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79)
색다른 준비
“뭐야, 있잖아.”
영혼이 없는 존재에겐 수락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주인이 있는 ‘인형’ 혹은 ‘골렘’에게 동화를 사용하려 할 때는 ‘소유주의 허가가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대신 떠오른다.
그런 것도 아니고, 동화가 발동되지도 않았다면 그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이상한 것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야.”
“이것이… 영혼의 증거란 말입니까?”
“그래, 수락한다고 말해 봐.”
화악-!
다음 순간, 빛으로 흩어진 현의 몸뚱이는 샤틴의 영혼과 겹쳐졌다.
그와 동시에, 현은 그녀에게서 미약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정도 감정이 있다면 영혼이 있다 봐도 되겠지?’
루이즈처럼 감정이 풍부하진 않아도 평범한 NPC들처럼 무감각하지도 않았다.
추측컨대 샤틴도 1세대보다 윗선의 인공지능. 어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관의 ‘중요NPC’로 판정된 것이리라.
「웬만한 인간보다도 네가 나은데?」
“인간 보다…?”
「다들 감정을 지닌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동화해 보면 사실 별 거 없거든.」
역사 퀘스트동안 루이즈의 대역인 NPC에게 여러 번 동화해 봤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리치에게 동화했을 때, 혹은 인형에게 동화했을 때와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그에 비하면 너는 조금이라도 진짜 감정 같은 게 있고.」
“이것은….”
샤틴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어둠의 가호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에 온 몸을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평생 어둠만을 위해 살아왔을 그녀는 온몸을 채운 어둠의 기운에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라면… 제가 갖지 못하던 것입니다.”
「아니, 갖고 있었는데 약해서 못 느끼던 것뿐이겠지.」
“그렇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의심도 많은 걸 보니 정말 확실하네.」
현은 똑같은 것을 부탁하는 샤티나에게도 다시 동화해 주었다.
아무리 설명해 줘도 골렘들은 스스로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띠링!
현에게 퀘스트 알람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퀘스트?’
아스리안에는 수많은 히든 퀘스트가 존재하니 언제 발동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등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망가진 두 자매들은 그저 어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 한쪽은 아마도, 만남 이전에 허락된 시간이 다하겠지요.
-그 시간이 찾아오기 전, 그녀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보상 : 어둠 세력에 대한 통솔력 증가)
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퀘스트 설명을 읽어 내렸다.
보상 목록을 목격하는 순간 눈을 빛냈고, 다시 퀘스트 목표를 살펴보았다.
‘가치를 일깨워 주라고?’
이런 히든 퀘스트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왜일까?
어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둠의 시종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현은 루이즈를 지켜준 녀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여기고 있었으니 때마침 나온 퀘스트를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 그 방법을 말하는 거겠지?’
가치를 일깨우는 방법.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열식이었다.
말로 타일러도, 직접 동화를 보여줘도, 자신은 영혼이 없다고 믿는 녀석들이니, 서열식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두 쌍둥이들의 상태 창을 훑어보았다.
현이 결정을 내린 것은 잠시 후였다.
***
“저것이 본인을 제치고 간택되었다는 것인가?”
“케륵, 돌덩어리가 나보다 강하다고? 인정 할 수 없다! 크르르…!”
“영혼이 없는… 존재가… 바히미르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니!”
현이 샤틴을 선택하자 네임드 급 마물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루블렌도 설마 현이 고물덩어리를 고쳐와 서열식에 참가시키겠다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루블렌님! 저것보다 제가 더욱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간택을…!”
“구오오오, 저런 낡은 골렘 따위, 이 몽둥이 한 방으로 가루로 만들어 준다!”
“좀, 조용히 하세요!”
하지만, 루블렌은 바히미르의 충실한 시종.
현이 뱀파이어를 선택하지 않은 탓에 눈초리는 조금 사나웠지만, 그래도 공작의 뜻을 거역하진 못했다.
“선택이 끝난 모양이네요,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그런…!”
