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이상적인 공연 계약이란 (2)
“잠시만요, 잠시만요.”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신태정 팀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신 팀장님.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그리고, 출연 계약서에도 김리듬 군과 단원들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습니다. 개인 단원들의 SNS 금지는 그렇다 치고, 저작권과 초상권 관련 조항들은 저작권, 초상권 탈취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수정하셔야겠습니다.”
왜 전수정이 신 팀장을 보냈는지 알겠다.
정말, 상대가 누구건 일당백이 가능한 사람이다.
“잠깐만 기다려요!”
신 팀장의 논리적인 지적에 말문이 막혀 버린 배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고서는.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급하게 닷지를 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최시현이 한마디 했다.
“저거 진짜 옛날부터 고소하고 싶었는데.”
다들 침묵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유명했나 보다.
“정신이 나가도 아주 제대로 나갔다니까. 어디서 감히, 이제 막 쑥쑥 크려는 음악계의 귀하디귀한 새싹에게 더러운 갑질을 하려고 들어?”
“그것보다, 나는 우리 김리듬 군이 깔끔하게 허점을 짚어 내서 함정을 피했다는 점에 눈이 가는데?”
이명석 본부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야무진데?’라는 감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나는 눈웃음으로 그의 눈빛을 받았다.
“주위에서 약간의 조언을 해 줘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계약서는 꼼꼼하게 보라고 해서요.”
음악뿐만 아니라 공연 계약에도 통달한 지휘자 귀신이 옆에 있으면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이거 아닐까.
“하하하. 이거, 우리 김리듬 학생하고 정식으로 계약할 때는 최고의 계약서를 만들어 와야겠어. 방심했다가는 큰일 날 수 있으니까. 하하.”
나는 그의 뼈 있는 말에도 침착하게 굴었다.
달콤한 말을 쏟아 내는 입과는 다르게.
그의 눈은, 나를 예리하게 관찰했으니까.
[저, 저 눈 봐라, 저거. 방금 전까지는 너를 최시현 MBG 재계약 관련해서 집어 올 1+1으로만 생각하는 게 대놓고 보였는데.]윤성의 현실적인 조언이.
지금만큼 큰 도움이 되는 순간도 없다.
딸랑.
때마침, 예술의 전당 측 배 부장이 ‘통화’를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의 생기가 싹 사라진 얼굴을 보니, 오랜만에 사이다가 몸속에 쫙쫙 퍼지는 기분이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계약서 수정할게요.”
“좋습니다. 수정을 시작하지요.”
신태정 팀장은 계약이 끝나는 순간까지 칼같았다.
조항 하나하나를 칼같이 분해하고 분석해서는, 나와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에게 불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요소를 외과 수술하듯 전부 적출했고.
생기가 싹 사라진 예술의 전당 측 배 부장은, 네, 네, 하는 영혼 없는 리액션으로 받았다.
마침내,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좋습니다. 그러면, 좋은 공연 기대하겠습니다.”
이제 정말로, 계약을 이행해야 할 순간이 왔다.
* * *
“아, 정말 짜릿해. 몇 번을 생각해도.”
최시현은 올 때보다 기분이 200배는 더 좋아졌다.
“그렇게 좋아요, 마에스트로?”
“당연하지. 네가 저 배 부장한테 시작부터 엿을 먹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둘 사이의 구체적인 악연은 모르겠지만.
최시현이 이렇게 기분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아, 진짜 얼마나 꼴 보기 싫던지. 툭하면 저희는 공익을 위해서, 국가의 얼굴이기 때문에, 항상 손해 보면서 일하는 입장이라서, 이따위 말만 주절거리는 꼴 진짜 보기 싫었다고.”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사실, 네가 계약서를 대충 훑으면 내가 직접 지적할 생각이었어.”
“네?”
그가 부드럽게 차선을 변경하자.
레드 라이트가 그린 라이트로 바뀌었다.
“네 계약서와 내 계약서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거든. 세상 물정 모르는 예고생이 뭘 모를 거라고 여기고, 알게 모르게 갑질을 하려고 들다가 된통 당한 거지.”
아니, 저기 마에스트로 최시현 님.
그런 건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그런데, 생각보다 잘 해내서 놀랐어.”
“해내서 다행이네요.”
“흐음. 이렇게 나를 기분 좋게 해 준 김에, 우리 김리듬한테 소원 카드를 하나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 말, 후회하지 않으시죠?”
“네버. 무엇이든지 얘기해.”
나는 눈으로 씩 웃었다.
* * *
최시현과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템포를 잡는 피아노 리허설은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오케스트라와 같이하는 진짜 리허설.
시현은 나의 ‘사소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 마에스트로 최시현! 영광입니다!”
“정선율이라고 했지? 만나서 반가워.”
나는 정선율을 리허설 페이지 터너로 써 달라고 했고, 그가 고민하지 않고 승낙한 것이다.
‘최시현의 연주를 옆에서 계속 들으면, 정선율도 한 단계 더 성장하겠지.’
그리고, 두 달 후인 4월에 있을 한국문화일보 콩쿠르 준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백도희 선배를 꺾어야 하겠지만.’
백도희 선배는, 이 콩쿠르 우승을 위해 진짜로 이를 갈고 몇 달째 절치부심 준비 중이라고 한다.
나도 학교에서 가끔 그녀의 연주를 듣고는 하지만.
‘정선율과는 급이 달라.’
정선율도 하루 9시간, 10시간씩 연습 중이지만.
백도희 선배는, 거의, 뭐랄까.
[맡겨 놓은 우승 트로피 가져갈 기세지.]“그렇죠. 바로 그거예요.”
