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연말은 TBS 연기대상에서
성탄절 예술제가 끝나고, 드디어 겨울방학이 왔다.
요즘 내 일상은 소복이 쌓인 눈만큼 평온하다.
[김리듬. 정신 차려. 악보 정리 오늘 다 끝내야 해.]“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비록 산더미처럼 쌓인 악보 정리라는 난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온하다.
앞으로 2학년이 되면 쓸 악보들이라나.
“정 마에.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죠?”
[왜긴 왜야.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
그렇다.
방학이 되기 직전, 전수정은 내게 ‘돈을 받으면서 음악 공부도 할 수 있고 나에게 가장 적절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했고, 나는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았다.
그게 학교 도서관 1/3 규모의 악보 정리 작업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아니, 이건 양이 좀 많이 미쳤는데요…….”
[김리듬. 너, 음대 지휘과 입학생이 입학한 다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아냐?]“당연히 모르죠.”
[악보 관리다. 음대 오케스트라의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쓰는 파트보를 지휘과 학생들이 다 관리하지.]“그런 짓은 음대 가서 해도 되잖아요.”
[이게 참 엄청난 노가다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야.]그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하이든의 교향곡 파트보를 슥 훑어보고는, 내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랬거든. 관련 악보들을 일일이 복사해서 제본하고, 연주가 끝나면 수거하고 관리했지. 그러면서 오케스트라의 구조가 머릿속에 빠삭하게 들어왔다고.]이제야 전수정이 내게 이런 아르바이트를 왜 제안했는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지금, 조급한 것이다.
내가 지금보다 더 압도적으로 성장해서.
하루라도 빨리 정점에 서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이거, 전수정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요?”
[이제야 전수정의 속내를 눈치챈 거냐? 너도 참 둔하다.]“그런데 정 마에는 처음부터 잘나갔을 것 같은데, 그런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셨네요?”
[그건 브장송 지휘 콩쿠르 우승 전 얘기고. 내가 대학교 첫 학기 내내 한 짓이 조교실하고 행정실 앞 복사기 붙잡고 신나게 악보 복사하는 일이었어.]“그리고 브장송 지휘 콩쿠르를 우승하셨죠.”
[그때는 진짜 너무 우승하고 싶었거든. 그놈의 지겨운 복사 일 좀 빨리 끝내고 싶어서.]여러분.
여기 악보 복사하는 게 귀찮다고, 지휘 콩쿠르를 나가 우승해 버린 귀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에스트로 폰 노이만에게서 사사했죠?”
[그랬지. 정말 멋진 경험이었어.]“그런데, 시드니 피아노 콩쿠르까지 우승하신 분이 갑자기 생각을 바꿔 지휘자로 나선 이유가 뭐예요?”
[약속을 했었거든. 중요한 약속…….]참으로 오랜만이다.
투명한 그의 눈동자에, 감정이 결빙되는 일이.
[아니다. 다 옛날 얘기지, 뭐.]“아니, 대체 무슨 옛날얘기요?”
[됐어. 말 안 할 거야. 악보 정리나 계속해.]“궁금한데.”
[말 안 할 거라니까.]“쳇. 언젠가는 알아내고 말겠어.”
[어이, 김 씨. 빨리 작업 끝내. 연습이나 하게.]“안 그래도 그럴 작정임다~”
이 인간, 아니, 귀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 단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살다 가는 것’ 아닐까.
그래도 괜찮다.
“고마워, 나른아.”
나한테는, 작업을 도와줄 폭신이 12형제가 있으니까.
그렇게 짧은 겨울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 작업은.
검은 밤이 온 다음에야 끝이 났다.
“드디어 끝. 으아아아.”
[수고했다.]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일으켜 바깥을 살피니.
창문 밖의 연말 저녁은 감청색 바탕에 전구색 점들이 가득한 성화처럼 빛났다.
이렇게 평온하고, 고요한 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내게 묘한 충만함을 주었다.
“좋아요. 일단, 음악 한 곡 들으면서 연습할까요?”
분위기 전환을 위해, 태블릿 PC를 켜자마자.
― 연말은 TBS 연기대상과 함께하세요!
라는 익숙한 광고 문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현성 목소리 좋은데? 가수 했어도 괜찮았을 거야.]“후우. 여기를 제가 참석해야 한다니.”
