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98)
기만이 인도하는 길
일행은 던전을 빠르게 통과해 나갔다.
아인에겐 민첩의 잠력 폭발이, 루이즈에게는 검은 바람이, 현에게는 그런 둘에게 빙의할 수 있는 동화가 있었으니 웬만한 몬스터 무리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몬스터들이 밀집된 구역을 가로질러야 하는 경우는 강제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탕! 탕! 탕!
달려가던 도중, 현은 뒤로 돌아 경계의 총을 연사했다.
충격 증폭의 효과로 귀찮은 녀석들을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유저만큼 멀리 날려 보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힘 스탯이 비교적 낮은 정령들에게 효과가 아주 없진 않았다.
‘곧 얼음가시 던전의 보스 방이다!’
휘이이이-! 어느새 주위의 바람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태풍을 넘어선, 광풍(狂風)!
던전의 막바지에 온 지금, 모든 공간에 수직통로와 맞먹는 흡입력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오히려 속도를 늦춰야만 했다.
“현, 나 민첩이 모자라…! 동화 좀….”
아인이 바닥에 낫을 꽂은 채 도움을 요청했다.
몬스터 구간을 완전히 지나쳐 잠력폭발이 해제된 아인은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했다.
“아, 안 된다! 지금 동화를 해제하면 내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루이즈가 깜짝 놀라 현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이즈의 민첩은 무려 354지만, 그녀는 바람의 반작용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동하는 만큼 이 환경에 불리했다.
아인에게 동화하면 루이즈가, 루이즈에게 동화하면 아인이 바람에 버티지 못하는 상황.
“샤틴. 쟤 좀 붙잡아 줘.”
“알겠습니다.
현은 샤틴을 소환에 아인을 돕게 했다.
육중한 몸에 민첩도 일행 중 가장 높은 그녀는 이 바람 속에서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샤틴의 몸을 꽉 붙잡고 나아갔다.
‘역시, 얼음가시 던전은 지금 우리 스펙으로 올 장소가 아니야.’
보스 방에 가까워질수록 현은 얼음가시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이 파티로 던전의 보스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샤틴이 돕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녀의 내구도는 거의 다 회복된 듯하지만 손상된 마법진은 평생 고칠 수 없다.
그로 인한 모든 스탯, 및 스킬 성능 하락.
특히, 생명력은 90퍼센트 이상 줄어들어 1천만에 육박해야 할 최대 체력이 1백만 이하로 내려가 버렸다.
‘보스를 잡을 방법은 없어. 그 전에 대칭세계로 도망쳐야겠지!’
다행히, 보스 방에 들어가자마자 보스를 조우하는 것은 아니다.
천장이 내려앉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등, 녀석이 출현하기까진 10분 이상의 쓸데없는 연출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10분. 그 정도면 충분히 의식을 낮추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 왔다. 저기야.”
어느 순간, 현은 모두를 둘러보며 전방을 가리켰다.
거대한 용의 석상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장소.
석상의 입이 바로 보스방으로 향하는 문이다.
경계를 지나는 순간 곧바로 기도를 시작해야 보스 등장 연출이 끝나기 전에 대칭세계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오면서 말해준 계획. 다들 기억하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 넌 몰라도 돼.”
샤틴을 제외하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땐 어리숙하던 루이즈도 성장한 지금은 이해력이 높아졌다.
「생각해보니까 5년이 넘도록 기도해 본 적이 없구나. 난 신녀라 불리는데도 말이다.」
‘….’
약간 불안한 점은 있어 보이지만, 현은 자신의 기도 실력으로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아, 가자!”
“응!”
일행은 그대로 바람의 격류에 몸을 맡겨 용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입을 통과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다.
보스 방은 조용했다.
아니, 방이라기보다 거대한 동굴에 가까운 장소였다.
「여긴.」
주위를 둘러본 루이즈가 감탄했다.
빌딩처럼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바닥과 천장에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얼음가시’란 단어는 이 장소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구나….」
바깥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광경. 땅속에 이런 신비스런 장소가 존재했다니.
