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83)
다시 라비린스로
‘난 유명해지더라도 대놓고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평범한 자신과 달리 아인의 독특한 분위기는 쉽게 유저들의 눈에 띄기 때문에 이러한 변장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다시 도착한 라비린스의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뭐야, 여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선 순간부터 ‘유저’로 추측되는 복장들의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혼자 있는 유저, 서넛 파티를 이룬 유저.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들까지. 지금 이곳에 있는 유저들은 대부분 최소 15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리라.
「응? 현, 저 사람 봐!」
아인의 외침에 현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선글라스 코스튬을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유저.
장비로 추측하건데, 그녀의 레벨은 최소 200이었다!
레벨제한 200의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도, 아인도 그 얼굴을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뭐야 저건.」
「우리처럼 전당에 등록하지 않은 유저인가 봐!」
「정말로…?」
현의 머릿속에 잡생각이 확 가셨다.
라티스가 명예의 전당에서 이름을 내린 뒤부턴 쭉 메이데이가 1등을 유지하는 지금.
메이데이가 약 일주일 전에 200레벨을 달성했으니, 저 유저는 최소 메이데이와 비슷하다고 봐야 했다.
‘커뮤니티의 눈에 띄지 않고 200레벨을 찍을 수 있는 유저가 있다고? 나처럼? 하지만 동화도 없을 텐데…!’
순간 현에게 의구심이 떠올랐다.
마침 아인도 똑같은 의문을 지닌 듯했다.
「아스라 유저일까?」
「아니, 서양인 같아… 외모를 변경했을지도 모르지만.」
「아, 사라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도중 그녀는 인파 속으로 감쪽같이 숨어버렸다.
현과 아인은 재빨리 쫓아가 봤지만 복잡한 사막도시의 지형에 가려져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니면 로그아웃했거나, 만약 그렇다면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후, 좀 긴장해야겠는데?」
랭커가 넘치는 장소에 오니 별의 별 녀석들이 다 튀어나오는 것 같아.
현은 나중에 녹화 본으로 방금 보았던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괜찮아, 현이랑 내가 유저한테 지진 않을 걸?」
「그래, 아인 너만 믿는다.」
인파를 가로지르며 현과 아인은 수많은 종류의 유저들을 맞닥뜨렸다.
랭커 길드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 심지어 몇몇 게임단까지 라비린스에 집결해 있었다.
‘게임단인가? 본 적 없는 곳이네….’
안정적인 사냥을 추구하는 프로게이머들은 위험 가득한 미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 종목이 아닌 곳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마법 재료들의 가격이 미친 듯 폭등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유저들의 라비린스의 관심도는 현의 상상을 부쩍 뛰어넘었으니.
“21구역, 입장료는 24000골드입니다.”
현은 미궁에 들어가던 도중 화들짝 놀랐다.
“이만 골드? 입장료가…?!”
깜짝 놀란 나머지 아인의 목소리로 외쳤고, 조금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이게 뭔 가격이냐?」
아인도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예전에도 입장료 같은 게 있었어?」
「없었어! 오히려 위험 지역이라 150레벨 이하는 제한을 금지시켰지! 그런데 지금은 그 입장제한마저 사라진 것 같아.」
24000골드를 최근 시세로 환산하면 약 800만원!
그나마 유저들이 대폭 늘어나며 골드의 가치가 낮아졌기에 그 정도였다.
게임 속 던전 입장료가 현금으로 천만 원 가까이 된다니. 아스라 시절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현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 마도국 NPC들이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았군!’
미궁은 마법 재료들을 가장 쉽게 수급할 수 있는 사냥터다.
입장료가 오른 것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2만 4천 골드…. 입장료가 800만원이라고.」
「현, 골드 모자라면 내꺼 써도 돼.」
「아니, 모자라진 않지만… 예전 금전감각이 아직 남아있다는 게 무섭네.」
현은 투명화를 써서 잠입하려는 유혹을 겨우 떨쳐냈다.
800만원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만 마도국에 수배되면 감당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나마 동화 덕분에 1인 요금이니까.’
하지만 미궁에 입장한 뒤에도, 미궁 관리인의 바가지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모험가님! 수급장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승강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강기 이용을 원하십니까?”
입구의 복도를 걸으며, 관리인은 추가 옵션들을 읊기 시작했다.
“수급장? 승강기…? 그건 또 뭔데요?”
“하하, 250에서 300레벨 사이 몬스터들만이 출현하는 장소를 일컬어 ‘유저’ 분들이 수급장이라 부르더군요! 저희도 미궁의 수급장들은 특별히 따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승강기를 이용하면 바로 그곳에서 사냥할 수 있지요!”
관리인의 말은 한마디로 명당.
