, 그럼 됐지!」
파앙! 이어서 바람을 터뜨려 높이 솟아오른 아인은 하늘을 나는 매처럼, 지상의 사냥감들을 빠르게 훑었다.
순간 어떤 유저에게 시선이 고정되었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쟤가 대장인 것 같네.」
「베어실드잖아! 예전에도 너랑 싸웠던 녀석이야!」
「본 적 없는 얼굴인 걸?」
아인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어쨌든, 저 녀석을 먼저 죽이면 되는 거네.」
팟!
순간, 허공에 뜬 아인의 신형이 사라졌다.
투명화로 모습을 감춘 아인은 하늘 위의 바람장벽을 밟고 베어실드에게 돌진했다.
창공에서 지면까지!
이동기를 사용한 것과 같은 속도로, 아인은 한순간에 적장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거대한 이프리트의 발톱이 사냥감을 찍어 내리려는 순간!
카아아앙!
“아…?”
오히려 돌진했던 아인이 튕겨나가고 말았다.
아인의 존재를 확인한 후부터 긴장을 하고 있던 베어실드가 아인이 투명화를 시전하자마자 냅다 궁극기로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후웅. 후우웅.
방패 하나가 베어실드의 곁을 선회하고 있었다.
자신을 기준으로 5미터 반경의 모든 공격을 자동으로 막아주는 궁극기, ‘완전무결의 방패’.
궁극기가 지속되는 5분 동안 그 방패는 베어실드 곁의 동료들까지 방어해 줄 것이다.
‘흐읍…!’
파아앙!
튕겨나간 아인의 몸은 거꾸로 뒤집혔지만, 이내 하늘을 박차고 지상으로 착지했다.
[낙하! 10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콰앙!
지면을 찍는 강한 반동에 지면엔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미줄 같은 흔적이 생겼다.
「이야, 이걸 반응하네? 괜히 랭커가 아닌가?」
「실수였어. 투명화를 쓰기 전에 쳐다보면 안 됐는데.」
「뭐, 이번엔 쟤가 잘 한 거겠지.」
아인이 자세를 잡는 그 짧은 시간. 다크니스의 길드원들도 대열을 갖추었다.
촤라락! 허공에 마력의 지뢰들이 깔리며 하늘의 이동 반경이 제한되었다.
콰직! 콰직! 땅에 솟아오르는 강철과 얼음의 장벽은 나머지 지상의 경로를 차단했다.
안개 마법으로 일부의 시야마저 가려진 가운데.
모든 길드원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전방에 탱커들이, 그 뒤에는 암살자 계열의 근접 딜러들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지형 뒤쪽엔 마법사와 사제 계열의 원거리 직업군들이 각자의 스킬을 준비했다.
단 2~3초의 공백.
그 짧은 시간 수십 명의 유저가 이만한 대응을 펼치는 길드는 다크니스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조직적인 움직임만 따져보면 회귀자 길드보다도 뛰어나리라 생각되었다.
현은 이 길드가 1위를 유지하는 비결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위험해? 내가 도와줄까?」
「괜찮아.」
웬만한 유저는 오금이 저릴만한 압박 대형에도 현과 아인은 여유로웠다.
「나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거든…!」
아인은 빠르게 루이즈의 스킬을 어떻게 활용할지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실수가 나올 때마다 현이 강제로 움직임을 교정시켜 준 덕이었다.
「너무 지휘관을 노리려고만 마. 약한 녀석들부터 차례차례 죽여도 충분해.」
「응.」
「너를 1대1 마크할 사람이 없으니까.」
「알겠어.」
「좋아, 그럼 다시 가자고.」
띠링!
메시지 알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현, 지금 혹시 데모니아 협곡에 있나요?!」
메이데이의 급박한 목소리.
현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한 번 더 외쳤다.
「다크니스는 싸울 의도가 없어요, 만약 그 여자가 당신이라면요!」
협곡 안에 있는 다크니스의 간부진은 총 세 명이었다.
길드장, 부길드장, 그리고 랭킹 8위의 베어실드.