시간만 많았으면 루이즈는 이곳에서 몇 시간쯤 돌아다니고 싶다 생각했다.
“감상은 나중에 하고. 빨리 기도해.”
현이 루이즈를 재촉했다.
지금부터 약 10분. 보스의 등장 씬이 시작되는 사이 일행은 대칭 세계로 넘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뭐…?”
“어?”
현과 아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뾰족하게 솟은 얼음의 꼭대기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연출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그 정체는 바람용 세티아.
410레벨의 네임드 보스이자 얼음가시 던전의 주인.
크르르르.
일행을 목격한 용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동굴 전체에 은은한 진동이 일었다.
‘저게 왜… 바깥에 꺼내져 있지?!’
세티아와 눈을 마주친 순간, 현의 뇌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녀석은 지금 몸을 일으키고 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나? 기만의 술수인가?!
던전 보스가 이미 등장했다면 계획했던 10분의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대칭세계로 이동하지 않으면 죽는다!
「기도해!」
현은 악을 쓰듯 루이즈에게 소리쳤다.
앞으로 몇 초.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위험할지도 몰라.
일행 중 누구도 세티아의 공격을 피해낼 스킬을 지니고 있지 않는데…!
「잠깐. 기다리거라, 현. 저 용… 방금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뭐라고…?」
현은 정신을 차리고 거대한 얼음 탑 위를 다시 바라보았다.
루이즈의 말대로, 세티아는 가끔씩 이쪽을 흘겨보듯 머리만 돌릴 뿐 공격해 오는 일은 없었다.
“현, 그냥 싸울까?!”
“뭐…? 아인, 너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
현은 황급히 아인을 붙잡는 한편, 유심히 세티아의 거동을 살폈다.
‘정말로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인간을 보기만 해도 미친 듯 울부짖던 녀석인데.
이렇게 얌전한 세티아의 모습은 어색하기까지 했다.
“현, 저기 봐!”
“응?”
“출구가 열려 있어!”
현은 아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보스도 안 잡았는데.”
바닥이 무너진 장소엔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깊은 던전엔 반드시 입구로 돌아갈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이 존재한다.
계단 아래가 분명 던전의 출구일 것이다.
“가도 되는 건가…?”
현은 세티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계단으로 향했다.
쿵! 쿵!
샤틴의 발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탓에 재빨리 그녀를 루이즈의 영혼 속에 집어넣었다.
세티아는 일행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된다고?’
계단의 외길을 한참 내려온 뒤에야 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안도하자 비로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스 방에 도착하자마자 보스를 마주쳤던 이유.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케이드리알의 안배인가?’
기만의 신탁.
루이즈와 함께 얼음가시 던전으로 향한 것은 기만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인이 들은 목소리는 딱 한 마디 뿐.
특별한 지시가 추가로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은 스스로의 힘으로만 던전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만은 자신에게 따로 말해두지 않은 채 보스를 얌전하게 만들어 둔 것인지도 모른다.
‘쯧, 괜히 쓸데없는 짓을.’
모든 상황을 알게 되자 현은 괜히 심술이 났다.
기만이 괜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케이드리알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은 10분 안에 대칭세계로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의식을 낮추는 데 10분 이상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 내 기도 실력이 못 미더운 거겠지.’
어느 쪽이든 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스라 시절 기만이 벌였던 짓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뭐든 좋게 봐 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자신을 놀려주고 싶어서 세티아를 바깥에 빼 두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로 좋아할 수 없는 녀석이다.
“앗, 보석이야!”
계단의 끝.
보라색의 거대한 보석을 보자마자 아인이 쪼르르 달려갔다.
“잠깐, 손대지 마!”
“왜?”
“기만의 함정일지도 몰라.”
“함정…?”
“내가 먼저 건드려 볼게. 넌 멀리 떨어져 있어.”
[‘아인’님을 파티에서 추방했습니다!]불의의 사태를 대비하여 현은 파티까지 잠시 해제해 두었다.
