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84)
탐욕의 대가
‘칫, 4인 파티인가?’
블러드레이븐의 앞에 새로운 유저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눈빛은 네임드 몬스터를 발견하는 동시 탐욕에 물들었다.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하던 사냥 마저 하시오. 우리는 상관하지 말고.”
“그쪽이야말로 가던 길 가는 게 어떤가?”
블러드레이븐 길드장은 가증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다른 유저로부터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응? 우린 휴식도 취하지 말라는 거요?”
“굳이 안전지대를 놔두고 이런 장소에서 쉴 필요는 없겠지.”
“음,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우린 이곳을 떠나겠소. 좋은 사냥 하시오.”
4인 파티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잠시 후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블러드레이븐은 네임드 사냥을 시작할 수 없었다.
녀석들이 떠나지 않고 근처에서 간을 보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망할 새끼들이…!’
번개를 사용하는 거미를 잡으려면 두세 명은 무방비 상태에 빠질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습을 감춘 녀석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나타나 자신들의 성과를 빼앗으려 할 게 분명했다.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네임드 사냥을 마친 너덜너덜한 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칼을 갈던 무리.
어디가 유리할지는 불 보듯 뻔한 상황.
「길드장님, 이제 어쩌죠?」
누군가의 걱정 어린 물음에 한참을 고민하던 블레드레이븐의 길드장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우리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겠군.」
「네? 네임드를 포기하고요?!」
「아니, 머저리도 아니고, 누가 포기한댔나? 반대편에서 대기한다는 말이잖아!」
기묘한 신경전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나머지 한 쪽은 상처 입은 무리를 상대하거나, 혹은 상처 입은 사냥감을 마저 사냥할 생각으로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
먼저 움직인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약 20분이라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네임드 몬스터를 멀리 둔 장소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이대로 오래 대치해서 좋을 게 없어.’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장의 낯빛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언제 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날지 몰라. 무한정 미적거릴 수는 없다.
아니면 다리가 완전히 재생된 사냥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큭, 다른 방법이 없나?’
결국 길드장은 결심을 내렸다.
적당히 합의를 봐서 함께 사냥을 하자고 제안하는 수밖에.
하지만 바로 그 때.
자박자박. 멀리서부터 정적을 깨는 발걸음소리에 모두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또 누군가가 온다!’
‘조금 더 빨리 결정해야 했어!’
미궁 곳곳에 걸린 마력 등불의 배경 위.
길게 늘어선 그림자 하나가 바닥을 비추었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실루엣.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일행은 숨죽인 채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한명인가. 그나마 다행이로군.’
상황을 파악한 길드장은 조금 안도했다.
혼자뿐이라면 랭커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애초에 블러드레이븐은 PvP전문 길드다.
마석의 가격이 폭등하는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미궁 탐험대 노릇을 할 일도 없었으리라.
「빨리 죽여 버리는 게 낫겠어.」
「죽입니까?」
「그래, 이 이상 정보가 퍼지게 놔둘 순 없지.」
이곳은 위험이 가득한 미궁. 랭커라도 혼자 올 만큼 만만한 장소가 아니다.
얼핏 혼자처럼 보여도 십중팔구 함께 온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 네임드 몬스터에 관한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은 없었다.
「전사 직업은 아니야. 실루엣을 보아하니 두꺼운 갑옷을 입은 것 같진 않거든.」
「마법사나 사제일까? 흐흐, 그렇다면 내가 순식간에 암살할 수 있지.」
블러드레이븐 길드원들은 가장 적당할 때를 기다렸다.
상대가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움직일 요량이었지만.
바로 직전, 갑자기 그림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기, 일곱 명이나 모여서 뭐해요?”
‘일곱 명…?’
순간 블러드레이븐 길드장의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자신들이 숨어있던 벽 너머에서 완전히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뭐, 미궁 좀 돌아다니다가 잠깐 앉아서 쉬는 중이지.”
“여기서 쉰다고요?”
“하핫, 3층까지 쉬지 않고 내려오니 너무 힘들어서 말이야.”
하나 둘, 새로운 목소리가 추가되더니 그것들은 곧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무슨, 파티가 하나 더 있었다고?!’
상황을 깨달은 블러드레이븐 길드장은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반대편에 있을 4인 파티 외에도, 벽 뒤의 7인 파티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상황이 변한 지금, 암살계획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흐음, 여긴 쉴 만한 장소가 아닌데. 안전지대도 아니고.”
자박 자박.
중얼거리는 그림자는 곧 모퉁이를 돌아 블러드레이븐 길드원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생각보다 좀 더 작은 소녀였다.