그런데도 메이데이가 현에게 귓속말을 보낼 수 있던 것은 길드장 엑스라지의 긴급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인, 잠깐만…. 좀만 기다려 봐….」
「어? 나 지금 말하기 힘들어!」
이프리트의 발톱에, 마기가 섞인 바람에, 다크니스 길드원들이 빛으로 흩어져 나가는 중에도 귓속말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지금의 아인에게는 아무 말도 전해지지 않으려나?
현은 우선 메이데이의 목소리에 답하기로 했다.
「일단 거기서 싸우는 중이긴 한데….」
「역시 당신이었군요!」
메이데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공격을 멈춰 주세요! 길드장님이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뭘 원하든, 원하는 조건대로 전부 협상이 가능하다고요!」
「전부요…?」
「네, 무슨 요구든 웬만하면 거절하진 않으실 거예요!」
다크니스는 데모니아 협곡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 현은 그렇게 이해했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선 다크니스와 적대관계를 형성하더라도 반드시 신석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현은 얼마 전, 메이데이가 준 회귀자 길드에 관한 정보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뒤로 서로 정보를 거래하기로 약속하며 친구 등록까지 마쳤다.
그래, 여기선 나도 물러서 줘야겠지.
「좋아요. 협상이라는 게 뭔지 들어나 보죠.」
「네, 저희도 공격을 멈추라고 말해둘게요!」
메이데이와 이야기가 오가고, 이제 막 아인을 멈추려는 순간.
‘응?’
문득, 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지…?’
어째서 지금 자신의 손에 어둠의 검이 들려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 순간,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느낌이 꼭 ‘생체리듬 가속’을 사용할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시체가 빛이 되어 떨어지는 한가운데서, 현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야, 아인 너 방금 뭘…!」
「봤어? 나, 현이 쓰던 그 기술 성공했다고!」
「그 기술….」
「응, 갑자기 도망가길래 한꺼번에 다 잡았지! 아마 20명은 죽였을 걸?!」
전투의 성과를 자랑하며 의기양양해 하는 아인.
그 모습에 현은 잠시 후 다크니스의 길드장을 만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
약속대로, 베어실드를 포함한 모든 다크니스의 전투 병력은 협곡의 절벽 밖까지 물러났다.
드넓은 협곡에 남은 길드원은 이제 단 둘. 길드장 엑스라지와 부길드장 레이나 뿐이었다.
레이나는 이건 굴욕이라며 지더라도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엑스라지를 비롯한 간부진들의 판단은 달랐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감정적으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테니까.
“이제 나와도 돼요.”
다크니스의 병력이 물러서는 동안 현은 하늘 위에 떠있던 마차의 고정을 해제했다.
글라이더의 마법으로 마차가 지상으로 내려가는 사이, ‘강신’이 해제된 아인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인을 바라보는 마차 안 다섯 유저들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특히, 아인의 팬이라 자청한 신학자는 안절부절 아인을 힐긋거렸다.
“저기요… 진짜 아인 맞죠?”
이쯤 되면 거짓말도 소용없겠지.
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한 가지를 부탁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커뮤니티 같은 곳에 알리지 말아 주세요.”
“네, 물론이죠…! 그런데 혹시 친구등록 해주실 수 있어요?”
그것은 현의 선택사항이 아니었기에 아인에게 대답을 넘겼다.
한창 전투가 이루어지던 도중 멈춘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아, 아인은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PK에서 이기면. 할래?”
어째선지 갑자기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뀐 아인의 말투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스리안 알바세상’은 한국 사이트였으니 이 사람들은 전부 한국인일 텐데도.
“아뇨, 그럼 됐어요…!”
자신들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 유저들 백여 명을 통째로 박살낸 직후였다.
그 길드가 다크니스였다는 사실까지 알았더라면 더욱 경악했을지도 모르지만, 엑스라지와 레이나의 얼굴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모든 아이템이 ‘파티장 획득’으로 설정되었습니다!]이어서 현은 5명을 아인의 파티에 가입시켰다.