[솔직히 나라면 정선율 우승 가능성에 걸지 않아. 물론 녀석이 전과는 다르게 열심히 하지만, 급이 다르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의 질이 달라.]“알아요, 알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선율이를 돕고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받은 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친구에게.
정말 도움이 될 선물 하나 정도는.
꼭 하고 싶으니까.
* * *
마침내 리허설을 시작하기 직전에.
나는 단원들을 모아 충고했다.
“마에스트로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알겠지만, 음압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될 겁니다.”
“압니다, 지휘자님.”
“아, 시작부터 너무 기죽이는 거 아냐?”
이건 절대 과장이 아니다.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말고, 제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오세요. 자, 그러면 최고의 연주를 만들어 봅시다.”
마침내.
‘아르스 노바’ 오케 100명의 소리가.
한 명의 거장과 맞설 시간이 왔다.
시현이 누르는 A음에 맞춰, 오케스트라를 조율하고.
“팀파니. 준비를.”
모든 소리의 파동이 추방된 진공의 공간에서.
팀파니의 미친 트레몰로를 불러온다.
쾅!
기다렸다는 듯, 피아노의 미친 하강 연타가.
공연장 전체를 뒤흔든다.
[이거 완전 ‘퍼스트 임팩트’야. 최시현 저거, 연습 때도 느낀 거지만 정말 괴물이라고.]단원들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지금 우리가 이 소리에 맞서야 한다고?’라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난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고 나의 지시를 잘 따라온 것은 유준혁뿐이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나는 바로 연주를 멈추게 한 후, 지적을 개시했다.
“목관에 긴장감이 전혀 없어요. 오보에를 제외하면 강박과 약박의 구분도 불분명하고요. 다시 합시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아니, 관현악곡에서 왜 항상 목관이 중요할까.
‘오케스트라의 신 스틸러니까.’
이 곡만 해도 그렇지.
피아노가 ‘퍼스트 임팩트’로 무대를 뒤집어 놓은 직후, 무대가 격렬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바로 이 순간.
‘그 긴장감을, 정면으로 이어 나가야 하는 악기들이 바로 목관이니까.’
특히, 목관의 중심축인 유준혁이 받쳐 줘야 한다.
얼핏 보면 현악기처럼 수도 많지 않고.
금관악기 같은 파워도 없어 보이지만.
관현악곡의 중요한 장면에서.
미친 듯한 존재감을 보이면서.
신 스틸러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바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같은.
목관악기다.
“좋습니다. 이 긴장감을, 그대로 현악기로!”
다행히, 현악기는 매끄럽게 긴장감을 받았다.
악기들끼리 선율을 주고받는 이런 토스에서.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단 합격점이다. 계속 진행해.]이제 시현의 피아노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언의 무게감이, 내게 묵직하게 다가온다.
“금관! 팀파니! 더 크게! 공연장 끝까지 울리게!”
* * *
“수고하셨습니다.”
리허설은 아슬아슬하게 진행되었다.
완벽함을 넘어, 숨 막히는 무결점의 피아노와.
조악함을 갓 탈피한 합주력으로 버티는 오케스트라.
수석 단원들이 집요하게 연습을 시킨 덕에, 합주력 자체는 ‘괄목상대’라 불러도 될 정도로 늘었지만.
상대는 최시현이다.
“마에스트로, 수고하셨어요.”
“아등바등하는 소리들이 참 듣기 좋던데.”
“역시, 참고 계셨군요.”
단원들은 정말 노력했다.
노력했지만.
최시현의 입장에서는, 우스울 것이다.
“물론 지휘자 김리듬의 지휘 혼은 눈부셨지만, 지휘자 혼자서는 오케스트라를 완성할 수 없지. 이 정도로는 안 돼. 더 끌어올려야 할 거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기세이던 사람이 갑자기 지휘자로 전직이라니. 좀 특이하기는 하네.”
그는 진설희 매니저가 건네주는 물병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윤성과의 약속.
김조현에 대한 분노.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금, 내가 지휘자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은 몰랐거든요.”
“흐음.”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나를 삐딱하게 보았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네. 하지만.”
“하지만?”
“김리듬. 언젠가 너는, 지금까지 이룬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업적을 피아니스트로 쌓게 될 거야.”
“…….”
“나한테는 보여. 네가 피아니스트로 정상에 오르는 모습이.”
“마에스트로, 조금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뭐든지.”
나는,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그에게 선언했다.
“반드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서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 * *
돌아가는 길에, 윤성은 내게 묵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도 할 생각이야?]“쇼팽 콩쿠르요?”
[네가 피아니스트로서 정점에 오른다는 증거는 그것 말고는 딱히 없지 않냐?]그 말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씨를.
내 마음속에 붙였다.
“쇼팽 콩쿠르 우승…….”
[내가 옛날에 너한테 한 말 기억나냐? 너한테는 빛이 있다고 한 말.]“작년 여름 마스터클래스요?”
[아마 최시현도, 이제는 그걸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아. 네 안에 계속 잠복해 있지만, 절대 꺼지지 않는 그 불씨를 말이야.]그래. 그것만큼은 분명하다.
내게 지휘는 계약이자, 목표지만.
나의 인생은, 피아노와 함께했음을.
“정 마에.”
“제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내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세상이 저를 뭐라고 할까요?”
[너, 그 말이 아주 오만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물론이죠.”
피아니스트에게 쇼팽 콩쿠르는 단순히 우승하기 위한 목표물이나 성취 따위가 아니다.
그곳은, 오직 피아노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생애를 바쳐 온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신성한 전당이다.
지금 내 말은 어쩌면 그런 이들에 대한 모독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윤성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들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겠지.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미증유의 미친 천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