어두운 미궁에서 모자를 눌러쓴 탓에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여기도 사람들 또 있네.”
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려 앉은 유저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홀 한가운데 서있는 네임드 몬스터, ‘파무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쟤가 왜 여기까지 나와 있지? 서식지가 바뀌었나?”
“큭…!”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또 한명의 유저가 네임드의 존재를 눈치 챘다!
녀석이 동료에게 귓속말을 보내면 자신들은 총 세 곳의 파티와 네임드 쟁탈전을 벌여야만 하리라.
‘아까 다 잡은걸 이 지경까지 오다니! 어떤 망할 새끼가 마지막에 다리를 잘라서…!’
이렇게 된 이상 협상은 불가능했다.
기회를 노려 마지막에 마석을 가로채는 수밖에!
다행히 미궁 안의 드랍 아이템은 1분간 소유권이 정해지지 않는다.
블러드레이븐의 네 명 중 셋이나 도적 계열이었으니, 아직 암살을 노려볼 수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길드장이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이었다.
“그쪽도 여기서 쉬는 거예요?”
“…그래.”
“굳이 여기서요?”
“우리가 어디서 쉬든 무슨 상관이지?”
무뚝뚝한 남자의 대답에 현은 더 의문에 빠졌다.
「이상한데?」
「뭐가?」
현은 자신이 발견한 모순점들을 설명해 주었다.
「네임드에 환장한 유저들이 눈앞에 사냥감을 두고 이토록 태평할 수 있나.」
「음… 네임드인 걸 모르나 봐.」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돼, 미궁의 대형 몬스터에겐 마석이 드랍될 확률이 꽤 높아. 네임드가 아닌 건 상관없다고.」
「아무도 안 잡으면, 우리가 잡으면 되겠네!」
아인은 간단명료한 해답을 알려 주었다.
「그런가?」
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확인해 보았다.
가끔씩 본인들의 사냥감을 스틸(Steal)했다며 시비를 거는 파티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복도 뒤편에 모여 있던 7인 파티도 근처로 다가와 있었다.
현은 먼 곳의 거대 거미를 가리키며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그럼 저거, 제가 잡습니다?”
찰나, 몇몇의 안색이 딱딱해졌고,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은 몇 명 파티지?”
‘뭐야,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노려봐?’
갑작스레 쏘아진 날카로운 시선.
현은 질문한 녀석을 훑어보며 짧게 대답해 주었다.
“두 명인데?”
“둘? 그래. 둘이서 잡겠다면 상관없지.”
“흐흐, 우리도 구경이나 하겠소. 아참, 우린 처음부터 쉬는 중이었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소름이 돋는 듯, 아인이 중얼거렸다.
「으… 현, 이 녀석들 말투가 왜 이래!」
「그러네.」
현도 바보는 아니니 연극배우 같은 과장된 말투와 웃음을 모르진 않았다.
실제로 이 장소는 거짓된 연극이 가득 찬 장소였으니 그 느낌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이제야 뭔지 대충 알겠어.」
주위 유저들의 의도도 파악했다.
이곳은 양보 가득한 휴식처가 아니라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현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경고했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다들 멀찌감치 떨어지는 게 좋을 걸?”
“흐음?”
그 순간, 좌중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훗. 어째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야 하지?”
“음… 죽을지도 모르니까?”
“오오, 걱정 고맙네. 하지만 우리 몸은 알아서 챙길 테니 상관하지 마시게나.”
「역시.」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냄새를 너무 풍기잖아.」
「나한테 냄새… 나?!」
갑자기 쭈뼛거리는 아인에게, 현은 재차 말했다.
「너 말고. 저 녀석들.」
「그랬나?」
「곧 보면 알 수 있겠지.」
현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거대거미가 웅크린 넓은 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2미터 정도 크기의 거미 파르무.
같은 네임드라도, 구미호 셰라트와 비교하면 약해빠졌으니, 마음만 먹으면 2분 내에 녀석을 사냥하는 것도 가능했다.
‘너무 빨리 사냥을 끝내면 안 돼.’
그럼에도 현은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간단한 일을 굳이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파르무라는 네임드는 재료 외의 용도로 써먹을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충 10분 정도만 살려두면 그 마법이 발동되겠지?’
신석으로 진화시킨 파르무는 아주 특별한 마법을 사용한다.
바로 공간전이(轉移)의 마법. 순식간에 미궁의 여러 계층을 이동하는 스킬이다.
미궁에서 텔레포트 계열의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파무르의 스킬만은 예외다.
