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89)
천인의 시험
아스리안 오픈 후 어느덧 9개월.
그동안 게임업계엔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었다.
현실에서 아스리안의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아스리안 정규 방송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현자의 대도서관’이란 방송은 정보의 유용함과 정확함 덕분에 유저들 사이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정보 전문 프로그램이었다.
“오늘 가져온 정보는 바로… 특별한 NPC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특별한 NPC라니 누굴 말하는 걸까요?”
“흠, 세이라씨, 천사가 뭔지 아시나요?”
“천사요? 저 말인가요?!”
진행자 남녀의 오프닝 멘트와 함께 오늘의 특집 방송이 시작되었다.
“…네, 바로 초월자. 아스리안 최상위 존재를 뜻하죠. 초월자들에게도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계실 겁니다.”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계급에 따른 레벨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레벨이요? 천사나 악마도 레벨이 있었나요?”
“있죠. 아스리안의 모든 존재는 레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태껏 어느 커뮤니티에도 공개되지 않은 정보.
전작에서도, 일정 수준에 도달한 랭커가 아니라면 잘 모르던 사실이었다.
“대천사는 500레벨. 로열은 475, 비숍은 450, 플레인은 425, 그리고 가장 낮은 서번트는… 이쯤 되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400레벨입니다.”
“엥? 생각보다 너무 낮네요.”
여성 진행자는 대본대로 질문을 던졌다.
“몇 년 만 지나면 제가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후후, 물론 낮은 레벨에는 이유가 있지요. 천사는 보이는 레벨이 다가 아니거든요.”
설령 초월자의 레벨이 유저와 같아도 스펙은 같지 않다.
모든 초월자는 네임드 보스 이상의 보정을 받기 때문이다.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동시, 힘의 행사에도 제약을 지진 존재들이니.
물론, 초월자의 레벨이 낮아 보이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세이라씨도 아스리안의 전작이 뭔지 아시겠죠?”
“앗! 그 아스라…!”
“맞아요, 아스리안의 모태가 된 게임이에요. 그곳 랭킹 1위 유저의 마지막 레벨이 450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지는 것이 모든 RPG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아스라 온라인은 그 정도가 다른 게임보다 심했다.
성장의 난이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200레벨부터 급경사. 300레벨부터 지옥! 그리고 400레벨이 넘어가면 경험치가 오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좀 낮아 보이죠? 하지만 제가 알아온 정보대로라면 450레벨은… 인간이 100년 동안 아스리안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레벨이라는 사실!”
“100년이나요?!”
“게다가 400레벨부터는 10퍼센트의 경험치가 날아가는 사망 패널티가 추가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레벨이 하락할 수도 있단 거죠. 실제로 아스라 온라인 시절 400레벨을 달성한 유저의 절반은 401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통계도 있으니까요.”
“1레벨 올리는 게 그렇게 힘들다면… 사실상 400이 만렙이란 거군요!”
“후후, 이 1레벨의 격차가 또 재미있는 점인데… 아참, 이건 다음 특집에서 다룰 내용이었죠! 오늘은 NPC에 관한 이야기를 합시다.”
살짝 궁금증을 유발시킨 후, 남자는 본래 주제로 되돌아갔다.
“어쨌든, 초월자들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려드린 이유는 바로 오늘의 주인공, ‘천인’에 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죠.”
“아, 요즘 엄청 핫해요! 천인 퀘스트!”
“맞습니다. 심연에서 공작의 호감도를 얻어낸 유저들의 성장이 참 대단했지요? ‘천인의 대리자’가 바로 그것과 같은 포지션입니다. 천공 유저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칭호지요.”
오늘의 방송의 주제는 바로 천인!
더 상세하게는, ‘천인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얻는 방법이었다.
두 진행자는 한참 동안 쓸데없는 대화로 분량을 뽑은 뒤에야 본론으로 넘어갔다.