NPC들은 유저들이 원하는 것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미궁이라 해도 몬스터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니까, 적당히 강한 몬스터들만 출몰하는 장소에서 파밍을 계속하는 유저들은 시간도, 목숨도 아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승강기 이용료는 얼만데요…?”
“노블 구역으로 향하는 승강기는 52000골드, 로열 구역은 89000골드만 내시면 저희가 곧바로…!”
“아… 네.”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지나치는 소녀.
관리자는 재빨리 따라붙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혹시 승강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내려가시려는 건가요?! 죽을 수도 있어요! 아니, 틀림없이 죽을 겁니다! 입구서부터 통제를 잃은 함정 마법진들이 가득한데다, 통로마다 잔악한 몬스터들이 바글거린다니까요!”
쯧쯧, 입장료를 다 받아놓고 저런 말을 하다니, 양심을 어디다 팔아먹은 것인지.
현은 관리인을 무시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쓸데없는 논쟁을 줄였다.
‘장사도 적당히 해먹어야지.’
현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걱정 가득한 미궁 관리인의 표정이 변한 것은 소녀가 사라진 뒤 몇 초가 지났을 때였다.
“쳇, 이래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유저들이란….”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
하지만 그의 표정은 몇 초 만에 사람 좋은 미소 가득한 것으로 변했다.
한눈에 유저임을 알 수 있는 새로운 호구가 미궁의 입구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모험가님! 미궁에 입장하려십니까! 입장료는….”
쩔그렁.
선글라스를 고쳐 쓴 여자는 묵직한 돈다발을 내밀며 짧게 중얼거렸다.
“로열 구역으로 바로 가지.”
잠시 멍하니 있던 관리인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특대의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재빨리 마법으로 확인해 본 결과 돈다발 안의 금화는 113,000골드!
유저들 중에는 가끔씩 이러한 자들이 있었다. 마치 귀족이나 대부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거액을 툭툭 던지는 자들 말이다.
‘흐흐흐, 또 한명 오셨군!’
관리인은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귀족처럼 받들어 모셨다.
높은 수익을 거둘수록 자신에게 떨어지는 돈도 커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유저들의 등장 이후 라비린스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미궁, 지하 23층.
쿠우우웅! 계층의 주인 바브로스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이어서 녀석의 거체 위로 푸른 결정이 떠올랐다.
마력이 응축된 돌, 마석.
이처럼 대부분의 거대 네임드 몬스터들은 힘의 동력원을 몸속에 지니고 있었다.
“다섯 개, 드디어 끝이구나.”
루이즈는 마석을 주워들으며 불평했다.
“일 년에 한 마리밖에 리젠되지 않는다니.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니냐?”
“리젠…이요?”
곁의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였다. 신녀께서 의미모를 단어를 중얼거린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목표는 다 달성했습니까?”
“그렇다, 이제야 이곳을 떠나게 되겠구나.”
“전 5년 만에 태양을 보겠군요.”
“그래, 이제부턴 하늘로… 으응?”
말을 이어가던 루이즈는 순간, 기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공감을 봉인하고 있음에도 얼핏 느껴지는 영혼의 떨림.
가장 따뜻하게 여기는 존재와의 공명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의 기운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그의 얼굴을 떠올려낼 수 없다면 자신은 5년이란 시간을 버텨낼 수 없었으리라.
“오오, 이건!”
“무슨 일입니까?”
눈을 감은 루이즈의 입가에 점점 그리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또 기도를 올리는 중인가 보구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엇…!”
그와 동시, 함께 있던 남자, 파피 또한 무언가를 느꼈다.
천인은 기감에 민감하다.
특히 큰 신성력을 가진 존재는 굉장히 멀리 있어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미궁에 온 건가?’
파피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신성력이란 천인에겐 익숙한 기운이지만, 지금의 파피에게는 조금 껄끄러운 기운이기도 했다.
5년 동안 라비린스의 지하에 숨어 있던 것도 천공 세력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
하지만 얼핏 느껴진 신성은 기운이 머지않아 사라졌다. 곧 기감에도 잡히지 않게 되었다.
‘아니… 착각이었는지도.’
고개를 저은 파피는 크게 신경 쓰지 말기로 했다.
며칠 뒤면 어차피 이 은신처를 떠나게 될 터이니.
‘신녀님…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파피는 안쓰러운 눈으로 루이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가 겹쳐졌다.
악마에 속아 마기에 물들었던 일.
천공의 세력을 피해 다녀야만 했던 기억은 다시 생각해도 악몽이었다.
천인이 천공을 두려워하다니? 그런 웃기는 이야기가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십여 년 동안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던 파피에게 그것은 전혀 웃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시, 파피는 루이즈를 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신녀님께서도 곧 신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파피는 루이즈의 아련한 눈빛을 느꼈다.