[참석하면 좋지, 뭘 그런 걸 가지고.]주인공의 연주 대역으로서는 꽤 파격적인 대우다.
물론, 나 혼자 참석해야 한다는 게 좀 착잡하지만.
게다가, 나는 그 연기대상에서 연주까지 해야 한다.
* * *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TBS 연기대상 시상식 날이.
“그러면, 갔다 올게요.”
“응. 몸조심하고, 집에서 우리 아들 잘 지켜볼게.”
“몸조심은요. 금방 다녀오는 건데.”
택시를 타고 조용히 TBS 공개홀에 도착한 후.
초청장을 보여 주고,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연습 시간을 많이 못 줘서 미안해요, 김리듬 군.”
“괜찮습니다. 일단 피아노 상태부터 확인할게요.”
다행히, 피아노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차가운 공간에 있던 피아노를 미리 따뜻하게 덥혀 놓은 거야. 꽤 섬세한데?]‘박현성 씨 쪽에서 언질 한 거 아닐까요?’
[그랬을 수도 있지.]리허설을 마친 후,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중.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 열어 주세요, 김리듬 군.”
아,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문을 열자, 충격적인 비주얼이 내게 들이밀어졌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
“안녕하세요, 새롭고 섹시한 ‘세라핀즈’입니다!”
그렇게 신인 걸그룹처럼 자기소개를 한 네 명의 여신들은, 멍한 내 얼굴을 보면서 깔깔거렸다.
“어떻게 해, 우리 미모에 의식을 잃었나 봐!”
“오랜만이야, 김리듬 군!”
사실, ‘세라핀즈’에 대해서 내가 아는 점은.
‘리더 안유경을 제외하면 이상하리만치 안 뜨는 비운의 걸그룹’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반가워요, 리듬 군! 진짜 언니 말대로 손가락 미남이네?”
“리듬 군, 정신 차려요! 지금 얼굴이 딸기 맛이에요!”
가까이서 보니.
그저, 눈이 부시다.
이렇게 환상적인 걸그룹이, 왜 지금까지 안 뜬 거지?
하지만 재회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안유경 씨, 이제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그러면, 얘들아. 나 이만 들어갈게. 김리듬 군도 조심해서 들어와.”
“네. 들어가세요.”
“나중에 봐, 언니~”
미묘한 표정의 안유경이 스태프를 따라 들어가고.
그녀와 나머지 세 멤버의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드라마 촬영과 이어진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이 바닥의 민낯을 자주 보게 된 내 눈에, 거리감이 보였다.
성공한 멤버와 뒤처진 멤버들 사이의 묘한 거리감을.
‘아니야. 잘못 본 거겠지.’
* * *
연말 연기대상을 시작하는 촬영장은 온갖 스타들의 향연으로 정신이 없었다.
시상식장에 모인 무수한 스타들 중에서도.
박현성과 김세린은, 정말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박현성 씨! 이쪽 바라봐 주세요!”
“저기 김세린 씨다!”
카메라가 온통 두 스타를 찍는 데 집중되어 있어서.
나머지 배우들에게는 좀처럼 카메라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제 202X년도 TBS 연기대상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올해의 가장 핫한 드라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줄여서 ≪죽. 왕. 파.≫를 빛낸 주인공, 박현성의 손의 연주를 들어 보실까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손을 풀고, 정신을 열 손가락으로 집중한 후.
나의 영혼을, 악기에 감응시켜 음을 울리게 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 환상으로 시작해서, 몽상으로 이어지다가, 광상으로 끝나는 곡.]나는 영혼을 건반에 새기듯 연주를 끝냈고.
연주가 끝나자, 예의와 열광 사이의 박수가 터졌다.
특히 현성은 노골적으로 내 연주에 환호했다.
“자, 그러면 본격적인 시상식, 시작해 볼까요?”
기대하고, 예상했던 대로.
시상식에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독주했다.
“신인상 발표하겠습니다. 신인상은, 드라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본인의 이름으로 열연한 안! 유! 진!”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졌고.
유경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무대에 올라 인사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과, 그리고 항상 저를 먼저 생각하고 챙겨 준 우리 ‘세라핀즈’ 멤버들…….”