이어서 천천히 보석을 향해 손을 뻗던 중. 당황한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함정이라면서…! 그런데 나랑 동화한 채로 하는 것이냐?!」
「그래서 안전한 거야. 기만이 널 곤란하게 만들진 못하는데, 나한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잘 모르겠다만… 함정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걱정 마. 확실하니까.」
현은 천천히 보석을 건드렸다.
팟! 그 순간, 주위의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혼자 남게 된 현.
하지만 이젠 당황하지 않았다. 악의 씨앗 던전의 끝에서도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니까.
‘함정은 아닌 모양이네.’
이벤트 컷씬.
천계에서 루이즈와 케이드리알이 함께 등장했던 씬은 아직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이번 것은 이해할 수 있을지….
현은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녹화 기능이 켜져 있는지 확인까지 마쳤다.
‘시작됐다!’
찰나, 현은 유체이탈을 한 것과 유사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어딘지 모를 장소들을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칭세계…?’
대칭세계의 풍경으로 시작된 화면은 빠르게 전환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자신은 갑자기 구름 위를 날았고, 잠시 후엔 검은 태양 아래의 외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빨리감기 화면을 지켜보는 기분.
평소엔 5~10배속으로, 광활한 장소에선 100배속이 넘는 속도로 화면이 질주했다.
‘이건….’
현이 이벤트 영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길을 알려주는 건가?’
처음의 장소는 보랏빛 보석이 놓인 이 방.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과 가까운 풍경이 나타나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기만은 지금 하늘로 향하는 루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길대로 따라가라는 거야…!’
그 과정은 엄청나게 복잡했다.
대칭세계. 즉, 지하와 지상을 10번 이상 오가고 있었고, 그 와중엔 이 얼음가시 던전보다 더 험한 지형도 지나가야만 했다.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들 중엔 가끔씩 자신이 아는 장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현은 이것이 속임수가 아니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영상으로 만들어진 지도다!’
이벤트 씬이 종료되기 직전, 정신없이 달리던 화면은 서서히 멈추었다.
드디어 종착지.
현은 화면에 보이는 장소를 보고 숨을 삼켰다.
‘어둠의 땅…?’
현은 대칭세계도, 레티의 시험에서도 이 장소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어둠의 땅은 자신의 기억과 너무 달랐다.
폭포처럼 콸콸 흘러내리던 새카만 안개는 완전히 멎었고, 제단의 역할을 했던 피라미드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루이즈를 다시 여기로 데려다 주라는 걸까?’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팟! 현은 한순간에 아인이 기다리던 방으로 되돌아왔다.
이벤트 씬이 끝나며 보랏빛의 광채를 내뿜덕 보석은, 그 빛을 잃고 검게 물들어 버렸다.
「현, 방금은 무엇이었느냐!」
루이즈도 같은 이벤트 영상을 본 모양이었다.
당황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이 동화로 전해져 왔다.
현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루이즈에겐 미리 말해주지 못했다. 영문도 모른 채 주위의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면 그야 당황할 만도 하겠지.
「그건 말이야….」
캬오오오오!
계단 위로부턴 괴성이 들려온 것은, 현이 막 설명을 해 주려던 순간이었다.
‘세티아의 울음소리?’
현은 귀를 기울여 봤다.
짐승의 울음 외에 누군가의 고함과 병장기 소리가 섞여 있음을 깨닫긴 어렵지 않았다.
세티아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현! 지금 위에….”
“그래, 추격대일 거야!”
추격대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레벨이 몇인지,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세티아를 사냥하지 못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설령 사냥이 불가능하더라도, 바닥에 뚫린 계단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겠지!
상황 파악을 끝내자마자 현은 루이즈에게 소리쳤다.
「루이즈, 기도하자!」
「알겠다!」
“아인, 넌 기다려. 넘어가서 바로 소환해 줄게.”
긴박한 상황에 기도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대칭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선 무의식 근처까지 영혼을 낮춰야 한다니 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루이즈는 일루나의 평원에서 죽음을 앞둔 고통을 느끼면서도 기도에 성공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번에도….
타닥! 타닥!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팟! 현의 신형이 사라진 것은 바로 그 순간.
“아, 벌써 왔네…?”
아인은 성기사로 보이는 자를 어색하게 마주보며 웃었다.