신녀께선 가끔씩 저렇게 아주 미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곤 했다. 본인이 그러한 감정을 지닐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저만은 당신을 외면하지 않을 테니.’
***
미궁의 입구.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현의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기의 마나가 뒤틀려 있습니다!] [미궁 내에서는 바깥과 다른 법칙이 적용됩니다!]-몬스터로부터 드랍되는 아이템은 1분간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최대체력의 5%의 피해로 신체결손이 가능합니다.
‘바뀌지 않았어.’
모든 내용을 읽은 뒤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라 때와 마찬가지로, 미궁은 여러 면에서 ‘현실’과 닮은 장소였다.
현실에서는 남의 물건을 가로채는 것이 가능하다.
급소에 조그만 상처만 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
특히 신체결손의 설정 변화는 NPC들에게 저주와도 같은 효과였다.
그들은 평소에 33퍼센트가 아닌 5퍼센트의 피해로 돌연사할 일이 없을 테니까.
고위 NPC들이 미궁에 들어오길 꺼리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루이즈가 여기에 숨은 거겠지만.’
현은 ‘깊이‘를 제외한 루이즈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마의 구슬에 찍힌 붉은 점을 최대한 확대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고정된 X,Y좌표에, 인터루프로 얻은 미궁의 지도를 겹쳐보자 루이즈가 있을 장소를 3개 후보로 줄여낼 수 있었다.
‘20층, 22층, 23층 그 외에는 공간 자체가 없어!’
현은 시선을 올려다봤다.
화면 위쪽에 띄워 둔 3차원 지도엔 무수한 화살표가 가득 했다.
미궁에 오기 전 밤을 새워 만들어낸 완벽한 동선이다.
화살표대로만 따라가면 지니가 부탁한 소재를 충분히 확보하고, 레전더리 아이템의 재료를 얻으며, 그 와중에 반드시 루이즈를 만나게 될 것이다.
‘웃?! 그림자 질주!’
갑자기 바닥과 천장에서 강철의 가시가 솟아오른 것은 그 동선을 따라 빠르게 달려가던 도중이었다.
콰직! 송곳으로 이루어진 이빨이 복도를 통째로 씹었다.
간신히 벗어난 직후, 현은 아인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음을 눈치 챘다.
「장난치지 마. 죽을 뻔 했잖아!」
마력의 흐름에 반응하는 함정.
아인은 일부러 복도 한가운데서 스킬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현이 피할 줄 알고 있었지.」
「못 피했으면 어쩌려고.」
「현이니까 피했잖아?」
후우… 함정에 몬스터에, 아인의 장난까지 받아주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아인 말대로, 이 정도 함정에 반응하지 못해서야 미궁의 절반도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이런 장난도 낮은 층에서만 마음껏 해.」
「마음껏 하라고~?」
「아니, 너무 하진 말고… 하층까지 가야 하니까.」
‘가호 On.’
현은 슬쩍 어둠의 가호를 사용해 두었다.
아인의 성향이 심연으로 변한 이후, 이 방법으로 그녀의 장난기를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다.
‘계속 켜둘 순 없겠지만.’
다만, 중요할 때엔 꼭 해제해야만 했다.
어둠의 가호를 받게 되면 아인도, 그녀와 동화한 자신까지도 좀처럼 싸움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절대 죽으면 안 되니까!’
현은 빠르게 미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칵, 달칵. 함정들이 연속으로 발동되었다.
갑자기 날아드는 화살, 피어오르는 독 안개.
현은 속도를 올리며 그것들을 건너뛰었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함정을 발동시켜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어디에 어떤 함정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고, 불시의 기습도 반사적으로 피해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하미궁은 세계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거대한 던전.
오늘 내로, 혹은 내일 안으로 루이즈와 만나기 위해선 이렇게 속도를 내야만 했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네임드가 총 세 마리야.」
그리고 아인은 잊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달리면서 계획을 재차 설명해 주었다.
「세 마리?」
「그래, 첫 번째 녀석은 바로 1층. 마침 이 구역 근처에 서식하고 있는 녀석이거든.」
1층이라면 가장 난이도가 낮은 구역.
대부분의 유저들은 네임드라 해도 손쉬운 사냥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틀리진 않았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다.
미궁의 몬스터들은 겉으로 보이는 레벨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다.
「1층 네임드가 근처에 뭐가 있더라?」
「붉은 구미호, 셰라트야.」
실제로 첫 번째 사냥감은 미궁 전체를 통틀어도 상위권의 강함을 지닌 네임드였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세 마리 중엔 가장 강력한 녀석이기도 했다.