협상 후에도 신석들의 소유권은 크게 변하지 않을 테니, 미리 작업을 시작할 심산이었다.
“신학자님은 협곡 안에서 신력 탐지를 사용해 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이걸로 그 장소를 파내면 됩니다.”
반드시 주의해야하는 사항을 덧붙였다.
거리가 일정 이상 멀어지면 ‘파티장 획득’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절대로 1미터 이상 파면 안 됩니다!”
“1미터라고요?”
“네. 적당히만 파두고, 나머지 작업은 제가 근처에 있을 때 한꺼번에 할 거에요.”
신석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최소 만 골드, 큰 것은 십만 골드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만큼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이래도 혹시 몰라. 틈틈이 감시해야겠군.’
그 사이 다크니스 길드의 내부 회의가 끝났고, 현은 두 명의 남녀를 마주하게 되었다.
엑스라지, 레이나.
일반 유저들은 잘 모르지만 현은 양쪽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전에 보기도 했고, 주요 길드마다의 핵심 인물들은 되도록 기억해 두고 있었다.
‘아인…!’
그리고 엑스라지와 레이나 역시 당연히 아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특히 레이나는 아인에게 당해왔던 것에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엑스라지는 레이나가 말실수 를 하지 않도록 진정시켜야 했다.
‘외모가 다시 변했어. 아까 건 일종의 변신 스킬이었던 건가?’
엑스라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인을 맞이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냉철한 계산을 굴렸다.
‘분명 현이 동화하고 있겠지. 메이데이는 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고 했으니까!’
지금도 6명이 모두 접속한 간부 채팅엔 쉴 새 없이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레이나가 개인방송으로 시야를 공유해 준 덕분에 협곡 안의 상황을 함께 보는 중이었다.
「현은 그 정보를 알고 있었군….」
방송을 지켜보던 베어실드가 어느 순간 침음성을 흘렸다.
저 멀리, 현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유저들이 곡괭이질을 하는 광경을 본 순간이었다.
「저길 봐. 벌써부터 주변의 토질을 확인하고 있어.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질 테니 미리부터 부지의 상태를 점검하는 거잖아.」
다크니스의 정보 분석가들은 현이 관련 정보를 모르는 경우 1퍼센트 미만의 확률로 동선이 겹칠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그 1퍼센트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 확률은 처음부터 1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였다는 것.
「음… 혹시 신석을 캐내려는 건 아닐까요?」
피아스가 그러한 의문을 던졌지만. 베어실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정했다.
「아니지. 그럴 거면 뭣 하러 저렇게 여러 군데를 조금씩만 파헤치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요, 피아스. 협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협상 테이블에 놓인 재료에 손대는 유저가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렇겠죠?」
베어실드에 메이데이까지 확답하자 피아스도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 판단은 엑스라지와 레이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모든 정보를 알고 온 게 확실해.」
「맞아요. 괜한 줄타기는 피하는 편이 좋겠죠.」
엑스라지는 방금 전 현의 말을 떠올려 봤다.
“우선권을 얻는 걸 깜빡해서 다 죽여 버렸네요. 우선권만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만나자마자 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숨겨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우선권이란 계약에 적힌 보호 권리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놓친 탓에 분풀이 섞인 협박을 하는 것이고.
「정황상 모르고 있을 수가 없거든요.」
엑스라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로 했다.
일개 개인이 알 수는 없는 정보라고 확신했지만, 현은 혼자서 다크니스와 동일한 정보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이 이상 떠보는 행동은 오히려 반감만 살 가능성이 높겠죠.」
「그럼 다 내주자는 말이야?」
「아뇨, 최대한 협상을 하려고요.」
다크니스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기회비용을 투자했다.
패치 직후의 황금 같은 하루.
수십 명 길드원의 목숨까지도!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선다면 길드원들의 입장에선 다크니스라는 길드와 간부진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갈 수도 있었다.
「다크니스도 최소한의 체면은 차려야 하니까요.」
어떤 식으로 협상을 이끌어야 할까?
데모니아 협곡을 차지하는 이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내부이득과 외부이득… 내부이득이란 쉽게 말해, 신석이다.