“감정도 없는 골렘이 서열식에서 공작님의 지고한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겁니까?”
“다들 그만.”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어느새 마블렌이 다가와 있었다.
마블렌은 가늘게 뜬 눈으로 현과 샤틴, 그 옆의 마물들을 차례로 훑어본 뒤 말을 이었다.
“불만을 말하는 이는 공작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 그래요! 불만 있는 녀석은 나와 보라고요!”
두 뱀파이어들이 함께 상황을 정리하자 어수선하던 마물들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때까지, 현의 옆에 있던 샤틴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마블렌은 무표정한 샤틴의 얼굴을 슬쩍 보며 중얼거렸다.
“골렘이라… 그대가 자격이 있는지, 그저 인형에 불과한지는 서열식에서 스스로 증명하겠죠.”
“증명….”
“호오, 말을 할 수 있었나요? 입을 안 움직이고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신기하군요!”
“무엇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샤틴의 물음에 마블렌이 답했다.
“바히미르님께… 아니, 더 포괄적으로는 어둠의 세력에 도움이 되는지를 증명해야죠.”
“어둠께 도움이….”
“만약 그대가 정말로 ‘도구’에 불과하다면 서열식에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그곳은 이제 단순히 힘을 겨루는 장소가 아니거든요.”
바히미르가 출전하는 서열식은 총 두 번이다.
방어전, 그리고 찬탈전!
만약 샤틴이 방어전에서 활약하지 못한다면 이어지는 찬탈전에선 출전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당신을 선택한 자의 눈썰미에 기대하는 것이지만.”
다시 마블렌이 떠난 뒤, 루블렌이 나머지 말을 전했다.
그녀도, 자신이 천거하는 뱀파이어가 선택받지 못해 조금 빈정이 상한 목소리였다.
“서열식은 사흘 뒤에요. 시간을 깜빡한다면 각오해야 할 걸요?”
“저기, 루블렌, 부탁이 있어.”
“뭔가요?”
“이전의 서열식을 다시 볼 수 있을만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헤어지기 전 현은 서열식의 녹화 본을 부탁했다.
정확히는 녹화 본이 아니라 ‘기억의 흐름’이라는 마법이 씌워진 수정구였지만, 대충 설명해도 루블렌은 알아들었다.
“상대할 공작들의 것, 그리고 바히미르님의 것. 이렇게 두 종류로.”
“기억의 수정은 무슨 용도로 사용할 생각이시죠?”
“전략을 짤 거야.”
“전략…?”
“그래, 기존의 전략에서 장점은 극대화하고. 잘못된 건 고쳐야지.”
“잘못됐다니! 감히, 바히미르님의 전략에 의심을 품는 것입니까?!”
루블렌의 호통에 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토록 유연함 없는 집단에서 나온 전략이 어느 정도일지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심각한 수준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그래도 현은 공작의 성을 나오기 전에 기억의 수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어서 프라이빗 룸.
아인이 하교하려면 아직도 한참이 지나야 했으니 현은 혼자서 다음 계획을 진행해 나갔다.
‘우선, 대회를 이해하는 게 먼저겠지.’
솔직히 말해, 현은 대회의 규칙을 잘 몰랐다.
전작에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도, 대회와 공성전은 다르다.
프렉티스가 나온 부분의 하이라이트만 챙겨 보던 현이 대회의 흐름을 파악할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열식을 대충 할 마음도 없었으니, 지금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쪽의 전문가는 바로 프로게이머겠지!’
그렇다, 현은 프렉티스의 도움을 빌릴 생각이었다.
대회 시즌이 끝난 지금 시기엔 프로게이머들도 비교적 한가한 때.
프렉티스도 마침 친구 창에 접속해 있는 상태였다.
‘에이, 여태까지 도와준 게 얼마인데, 설마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러한 기대로 귓속말을 보낸 현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미안, 나 지금 해외에 있는데?」
「뭐…? 해외?!」
「하하, 대회 우승 기념으로 여행 왔지! 5일쯤 뒤에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접속해 있는 거야…?」
「폰하고 캡슐을 연동해 뒀지.」
「그… 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프렉티스와의 짧은 연락이 끝나고.