“물론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대리자가 되기 위해선 3단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거든요.”
“첫 번째 시험이 뭔가요?”
“놀라지 마세요, 두 번째 시험장에 도달하는 게 바로 첫 번째 시험이라고 합니다.”
팟! 화면이 전환되었다.
20미터 정도의 폭을 지닌 거대한 계단이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유저들이 양팔을 감싼 채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몇 유저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엄청 추워 보이는데요?.”
“맞아요, 영하 20도 정도의 추위라고 합니다. 아스리안이 최초의 감각동조 게임이란 사실이 안타까운 부분이죠. 전작에선 이런 게 없었으니까요. 참고로 너무 추워서 불꽃이라도 사용한다면….”
콰르르릉! 갑자기 계단 위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그 자리에서 계단을 오르던 유저 한 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렇게 바싹 구워지죠.”
“앗, 난로도 못 쓰는 건가요?!”
“못 씁니다. 불꽃을 사용하는 건 여기서 죄악을 범하는 거랑 똑같아요.”
“전 벌써 포기하고 싶은데요…?”
“이제 시작인데요. 자, 계단을 다 오른 유저들에게만 다음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지죠. 다행히 두 번째 시험은 첫 번째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두 번째 시험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입국심사’.
“진실의 앞에 서게 되면 한 점의 부끄럼도 없어야만 하리라… 이 말을 들어본 분이 계실 겁니다.”
“앗, 설마 진실의 대천사가 여기서?!”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등장했던 진실은 모든 천사들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대천사였다.
“아쉽게도 진실은 아니고, 진실의 ‘서번트’가 유저의 영혼을 살펴 ‘성향’의 수치를 알아낸다고 합니다.”
“아하, 심연을 거르기 위해서군요!”
“당연히 심연도 거르겠지만… 성향이 50미만인 천공 유저들까지 여기서 걸러지죠.”
“엑, 그래도 천공인데?!”
화악!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구름 위의 계단 한 구석. 소수의 유저들이 옹기종기 모여 성향을 올리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추위에 떨며 양손을 모은 유저들에게선 불쌍함을 넘어 처절함이 느껴졌다.
“저 사람들이 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지옥을 맛보게 되죠.”
“천국의 문 앞이 바로 지옥일 줄이야….”
약간의 설명이 더 이어졌다.
“얼마 전 명예의 전당이 완전 뒤집혔죠? 랭킹 1위의 라티스도 천공으로 전향하면서 다시 등장했고요.”
“맞아요! 그거 엄청 소란이었어요!”
“그게 이 천인 퀘스트랑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입니다.”
남자는 진실의 서번트 앞에서 성향 외의 정보까지 밝혀진다고 말했다.
레벨, 명예의 전당 순위, 결투등급도!
만약 하나라도 특출난 것이 있다면 세 번째 시험에 가산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자, 지금까지의 설명은 알 분들은 다 아는 정보들이죠?”
“전 몰랐는데요?!”
“여태 떠든 이유는 세 번째 시험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팟! 화면이 재차 반전되며 천인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약 스무 명.
수가 적은 이유는 지상에 관심을 지닌 천인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5년이 지난 지금이기 때문에 스무 명이나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였다.
“유저는 이제 천인 중 한 명을 골라 그에게 대리자 시험을 치러야 하죠. 하지만 어떤 천인을 택하느냐에 따라 시험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가끔은 같은 천인이라도 다른 시험을 줄 때도 있고요.”
“뭣, 그럼 아무 의미 없잖아요!”
“맞아요, 오늘은 어떤 천인을 고르는 게 좋은지 모를 유저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한 방송이니까요!”
대리자가 될 천인을 고른다는 것.
현실에 비유하면 앞으로 따를 직장상사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순간이다.
온화한 천인, 지랄 맞은 천인, 약한 천인, 강한 천인.
천인들 역시 인간만큼이나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종족이었으니 말이다.