녀석은 미궁에서 전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킬을 활용하면 단번에 16층까지 이동할 수 있어.’
애초에 20층은 너무 깊었다.
걸어 내려간다면 최소 며칠, 길면 몇 주가 걸릴 테다.
악의 씨앗 던전처럼 외길로 이루어진 던전이 아닌데도 그만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은 미궁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아인, 이번엔 네가 해볼래?」
현은 불쑥 물었다.
「내가?」
「그래, 왠진 모르겠지만, 너 아까부터 몸이 근질거리고 있잖아.」
동화로 느낄 수 있었다.
셰라트를 잡은 이후부터, 아인의 감정이 계속 들썩거리고 있단 사실을.
아인이 PvP가 아닌 곳에 이토록 의욕을 불태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지금 사냥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조금?」
「뭘 조금이야. 해 보고 싶으면서.」
후후후, 아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실수하지 않을까 몰라.」
「괜찮아, 데미지 계산식은 간단하니까. 내가 옆에서 알려줄게.」
현은 사냥의 핵심, 최소한의 데미지로 신체결손을 일으키는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엔 레어 장검으로, 두 번째는 장갑을 벗은 이프리트의 발톱으로, 그리고 마지막 형태를 상대할 때는….」
「어둠의 검으로?」
「아니, 그 때도 네 이프리트의 발톱이면 충분해. 대신 무기를 착용하고, 투명화를 제외한 보조 스킬들을 전부 사용해야겠지만.」
「음….」
설명을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아인.
하지만 그 거짓말은 곧바로 동화를 통해 들키고 말았다.
「…이해 못 했잖아!」
「그, 그렇지!」
「앞부분만 확실히 외워. 까먹은 곳은 싸우면서 다시 설명해 줄게.」
스르륵.
설명을 들으며 아인은 아까와 다른 검을 뽑아들었다.
한편, 현은 뒤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의 기척을 다시 살펴보았다.
‘정말 물러날 생각이 없나 보네.’
다른 파티가 사냥할 때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는 것이 매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 다른 생각이 있다고 확신해도 될 것 같았다.
‘미궁 안이니까. 마침 잘 됐어.’
현은 유저들의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스라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쉽게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은 많았다.
‘여기라면 악명이 오르진 않겠지?’
아스리안에 넘어온 이후 유저를 죽인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특히, 퀘스트를 위해서가 아닌 감정적인 싸움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굳이 싸워서 볼 만한 이득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든다면….
과거에, 현은 그런 자들을 가만히 놔 둔 적이 없었다.
‘아니.’
문득 좋은 방법을 떠올린 현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죽이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유저는 자해가 불가능하다.
피격 시 발동하는 스킬의 악용을 막기 위한 시스템 때문이다.
그걸 바꿔 말하면, 아스리안의 유저는 가끔씩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
죽지 못한다는 게 유저에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한 번 알려줘 볼까?
「으, 으응? 현, 방금 어둠의 가호 썼어…?」
순간, 아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 와중에도 파무르의 거대한 앞발을 피해내는 컨트롤이 대단했다.
「아, 신경 쓰지 마.」
아차. 자신이 지금 동화 상태임을 깨달은 현은 잠깐 새어나간 감정을 갈무리했다.
지금은 저런 녀석들의 사정보다, 아인을 봐주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장, 사이트.
개인랭킹 3573위인 사이트는 ‘랭커’라 불리는 등수까진 아니었지만 접속자 수로 비교해 본다면 나름대로 최상위권에 속하는 유저였다.
‘아직 기회는 있어.’
세상은 항상 비겁한 놈이 이긴다.
미궁 안에선 더욱더 비겁해야만 한다.
눈치 하나로 길드를 167위까지 끌어올린 그가 가장 자신하는 능력은 바로 ‘상황 판단력’.
이번에도 사이트는 누구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끝에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사냥이 끝나기 바로 직전, 우리는 저 녀석들을 기습한다.」
사이트는 7인 파티를 흘겨보며 길드원들에게 지시했다.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가 되물었다.
「우리 넷이서 일곱 명을 공격한다고요?」
「정확해.」
「하지만 여기선 먼저 움직이는 쪽이….」
여럿이 하나의 사냥감을 호시탐탐 노리는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에선 돌발행동을 먼저 벌이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사이트의 판단은 상식과 달랐고, 그것은 가장 정확한 판단이기도 했다.
