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96)
비상을 위한 준비
지도를 살펴보면 지금 자신들이 위치한 장소는 서리가 가득한 동굴.
이 안에 잊혀진 성소가 존재한다.
현은 고요함만이 가득한 얼음 동굴을 걸었다.
자박. 자박.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발소리가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탓인지, 작은 진동에도 가끔씩 바닥의 얼음이 쩍쩍 갈라졌다.
햇빛이 들진 않지만 곳곳에서 신비한 빛이 맴돌아 동굴의 내부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여기야.」
현은 은은한 푸른빛이 맴도는 기둥 앞에서 멈추었다.
아인의 시스템 창이 저절로 출력되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빛을 바라보며 당신이 섬길 천사에게 기도하세요.] [천사가 그대의 의지에 답하길….」사도 시험의 마무리.
「여기서 기도하라는데.」
메시지를 본 아인이 물었다.
「누구한테 하면 돼?」
「그건….」
아스라의 지식대로라면 꼭 기도를 바친 천사 본인이 강림하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신하는 자신만의 시종을 둔 것처럼, 사도는 대천사의 하수인을 섬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보통의 유저는 진실이나 빛에게 기도를 바친다.
질서.
순간, 현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기도하기 위해선 대상의 모습을 떠올려야만 하는데, 아무도 질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모가 알려진 대천사는 진실과 빛 둘 뿐.
여기선 아인의 선택도 둘 중 하나로 정해질 테지만….
「루티아에게 기도해 보자.」
현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칭 루이즈의 보호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인.
어쩌면 여기서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티아? 걔 악마 아니었어?!」
아인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워낙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아인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해 봐.」
「으음… 모르겠지만 현이 시키는 거니까.」
아인은 곧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돕기 위해서 현도 루티아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떠올렸다.
요염한 옷을 입고 다니는 괴짜 신관.
어스름의 신전에서 처음 만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일루나에서 재회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능력은 평범한 신관의 것을 벗어나 있었다.
동화를 볼 수 있는데다, 대칭세계의 길을 맘대로 넘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둠의 땅에서 만났을 때.
어둠의 안개를 헤치는 모습을 본 뒤부터 현은 강한 의심 하나를 갖게 되었다.
아직은 그저 가능성 높은 의심이었지만… 그녀가 강림하는 순간 그 의심은 확신으로 변할 것이다.
“…….”
몇 분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제단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착각이었나?’
될 때까지 기도해 볼까?
아니, 계획을 마치려면 낭비할 시간은 없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현의 마음속에 다시 의심이 떠오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이거… 벌써 들킬 줄은 몰랐네.”
루티아는 아인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질서에게 기도해도 상관없었는데.”
화륵! 화륵!
루티아의 어깻죽지에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나자, 현은 숨이 가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언젠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래, 일루나로 향하는 왕복선에서 케이드리알을 마주쳤을 때!
“뭐, 누구에게 기도하든 상관없었지만.”
「현, 저… 저거! 나 뭔가 실수한 거야?」
아인은 당황했다.
자신 때문에 사도 퀘스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제대로 했어.」
치이이익!
얼음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땅을 이루던 얼음이 녹아 사라졌음에도 루티아는 나타난 그 위치 그대로 허공에 서 있었다.
활짝 펼쳐진 한 쌍의 날개.
그 특유의 색깔과, 형태는 이미 현이 알고 있는 존재의 것이었다.
「이게 루티아의 정체겠지.」
기만의 대악마, 케이드리알.
아스리안을 시작할 때부터 그녀와는 악연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전작에선 ‘케이르엘’이라는 천사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다녔던 그녀가 어째서 아스리안에선 잠잠했던 것일까?
기만이 새로운 껍데기를 만들었다면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어둠의 보호자를 자칭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천공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대악마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깨워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 계약을 위해 강림한 거니까.”
케이드리알은 아인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화악!
날개를 한번 퍼덕이자 그녀의 어깨가 번쩍 빛났다.
찰나 만에 검붉은 날개는 은은한 빛이 흐르는 신성의 날개로 뒤바뀌어 있었다.
“여기선 널 사도로 받아주지.”
이어서 아인의 이마에 손을 뻗고 신성의 기운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마기(魔氣)와 신성력(神聖力).
세상 모든 존재는 두 종류의 신력을 동시에 보유할 수 없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기만의 대악마는 로열의 천사와 비견될 만한 신성력을 지녔다고, 지식의 보고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칭호, ‘루티엘의 사도’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제 천계에서 공적치 상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엔젤릭 리퍼(Angelic Reaper)로 전직하였습니다!] [신성력이 +30000 상승하였습니다!]여러 줄의 메시지가 번쩍였고.