계획을 말하자 아인은 살짝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어…? 나 그거 잡을 줄 모르는데?!」
「보고만 있어. 내가 할 테니까.」
덜컹! 달려가던 순간, 복도의 바닥이 통째로 사라졌다.
낙하 함정!
아래에는 부글거리는 용암의 강이 아인의 추락을 반기고 있었다.
‘그림자 질주!’
얼핏 함정처럼 보이는 이곳에 숨겨진 통로를 아는 유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궁 1층의 지도를 얻기 위해선 상당히 귀찮은 마도국 NPC의 히든 퀘스트를 수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여기다!」
부글부글!
현은 용암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다가 눈을 빛냈다.
화면 위의 지도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 장소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죽진 않겠지?’
-용암 내성 : 99%
아인이 입은 레카라트의 마물 갑옷에 달린 효과면 용암에서 헤엄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현은 만약을 위해 추가 스킬을 발동했다.
마침 최대치에 도달한 마기를 사용해서.
‘어둠의 갑주!’
드드득! 칠흑의 보호막이 아인의 전신을 감쌌다.
촤아아, 촤아.
그대로 한 명의 신체를 통째로 삼켜버린 붉은 물살. 아인의 몸은 용암 아래의 거센 흐름을 따라 어딘가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어둠의 갑주의 지속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293829의 마기가 환원되었습니다!]푸하! 다시 용암 아래서 솟구쳤을 때.
그 때의 아인은 추락하기 전 미궁의 복도가 아니라 사방이 용암의 강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발판 위에 서 있었다.
예전 베티와 싸웠던 지하도시와 비슷한 장소. 하지만 그때보단 조금 세련된 대리석의 타일이 깔린 공터였다.
「구미호 사냥도 오랜만인데.」
그리고 공터의 한가운데엔 꼬리 9개 달린 거대한 여우가 웅크린 채 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캬르르르, 구미호는 용암 속에서 솟아오른 아인에게 경계 가득한 시선을 던지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높이만 해도 3미터에 가까운 거체!
설화 속 구미호보다 한참이나 거대하다!
녀석의 상태 창을 볼 순 없었지만, 인터루프를 참고해 보면 정확한 정보를 알 수가 있었다.
레벨 110, 체력 33000.
고작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에게 현이 이토록 긴장하는 이유는 왜일까?
바로 한 방에 쓰러뜨리면 안 되는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스릉, 현은 인벤토리에서 유니크 장검을 꺼냈다.
아인이 롱소드를 곧게 뻗는 모습은 아스리안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무기는 이게 적당하겠지.’
미궁 안엔 바깥과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같은 네임드를 수억 마리 잡아도 마석밖에 드랍되지 않는다.
녀석의 고유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푸른 꼬리는 자르면 안 돼.’
구미호가 지닌 꼬리들 중 8개는 붉은색, 1개는 푸른 색.
푸른 꼬리는 인간에게 심장과 같다.
그것이 잘리게 되면 녀석은 마력의 제어를 잃고 흐물거리다 머지않아 소멸해 버린다.
‘8개의 붉은 꼬리만 전부 벤다.’
사냥꾼은 모피를 얻기 위해 사냥감의 대가리만 노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미궁 네임드들로부터 원하는 소재를 얻고 싶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녀석들을 사냥해야만 했다.
현은 살랑거리는 구미호의 꼬리를 유심히 살폈다.
재료, ‘구미호의 꼬리’를 얻는 방법. 반드시 푸른 꼬리를 가장 마지막에 베어낼 것!
‘치명타는 피하면서!’
치명타가 3번 이상 터지면 안 된다.
꼬리 외의 부위를 공격해서도 안 됐다.
그러면 소재를 얻기도 전에 녀석이 죽어버릴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지금.’
현은 녀석의 공격 타이밍을 노려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부웅! 느릿느릿한 발톱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뒤를 잡은 직후, 검을 내리고 올리며 두 번을 베었다.
그대로 불꽃으로 흩어지는 두 가닥의 꼬리.
[셰라트의 마력이 20% 상승합니다!] [셰라트의 마력이 40% 상승합니다!]캬아아! 녀석의 몸체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이것이 바로 미궁 몬스터들의 무서운 점이다. 대부분의 녀석들은 신체를 잃을수록 강해지고 사나워진다.
‘아직은 어렵지 않아.’
다시 한 번, 현은 잔상을 남기며 돌진하는 구미호를 피한 뒤 반격을 꽂았다.
치명타가 터지지 않도록 일부러 검날을 빗겨 넣었다.
화륵, 화륵, 화륵, 꼬리 여러 가닥이 불타며 사라졌다.
아인의 민첩이 훨씬 높은 덕분에 현은 약 30초 만에 붉은 꼬리들을 전부 잘라낼 수 있었다.