「여긴 미궁이다. 바깥과 다르지. 네 명뿐인 우리라도 순식간에 7명을 몰살시킬 수 있어.」
사이트는 미궁이란 장소의 특성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신체결손이 쉽게 일어날 때 ‘선공권’은 수적 우위를 무위로 돌릴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내가 신호하면 동시에 단검을 하나씩 던져. 녀석들이 우왕좌왕하는 찰나, 바로 돌진해서 남은 녀석들을 죽인다.」
「한방에 안 죽으면요?」
「무조건 머리를 노려야지! 심장은 가끔씩 빗나가는 경우가 있거든!」
이곳이 미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할 전략.
동시에, 미궁이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자, 이제 2인 파티의 네임드 사냥이 언제쯤 끝날지 유심히 지켜보자고.」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트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소녀가 혼자서 거대 거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던 순간부터 사이트는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2인 파티라면서, 동료는 어디 있지?’
그녀가 검을 꺼낼 때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뭣? 동료도 아직 안 왔는데 사냥을 시작하려는 건가?’
취이이이! 이윽고 네임드가 눈앞의 소녀를 인식하며 괴성을 터뜨린 그 순간, 사이트는 모든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파티가 있다고 말한 것은 페이크!
소녀는 정말로 혼자 네임드를 잡을 생각이었다.
손에 든 화려한 장식의 검을 목격하는 찰나 사이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재빨리 그 아이템의 이미지를 검색해 봤기 때문이었다.
「마검사의 돌풍! 180레벨제한 무기다! 저 여자, 100위권 이상의 랭커야!」
「랭커?!」
「누구…지? 100위권이면 아이디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랭커라는 단어를 듣자 바짝 긴장하는 블러드레이븐 단원들.
길드장 사이트가 재빨리 길드원을 독려했다.
「랭커라도 위축될 필요 없다. 미궁에선 암살자가 모든 직업의 우위에 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엔 사이트의 눈동자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서걱! 마검사의 돌풍이 깔끔하게 파무르의 신체 일부를 절단한 순간부터였다.
‘다리를 자른다고…?’
블러드레이븐은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해 보았다.
저 거미는 다리가 잘린 이후부턴 전격 마법을 함께 사용하기에 공략이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위기에 처할수록 사납고 민첩해지는 탓에 신중하게 공격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전격을 피하고, 엄청난 속도로 녀석을 따라붙으며 순식간에 다리를 베어내고 있지 않나!
「잠깐, 사냥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잖아!」
파칙! 파칙!
다리가 잘릴 때마다 재차 번개가 튀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10초도 안 되어 그 사납던 거미가 모든 다리를 잃고 버둥거리는 모습은 쉽게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곧 사냥이 끝나! 지금 움직여!」
사이트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7인 파티의 후방에서 기습을 시작했다.
“뭐, 뭐야… 커헉!”
“이 새끼들…! 으허…억!”
순식간에 여럿의 목이 꿰뚫렸고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드랍 아이템에만 정신이 팔린 탓에 일어난 대참사!
소리를 죽이는 스킬이 결정적이었다.
블러드레이븐의 단원들이 7인 파티의 후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그들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으니까.
이처럼 미궁은 현실처럼, 아니 현실보다 허무하게 목숨이 사라져 버리는 장소였다.
「전부 죽였습니다!」
「의외로 엄청 쉬운데? 역시 길드장님이야!」
「좋아!」
네 명 중 셋이 암살자.
극단적인 직업 언밸런스가 이토록 고마운 날이 올 줄이야!
사이트는 작은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목표로 방향을 바꿨다.
「바로 사냥감에 집중해! 곧 아이템이 드랍된다!」
숨어 있던 또 다른 4인 파티도 재등장했다.
예상대로, 그들 역시 사냥의 마지막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블러드레이븐과, 처음 마주친 4인 파티. 총 여덟 명의 유저가 일제히 홀 가운데로 돌진해 왔다.
「랭커부터 죽여! 나머지는 넷은 어차피 우리가 이기니까!」
그것이 사이트의 생각이었지만,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드원들과 소녀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
꾸득 꾸드득.
바닥에 버둥거리던 거대 거미의 모든 다리가 서서히 재생되어가고 있었다.
자연치유라고 말하기엔 비상식적인 속도로.
「잠깐, 사냥이 안 끝났어…?」
키에에에에!
거미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동공을 울렸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마력의 떨림은 모두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다시 재생됐잖아!」
콰드득!
소녀의 양손에 새빨갛고 거대한 한 쌍의 발톱이 돋아난 것도 그 때였다.
2차 형태의 파무르를 잡기 위한 무기.
‘저 스킬은…?!’
이프리트의 발톱을 목격하는 순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이곳의 유저들은 최소 150레벨의 상위권 유저들.