진행자들은 한참 동안 다양한 천인들에 관한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밝힌 것은 약 40분 뒤, 방송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직 제가 소개드리지 않은 천인이 한 명 있죠.”
“그 말, 지금 다섯 번째라고요?”
“아까 천인들의 강함에 따라 F급부터 S급까지 분류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네, 전 여태까지 S급을 단 한 번도 소개드리지 않았습니다.”
“앗, 그러네요!”
“A급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서번트’ 계급의 천사와 비견될 만한 힘을 지닌 천인이었죠. 그렇다면 S급의 강함은 어느 정도일까요?”
남자 진행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천사보다 강한 천인.”
“천사보다…!”
“제가 가져온 정보통대로라면 그 유명한 천인이 일주일 내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누군가의 대리자가 되면 해당 천인이 사망하기 전까진 다른 이의 대리자가 될 수 없다.
즉, 진행자의 말은 서둘러 천인 퀘스트를 진행하려던 유저들을 만류하는 것이었다.
“S급 천인, 라디에트. 그의 강함은 플레인(Plain)급의 천사에 비견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클로징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스라 온라인에서 등장했던 라디에트의 이벤트 영상.
라디에트의 등장 시기는 전작의 유저들이 통제하고 있던 탓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정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 번씩 특급 정보를 내뱉는 덕분에 ‘현자의 대도서관’은 오늘도 순조롭게 시청률을 올리는 중이었다.
***
세상엔 보는 것만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등.
하지만 그 어떤 건축물도 지금 이 끝없는 계단만큼 ‘신’의 존재를 확신시키는 것은 없으리라.
“…….”
아인은 가만히 위를 올려다봤다.
한동안 달려왔지만 구름을 뚫고 오른 계단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계단을 내려다보면 더 장관이다.
지상의 시작점도 보이지 않아.
보이는 것이라곤 죽을 것 같은 기색으로, 가끔씩 귀신 보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저들의 표정이었다.
「현, 나 왠지 아까부터 눈에 띄는 것 같은데?」
아인은 귓속말로 현에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영혼 대화가 아닌 귓속말로.
현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방송으로 자신의 화면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옷을 잘못 입은 것 같네.」
「옷?」
「너 좀 추워 보이지 않아?」
현은 화면으로 지켜보며 물었다.
주위에 간간히 보이는 유저들은 두꺼운 털옷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는데, 아인은 드레스풍인 레카르트의 마물갑옷에 망토만 덧댄 채였다.
「안 추운데?」
천인은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천인 칭호를 가진 현과 아인 역시도 마찬가지다.
「안 추워도, 우리 입장을 생각해서 눈에 띄지 않으려면….」
「저렇게 둔해 보이는 옷은 사둔 게 없는 걸?」
「그래. 그냥 됐다.」
어느새 계단의 표면엔 서리를 넘어 얼음막이 코팅되어 있었고, 하늘에선 눈송이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서서 가만히 외길을 내려다보는 아인의 모습은 얼핏 인외의 존재처럼 보였다.
「빨리 안쪽으로 가면 눈에 띄지 않겠지.」
「꼭대기까진 얼마나 남았을까?」
「거의 다 왔어. 달려가면 금방이니까 괜히 마법 쓰지 말고.」
아인에겐 불꽃과 바람을 사용하지 말도록 당부해 두었다.
현은 계단 전체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마침내 계단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구름 위에서, 둘은 황금빛 복장의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막 계단을 오른 아인을 빤히 마주보는 자는 한 명의 천인.
이곳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유는 그의 눈이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천사의 눈!
하늘은 비교적 천계에 가까운 장소인데다, 시야공유엔 강림만큼 큰 힘이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니 천계의 누군가가 직접 유저를 판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괜찮을까…?」
갑자기 아인이 불안한 듯 물어왔다.