“난 범인 아닌데….”
그리고 약 2초 후.
팟! 그녀의 몸뚱이 역시 검은색의 보석이 놓인 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팟!
“우와, 방금 죽을 뻔했다!”
허공의 일렁이고 약 2초 뒤.
호들갑을 떠는 아인의 모습이 현의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천상의 커플링을 사용한 소환은 아슬아슬하게 성공.
“성기사였어?”
“응. 네임드까진 아니고, 고위 기사들이었어. 잘 얼버무려서 살았지!”
“…그건 좀 위험했겠네.”
현은 매번 반지를 사용할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파트너가 어디에 있든 자신의 앞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의 활용도는 사기스러울 만큼 뛰어났다.
유일한 단점은 결투 등급 ‘그랜드 마스터’ 이상만 착용할 수 있다는 제한 조건.
만약 그 조건이 달려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루이즈에게 반지를 끼웠을 것이다.
어디서든 소환이 가능하면 수많은 메인 퀘스트들을 날로 먹는 건데.
「그만 해도 돼.」
「…….」
「루이즈. 기도 끝났다고.」
「앗…!」
대칭세계로 넘어온 뒤에도 루이즈는 여러 번 불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주위의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깊은 무의식에 빠진 것.
‘기도 스킬도 없는데… 이건 나랑 비교도 안 될 정도네.’
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순간, 루이즈의 공감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정됐어?」
「머, 멀쩡하다!」
「너무 깊게 빠지진 마.」
무의식은 모든 감정의 집합체.
루이즈에게 동화한 채로 기도하던 현은 본의 아니게 그녀의 무의식 밑바닥에 쌓여있던 속마음을 엿보았다.
루이즈는 두 명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고 느낀다.
한 명은 자신.
루이즈는 종종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혹은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꺼냈으니 그것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현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경고 한 마디를 남긴 채 사라져 버린 천인. 파피.
예상외로 루이즈의 마음속 깊은 곳엔 파피의 신변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만약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거라면… 루이즈가 느낄 죄책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할 것이다.
‘NPC라는 선입견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
생각해 보면 루이즈는 마리아의 죽음에도 엄청나게 슬퍼했다.
자신은 파피를 1.5세대의 생생한 인공지능이라 느낄 뿐이지만, 아스리안이 진짜 세계인 루이즈에겐 유저든 NPC든 다르지 않은 거겠지.
아니, 삶과 죽음을 장난스럽게 대하는 유저보다 NPC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루이즈.”
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루이즈가 방금 자신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또, 한 가지 사과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부하들의 위치를 알아봐 준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네.」
어둠에게 부하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500레벨. 진정한 어둠이 되기까지 루이즈는 앞으로 두 번을 더 각성해야 한다.
첫 번째 파편이 존재하는 장소는 하늘의 외딴 섬.
천인들이 철통같이 경계하는 그곳을 루이즈 혼자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늘로 향하기 전 세상에 흩어진 부하들을 모으려 했던 이유도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운이 좋아 샤틴이 제 발로 찾아오긴 했지만, 그녀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인터루프의 정보를 뒤져 볼 시간이 없었거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 변덕으로 이틀이나 계획이 앞당겨졌으니, 내가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이다.」
루이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현, 그대가 나와 함께 와주지 않았는가? 아, 물론 아인도… 말이다.」
「우린 고작 200레벨인데? 하늘에서 천인들과 싸우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될 거야.」
「레벨은 상관없다. 그대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다.」
루이즈는 잠시 쉬고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대가 천사였다면… 난 진심으로 그대를 섬겼을지도 모르겠구나.」
「뭐? 악마가 천사를 섬겨?」
「이상한가? 그럼 그대 역시 악마인 것으로 하지.」
「그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야. 바보 같은 소린 그만하고.」
또 화제가 이상해지기 전에, 현은 방금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아직 네 부하들을 얻을 기회가 있는 것 같아.」
「응?」
「하늘에도 어둠의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것 같거든.」
「하늘, 어디에 말인가…?」
「어둠의 땅.」
현은 방금 본 이벤트 영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마지막 화면. 기만은 루이즈와 함께 어둠의 땅으로 향하라 말하고 있었다.