현의 시선은 자연스레 친구 창 바로 밑의 이름에 고정되었다.
전 프로게이머 지니.
‘이 방법밖에 없나…?’
겪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상호간의 계산에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다.
과거, 몇 가지 가르침을 준 것만으로 그녀에겐 수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얻어먹었다.
프렉티스처럼 친분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자신이 가르침을 청한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가?
씀씀이가 아무리 넉넉해졌다고 하나, 액수가 천만 단위에 달하는 만큼 살짝 주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까짓 꺼.’
생각은 짧았다.
‘유트브 정산도 금방 들어올 텐데!’’
되돌릴 수 있는 것과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저울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으리다.
현은 우선 지니에게 연락해 봤다..
최근 직장을 바꾼 탓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들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조건을 높여서라도 지니를 불러 볼 생각이었다.
「현? 무슨 일인가요?」
「혹시 바쁘진 않나요?」
「네…?」
「지니에게 뭐 좀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되나 해서 물어봤어요.」
순간, 지니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갔다.
「저한테 배운다고요?」
「네, 사흘 뒤에 서열식이 있는데, 완벽하게 대비하려면 지니의 도움이 꼭 필요하거든요.」
대회와 동일한 형식, 그에 필요한 전략들.
지니는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현이 자신을 부른 의도를 이해했다.
잠시 말을 멈칫하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커져서 대답했다.
「저, 저요? 하나도 안 바빠요…! 요즘 완전 백수라서!」
「그래요? 재훈이 말로는 잠도 못 잘 만큼 바쁘다던데….」
「아, 그렇죠! 가끔은… 그럴 때도 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도 괜찮다고요…? 그럼 지금 프라이빗 룸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잠깐 이것만 끝나면… 아니, 네, 지금 당장이라도 가죠!」
어째서인지 지니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횡설수설했다.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당장 와준다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니를 기다리는 동안 현은 사사로운 문제들을 고민해 보았다.
‘수업료를 얼마나 줘야 할까?’
앞으로 서열식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하지만, 지니는 고작 20분의 수업에 거액을 지불했는데… 이틀 동안 계속 배울 수 있을까?
만약 데리고 있는다 해도 어마어마한 수업료가 깨질 텐데.
그러한 걱정은 지니가 프라이빗 룸에 도착하는 순간 곧바로 사라지게 되었다.
“네? 수업료는 안 줘도 괜찮아요! 저 백수라니까요. 그냥 할 거 없어서 놀러 온 거죠! 게다가 제가 도움이 된다는 장담도 못 하는데.”
“백수라는 건… 2일 동안 쭉 시간이 빈다는 뜻인가요?”
“네…? 이틀이라고요…? 어…? 아마… 빠듯하게 되지 않을… 까요. 네, 될 것 같아요…!”
현은 횡설수설하는 지니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역시,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틀 동안 무상으로 과외를 해달라는 부탁에는 당황할 수밖에.
현은 나중에 봐서 합당한 수업료를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아, 준비는 다 끝났고.’
대충 정리가 끝나고, 현은 지니와 함께 로비에 앉았다.
우우웅. 루블렌에게 받은 구슬에 손을 대는 순간 허공의 스크린에선 서열식의 광경이 재현되었다.
“같이 봐요. 저도 아직 안 봤거든요.”
“녹화 마법… 굉장하군요…! 현이 이곳의 선수로 출전한다는 거죠?”
“네, 이쪽이 제가 참가할 진형이에요.”
구슬에 담긴 영상은 크게 두 종류로 분리되었다.
아군의 것과 적군의 것.
정적 가운데 스크린의 영상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 분석을 시작한 지니의 눈빛은 냉철하고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지니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편에 띄워둔 기록 인터페이스에 무언가 메모하는 시늉을 했다.