“절차대로라면 추가로 계약을 해야겠지만…. 너에겐 필요 없겠지? 계약 같은 게 없어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아인의 이마에서 손을 뗀 케이드리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현은 그것이 ‘기만자’ 칭호에 달린 효과를 말하는 것임을 바로 이해했다.
레티의 시험에서 난데없이 들린 목소리가 기만의 짓이라고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계약의 절차를 줄인 덕분에 힘이 조금 남았는데….”
케이드리알은 아인의 눈동자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순간, 현은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한테 부탁하려고 하던 거 뭐 없어?”
기만에겐 생각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없음에도, 현은 머릿속이 읽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자신은 루이즈가 말했던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
“훗, 여기서 물어보지 마. 대답 안 해줄 거니까.”
케이드리알은 웃음을 흘리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신탁을 내리는 게 힘의 소모가 더 적거든.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아….’
파직!
현이 입을 열기 직전, 케이드리알은 한순간에 뇌전이 되어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아인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
도시, 랜턴에 돌아왔을 땐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오후 5시.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둑어둑한 하늘은 조금 눈에 띄었다.
‘이런.’
현은 어두워진 구름을 보며 이전에 루이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머무르는 곳은 금세 어두워지니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고.
‘이래서 프라이빗 룸에 오지 못한다고 말했던 거였나.’
어둠과 빛은 서로 반발한다.
다행이 랜턴엔 밤이 찾아오기 때문에 하늘의 먹구름이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느끼겠지.
‘확실히, 이건 좀 문제겠네.’
프라이빗 룸엔, 예상대로 루이즈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 왔구나! 바깥엔 아무 일도 없었느냐?”
“별거 없었어.”
“그럼 다행이다. 이제 곧 해가 지면 내일까진 괜찮을 것이야.”
프라이빗 룸에 돌아온 직후 현은 아인에게 물었다.
“어때, 좀 직업 특성 좀 알겠어?”
성소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아인은 새로 얻은 직업의 특징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약간은.”
아인은 새로워진 상태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젤릭 리퍼.
리퍼(Reaper)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의미는 사신(死神)이다.
그런 단어에 천사(Angelic)의 수식어가 붙은 것은 모순.
기만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직업이 튀어나오게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인은 엔젤릭 리퍼에 대해 자신이 파악한 대로 설명해 주었다.
“주 무기는 낫이야.”
“스킬은 대부분 얼음 계열이지만, 가끔은 신성 계열도 있어.”
“궁극기는… 딱히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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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적들에게 지속적인 화염 피해를 입힙니다!
이후에도, 아인은 자신이 마음에 든 스킬들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현은 자신의 스킬트리도 함께 살폈다.
쉐도우 슈터. 그리고 엔젤릭 리퍼.
두 직업으로 만들 수 있는 조합들을 구상해 보았다.
현의 머릿속에선 수십 종류의 퍼즐이 맞춰지고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무한한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전작부터 이어져 온 현의 특기였다.
‘좋아, 정했다.’
잠시 후, 현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 창에 온라인 상태로 표시되고 있는 지니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지니, 지금 바빠요?」
5초 뒤 답장이 왔다.
「바쁜 건 언제나 그렇지만, 현의 지시가 있다면 그게 우선이죠.」
「그러면 하나만 부탁할게요.」
지니와 만난 이후, 현은 하루에 한 번씩은 지니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틈틈이 경과를 파악하고, 예정된 계획을 진행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보니 현의 지식도 조금씩 쌓이게 되었고, ‘총기’라는 분야에서 쉐이드 길드가 지닌 연구력도 이해하게 되었다.
「어제 보여줬던 그 최신작. 아직 있죠?」
「네.」
「조금 다른 형태로 개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시간은 의식하지 않으면 물 흐르듯 지나간다.
현은 지니를 데리고 대장간을 찾아왔다.
가장 믿음직한 대장장이. 아인의 갑옷을 유니크로 띄웠던 장인이 일하는 장소였다.
“무엇을 맡기러 왔나? 나는 하찮은 의뢰는 받지 않아.”
다가가자 그는 퉁명스런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무뚝뚝한 말투가 오히려 현에게 믿음을 주었다.
“다시 뵙네요.”
“음? 날 아나?”
“5년 전 마물 갑옷을 의뢰했던 손님이에요.”
“아아, 그렇군.”
대장장이는 현의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유저들의 얼굴은 다 비슷해 보여서 잘 모르겠단 말이지.”