「들키면 그땐 스크롤로 튀면 되지.」
「그렇겠지?」
현의 대답을 들으며, 아인은 자신의 상태 창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성향 : -2 (심연)
몇 시간 전.
현은 아인의 성향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지식대로라면, 한 자리수인 성향은 쉽게 변해야 하는 데… 왠지 모르게 아인의 성향은 요지부동이었다.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인은 가끔씩 혼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무리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도 기도의 느낌이 나지 않는 이유?
아인이 좋아하는 것 외엔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현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 곳을 통과하려면 최소 50의 성향이 필요한데, 아인에겐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야.
‘역시, 이것밖에 없나?’
결국 현은 아인의 칭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기만자.
설명에 따르면 ‘타인을 속이기 쉬워지는 능력’이라고 한다.
파피는 아인의 성향을 간파하지 못했다.
천인이 속았다는 것은 고위 신관을 포함한 웬만한 인간은 무조건 속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파피보다 고위 천인까지, 혹은 천사까지도 속일 수 있을까…?
‘기만… 기만자라….’
현은 잠깐 아스라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과거 세계관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엔 누구도 기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밝혀내기 전까지, 케이드리알은 대천사마저 속이며 천공의 세력들을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물론, 대악마 본신의 능력과 유저가 지닌 칭호의 효과가 동일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만’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상 비슷한 능력을 지니지 않았을까?
“….”
아인은 긴장한 기색으로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천사. 아마도 진실의 수하들 중 한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만자. 들키지 않아…!
그렇게 생각해 봐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면, 진실의 수하들 중 몇몇은 상태 창을 읽어내니까!
물론,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대천사, 진실뿐이지만, 레벨, 성향, 결투등급 따위의 정보들을 읽어내는 것은 진실을 섬기는 다른 천사들도 가능했다.
팟! 남자의 눈동자의 색이 변한 것은 한참 만이었다.
“…그대의 입장을 허가합니다.”
시야 공유가 해제되고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됐다…?」
「후, 봐봐 안 걸린다고 했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현도 사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인의 방송을 지켜보던 중이었지만.
만약 기만자가 통하지 않았다면, 아인은 꼼짝없이 천공 NPC들 사이에서 안 좋은 의미의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으리라.
「지금 우리, 꼭 밀입국자 같지 않아?!」
문득, 3인칭 화면에 실실거리는 아인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일단 통과했으니까. 빨리 쟤한테서 멀어지자.」
「뭐야, 현도 걱정하고 있었던 거네.」
문지기의 천사를 지나고 나서도 아인은 한참동안 걸었다.
언젠가부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그쳤다.
근처에 보이는 몇몇 유저들의 복장도 간소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늘다리를 가로질러 한적한 장소까지 이동한 아인은 드디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서 할까?」
「주위에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좋아, 지금 하자.」
우우웅. 반지의 마나가 일렁이는 동시.
지상에 어딘가에 있을 어둠의 그림자는 수천 킬로미터를 격해 하늘 위에 소환되었다.
팟!
눈앞의 시야가 변하자마자 현은 동화를 사용했다.
둘의 신체가 하나로 겹쳐지는 은밀한 광경을 본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하하.”
주위를 둘러본 현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익숙한 하늘위의 광경을 본 뒤에야 비로소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친 짓이 정말로 가능했네.」
「현이 생각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방법을 알아도 실천에 옮기긴 쉽지 않았단 말이지.」
현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감각동조의 생생함을 제외하면 아스라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늘 위에 우뚝 선 신성하고 신비로운 건축물들.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전작의 유저들은 이 도시를 ‘최초의 하늘’이라고 이름 붙였다.
면적으로 따지면 중소 마을 정도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도시라 불린다.
난데없이 하늘에 이런 장소가 존재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천인은 천사와 달라 먹어야 살 수 있고, 살아갈 장소도 필요했다.