「5년 전 전쟁이 일어났잖아.」
「그랬…지.」
「그때 네 부하들도 많이 죽었고.」
현은 레티의 시험에서 그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어 보았다.
루이즈가 살아남은 게 기적일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루이즈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고, 운이 좋아 파피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대로 객사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네 부하들이 잠들어 있다면, 네가 깨울 수 있는 거 아니야?」
폐허로 변한 땅에 남은 영혼은 얼핏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루이즈를 어둠의 땅으로 불어들일 이유가 없겠지
잠든 영혼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기만은 그곳을 이정표로 가리키는 것이다.
「나의 부하가 남아있다고…?」
「가능성은 충분해 보여.」
「그대의 말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나는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
“둘이만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동화 풀고 좀 말해!”
아인의 불평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대화의 내용은 아인도 알아둬서 나쁠 것이 없는 정보들이었다.
“알겠어.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
“안전한 곳? 여기도 위험한 거야?”
“샤크론의 성기사단도 대칭세계로 넘어왔었잖아. 그 녀석들이 악마에게 기도하진 않을 테니… 신관들이 세계를 건너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아.”
“또 쫒기는 건 싫은데….”
“숨으면 괜찮아. 넘어온다 해도 그 수가 많진 않을 거고. 트레이싱 이블이 대칭세계의 좌표까지 읽어낼 것 같진 않거든.”
약 10분정도 달리자 일행은 한산한 냇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휴식을 취하기 딱 좋은 장소.
루이즈는 물에 발을 담갔고 아인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동안, 현은 녹화된 이벤트 영상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가끔 중요한 부분은 느린 재생으로 몇 번쯤 돌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동영상을 분석하는 현은 머릿속에 어둠의 땅으로 향하는 가상의 지도를 서서히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아, 왔어?”
아인이 돌아온 시간에 맞춰 허공에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웠다.
“이번엔 무슨 임무입니까…?”
“그냥 듣기만 해.”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어야만 했기에 현은 샤틴까지 소환해 두었다.
아인과 샤틴은 이벤트 씬을 보지 못했을 테니, 5분 남짓한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재생시켰다.
물론, 한 번 보는 것으로 전부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끊임없이 일행에게 길을 알려줄 것이고, 자신도 헷갈릴 만한 세세한 길은 그때그때 영상을 확인하며 나아가도 충분하니까.
현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행성 아스라의 상공 200킬로미터에는 ‘백색의 띠(White Line)’라 불리는 대기층이 존재한다.
약 5킬로미터의 두께를 지니는 그 구역엔 인간도, 천인도, 심지어 격이 낮은 초월자도 접근할 수 없다.
구역 내부엔 마나, 신성력, 마기 등… 세상의 모든 기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휘몰아치며 죽음의 공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백색의 띠가 바로 하늘의 경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구름의 너머를 하늘이라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잘못된 말이다.
성서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이 백색의 띠를 경계로 위쪽은 ‘하늘’, 아래쪽은 ‘지상’이라 정의된다.
그러니 아스리안에서 ‘하늘’이라는 단어는 현실의 하늘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하늘이란 천인의 구역.
반대로 지상은 인간의 구역이다.
두 구역을 나누는 백색의 띠는 태초에 어느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지상에서 천인의 힘이 제약되고, 인간이 제작한 인공위성은 하늘의 영역을 넘볼 수 없는 것도 그 정체모를 초월자의 의지대로인 것이다.
거대한 구체의 껍질처럼 아스라를 둘러싸고 있는 백색의 띠.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탓에 텔레포트로도 그 띠를 건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백색의 띠를 통과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상에 천인이 내려올 수도 없었으리라.
죽음의 층이란 악명을 지닌 그 껍질에도 두 군데의 구멍이 존재했다.
마나의 순환이 시작되는 북극.
다시 마나가 흩어지는 남극.
이렇게 거대한 마나의 격류가 흐르는 두 곳엔 백색의 띠가 유지되지 못하고 흩어진다.