함께 온 지니를 흘겨보며 눈을 가늘였다.
“이쪽은… 그 때 그 아가씨가 벌써 이렇게 자랐나?”
“아닐 겁니다.”
“흐음, 뭐.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
지니의 짤막한 대답에 대장장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뢰를 맡기러 왔다고? 예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난 하찮은 의뢰는 받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현은 그동안 준비해 온 재료들을 몽땅 쏟아냈다.
마석과 금속류부터 시작해, 희귀한 마법 재료들까지 테이블에 나열했다.
“간단한 제작 따위라면 이곳을 찾아올 이유도 없겠죠.”
“흐음…?”
인벤토리에서 나온 ‘셰라트의 꼬리’를 보는 순간 대장장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만져 봐도 되나?”
“얼마든지요.”
과연 뛰어난 장인이기 때문일까, 그는 재료를 쓰다듬으며 연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호오, 유저가 이런 걸 가져올 줄이야. 안 그래도 요즘 마법 재료들을 구하긴 힘들 텐데.”
그의 감탄은 현이 마지막 물건을 꺼내는 순간 의문으로 변했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부피를 잡아먹는 무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이건 설마… 낫인가?”
대장장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대한 낫은 사신을 상징하는 무기. 천공에서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성왕국에선 낫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다.
“낫이 아니라, 총이란 무기에요.”
“청…?”
“총이요. 지니, 설명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지니는 대장장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것들까지 설명했다.
낫 형태를 가진 총.
현은 언젠가 우연히 유트브에서 본 영상 하나를 계기로 두 종류의 무기를 하나로 합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서 조금 독창적인 특징들을 더해 총의 세부 분류는 저격용 총으로 만들었다.
데미지를 올리는 대신 사거리를 높였고, 탄창의 수를 최대한 늘렸다.
또한, 총의 본체와 손잡이를 분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개조가 가능했다.
작동 방식은,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과, 강하게 손잡이를 쥐는 방법. 두 가지.
루이즈의 늘어나는 창의 작동법을 보고 떠올린 현의 아이디어였다.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대강 설명을 마친 지니가 경고하며 바닥에 낫을 꽂았다.
그 상태로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타앙!
굉음과 함께 연습용 나무판자가 산산 조각났다.
NPC들은 현실의 지식에 무지하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총이란 무기에 대장장이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뭣!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총알은 빠르니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공격인가?”
“평범한 사람은 못 볼 테지만… 아스리안엔 워낙 초인들이 많아서 잘 모르겠네요.”
파괴력이 그리 높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쾌속의 공격.
인간이 만든 도구가 그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의뢰 내용을 말씀드리죠.”
지니의 설명이 끝난 뒤엔 다시 현이 나섰다.
“지금 이 총을 완벽한 ‘낫’으로 바꿔 주세요. 단, 총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요.”
난생 처음 받아보는 내용의 의뢰.
다른 대장장이였다면 자신이 없어 포기할지도, 혹은 ‘낫’은 만들어 줄 순 없다며 엄포를 놓을지도 모른다.
“으음. 그건 좀 흥미로운 의뢰로군.”
하지만 여태껏 없던 의뢰이기 때문에 그는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우웅.
대장장이는 이어서 제작 스킬로 총의 설계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금속 기관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가?”
“네. 주의할 점이나 변경 가능한 부분들은 이쪽 여자분이 계속 옆에서 알려드릴 겁니다.”
“좋아, 해 주지. 원하는 기능을 말해 보게.”
반드시 띄워야 하는 옵션.
현은 준비한 대로 읊어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대장장이의 눈빛은 처음의 그 심드렁함은 찾아볼 수 없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이런 의뢰를 받아본 게 몇 년 만인지… 크흐흐, 오랜만에 재미는 있겠어.”
“의뢰비는 얼마죠?”
“20만 골드. 대신, 필요한 추가 재료는 내 것을 사용하겠네.”
현실 액수로 4천만 원.
하지만, 이만한 실력자를 다른 데서 구할 수도 없으니 현은 불만 없이 수락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현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제작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음….”
대장장이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이틀정도 걸리겠군.”
“이틀이요?!”
순간 현은 펄쩍 뛰어올랐다.
아스리안에서 웬만한 장비는 그 즉시 제작된다.
지난번 아인의 유니크 갑옷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는 데 오래 걸렸을 뿐, 실질적인 제작엔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좀 더 짧게는 안 될까요…?”
“얼마나.”
“4시간 내로요.”