‘세라핀즈’의 멤버들은 ‘유경 언니 3,000만큼 사랑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그녀에게 꽃다발을 주었다.
방금 전에 내가 보았던 미묘한 거리감은 이미 눈 녹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잘못 본 거겠지.’
그다음 순서들도 우리 드라마가 독차지했다.
전상국 감독의 감독상에.
백아현 작가의 시나리오상까지.
전상국 감독은 “나 상 탔다! 오늘 밤에 한잔하러 가자!”라는 본인다운 수상소감을 발표했지만.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아현 작가는 역대 TBS 연기대상 수상소감 중 가장 충격적인 수상소감을 밝히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모두가 ‘저게 끝?’이라는 표정으로, 백아현 작가가 내려간 무대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냉정하기 짝이 없으시네요.”
[그래도 온 게 어디냐. 원래는 차기작 구상 때문에 참석조차 안 할 생각이었다는데.]그런데.
백아현 작가가 내려간 다음부터, 흐름이 이상해졌다.
“우수상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김세린과!”
뭐라고?
설마, 이거 공동 수상인가?
“≪오후의 여름 정원≫ 최석규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수상이, 공동 수상이다.
분위기가 뭔가 묘하게 돌아간다.
[이건 말이 안 되지. 내가 기억하기로 ≪오후의 여름 정원≫ 최고 시청률이 8.8%였던 걸로 아는데.]‘두고 보면 알겠죠.’
묘한 분위기는 최우수상에서 정점을 찍었다.
“최우수상은, ≪오후의 여름 정원≫의 유가연!”
박현성도 김세린도 사심 없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지만, 나와 정윤성은 적잖이 불편했다.
2020년대 TBS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2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와.
고작 8%에 그쳤던 드라마가.
수상을 경쟁한다니.
[이거, 그 외압이라는 게 투자자들을 통해 이사진 쪽으로 들어간 모양이야.]이렇게 되면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제 모두의 관심사가 집중된 것은, 단 하나.
‘과연, 박현성이 대상 수상에 성공할 것인가?’
마침내 대상 수상자가 적힌 큐카드의 봉인이 풀렸다.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 영광의 TBS 연기대상은!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박! 현! 성!”
나는 진심으로 그의 대상 수상을 축하해 주었다.
독특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그는.
꽃다발과 상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마침내,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을 때.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
나는 약간 잠겨서 음정이 불안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우선, 저희 소속사 유종필 사장님께 감사드리고요. 완벽한 드라마 촬영을 위해 항상 힘써 주신 전상국 감독님과, 환상적인 대본을 써 주신 백아현 작가님…….”
떨면서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연기자의 모습이라고 하기가 힘들었다.
시선 처리조차 안 되고 목소리도 갈라지는 저 모습이 연기라면, 그는 할리우드에 있어야 할 테니까.
“저와 항상 좋은 호흡을 잘 맞춰 준 김세린 씨와 안유경 씨에게도 감사드리고, 어, 그리고, 아! 제가 힘들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저를 도와준 창선이 형…….”
그의 시선이, 이제 나를 향했다.
“그리고, 제가 드라마를 찍는 동안 항상 저의 음악이 되어 주었던 김리듬 군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덜덜 떨리던 그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제가 무명일 때, 정말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어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
오만하고, 쌀쌀맞고, 냉정해 보이는 그의 본모습인.
차갑게 식은 방바닥에서 혼자 웅크린 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를.
“어머니가 항상 해 주시던 음식이었거든요. 씻은 김치를 다지고 잘 으깬 두부와 고기를 넣고 파를 썰어 넣어 양념을 하면 만두소가 되는데, 어머니는 그 만두소를 계란에 잘 부쳐서 싸 주셨어요. 굶지 말라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2년 전에,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떠, 떠나시고, 정리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 만두소가…… 팩에 담겨 있더라고요.”
현성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열했고.
나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꼭, 흐윽, 꼭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제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이 상을, 바칩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박현성은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어린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어머니는, 성공을 보지 못하고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 저런 사연이 그런 연기를 만든 원천이겠지.]나는 세린의 포옹을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현성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올 한 해 있었던,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모두 보내고.
부디, 내년은 더 따스한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