영상이 끝난 건 한참 만이었다.
지니는 바히미르의 기록이 담긴 구슬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전력상으로만 보면 이쪽이 더 강하군요.”
“역시 그렇죠? 바히미르쪽의 서열이 더 높거든요.”
지니의 대답에 현은 안심했다.
자신이 봤을 때도 방어전은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안심하던 순간, 지니는 다시 중얼거렸다.
“근데, 대회 규칙으로 붙으면 질 수도 있겠어요.”
“네…?”
이어지는 이야기는 현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분야의 내용이었다.
또한, 수천 명의 프로게이머들이 무수한 성공과 실패를 걸쳐 만들어낸 전략이기도 했다.
“대회는 선수가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변수가 가장 크지만, 병사들의 변수를 무시할 수도 없어요. 공세 타이밍을 잡아서 병력의 수로 끊임없이 스노우 볼링을 하면 그것만으로 선수 한 명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게 가능해지니까요.”
“스노우볼… 뭐라고요…?”
“눈덩이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한 번 우세를 잡으면 그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는 용어랍니다.”
지니는 대회의 전략이 바뀌게 된 과정까지 함께 설명해 주었다.
“선수의 힘만으로 우세를 점하는 건 리그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에요. 연구가 시작되면서 대회는 개인의 무력만큼 ‘운영’이 중요하게 되었죠.”
“운영이요…?”
“현도 대회 몇 번 봤다 하지 않았어요?”
“그게… 최근엔 좀 바빠서….”
모르는 이야기가 자꾸만 튀어나왔기 때문에 현은 그냥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지니의 설명을 듣다 보니 현도 대회와 전쟁의 차이를 점점 파악할 수 있었다.
‘실제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것 같아.’
소수의 엘리트가 상대병력을 휘저어 치명적인 피해를 가하는 것이 바로 아스리안의 전쟁이지만, 대회에서는 그 전투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부활시스템의 존재!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선수를 회복시켜 60초 뒤에 재출전시키는 것이니 부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니는 그 차이가 전투의 승패마저 뒤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총합 점수로 따지면. 킬 카운트보다 요새 파괴 점수가 더 높아요.”
“병사는 부활하지 않죠. 병사의 목숨을 살리는 식으로 운영하면 요새에 지속적인 피해를 계속 입힐 수 있어요. 봐요, 이렇게… 상대 진형이 하는 것처럼.”
“선수 위주의 전략은 이런 식의 게릴라로 쉽게 카운터 칠 수 있죠. 2대1보다 1대0으로 선수가 배치된 장소에서 훨씬 큰 피해가 나오니까요.”
“그 빈 공간을 병력으로 막기 위해 ‘통솔자’라는 포지션이 생겨났고, 최소한 한 명은 반드시 있어야 해요. 요즘 대회에선 대부분 두 명까지 기용하죠. 그런데 보면, 공작의 부하 중엔 그런 역할이 없잖아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니의 설명은 현에게 새로운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설명을 들을수록 현은 자신이 여태껏 대회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투 장면만 보고 ‘쟤는 프로게이머라면서 왜 저기서 혼자 죽지…?’라던 의문도, 다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강해 보이던 바히미르와 뱀파이어 무리들도 설명을 듣고 보니 갑자기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역시, 프로게이머를 부르길 잘했어! 자칫 잘못하면 아무것도 모른 채 질 수도 있었다는 거잖아.’
현은 지니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오후가 되어서야 접속한 아인.
결투장에 갈 것이란 소리를 들은 뒤부턴 계속 들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나머지 반지 한 짝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품고 프라이빗 룸에 들어온 아인은, 현과 함께 있는 지니를 보고선 묘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현…?”
“어, 아인, 왔구나.”
“이 사람은 뭐야…?”
“이 사람이 아니라, 지니 누나잖아!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지.”
“그으래…?”
아인은 단 둘의 일정에 지니가 끼어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눈치 빠른 지니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걱정 마요, 저는 함께 따라가지 않거든요.”