그러니 대리자의 시험을 위해 천인들이 머무르는 곳엔 필연적으로 마을 비슷한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즉, 이곳은 소수의 천인들과 다수의 인간들이 경계를 이루는 첫 번째 영역이었다.
「일단 도시를 좀 둘러보자고.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어디?」
「파피의 집.」
현은 도시의 구석에서 생활감이 없는 낡은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피는 5년 동안 미궁에서 루이즈를 돕고 있었을 테니, 문의 손잡이엔 먼지만 쌓여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나.」
대부분의 천인들은 여러 이유로 인간과 엮이길 꺼린다.
즉, 대리자를 구하려는 목적이 없다면 천인이 이 도시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파피는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이곳에 살고 있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본능적으로 천인들의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 보자!」
「그래.」
다음으로는 도시를 돌아다녔다.
현과 아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사람이 엄청 많아!」
「아스라가 아니니까.」
「그래도 원래는 한적한 도시잖아! 이 사람들이 전부 유저란 걸까?」
「맞아. 내가 좀 찾아봤는데, 요새 천공 유저들의 트렌드가 천인 퀘스트인 것 같아.」
아스라 시절엔 한 명의 사람조차 마주치기 힘들었던 하늘의 현은 유저들의 틈새를 지나다니며 대화를 엿들어 봤다.
B급, A급, S급… 천인의 등급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한 등급 차이는 약 20레벨.
아스라 시절의 유저들이 편의상 만든 기준이 아스리안에서도 똑같이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하하, 저게 뭐야! 무슨 족집게 과외도 아니고!」
갑자기 아인의 웃음이 터졌다.
「왜 그래?」
「쟤 봐봐, 천인들의 시험정보를 팔고 있어!」
아인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곧 한 명의 유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능숙하게 외치며 시험의 내용을 팔고 있는 시험지 장사꾼.
「정말 별의 별 녀석들이 다 있군. 시험이 계속 똑같은 내용인 줄 아나?」
「뭐 어때, 예전에 못 보던 광경이라 재밌는 걸?」
아인은 즐거운 듯 유저들의 면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긴, 상관없나.
이미 모든 계획을 정해둔 자신은 쓸데없는 정보에 흔들릴 필요가 없었다.
「귓속말로 파나 봐! 현, 우리도 쟤한테 시험지 사볼래?」
「얼마래?」
「6천 골드!」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우리 선택은 이미 정해졌잖아.」
C급 천인. 레티.
380 정도의 레벨을 지닌 그녀가 바로 현이 고른 천인이었다.
C급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강한 천인은 아니다.
물론 네임드에 천인이니까, 일반 몬스터들은 상대도 안 되겠지만 대리자를 구하는 다른 천인들과 비교하면 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게 나아.’
그런 빈약한 천인을 후보로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로, NPC들에게 과도한 관심을 끄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둘째로는 그녀가 마리아처럼 ‘유저’를 포함한 인간들에게 헌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상을 퍼주는 천인이라면 마지막 레전더리 재료, 유니콘의 뿔을 얻기도 한결 편해진다.
[‘레티’의 전당이 열리기까지 : 1시간 54분]현은 레티의 시험장으로 향하는 포탈이 닫혀 있음을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천인들마다 시험내용이 제각각인 만큼, 시험이 시작되는 시간도, 하루에 시행되는 횟수도 달랐다.
「씁, 타이밍이 안 맞았나.」
「뭐 어때, 근처에서 놀고 있으면 되잖아!」
「핫, 그래야겠네.」
아인의 의견대로, 현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붕 뜨는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가끔 이쪽을 힐긋거리는 유저가 있는 걸 보면 아인의 얼굴을 알아본 걸까?
그래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최소한 랭커에 근접하거나, 혹은 랭커인 유저들.
최상위권 유저들도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유명인을 봤다고 해서 소란스러워지진 않았다.
‘그런데 라디에트의 이름은 왜 이렇게 자주 들려오는 거야?’