[셰라트의 마력이 160% 상승합니다!]캬아아아! 순식간에 8개의 꼬리를 모두 잃어버린 구미호는 고통스런 울음을 내뱉었다.
마지막 하나, 푸른 꼬리를 베어내는 것으로 최소 억 단위 가격의 소재가 드랍될 것이다.
하지만 현은 녀석을 마무리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던졌다.
“먹어라.”
푸른 결정 하나가 녀석의 입가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구미호는 그대로 그것을 낚아채듯 삼켰다.
결정의 정체는 10등급 마석! 최소 250레벨 이상의 몬스터에게서만 희귀하게 드랍되는 보석!
우우우우우우-!
마석을 삼키는 즉시 녀석은 크게 울부짖었다. 잘렸던 꼬리가 순식간에 돋아났다.
그리고 전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근접 마법사의 궁극기, 소멸의 각오를 사용한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성공한 거야?」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야.」
현은 손에 든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검으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을 테니.
콰드득! 대신 이프리티의 발톱을 발동시켰다.
‘체력이 55만으로 올랐고, 데미지 감소 패시브까지 생겨났겠지.’
녀석의 방어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쉽게 죽이면 안 되겠지.
파장 계열 버프들을 전부 해제했다. 천사의 기초검술 또한 발동되지 않도록 설정해 두었다.
콰앙! 그 상태로 마력의 잠력 폭발을 사용하는 순간.
한 방에 최대체력의 5%이상, 10%이하를 만족하는 데미지가 재차 맞춰졌다.
‘좋아, 이거로 충분해!’
그 때부터 불꽃을 휘두르는 소녀와 불꽃으로 타오르는 여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화르륵! 양쪽이 움직일 때마다 불꽃의 잔상이 여기저기 남았다.
쿠릉, 드드드득!
스킬이 사용될 때마다 지면과 용암이 파헤쳐지자 대리석의 공터는 순식간에 난잡한 전장이 되어 버렸다.
‘생체리듬 가속!’
터엉! 이프리트의 발톱으로 녀석의 마력 구체를 튕겨낸 직후.
현은 용암 아래로 질주하여 녀석의 뒤를 잡아냈다.
스킬을 사용한 직후 생겨나는 물리적 빈틈, 보이지 않도록 접근하여 만들어낸 심리적 빈틈까지!
일순간 완벽한 기회를 잡아낸 현은 구미호의 꽁무니에서 양손의 발톱을 난자했다.
캬아아! 녀석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네 가닥의 꼬리를 잘라낸 뒤였다.
[셰라트(각성)의 마력이 120%상승합니다!] [이제부터 스킬, ‘화겁참’을 사용합니다!]거리를 벌리던 도중, 현은 녀석의 발톱이 애꿎은 공기를 할퀴는 광경을 목격했다.
허공에 그어지는 세 줄기의 불꽃.
그 이펙트로부터 단번에 스킬 효과를 파악했다.
‘왼쪽.’
수십 가닥의 불꽃이 몰아친 것은 현이 옆으로 몸을 날린 직후.
촤라라라락!
아인이 머무르던 자리에 난데없이 참격이 몰아쳤다.
날카로운 불꽃의 폭풍은 모든 지형지물을 초토화시키는 동시, 사방으로 용암의 파편을 튀겼다.
허공을 격해 발동되는 할퀴기. 녀석이 지닌 스킬들 중 가장 위험한 기술이었다.
「방금 반응속도… 엄청났어!」
감탄하는 아인에게 현은 짧게 대답했다.
「반응이 아니야. 예상한 거지.」
「흐음, 신기하네!」
하핫, 아인의 대답에 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결투 중에 상대의 심리 예측은 그렇게 잘 하면서, 몬스터의 패턴을 신기해하나? 어찌 보면 그것이 아인답기는 했지만.
어쨌든 불꽃 대 불꽃의 뜨거운 싸움은 약 5분간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아인 쪽이었다.
콰앙! 민첩의 잠력 폭발이 중첩될수록 기동력 차이가 현저히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중첩에 이르러서는, 현이 투우사처럼 녀석을 가지고 노는 정도가 되었다.
화륵! 화륵! 캬오오!
[셰라트(각성)의 마력이 160%상승합니다!]원형 공터가 1/3쯤 파괴되었을 때, 현은 마지막 8개째의 꼬리를 잘라낼 수 있었다.
빈사상태에 달해 무릎을 꿇은 푸른 꼬리의 여우. 이제는 구미호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은 이번에도 그 녀석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다시 인벤토리에서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까처럼 푸른 빛깔이 아니라 투명한 결정. 그 자체로써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신석(神石).
‘이게 마지막이다.’
구미호의 꼬리는 지니의 요청에 포함된 소재가 아니라 레전더리 아이템의 재료다.
레전더리(Legendary).