현의 부탁에도 대장장이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는 그의 눈빛에선 굳건한 장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이 총이란 무기는 마나의 움직임에 상당히 예민한 것 같더군. 네다섯 시간으론 절대 불가능하네.”
잠깐 보고 총의 특징을 바로 파악하다니.
대장장이의 실력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지만, 그와 별개로 현의 마음은 초조해지기만 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약 5시간.
무기가 완성될 때면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뒤. 그 사이에 몇 번의 위기가 닥칠지 알 수 없다.
“그럼 30만 골드를 드릴 테니.”
“허어….”
“그럼 50만 골드는….”
“자네는 모르겠지만, 완벽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선 여유가 필요한 법이네.”
“100만 골드를 드려도 안 되나요?”
“그래.”
아무리 액수를 올려 봐도 대장장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장인을 돈으로 설득하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잠깐… 100만 골드를 준다는 말이 사실인가?”
대장장이가 조심스레 되물은 것은 현이 포기하려던 순간이었다.
“음, 최대한 줄이면… 어쩌면 다섯 시간까지는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군. 그 이상은 1억 골드를 준다 해도 못 줄여.”
“네? 아까는 분명 이틀이라고….”
“아아, 다 방법이 있지. 그래서 의뢰할 건가 말건가?”
“다섯 시간… 조금 촉박하지만 일단 맡겨보겠습니다.”
철그렁.
현은 1만 골드짜리 동전으로 가득 채워진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어떻게 이틀의 작업량을 다섯 시간으로 줄인다는 거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현은 대장장이의 작업을 조금만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통신 마법진으로 누군가와 통화한 뒤, 자신을 지켜보는 현에게 답했다.
“사람을 한 명 불렀지. 내가 유일하게 실력을 인정하는 녀석이야. 이 녀석과 함께 하면 작업 속도가 훨씬 빨라질 거야.”
“아, 그렇군요!”
현은 한숨 놓았다.
이만한 실력의 장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라니.
기회가 된다면 소개받아 볼까? 나중에 아이템 제작을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대장간에 사람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어이 레카르트. 20만 골드짜리 의뢰를 받았다는 게 정말인가?”
털북숭이에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사내.
얼핏 보기엔 자기 고집이 강한 또 한명의 장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현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아스라 온라인에서 겪었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 남자는…! 설마?’
현의 입가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절대자의 대검을 날려먹고 호탕하게 허허 웃던 ‘그 새끼’가 눈앞에서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
불안하긴 해도 달리 방법이 없다.
현은 대장간을 떠나기 전 지니에게 신신당부해 두었다.
그 새끼가 자신의 무기에 이상한 짓을 하진 않는지 꼭 감시해 달라고.
‘괜찮겠지? 장인 분도 계시고, 지니도 옆에서 도와주면… 2대 1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야.’
이제부턴 운에 맡길 수밖에.
휘휘 고개를 저은 현은 대장간에서 있었던 일을 잊었다.
‘어쨌든,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빈 시간동안 현은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두었고, 아인에게도 피로도를 낮춰 두라 확실히 말했다.
한숨 자고 일어난 뒤, 현과 아인은 프라이빗 룸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직업이 바뀌었으니 스킬트리를 다시 최적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컨셉은 이전과 동일하게, 2명의 시너지를 극대화시키는 방식.
‘연습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
새로운 직업에 익숙해지기 위한 트레이닝도 해 두었다.
2차 전직의 스킬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각자의 전용 무기가 필요했으니 현과 아인은 지니가 선물해 준 권총과 레벨제한 50짜리 낫을 들고 모의 전투를 해봤다.
실전에서도 익숙한 감각으로 싸우려면 미리부터 몸을 풀어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만히 기다리던 도중.
“현, 방금 목소리 들렸어!”
아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현은 드디어 신탁이 내려왔음을 직감했다.
“케이드리알의 신탁이야! 뭐라고 했는데?”
“그게…. 베티의 맞은편으로 향하라…?”
아인은 미심쩍은 듯 몇 번이나 녹화 본을 돌려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문장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현은 아인에게 되물었다.
“그게 다야?”
“응.”
“무슨 뜻인데…?”
“나야 모르지!”
“…?”
현의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애매모호한 신탁일수록 그 신탁을 내리는 초월자의 힘이 덜 사용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악마라는 자가 이런 쓰레기 신탁을 내릴 줄이야. 이럴 거면 신탁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내리겠다고 하던가.
단서가 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장소였다.
“베티라면… 그 박쥐 말인가?”
“뭐?”
루이즈가 중얼거린 순간, 현은 휙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아무것도 모른 채 눈만 멀뚱거리던 녀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루이즈, 뭔가 알고 있어?”
