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정선율의 콩쿠르
“일단 연습실로 가자.”
“매일 치는 거기?”
“응. 요즘은 사실상 내 전용 연습실이지.”
거기라면 나도 익숙한 곳이다.
내 전용 연습실을 받기 전의 나도, 그 특유의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했으니까.
‘유일한 단점이라면, 인기가 너무 좋다는 거지.’
희성예고에서 연습실을 사용하려면, 보통 전날 밤 11시 30분까지는 예약을 마쳐야 한다.
간발의 차이로 예약을 놓쳐서 좋은 연습실을 날리는 애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선율은 정말로 콩쿠르에 목숨을 걸었고.
단 한 번도 예약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먼저 연습실에 가 있을게.”
“오케이. 15분 후에 보자.”
시간을 빡빡하게 쓰다 보니 시간 개념이 철저해졌다.
정확하게 ‘몇 분 후에 보자.’ 같은 말을 쓰지 않으면 이제 불안해질 지경이다.
그렇게 선율이를 먼저 보내고.
나는 화성학 문제를 싹 풀고 연습실로 이동했다.
‘그런데, 선율이가 참 저런 예약 같은 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해낸단 말이야.’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정선율은 지금까지 자신이 먹잇감으로 노린 콘서트 예매를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게다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스케줄이나 특이사항, 습관, 무대 뒤의 뒷얘기에까지 은근히 빠삭하다.
[김리듬. 정선율 말이야, 은근히 매니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 안 하냐?]“선율이는 피아니스트거든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져?”
[야. 재능이 있으면 그걸 살려야지.]재능이라.
분명히 농담처럼 꺼낸 단어인데.
거기 실린 무게가, 의외로 돌 같다.
기분 나쁜 무게를 가진 돌.
“정 마에. 그거 정선율한테 진짜 실례예요.”
[글쎄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하는데.]“정 마에.”
[전국의 무수한 예고생 중에 몇 명이나 체칠리아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체칠리아.
서구권에서 음악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음악의 성녀.
[너는 선택을 받았어. 지금까지의 네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하지만 정선율은…….]“정 마에. 거기까지.”
윤성이 입을 닫았다.
내 표정에 드러난 의미를 읽은 것이다.
[야.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정색할 것까지야…….]“그리고 체칠리아가 어디 있어요. 나한테 붙은 건 칙칙한 남자 유령인데.”
“그런데, 선율이 표정을 보니까 이제 진짜로 콩쿠르만 보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지. 요즘 개드립도 잘 안 치지 않나?]“개드립이라뇨. 얼굴 본 기억도 희미한데.”
정선율은, 이제 정말로.
진지하게 콩쿠르와 대면하는 중이다.
벌써부터, 연습실 안에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다가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저 모습이.
“좋아. 좋아…….”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리가 들리지 않게 벽에 기대서서는.
친구가 연습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연주가 끝난 후에야.
녀석이 나를 알아보았다.
“아니, 미친 김리듬! 은신 쓰지 말라고! 심장 오링 나는 줄 알았네!”
“은신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연습실에 들어왔는데 네가 몰랐던 거잖아.”
“아, 그런 것인가.”
“자, 이제 빨리 연주 시작해.”
“어, 해야지.”
하지만 피아노로 몸을 다시 돌린 녀석은.
좀처럼 연주를 시작하려 들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흐르지만, 녀석의 손가락은 좀처럼 건반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정선율! 정신 차려!”
“아, 시끄러워!”
반응이 이런 걸 보니 다행히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
“긴장 풀어.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쳐.”
“그래, 좋아.”
녀석은, 마침내 용기를 내서.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리고는.
손을 몇 번 풀고, 연주를 시작했다.
‘쇼팽의 연습곡 12번 다단조.’
일명 ≪혁명≫.
심장에서 솟구치는 피의 온도를.
증발 직전까지 올려 버리는 격렬한 곡.
‘그리고, 파국을 직면하는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투수의 손끝에서부터 포수의 미트까지.
강렬하게, 아찔하게, 묵직하게 전달해야 하는 곡.
이제 정선율은, 주뼛거리거나 머뭇거리는 특유의 단점 없이, 곡에 집중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래서, 나와 윤성은 연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
[…….]머리로 냉정한 평가를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연주가 끝났다.
“……어때?”
“…….”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잔인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잔인해져야 하는 시간이다.
“선율아.”
“응. 얘기해.”
“지금까지, 열심히 했잖아.”
“당연하지.”
“정말 열심히 했잖아. 그렇지?”
“왜 그래, 갑자기? 옆에서 봐서 알잖아!”
“그래서 말이야, 정선율.”
나는 확신한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이 연주로는.
절대 도희 선배를 이기지 못한다.
“이걸로는 힘들어.”
그 말 한마디가.
정선율이라는 인간을, 그 자리에 굳어 버리게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잔인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잔인해지라는 의미였다.
“……납득하게 해 줘.”
마침내, 선율이의 입이 열렸고.
그것이 내 마음을 조금 가볍게 했다.
“연주로, 얘기할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 대신 피아노에 앉았다.
[시작해라.]이제 나는, 정선율의 연주를 한 번 듣기만 해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가.
상대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지를 잘 알면서도.
나는 연주를 했고.
정선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연주를 끝까지 들었다.
“네 연주를 똑같이 따라 해 보려고 애를 썼어.”
“…….”
아니. 녀석은 잘 알 것이다.
똑같이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똑같다는 사실을.
“어떤 느낌이었어, 정선율?”
“좀, 강약이 구분이 안 되는 느낌…….”