“그럼?”
“보기만 할 겁니다.”
지니는 현이 틀어준 비공개 방송으로 시야를 공유 받는 한편, 순간마다 필요한 조언을 주기로 했다.
그 사실을 듣고 나서야 아인은 혼자만의 경계를 풀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완벽히 준비해야겠지.’
지금은 아인의 몸에 동화하지만, 서열식이 열리는 날엔 어둠을 섬기는 골렘, 샤틴에게 동화할 예정이었다.
아인의 몸을 빌리는 까닭도 그녀의 대검의 리치가 ‘이프리트의 발톱’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마을의 어느 결투장.
현과 아인은 함께 로비 한가운데의 포탈을 마주보았다.
[2인 파티 리그 매칭을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현’의 1대1 결투 등급으로부터 임시 리그 등급을 배정 중입니다….] [‘골드 3’에 배정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아인’의 1대1 결투 등급으로부터 임시 리그 등급을 배정 중입니다….] [‘마스터’에 배정되었습니다!] [파티간의 등급 차가 커서 높은 쪽을 기준으로 매칭을 탐색합니다!]예전에도 실험해 봤다만, 동화는 매칭 시스템을 속일 수는 없었다.
즉, 아인과 함께 한다면 무조건 2인 파티.
아인은 잔뜩 신난 듯했지만, 현은 그렇게 느긋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모르던 게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200레벨의 기회까지 포기하며 낸 시간이다.
현은 대회에 관한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초심자의 자세로 배워나갈 생각이었다.
눈앞의 서열식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먼 미래를 위해서까지.
‘공작 말고도 유저의 영향을 받은 NPC가 있다면, 대회 비슷한 것이 또 생겨날지도 몰라. 아니면, 프로와 코치들이 수개월간 발전시켜온 방법론을 내 공략에 적용시킬 수도 있겠지!’
물론, 이틀 안에 지니의 모든 노하우를 흡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자란 부분은 8년간 다져진 아스라 시절의 경험치로 충분히 메울 자신이 있었다.
최종목표는 서열식 전까지 프로에 비견되는 대회 실력을 갖추는 것.
물론 스탯이 공평하게 설정되는 ‘리그 매칭’이 기준이다.
현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인과 지니는 전폭적으로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바짝 동기부여를 끌어올린 이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
“후우… 어때요, 처음보단 제법 괜찮아졌죠? 아니면, 아직 좀 모자라려나…?”
서열식 바로 직전의 새벽.
모든 준비를 마친 현은 뿌듯한 듯이 웃으며 드러누웠다.
현의 피로도 수치가 95를 넘어간 것은 정말 쥐어짜듯 집중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아뇨… 지금이면 충분할 겁니다.”
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본 지니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일을 미리 겪었다면 자신은 아마 더 일찍 프로게이머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인의 컨트롤도 분명 빛났지만, 이번만큼은 그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현의 성장은 빠른 것을 넘어 눈부신 수준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줄게요. 지금 현이 2군 프로게이머보다 나을 걸요.”
“하하, 그렇게 띄워주실 필요는 없는데.”
띄운다? 정말로 현의 이름값 때문에 자신이 과대평가한 것일까?
지니는 스타더스트에 있던 시절의 프로게이머들과 현을 비교해 봤다.
‘과대평가가 아니야.’
프로로 활약하던 시절, 지니는 팀에서 메인 오더(Main order, 주 지휘)를 맡았다.
그래서 초창기 스타더스트의 ‘정석전략’들 중 많은 것들은 지니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며칠 밤을 새워 짜낸 정석을 그녀가 똑같이 가르쳐 줘도, 그 이유와 과정까지 온전히 이해하는 선수는 게임단 내에 두세 명 뿐이었다.
연습생 및 2군을 포함한 대다수는 그저 정석이기 때문에 특정 시간대에, 계획된 동선을 따라서, 정해진 행동만 하려고 했다.