바꿔 말해, 북극과 남극 상공 500킬로미터에 뚫린 구멍들은 지상과 하늘을 잇는 단 두 개의 통로!
일루나 선착장이 극지방에만 존재하는 이유도 왕복선이 둘 중 하나의 구멍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대칭세계를 이용해도 한 번에 하늘로 가는 길은 없어.”
현은 영상을 보고 분석한 바를 모두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여러 번’ 현실과 대칭세계를 왕복하는 방법으로 하늘까지 가는 길은 있지!”
기만이 제시한 루트는 북극의 구멍을 관통하는 ‘하늘 다리’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세 번쯤 대칭세계를 통과하고 나면 하늘 다리의 중간층에 도달할 거야.”
북극 하늘다리.
다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하늘에 부유하는 섬들보다 훨씬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하늘에 인간의 대도시를 만들 수 있을 정도.
그 거대한 길이 때문에 다리의 상층부는 ‘하늘’, 하층부는 ‘지상’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5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간층은 백색의 띠와 같은 고도, 즉, 인공위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높이에 속하게 된다.
중간층을 지나는 순간부터 루이즈에게 걸린 트레이싱 이블의 효과가 해제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하늘다리를 벗어나기 전까진 발을 멈추지 말고 도망가야 돼.”
“어째서인가?”
“천인들은 마기에 민감하거든. 네 존재만으로 들킬 수밖에 없겠지.”
하늘 다리의 운행을 관리하는 것은 대여섯 명의 천인들이다.
또한, 수백의 가디언(Guardian)들과 수천의 인간 병사들이 곳곳의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소란이 벌어질 것은 필연.
“천인이 다섯 명이라니…! 우린 그런 녀석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냐?!”
“괜찮아.”
현은 벌써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루이즈를 안심시켰다.
“대부분 F급이고 기껏해야 E급 한 두 명쯤 있을 거야. 관리직은 기피직종이거든.”
F급이란 350레벨 이하의 천인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 위로 한 등급마다 10레벨 정도의 격차가 존재하고, 400레벨을 넘어가는 천인은 다시 S급으로 묶어 분류된다.
물론 천인은 하나하나가 1.5세대의 인공지능을 지닌 네임드!
400레벨 유저라도 웬만하면 F급 천인조차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라면?
기만이 알려준 루트를 활용한다면?
다섯 명의 천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진 않을 테니 어떻게든 추격을 따돌릴 수 있으리라.
“가장 위험한 건 물론 천인이겠지만, 가디언도 조심해야 돼.”
“가디…언?”
“골렘의 종류야. 천인이 지휘하는 병사라고 생각하면 간단해.”
“그런 것은 기억의 파편에도 없다. 그대는 나보다 열 배는 더 세상을 경험한 것 같구나.”
루이즈의 중얼거림에 현은 피식 웃었다.
분명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일 텐데, 어째서 아직도 어린애를 키우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한 번 더 각성해서 400레벨이 되도 그대로일까?
아무리 심해도 두 번의 각성을 마친다면 달라지겠지.
루이즈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그녀의 성장은 환영할 일이 분명한데, 어째선지 한편으론 루이즈의 성격이 변하면 좀 아쉬울 것 같았다.
“항상 느끼는 건데.”
“응?”
“현은 이때가 제일 멋있는 것 같아….”
“훗, 쓸데없는 소린 나중에 하고. 다들 준비됐지?”
검은 태양 아래를 달리던 일행은 벌써 지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맞았다.
이번 기도의 대상은 루티아. 아니, 루티엘!
현은 거짓된 천사에게 기도를 바칠 생각이었다.
그 편이 진실이나 빛에게 기도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이 절벽 끝에 서서 기도하면 돼.”
「여기 말인가?」
“맞아. 딱 거기.”
현은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번엔 루이즈의 기도를 도와주지 않았다.
조금은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세계가 바뀌는 찰나, 자신은 북극 하늘다리의 최하층에 있을 테니까!
팟! 루이즈의 의식이 끝없이 낮아지던 어느 순간, 현의 시야는 반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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