5년에 걸쳐 축척된 양, 거기에 수개월에 한 두 개씩 생겨나는 신석을 팔면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의 이득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을 것이다.
외부이득. 즉, 연구단지의 부지면적을 몇 개월 동안 보호하는 계약금은 무려 수백만 달러!
‘후자는… 대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엑스라지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현과 아인은 계약을 파기시킬 수 있는 유저들이자, 유일한 ‘세력’이었다.
괜한 배짱을 부리다간 다크니스는 오히려 계약의 위약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쉬운 대로 차선책을 제시하는 수밖에.’
엑스라지는 미리 생각해 둔 방법을 떠올렸다.
현도 만족하고, 다크니스의 체면을 살리는 동시, 위약금도 물지 않을 방법을.
설령 현의 인성이 케이지가 말한 대로의 개차반이더라도, 이만한 조건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충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엑스라지는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데모니아 협곡의 관리권을 원하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관리권…?”
“그렇습니다. 초기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도 원하신다면 도와드리죠.”
‘관리권이 뭐지…?’
현은 엑스라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협곡에서 2~3달에 한 개씩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신석. 그것들을 채굴할 권리를 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주기적으로 데모니아 협곡에 방문할 생각은 없는데…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갑자기 엑스라지가 인벤토리에서 서류 여러 장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여기 요약해 뒀지요.”
“음? 서류…?”
“네. 계약서 사본의 일부까지 포함되어 있지요. 다 읽고서 한번 원하는 것을 말씀해 보시죠.”
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
신석의 분배 비율을 정하는 데 뭔 글씨가 이렇게 많이 필요하지?
‘……?’
그런 생각은 서류들을 읽어나가며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여러 번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을 느낀 뒤. 이것이 단 몇 분 만에 대답을 줄 만한 내용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만이었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몇 시간 뒤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시간을 벌고서.
아인에게 인부 관리를 맡겨둔 현은 곧바로 휴식 상태로 전환했다.
포털 사이트에 데모니아 협곡, 연구소, 연구단지등, 방금 단어들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지만 원하던 정보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몇몇 뉴스로부터 현실의 여러 기업 및 단체들이 아스리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보통 큰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잠깐, 어쩌면?!’
순간, 서현은 지니가 어떤 연구소에 취직한다는 재훈이의 말을 떠올렸다.
곧바로 재훈을 통해 지니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자, 지니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왜요?”
“데모니아 협곡에 관한 거. 그거 기밀이거든요! 아, 이것도 원래 말 못 하는 건데요!”
어째선지 지니는 기밀이라고 말해 놓고선 현의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었다.
요약하자면, 데모니아 협곡은 안개로 인해 NPC 및 몬스터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유일한 장소.
그런 이유로 수많은 연구단체들이 눈독 들이는 차세대 연구단지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크니스 길드는 ‘유저’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용병으로 고용된 모양이었다.
‘근데 걔네는 왜 자기네들이 얻은 정보를 다 공개한 거지?’
순간, 서현은 다크니스 간부진들의 태도가 의문스러웠다.
‘내가 깽판을 칠까봐 걱정스러웠던 건가?’
몇 가지 의문은 남았지만, 정황은 확실해졌다.
그들이 보이던 불편한 기색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어렵게 따낸 계약이 뒤엎어질까봐 그런 거겠지.
‘현실의 사람들이 개입하는 걸 보면, 아스리안이 정말 시뮬레이터이긴 한가 봐.’
서현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회사와의 계약.
지금의 나라면 다크니스가 차려둔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는 것 뿐 아니라, 밥상을 통째로 빼앗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유트브까진 괜찮았다. 공략 영상을 만드는 것도, 남들의 댓글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서현은 지금 자신이 어떤 경계선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일과 취미의 경계.
그 선을 넘어가는 순간, 아스리안이란 게임을 이전처럼 즐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현은 자신이 현실의 문제들에 직면하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돈은 많이 벌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 여러 일로 훨씬 바빠지겠지.