커뮤니티들에 돌풍을 일으킨 역사 퀘스트를 모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 이 여자 어디서 본 적 있어! 아이디가 뭐였지…?」
「아인이잖아 멍청아!」
모두가 아인의 존재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사이트는 거미의 몸에서 튀기는 강렬한 스파크를 눈치 챘다.
「위험해, 다들 물러서라!」
드드득.
잠시 후 새까만 일렁임이 아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아인이 직접 발동시킨 스킬, 어둠의 갑주.
파치치치치칙!
바로 다음 순간, 홀에 뇌전의 폭풍이 내리쳤다.
2차 형태로 변신하자마자 시작되는 파무르의 대면 스킬. ‘일렉트릭 케이지(Electric Cage)’가 발동된 순간이었다.
‘큭… 어떻게 된 거지? 사냥이 끝나기 직전 아니었나?’
다행히 블러드레이븐의 전원은 번개가 내리치는 구역 밖으로 빠져나왔다.
겨우 한숨을 돌린 뒤, 사이트는 방금 상황을 천천히 되감아 봤다.
소녀… 아니, 아인은 뭔가를 거미에게 던졌다. 푸른 보석과 닮은 무언가를.
그것은 아마도.
‘마석?’
설마, 마석을 먹인 것일까?
지금 마석의 시장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체 마석을 왜 먹였지?’
아스라의 정보들 중엔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았다.
숨겨진 퀘스트, 숨겨진 장소,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재료 획득 방법까지!
‘뭔가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마석을 먹이로 사용한 것은 마석의 가치 이상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것밖에 가능성이 없었다.
순간, 사이트의 눈동자에 탐욕이 일렁거렸다.
전작의 유저라는 아인이 마석을 사용해서까지 얻으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곳은 미궁 안. 천상계의 랭커도 암살할 수 있지 않을까?
사이트는 흉포하게 날뛰는 거미를 지켜보며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궁극기 준비해.」
「설마 아인과 싸우려고요? 아무리 마석이 귀해도….」
「마석이 아닐 거다.」
사이트는 기억을 떠올려 봤다.
경매장엔 아주 가끔씩, 정체모를 마법재료가 매물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 소재의 정체도, 어디서 구하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물건들.
마석에만 혈안이 된 유저들은 잘 몰랐지만, 사이트는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는 특별한 재료가 존재한다는 은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다리를 자르고 마석을 먹인다. 딱 봐도 평범해 보이는 과정은 아니잖아?」
「설마 레어 등급 재료를 구하는 방법이….」
「그래, 바로 저거겠지.」
사이트는 여태까지 아인의 행동을 떠올려 보며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그 한마디로,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원들은 사이트의 말에 넘어왔다.
상위 등급 마법재료!
게임 속 데이터에 불과한 주제에 집문서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다.
「다들 준비해라.」
「…!」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기회 앞에서, 블러드레이븐의 길드원들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눈앞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아인과 네임드 몬스터의 싸움은 그들이 본 어떤 전투보다 격렬했다.
홀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번개와 불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모두 어쩔 수없이 물러서야 할 정도였다.
크에에에! 화려한 불꽃이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거대한 거미의 다리가 뜯겨나갔다.
모든 다리가 다시 한 번 잘려나가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또 다리를 다 잘랐다!」
「지금이에요?」
「잠깐, 아직!」
사이트는 일행을 만류했다.
아인이 이번에도 조그만 결정을 던지는 광경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건 뭐지?’
푸른 마석과 달리, 투명한 신석은 멀리서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도 뭔가가 더 있는 건가!’
아까 전 마석을 삼키자마자 번개를 방출하던 녀석의 패턴을 떠올린 사이트는 서둘러 모두에게 경고했다.
「일단 위험하니 빠져! 또 번개가 몰아칠 거다!」
그러나 사이트의 예상과 달리, 이번엔 번개의 폭풍이 몰아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녀석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밧!
순식간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이 퍼져나가며 온 공간을 잠식했다.
파무르의 가장 마지막 형태.
키이이이! 성물(聖物)이 내지르는 마력의 떨림은 모두의 혼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있지, 현.」
신성력이 담긴 빛을 한껏 뽐내는 파무르를 앞두고, 아인이 물었다.
「저 녀석들은 어쩔 거야?」
아인도 멀리서 은근슬쩍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안 죽여?」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넌 파무르에게만 집중해.」
아인은 갑자기 솟아오른 차가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현의 뜻이 이렇게 확고하다면 자신이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 도중, 현의 목소리가 좀 더 귓가에 전해졌다.