얼핏 만능처럼 들리는 단어지만, 레전더리라 해서 다 같은 레전더리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장비가 그저 사냥을 편하게만 만들어 준다면, 또 어떤 장비는 전쟁의 판도마저 뒤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200레벨에도 쓸 만한 수준으로 만들려면….’
가장 큰 문제는 강력한 힘에는 높은 수준의 제한이 걸린다는 것.
착용 제한을 낮출수록 장비의 질은 급격히 낮아진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200레벨 레전더리를 제작하면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이 될지도 몰랐다.
‘최상급 재료가 필요해!’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 첫째는 제작사의 실력이고 둘째는 재료의 질이다.
제작과정에는 관여할 수 없으니 현은 최고의 장비를 위해 최고의 재료를 구할 생각이었다.
「자, 시작이다.」
신석을 받아먹은 구미호는 잠시 동안 부르르 떨었다.
전신에 타오르는 불꽃이 힘을 잃고 사라지려는 듯하더니, 파바바밧! 다시 8개의 검은 꼬리가 솟아났다.
칠흑에 담긴 힘은 현과 아인에게도 익숙한 기운.
[압도적인 상대를 마주하여 모든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천인은 심연의 위협에 쉽게 굴하지 않습니다!] [모든 스탯이 5% 하락합니다!]쿠르르, 쿠르르,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며 용암의 강엔 동심원이 퍼져나갔다.
콰아아아아! 녀석이 울부짖는 동시, 마기의 태풍이 휘몰아쳤다.
조금 특별하던 네임드 몬스터는 이제 한 마리의 강력한 마물(魔物)로 변모했다.
인터루프에서 파악해 둔 녀석의 정보 일부는 이러하다.
칠흑의 셰라트 (Lv.395)
체력 : 9800000/9800000
마나 : 20480/20480
마기 : 104000/104000
[영물의 가죽 Lv.24]-방어력이 804 상승합니다!
-추가로 모든 피해를 47% 차단합니다!
[급속 자연치유 Lv.21]-초당 15183의 체력을 회복합니다!
천만에 가까운 아득한 체력, 어마어마한 방어력과 회복 속도까지.
신석을 집어삼킨 구미호는 유저들이 평범하게 발견할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몬스터였다.
현조차도, 레전더리 아이템이 걸린 게 아니었다면 이 녀석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력화의 파장도 녀석의 방어력을 0까지 깎아내지 못한다.
또한, 방어력이 0인 것과 아닌 것에는 피해량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인의 데미지로도, 프리딜이 아니라면 녀석의 회복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상황.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이곳은 미궁이다.
일정 피해만 줄 수 있다면 바늘로 거인을 쓰러뜨리는 일도 가능한 전장이었다.
‘한 방에 5퍼센트만 넘긴다면!’
그리고 현은 이미 모든 계산을 마쳐 두었다.
스스스. 아인의 몸이 사라졌다.
목표는 8가닥의 검은 꼬리 중 하나.
오직 한 가닥만 노리는 까닭은 ‘천사의 기초 검술’을 정확히 발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신석을 삼킨 여운으로 아직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짧은 틈.
서걱! 녀석의 꼬리 하나를 베었다.
[치명타! 72381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보호기재가 작동합니다! 셰라트의 모든 방어력이 10초간 3배 상승합니다!] [셰라트의 마력이 20%상승합니다!]피가 터지는 것처럼, 잘린 꼬리에선 마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후욱…!”
신음을 흘리며 물러서는 아인. 하지만 입가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산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 현의 웃음이었다.
「좋아, 데미지는 아슬아슬하게 나온다!」
「성공이야?!」
「아니, 이제부터 잘 해야겠지.」
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투명화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2분. 하지만 투명화가 없다면 웬만해서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다.
즉, 한 번의 공격을 위해서 2분간의 공세를 견뎌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이쪽은 한 번밖에 못 공격하거든!」
그때부터는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오오! 오오오!
칠흑의 여우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미친 듯 이곳저곳을 날뛰었다.
쉐도우 링커의 슬로우 디버프를 꾸준히 먹여도, 잠력 폭발을 최대로 중첩한 아인의 기동력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속도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녀석이 난사해대는 마법과 마기가 섞인 스킬들!
바닥은 전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용암의 군데군데 표류하는 징검다리마저도 잘게 갈라져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아인과 구미호는 드넓은 용암의 바다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레카르트의 마물 갑옷에 용암 내성이 없었다면 엄청나게 애를 먹었을 만한 난전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콰드드드드득!
셰라트가 허공을 할퀴자 붉은 파도가 십 미터까지 솟구쳤다.
마겁참.
얼핏 근거리 공격으로 보이는 녀석의 스킬은 사실, 시야의 모든 것을 가르는 기술이다.