아스리안의 왕좌에 오른다는 궁극적인 목표에선 한 발자국 멀어질 것이 분명했다.
‘굳이 저런 걸 뺐을 필요가 없어.’
몬스터 및 NPC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땅.
몇 년 만 지나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그런 장소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데모니아 협곡보다 훨씬 넓고, 안전하며, 평화로운 자신만의 성을…. 혹은 영지를. 나라를!
설계해 둔 미래에 비하면 데모니아 협곡은 조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했다.
‘성주(城主)만 되도 얼마나 바쁜데… 현실의 계약까지 생각할 시간은 없겠지.’
서현은 다크니스가 제안한 조건을 거절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인생을 바꿀 만 한 돈을 포기한다는 것. 범인의 기준으로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욕심이 없는 거라고?
아니, 서현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탐욕이 많았다.
바로 아스리안의 왕좌를 차지하는 것.
남들이 엄두조차 못 내는 것에 욕심을 내고 있으니까.
서현의 목표는 아스리안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현, 언제 와?!”
“지금.”
아인의 목소리에 답한 서현은 서둘러 캡슐에 몸을 눕혔다.
다크니스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은 한 시간이 넘도록 근처의 바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현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생각해 봤는데, 여기 있는 건 제가 전부 가져가야겠네요.”
“전부 말입니까…? 진심으로?”
순간, 엑스라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말은 협상을 거부한다는 것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 다크니스가 가장 우려하던 결과이기도 했다.
우우웅. 레이나의 지팡이에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만약 현이 모든 것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한다면 그녀는 죽더라도 싸울 생각이었다.
“케이지의 말이 사실이었군. 너랑 말을 섞을 일은 이제 없겠어.”
“그래요? 전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씨익. 현, 아니, 아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계약인가 뭔가 하는 건 필요 없어요. 그런 거에 연관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귀찮아지고…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거든요.”
“무슨 뜻이죠…?”
엑스라지가 이해를 위해 멈칫한 사이, 현은 드디어 조건을 말했다.
“제가 요구하는 건, 지금 협곡 안에 존재하는 모든 신석입니다.”
“잠깐, 그게 끝인 가요…?”
“아, 하나 더 있네요. 제 인부들 지금 일하는 거 보이시죠?”
현은 고용한 일꾼들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곡괭이질을 하는 4명과 그들을 감시하는 듯한 신학자 한 명.
“저 대신 사람들 감독 좀 해줘요. 여기 신석 다 캐려면 3일 정도 걸릴 텐데 마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아깝거든요.”
“그러면… 계약은.”
“아니, 계약은 안 한다니까요? 땅 투기든, 건물주 노릇이든, 뭘 하든 신경 안 쓸 테니까 그쪽이 알아서 해요.”
레이나의 지팡이에 빛이 꺼졌다.
간부진들이 현의 말을 이해하기까진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방송으로 레이나의 화면을 지켜보던 길드 채팅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뭐야! 진짜 신석 그거 하나 때문에 여기 온 거라고?」
「이봐 케이지, 현은 말도 안 통하는 쓰레기라며! 저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맞아. 다들 순진하군. 이것도 먼 훗날을 바라본 현의 계략이다. 나중에 뒤통수를 맞은 뒤에야 정신 차리지 말고 미리부터 경계해 두는 게 좋아.」
케이지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에 과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모든 것을 지켜본 메이데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음… 오늘 이후로 케이지의 발언권을 줄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후, 난 모르겠다.」
「어…?」
순간 메이데이가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현으로부터, 친구 창을 통해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내렸다.
메시지를 다 읽은 메이데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전해 듣던 것과 달리, 현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달랐다.
시끄러운 길드 채팅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간부진에서 케이지 좀 추방하면 안 돼요?」
「응? 갑자기 왜 나를…?」
「에이 추방은 심하지. 그래도 케이지의 조언이 도움이 된 적이 엄청 많잖아. 이번 판단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상하다니!?」
「흐음. 그래요 뭐….」
생각해 보면 케이지의 말은 현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정확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메이데이는 앞으로 사람들의 말을 잘 걸러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