정석으로부터 파생되는 선택의 가지들을 이해하기 귀찮아했거나, 혹은 이해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변칙적인 것엔 제대로 응수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재능의 싹이 확실히 다르다.’
아직 현의 운영법이 프로들과 비교해 모자란 것은 확실하다.
사소한 잔가지까지 모두 배우기엔 이틀이란 시간은 턱없이 짧으니.
하지만 어떤 것을 가르쳐 줘도 현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했다.
처음 두 번까지는 설명이 필요했지만, 그 뒤로부턴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상대의 모든 변칙적인 수에 정확한 응징을 가하는 현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른다.
‘이만한 재능이 있어야만 그런 공략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걸까?’
문득 지니는 과거 함께 베티를 사냥했던 날을 회상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공략은 과거의 경험을 가공해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임기응변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그렇게 지니가 복잡한 생각에 빠진 사이, 현도 지니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일지도 몰라…!’
리그 운영법에 이토록 많은 테크닉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지니는 물어본 것 외에도 쓸 만한 정보까지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대회에선 더욱 다양한 전략이 나와요. 팀의 합이 완벽하게 맞아야만 가능한 운영이 따로 있거든요.」
아인이 함께 없을 땐 실제 대회를 보며 프로들의 수싸움을 이해하기도 했다.
지니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며 현은 수많은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아인이 접속한 때는 리그 매칭을, 아인이 없을 때는 지니에게 이론적인 지식을 익혔다.
결국 현과 아인의 리그 매칭 등급은 점점 차이가 좁혀졌고, 함께 마스터 최상위권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틀이 지난 뒤의 새벽. 현은 지니에게 확답을 받게 되었다.
「지금 정도면 대비는 충분할 거예요.」
총 23승 2패.
그나마 두 번의 패배도 운영을 전혀 모르던 때의 전적이었으니 경기시간이 결투만큼 짧았다면 그랜드마스터 등급을 찍고도 남았으리라.
‘이 정도로 잘 봐줄 줄은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지니의 노력이 고마웠다.
아무리 한가하다고 해도 이틀 동안 남의 플레이를 봐주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닌데.
‘나에게 잘 맞춰준 것 같아.’
지니가 알려준 전략들 중엔 다른 유저가 따라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난이도 높은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맞춤형 강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녀가 유일하겠지.
‘대가를 원하지 않았다지만… 이만한 성의를 그냥 넘길 순 없잖아?’
지니는 과거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준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반대로, 지니에게 받은 것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은 서열식이 끝나고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메모해 두었다.
‘보답하는 게 도리겠지.’
그렇게 내일의 서열식을 각오하며 접속을 종료하려던 순간.
갑자기 아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물었다.
“현, 우리 그랜드마스터는 찍는 게 좋지 않을까?”
“어?”
“딱 세 판만 더 하자…!”
“뭔 소리야. 피로를 풀어 둬야지. 너도 이제 잘 시간이잖아.”
“그러면… 내일 모래는?!”
“그때는 메인 퀘스트를 하러 갈 거고.”
“…다음 주는?”
“200레벨을 찍어야 될 테니 계속 바쁘겠지, 응…?”
말을 이어갈수록, 현은 아인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한 것 같았기 때문에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 루이즈를 만나고 난 뒤엔 좀 한가해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그때 꼭 그랜드마스터 찍는 거지?”
“어, 응….”
아인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며 현은 자칫 위험할 뻔했던 실수를 피해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마침내 다가온 서열식 날.
뱀파이어, 두 골렘을 비롯한 공작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모두 엄숙한 공기 속에 도열해 있었다.
“출전이다.”
파앙! 바히미르의 손짓에 5미터 크기의 붉은 포탈이 열렸다.
수백에 달하는 마물들의 분위기는 전쟁을 앞둔 것 마냥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기억의 수정에서 보았던 광활한 협곡.
파츠츠츠!
수 킬로미터를 덮는 빽빽한 마법진에 하나씩 불빛이 들어오며, 협곡은 거대한 경기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