세상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아인의 신체는 불꽃과 마기가 혼합된 참격에 찢겨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 쪽은 가짜.
현은 교묘하게 투명화와 환영을 사용해 녀석의 스킬을 회피하는 동시 사각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절반…!’
[치명타! 58372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서걱! 조금 짧은 어둠의 검이 드디어 네 번째의 꼬리를 잘라냈다.
[보호기재가 작동합니다! 셰라트의 모든 방어력이 10초간 3배 상승합니다!] [셰라트의 마력이 80%상승합니다!] [이제부터 스킬, ‘화형식’을 사용합니다!] [이제부터 스킬, ‘화신의 걸음’을 사용합니다!]캬아아아아아!
째지는 비명과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들. 수많은 문장들이 빠르게 현의 시야를 스쳤다.
‘뭐? 위험…!’
내용을 확인했을 땐 이미 셰라트의 새로운 스킬이 발동된 뒤였다.
거대한 녀석의 몸체가 질주하자 순간적으로 용암의 바다가 갈라지며 바닥이 드러났다.
한순간에, 셰라트는 아인의 코앞까지 도달해 앞발을 뻗고 있었다.
화신의 걸음.
아인과의 대련에서 여러 번 느꼈지만, 이것은 예비동작이 없는 탓에 반응 자체가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화형식에 속박되었습니다!] [2초간 모든 이동 계열 스킬이 봉인됩니다!]‘쳇…!’
반사적으로 그림자 질주를 사용했을 땐 이미 그러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스라와 아스리안은 완전히 같지 않다.
스킬도, 몬스터도.
지금처럼, 가끔씩은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도 있으니. 현도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멸의 각오!’
아인의 뒤에도 꼬리 하나가 돋아난 찰나.
새빨간 불꽃이 아인의 전신을 타고 올랐다.
콰아아아아!
그저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소각시킬 기세로 휘감아 도는 홍염의 격류.
다만 아무리 뜨거운 불꽃도 궁극기를 사용한 엘리멘탈 버서커의 털끝 하나 태우지 못한다.
소멸을 각오한 자에게 불, 냉기, 전기, 바람의 속성은 전혀 통하지 않으니.
「후, 여차하면 쓸 생각은 있었는데, 그래도 아깝네.」
화영식이 끝난 후.
재차 디버프를 먹여 두고 바람장벽에 안착한 현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궁극기? 다른 데 쓸 데 있었어?!」
「그건 아니지만… 맨몸으로 잡는 게 더 멋있잖아.」
「궁극기로 잡아야 멋있는 거 아니고?」
아인의 물음에 현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최적화가 아니니까.」
「으음?」
아인은 그 말을 이해하려 해 봤다.
결투에서 한끝 차이로 이기면 기분이 좋은 것과 같은 맥락일까? 하지만 사냥은 결투랑 같지 않은데.
현이 몬스터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려고 이런 시도를 벌이는 것은 아닐 테다.
‘저런 게 현의 비법일까?’
언젠가부터 자신은 결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점점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기로 연습해 봤지만, 그래도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말이 새로운 단서가 될 지도 몰라!
아인은 좀 더 유심히 현의 플레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셰라트의 마력이 120% 증가합니다!]긴박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화염계열의 피해를 무시한다 해도 싸움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캬아! 꼬리가 잘려나갈수록 녀석의 발악이 거칠어지고 있으니.
그런 전투를 약 십여분 째.
보면 볼수록 아인은 어려운 것을 쉬워 보이게 만드는 현의 재주에 감탄하고 있었다.
특히 한 번 본 스킬에 절대로 당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동화로 전해지는 감각에 취할 것만 같다.
절대 질 것 같지가 않아.
현은 어떻게 이렇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찰나, 어둠의 가호가 켜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분명 전투 직전에 꺼 두었는데,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팟!
아인의 몸이 공기 속에 녹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장을 밟고 떨어져 내린 어둠의 검이 마침내 ‘푸른 꼬리’를 잘라냈다.
「끝이야!」
갑작스런 현의 외침에, 1인칭 영화를 감상하듯 지켜보던 아인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콰아아아!
모든 꼬리를 잃은 구미호는 온몸에서 마기를 발산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인간이 심장을 잃으면 죽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이 잘려나간 구미호에게 체력은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다.
꼬리 없는 여우는 곧 마기로 흩어지며 용암에 스며들었다.
녀석이 남긴 것은 오직 꼬리 하나.
현은 허공에서 살랑살랑 떨어져 내리는 푸른 털 뭉치 하나를 낚아챘다.
[해당 아이템은 55초 뒤에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거대한 꼬리는 손에 쥐기 적당한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레전더리 무기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재료.