현은 유저들의 소란 속에서 비슷한 말이 몇 번이나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난 라디에트가 등장할 때까지 여기서 존버해야겠어.”
방금도 또 어떤 유저가 누군가가 비슷한 내용을 중얼거렸다.
라디에트는 좀처럼 인세에 관심을 갖지 않는 S급 천인들 중 한 명이다.
그와 인맥을 만들 수만 있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어디서 아스라 때의 정보를 듣고 온 모양인데.’
현은 그 유저의 깜깜한 앞날이 걱정되었다.
얼마 전 루이즈로부터 라디에트가 종신형에 처해 어딘가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인내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할 텐데.
안쓰러운 기분이 동화로 옮겨갔을까? 아인이 갑자기 물었다.
「현, 무슨 생각 해?」
흠칫, 하지만 무언가의 사실을 깨닫는 동시, 현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 충고 좀 해줄까 했는데. 그냥 관두려고.」
「으음?」
「깜빡 속을 뻔 했잖아. 라디에트를 기다리는 녀석 아까 그 시험지 장사꾼이었잖다니!」
「후후, 뭐야 그게.」
그렇게, 대충 아인과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둘은 시간에 맞추어 레티의 전당으로 향하는 지점으로 돌아갔다.
닫힌 포탈의 근처. 수십 명의 유저가 모여 있었다.
C급이라 그나마 지원자가 적은 편, A급의 시험에는 한 명의 대리자를 뽑는 데 수백, 수천 명이 몰려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백 대 1의 경쟁률이 쉽게 형성되는 까닭은, 대리자의 시험에 낙방한 유저라도 성과에 따른 보상 일부를 획득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작의 대회에 하위 등수 보상이 존재하던 것처럼.
[‘레티’의 전당이 열리기까지 : 0초] [전당으로 항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곧 대리자의 시험이 시작됩니다!]“오, 드디어 열렸다!”
“크으으, 난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지이잉. 허공에 푸른 빛깔의 문이 열리자 근처에 둘러앉아 있던 유저들은 하나둘씩 포탈의 안으로 들어섰다.
「자, 우리도 가자고.」
현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그들을 따라갔다.
***
포탈 너머는 기존의 장소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이 세상의 어디인지, 가상의 공간인지도 확실치 않은 곳.
다만, 발아래 펼쳐진 텅 빈 평원은 이곳이 ‘하늘’이 아님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내가 샀던 시험 내용이랑 다른 장소인데?”
어디선가 들려온 중얼거림에 누군가가 맞받아쳤다.
“큭큭큭, 그 사기를 당하는 호구가 정말로 있었군. 레티의 시험은 매번 바뀌는 게 특징인데.”
“방금 누가 나한테 호구라 했어!”
“얼마 전 현자의 대도서관도 안 봤나? 미리 정보를 수집했다면 그런 호구는 안 잡혔겠지!”
두 목소리가 쓸데없는 말을 떠들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유저들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둘러 시험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음? 땅에 뭔가 그려져 있군.”
수십 명의 일행은 금방 자신들의 발치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을 발견했다.
“마법진인가, 엄청 큰데…?”
약 20미터의 지름을 가진 원형의 문양.
파치칙. 파치칙.
푸른 전류의 줄기들로 이루어진 선이 일렁일 때마다 은은한 스파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마법진이 아니야.」
가장 먼저 그 문양의 정체를 파악한 사람은 바로 현이었다.
「어? 시험 내용을 알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그림이 뭔지는 알겠어.」
「그림? 마법진이 아니라?」
「멀리서 봐봐.」
현의 말에 아인은 시야를 넓혔다.
얼핏 마법진처럼 보이는 전류의 문양은 어디선가 보았던 것이다.
바로 각성 퀘스트의 발판에서.
불꽃이 번개로 바뀌었다는 점만 다를 뿐, 그림은 분명 시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띠링! 모두에게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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