“베티는 기만의 오른팔이라고 불렸던 마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듣고 보니… 이상하구나. 그날 이후 돌아온 기억은 대부분 희미한 것들인데 이 기억은 왠지 선명하다.”
케이드리알은 이럴 줄 알고 있었을까? 루이즈가 지닌 기억의 파편이 신탁의 해석에 도움이 되었다.
‘오른팔.’
오른팔의 맞은편.
순간 현의 머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럼 왼팔은 뭔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아니, 그건 내가 알 것 같아.”
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신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
‘얼음가시 던전.’
현은 과거의 한 때를 떠올렸다.
프렉티스와 지니와 히든 퀘스트를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당시, 스키장처럼 가팔랐던 비탈길이 바로 얼음가시 던전.
예전에는 중간에 샛길로 빠졌지만, 그대로 비탈길을 내려간다면 베티가 아닌 다른 네임드 보스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전작의 정보에 따르면 그 녀석도 기만과 연관된 마수였다.
‘그 녀석이 기만의 왼팔이야!’
베티의 맞은편이란 해당 네임드가 있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
현은 기만에 관해 생각해 봤다.
신성력과 마기를 모두 사용하는 대악마.
두 신력을 동시에 다루는 존재는 모든 영혼을 통틀어 그녀가 유일했다.
천공에 깊이 뿌리내린 기만은 하늘은 물론 천계까지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케이드리알이 대칭세계를 통해 하늘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을 확률은 아주 높았다.
‘이번엔 절대 속임수가 아니야.’
기만과 마주칠 때마다 현은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남을 속이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그녀는 언제나 거짓말을 일삼았으니.
‘기만이 어둠을 속이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어둠’이 관련된 일.
루이즈의 각성이 늦춰짐으로서 심연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은 케이드리알에게도 큰 타격이다.
반대로, 루이즈가 완전히 각성하지 못하는 한, 기만은 자신을 해하지 못한다.
아인을 기만의 사도로 만든 이유도 그 때문.
기만이 어둠의 각성을 원한다면 아인의 성장을 도우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 때의 영상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유일한 의문은 악의 씨앗 던전 끝에서 보았던 이벤트 영상.
루이즈에게 천사의 날개가 달렸던 것은 기만의 위장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루이즈와 케이드리알은 천계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아직까지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마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겠지?
현은 한가해진 뒤에 그 이벤트 영상을 다시 한 번 돌려보기로 했다.
자정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다.
현은 아인과 루이즈를 먼저 목적지로 보냈다.
자신은 커플링의 능력으로 언제든 합류가 가능한 까닭이다.
‘준비는 다 끝났어. 이제 무기만 가져가면 되는데….’
지금 현은 대장간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앙! 키이이잉!
금속을 재련하는 소리만 울렸다.
기다리다 못한 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언제 끝나죠…? 이제 다섯 시간인데요.”
“아아, 이제 다 끝났어.”
“몇 분이면 끝날까요?”
“거 참, 이제 진짜 끝이라니깐.”
하필 대답한 것은 그 털북숭이 새끼.
당연히 현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두 대장장이의 옆에서 보조를 맡아주고 있는 지니에게 다시 물었다.
“지니, 얼마나 걸리면 끝날 것 같아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아직 안정화 작업이 남았다.”
현의 물음엔 다른 쪽의 대장장이가 대답했다.
“이 총이란 물건은 마나 뿐 아니라 신력에 더욱 민감한 것 같더군. 신석의 기운이 확산되지 않도록 고정시켜야 하는데… 정확히 32분 더 걸릴 거다.”
“32분이라고요?!”
아무래도 물건을 받아서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했다.
역시, 의뢰를 맡기기로 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 새끼를 보는 순간 의뢰를 취소했다면 이런 애매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기한에 맞추지 못해 미안하군… 원한다면 의뢰비의 절반은 돌려주겠네.”
“아뇨, 돈은 상관없는데….”
그래, 이렇게 훌륭한 장인 분이 실수할 리가 없지!
안 봐도 원흉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하지?’
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급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 힘을 이끌어낸다고 한다.
하늘이 도왔을까, 현이 대안을 생각한 것은 고작 몇 초 에 불과했다.
“지니,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네.”
“무기 받으면 프라이빗 룸에서 저한테 귓속말 보내요!”
바로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는 방법.
스크롤이 아깝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라이빗 룸에서 지니에게 물건을 받은 뒤, 다시 커플링의 능력을 사용하면 무기를 배달하는 것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