찬란히 빛나는 푸른 털을 손에 쥔 아인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두 개.’
이제 첫 번째 계단을 올랐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가공하기 전까진 재료일 뿐이니 현은 모든 조합이 완성되기 전까진 두근거림을 넣어 두기로 했다.
***
쿠르르르.
로열 구역의 휴식처로 이동하는 승강기 안.
갑작스런 땅울림에 마법진을 조종하던 관리자가 움찔거렸다.
‘헛, 지진…?’
떨림은 곧 잠잠해졌다.
잠시 착각인가 여기던 때, 쿠르르르! 재차 땅이 울렸다.
이번의 울림은 아까보다 훨씬 커서 강력한 보호 마법을 받고 있는 승강기의 통로까지 뒤흔들었다.
“어엇?!”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미궁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함께 승강기로 이동하던 4인 파티 중 누군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위험한 거야? 위험하면 지금 입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환불해 줘.”
“하하, 아마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아직은 미궁 초입밖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 근처엔 큰 소란이 일어날 일이 없거든요.”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관리인은 웃으며 말하는 동시, 한편으론 관리 마법진으로 근처 구역들을 점검해 보았다.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마법진에 전해진 진동과 마력의 흐름을 통해 일정 범위 내에 가해진 충격량이 산출되었다.
‘뭐야, 20분 동안 8만 기간테스의 마력이 발생했다고…?’
상층에서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수치의 마력.
순간 걱정이 들었다.
유저들이 거액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안전한 장소에서 안전한 사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궁의 이변을 알게 되면 장사에 나쁜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관리인은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곧 고개를 털었다.
‘괜찮겠지. 어차피 1, 2층엔 수급장도 없으니까.’
미궁의 가치는 몬스터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마법 재료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저들은 마법 재료에 혈안이 된 덕분에 입장료에 수만 골드를 지불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미궁이 붕괴하여 승강기의 통로나 휴식처의 길이 막히지만 않는다면 사업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 끝내고, 미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미궁 사업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간다면 반드시 해결책을 마련해야했다.
수급장 근처에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관리인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미궁 3층.
“진형 갖춰!”
세계랭킹 167위 길드, 블러드레이븐의 단원들은 아주 운이 좋았다.
미궁을 헤매던 도중 우연히 네임드 몬스터를 조우하는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빨리 잡아야 돼!.”
“괜찮아, 거의 다 잡았어! 체력 10퍼센트 아래까지 떨어뜨렸다!”
“망도 계속 보고 있지?”
수급장이 아닌 장소에서 네임드를 마주할 확률은 엄청나게 낮았다. 덕분에 그들은 복권에 당첨된 기분으로 신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면 하나 이상의 아이템이 확정으로 드랍되니까!
일반적인 드랍 아이템은 마석.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저 흔한 제작재료 중 하나에 불과한 그것은 이제 현실의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석이 되었다.
마석의 등급에 따라서 그것으로 집을 사거나, 혹은 건물을 살 수도 있는 덕분이다.
“아 미친!”
“왜, 무슨 일이야?”
“지금, 파티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
“뭐? 그럼 어떻게 해!”
그런 의미에서 블러드레이븐은 또 운이 나빴다.
도시 안에선 경비병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지만, 미궁 안은 그야말로 무법지대.
미궁에 온 유저들의 목적은 뻔하다.
네임드 몬스터를 발견하는 즉시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몇 명이나 되는데.”
“4명! 우리가 2명 많긴 한데… 사냥 도중 싸우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큭…! 눈치 채기 전에 극딜로 잡아버려!”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장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사냥감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마지막 순간의 실수를 만들었다.
툭, 흉측한 거미의 다리가 땅에 떨어지는 동시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뭐야.”
“미친….”
“어떤 새끼가 다리를 잘랐어!”
미궁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잘 알려진 하나의 금기가 존재한다.
불필요한 신체결손은 반드시 피할 것.
그것은 오히려 네임드들을 각성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미의 다리가 잘린 동시 모두의 눈앞엔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파르무의 모든 능력치가 10%상승합니다!] [이제부터 스킬 ‘라이트닝 트랩’을 사용합니다!]최악의 상황! 네임드의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다!
순식간에 근처의 공간이 거미줄에 뒤덮였고 전격이 거미줄을 타고 번쩍였다.
대응할 새도 없이 전위를 맡던 두 명이 허무하게 빛으로 흩어져 버렸다.
“젠장! 튀어!”
사냥을 지휘하고 있던 길드장도 간신히 거미줄의 범위에서 빠져나와 발을 굴렀다.
번개가 몰아치는 거미줄 근처엔 접근조차 힘든 상황.
“빌어먹을!”
잠시 후 등장한 이들의 얼굴을 목격하는 순간 길드장은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