「다리는 5개 이상 자르면 안 되는 거. 기억하고 있지?」
「어? 그, 그야… 당연히…」
막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아인은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거짓말을 준비하기 직전의 떨림. 현이라면 충분히 알아채고도 남겠지.
「당연히 까먹었지!」
「하…하.」
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선 아까의 설명을 반복해 주었다.
「파무르는 특정 조건이 맞춰져야만 공간전이를 사용할 수 있어. 우리 역할은 그 조건을 만들어주는 거야.」
「뭐였더라…?」
「첫째는 정확히 절반의 다리를 자를 것. 4개의 다리가 잘려야 녀석의 스킬이 개방되거든.」
파무르는 다리가 잘릴 때마다 능력치가 상승하고 새로운 스킬이 생겨난다.
주의할 건 5개 이상의 다리를 자르면 녀석은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없게 된다.
결계도 만들지 못하니, 공간전이를 발동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의할 점은 시간이야.」
「시간?」
「결계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너무 빨리 잡아버리지 말라고.」
파무르의 공간전이는 한순간에 발동하지 않는다.
즉, 파무르가 4개의 다리로 결계를 만들기까지 기다려 주어야만 녀석과 함께 층을 이동할 수 있었다.
「크흠, 이제 진짜 알았어!」
짧게 헛기침을 한 아인은 마지막 단계를 위한 버프를 차근차근 발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두 종류의 파장과, 잠시 발동을 해제해 둔 천사의 검술.
콰앙! 어느새 마력의 잠력 폭발 또한 순식간에 3중첩에 다다랐다. 소모되는 체력은 파무르의 몸통을 할퀴는 것으로 수급이 가능했다.
그렇게 신체결손을 위한 최적의 데미지를 확보한 아인은 자신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봐, 데미지 계산 완벽하지? 어쩌면 내가 현보다 빨리 잡아버리는 걸지도 몰라!」
「빨리 잡지 말라고, 방금 말한 참인데…?」
「아, 알지…! 그냥 해본 말이잖아.」
현은 동화로 전해져 오는 미묘한 떨림을 잡아냈다.
또 거짓말. 하지만 뻔히 들킬 걸 알고서도 한 것이라 그런지 화가 나기보단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아인은 전투에 몰두하면 자잘한 것을 안 보니까.’
그 덕분에 가끔 초인적인 집중력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지만, 결투가 아닌 사냥은 집중보다 계산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응?」
「반응속도는 네가 나보다 약간 더 나은 것 같아. 기억만 똑바로 하면 되겠지.」
두근, 현은 흐뭇한 기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아인의 입가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괜한 칭찬을 꺼냈나? 그래도 큰 상관은 없겠지.
아무리 전투에 몰두하는 아인이라도 이만큼 말해둔 것을 잊진 않을 것이다.
[파르무의 모든 능력치가 10%상승합니다!]키에에에!
녀석의 첫 번째 다리가 잘려나갔다.
잘린 다리는 사체로 남는 대신 신성의 폭발을 일으켰고, 폭발이 일어난 곳엔 빛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이 공간을 채웠다.
파칙 파치칙!
파무르가 거미줄 위를 이동할 때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빛의 끈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거미줄은 홀의 주변의 벽과 바닥, 천장까지 얽혀 있었으니 주변의 지형이 난장판으로 변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진화를 거듭하며 녀석의 몸체는 오히려 1미터 정도로 줄어들었고, 그만큼 민첩해졌다.
치직, 치지지직!
그런 녀석이 온군데 거미줄을 놓으며 발광하는 모습은 마치 번개 덩어리가 사방에서 쏘아지는 것만 같았다.
“제길! 이건 또 뭔데…!”
갑자기 시작된 전투에 정작 당황한 것은 블러드레이븐 길드원들.
공중전도 겪어보지 못한 그들이, 벽이나 바닥 아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전투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
파직! 허공을 가로지른 섬광.
누군가가 짧은 단말마와 함께 빛으로 흩어졌다.
난데없이 한 가닥의 번개가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탓이었다.
아니, 그것은 번개가 아니라 바닥에서 천장으로 거미줄을 타고 오른 파무르!
혼비백산하여 번개를 피해 다니는 블러드레이븐 길드원들을 보며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씁,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파무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빛의 거미줄을 치는 것은 단순히 이동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녀석이 움직이는 자취는 하나의 마법진.
내부의 모든 영혼을 전이시키는 거대한 결계를 형성하려는 목적이었다.
‘한 명 정도는 상관없나?’
현은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쓰기보다 아인을 봐 주는 일이 중요했기에.
아인의 공략법은 그야말로 단순함 그 자체였다.
자신이라면 슬로우를 먹인 뒤, 굼떠진 녀석의 다리를 하나씩 잘라나갔을 텐데, 아인은 이 민첩한 네임드와 막무가내의 속도전을 벌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아인의 기동력이 뒤쳐지는데도 특유의 페이크 무빙으로 한 번씩 공격을 적중시키고 있다는 사실.
마치 파무르의 움직임을 읽어내기라도 하는 듯, 현은 공략이라기보다 결투를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파르무의 모든 능력치가 40%상승합니다!] [스킬 ???가 개방되었습니다!]‘열렸다!’
마침내 아인이 파무르의 다리 4개를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키이! 다리를 잃을수록 녀석이 거미줄을 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파무르가 친 거미줄은 어느새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장과 바닥을 관통하는 빛줄기가 그어지자, 문양의 대칭성이 완성되었다.
지잉. 지이이잉!
온 방향에 환하게 빛나는 빛의 군집.
공간전이의 마법이 발동되기 위한 전조현상이다.
「아인, 기억하고 있지?!」
「알아, 이번엔 정말로 안 까먹었다고!」
‘생체리듬 가속!’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3초.
아인의 기동력은 일순간 파무르를 추월했다.
「닿았다!」
콰직!
녀석의 등에 이프리트의 발톱을 박아 넣은 아인이 소리쳤다.
발톱으로 결계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파무르를 끌어당겼다.
온 세상이 번쩍인 것은 바로 다음 순간.
결계 안의 모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인에게도, 파무르의 몸체에도, 저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는 자들의 신체에도 수천 가닥의 번개가 이어졌다.
팟!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전투가 있던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쿠르르.
미궁은 서서히 부서진 벽을 복구하며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분 만에, 전투가 있던 장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마냥 고요에 잠겼다.
***
루이즈와 함께 이동하던 파피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음? 무슨 일인가?”
제자리에 서서 천장을 바라보는 파피를 의아히 여긴 루이즈가 물었다.
파피는 안색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상층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군요.”
“무슨 일이라고?”
“상당한 양의 신성력을 지닌 자가 근처에 있습니다, 어쩌면 신녀님을 추격하는 자인지도 모르죠.”
같은 천인이라도 파피의 기감은 다른 천인들보다 못하다.
그렇기에, 그가 신성력을 느꼈다는 것은 그 기운이 아주 근처까지 다가왔음을 뜻했다.
“날 찾아온 자…? 5년 동안 쭉 무사했는데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
“혹여나 신녀님이 외출하였을 때 꼬리가 잡힌 것이 아닌지….”
“뭐라? 내 잘못이었단 말이냐?!”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대로 미궁을 올라간다면 누군가를 마주칠 것만은 확실합니다.”
루이즈는 파피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신성력을 가진 자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음, 두 명… 아니, 한 명입니다.”
“왜 둘이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냐…?!”
“잠시 혼동했습니다. 둘 중 하나는 미궁의 성수(聖獸)였던 것 같군요. 지금은 다시 사라졌습니다.”
“으음….”
루이즈의 생각이 깊어져 갔다.
그 위험하다는 자가 수배서를 보고 찾아온 것인지, 혹은 ‘어둠’을 찾아온 것인지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다만….’
하지만 만약 빛의 신탁을 받고 ‘어둠’을 찾아온 자라면 이야기는 심각해진다.
파피는 자신을 비운의 신녀로만 알고 있다.
사실은 어둠의 대악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마기를 다루는 것까지 눈감아 주었지만, 그것이 악마까지 포용해 준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니다, 어둠이 목적이라면 혼자서 찾아올 리는 없겠어! 그래, 수배서를 따라왔거나, 혹은 우연히 미궁에 들어선 자겠구나!’
신탁은 아닐 것이다.
신탁이 내린 것이었다면 5년 전의 그 때처럼 수백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우르르 몰려왔겠지!
일단 자신이 타겟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한층 마음이 놓이는 루이즈였다.
“으응?”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루이즈 역시 파피처럼 제자리에 멈춰 서서 천장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신녀님…?”
‘이 기운은!’
그녀 역시 기감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에.
불완전한 어둠이 느낄 수 있는 기감의 종류는 많지 않다. 공감이 봉인되었어도, 근처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운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현이냐…?!’
자신의 그림자가 아주 근처까지 다가와 있다!
‘기도하던 게 아니라, 날 찾아온 것이었나!’
“신녀님, 무슨 일입니까?”
다시 묻는 파피의 목소리에 루이즈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냥… 올라가는 도중에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그건 제가 했던 말이 아닙니까?”
“으응? 그랬지. 맞구나…!”
곧 만나게 될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며, 두 사람은 천천히 지상을 향하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
특별한 마력으로 감싸인 라비린스의 지하엔 유저들은 물론 NPC들도 잘 모르는 신비스러운 비밀들이 다수 존재한다.
비밀들은 밝혀질 때마다 누군가를 보물 상자의 곁으로, 혹은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파무르의 전이결계도 그 중 하나.
파치칙!
결계의 발동과 함께, 하나의 점으로 이루어진 전격은 무수히 넓은 공간에 고루 퍼져나갔다.
결계 내부의 영혼들이 16층의 어딘가로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장소가 바뀌었다!”
“네임드도 사라졌어! 뭐야, 우리 길드원까지 사라졌다고…?”
「다들 어디로 갔나?」
「모르지만, 어쨌든 죽진 않았어!」
「빨리 네임드를 찾아!」
미궁의 구조는 거대한 두 피라미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붙여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16층까진 내려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32층까지는 다시 역피라미드 형태로 좁아진다.
즉, 16층은 미궁에서 가장 광대한 층.
아무도 그 넓이를 헤아리지 못한다지만, 현은 인터루프에서 16층의 가로 세로의 거리가 각각 20킬로미터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드넓은 미궁에 뿔뿔이 흩어진 블러드레이븐 단원들이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있을 린 만무했다.
「된 거야?!」
「맞아, 제대로 왔어!」
반면 현과 아인은 목소리가 전해질 만큼 가까운 곳으로 전이했다.
키에에에!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거미도 근처에 있었다.
파무르의 전이마법은 맞닿은 대상들을 함께 이동시키기 때문이었다.
「쫓지 마.」
현은 거미줄을 모두 잃고 절뚝거리는 파무르를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왜?」
「이따 올라갈 때도 한 번 더 전이를 써먹어야지.」
파무르의 소재는 나중에 얻어도 되지만, 녀석이 죽게 되면 전이마법을 활용할 수는 없다.
「위치를 확인해 뒀으니까, 언제든 찾아올 수 있어.」
현은 저 멀리, 천장에 달라붙은 채 서서히 회복하는 파무르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
‘이 길은 여전히 헷갈리네.’
아인에게 동화한 채로 미궁을 걷던 현은 문득 느껴지는 아스라의 기억에 오싹함을 느꼈다.
미궁의 16층과 17층엔 어떠한 몬스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은 단 한 마리. 천장에 매달려 있는 파무르가 있을 테지만, 녀석을 제외한다면 정말 아무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목숨을 노릴 만한 함정조차 없는데도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현, 여기 아까 왔던 길 아니야?」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야.」
「그, 그런데 갑자기… 왜 날 데리고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건데…?!」
「…막다른 곳이 아니거든.」
스르륵- 아인의 몸체는 굳건한 벽을 그대로 통과했다.
바로 다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초록빛 불꽃이 가득한 새로운 통로.
이처럼 16층과 17층에는 눈속임 장치들이 가득하다.
벽에 새겨진 마법진 중엔 소리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존재했다.
현은 자신을 노리던 녀석들이 어떤 상황일지 떠올려 보았다.
‘좀 너무했나? 패치 직후 바쁘게 움직일 시기에 이곳에 갇혀있어야 한다면… 나 같으면 미쳐버릴 지도 몰라.’
16층과 17층은 광대한 미로.
아무리 달려도 똑같은 장소를 맴돌 뿐이고, 벽이나 바닥을 내리쳐 봐도 마나만 소모될 뿐이다.
결국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이 최후로 선택하는 행동은 바로 자살.
하지만 NPC가 아닌 한 그조차 불가능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끼지 않는 유저들에겐 낙사(落死)가 거의 유일한 자살 수단이지만, 그 방법은 민첩이 낮은 극수소의 직업군만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뭐, 인과응보니까,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길 바래야지.’
운이 좋다면 서로 만나 동반자살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일주일쯤 미궁을 헤맬 수도 있겠고.
어찌되든 자신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아인, 넌 여기부터 온 적 없나?」
「응… 아마도.」
「난 너랑 만나기 전에 와 봤는데, 그때도 도저히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더라. 결국 운영진에게 구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랬더니 꺼내줬어?」
「아니… 안 구해주더라고. 정말 다시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기억이지.」
「그래…? 그럼 이번에도 안 구해주겠네?」
갑자기 아인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