“그렇지? 강약 구분이 귀로 잘 들어오지 않지? 그러다 보니 멜로디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않고, 곡의 구성이 귀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아.”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말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도약이 심해질 때마다, 자세가 흐트러져서 손가락이 건반에 아슬아슬하게 닿고 있어. 이건 감점 요인이 될 수 있는 문제야.”
“그래. 그렇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입 안에서 들러붙으려 하는 마지막 말을, 밀어 내듯이 뱉어야 했다.
“연주를 들을 때,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무언가가 부재해.”
너만의 무언가가 없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꼭 해야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곡을 연주할 때 무엇을 담아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어떤 감정을 상상하고, 곡에 어떤 감정을 투영시켜야 할까? 울분? 격노? 파국? 열정? 비통? 애상?”
“…….”
“물론, 내가 든 것들은 예시에 불과해. 여기에는 정답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두서없이 시작한 내 말은 이제 결론으로 치달았다.
“적어도 청사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왼손의 격렬한 아르페지오와 도약을 듣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선율이는 침묵했다.
아마, 칼날 같을 것이다.
마음이 무겁다.
잔인한 말을 잔뜩 친구에게 쏟아 버린 다음, 이런 생각을 해서 무엇하겠냐만.
어쨌거나, 나는 저질러 버렸고.
남은 것은 선율이의 몫이다.
“사실, 최 쌤이 어제 나한테 그랬었어.”
“응?”
“정말 많이 늘었다고. 이제 더 잘 할 수 있겠다고. 나, 최 쌤한테 칭찬받은 적, 어제가 처음이었어.”
“최 쌤이 정말 그러셨어? 최선희 선생님이?”
“응. 그런데…….”
“그런데?”
“도희 선배를 이기는 건 힘들겠다고…… 그러시더라.”
최 선생님을 이해한다.
사랑하는 만큼 냉정해야 하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나는 지고 싶지 않아.”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나, 반드시 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야.”
* * *
선율이는 다짐이 무색하지 않게 연습을 계속했고, 나는 최대한 녀석의 연습을 봐준 후 하교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덜 잔인했어, 김박자 씨.]“지금의 저로서는 이게 최대치였어요.”
[더 몰아쳤어야 했어. 정말로 정선율이 백도희를 꺾고 콩쿠르 우승을 하는 걸 보고 싶었으면, 내 입에서 ‘잔인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몰아쳤어야 한다고.]“그건 그냥 인격 모독이잖아요.”
[해 보지도 않고?]“정 마에. 남 씹는 걸 너무 좋아하면 안 돼요.”
[야. 나라고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니?]“…….”
[왜 그딴 눈으로 봐? 어?]아주 좋아 죽던데?
대상을 막론하고 독설 스위치를 켤 때만큼 이 양반이 기분 좋을 때가 또 없지.
[그냥 내 말을 따라. 지금 정선율한테 필요한 건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야.]참고하고 싶은 생각 1도 없다.
하여간, 이 양반은 독설만 퍼부으면 일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타입이라 참고가 안 된다.
교문 바깥으로 늘어선, 아직 꽃이 피기 전의 간절한 꽃망울들을 가득 단 벚꽃길로 들어선 나는.
하교하던 도희 선배와 마주쳤다.
* * *
도희는 긴장한 탓에 얼굴을 펴기 힘들었다.
‘김리듬.’
인생의 순위를 결정지을 콩쿠르 준비 때문에, 일찍 하교해서 연습에 몰두할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이 녀석과 마주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안녕하세요. 도희 선배.”
“어어…… 안녕.”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짜증을 내며 가 버리고 싶었지만.
도희는 그러지 않았다.
‘아, 물론 짜증 나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 짜증마저 억누를 정도로.
도희는, 김리듬의 연주가.
그런 연주를 연금하는 비밀이.
그 마법 같은 연단술(鍊丹術)이 궁금했다.
‘이 정도로 주위를 압도적으로 집어삼키는 아우라는, 그 이민아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
민아의 연주는 빛이다.
찬란하게 광채를 발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위압적이고 탐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런 압도적인 빛.
하지만 김리듬은 다르다.
‘블루오렌지. 빛과 어둠의 장엄한 조화.’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스펙트럼을 손에 쥐고서는, 그 다채로움으로 듣는 이를 적셔 버린다.
작년 베토벤 ≪황제≫ 연주를 들었을 때.
도희는, 그만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도희야. 기교는 네가 더 뛰어났어.’
주위의 위로는 전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기교?
그래.
물론 기교는 내가 더 뛰어났지.
하지만, 김리듬의 연주에는.
‘기교를 뚫고 튀어나오는 무언가가 있어.’
사람들이 ‘천재성’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그 안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난 확신해. 김리듬 저 녀석은, 곧 그 기교조차 나를 앞서게 될 거야.’
도희는 또다시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현실이, 그녀를 납득하게 만들었다.
선혈을 흩뿌리며 기어이 완주한 라흐마니노프.
끝없이 이어지는 리사이틀을 듣는 것만 같은 드라마 속 그 녀석의 연주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지휘자 도전기와 성공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치솟을 생각이지?’
자신이 뛰고 있을 때.
그 녀석은 우주를 걷고 있다.
별을 한 움큼 집어서는 입으로 후 불어서, 검은 우주를 반짝이게 하는 기적을 창조한다.
‘하. 짜증 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김리듬이 밉다.
내가 가지지 못한 천재성을 가진 채, 우주를 무심하게 걷는 그 녀석이 밉다.
그렇게, 생각이 용수당처럼 계속 길게 이어질 찰나.
“저기, 선배?”
“응?”
김리듬의 말이,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혹시, 연습하러 가는 길이세요?”
“응? 어어. 해야지. 이제 4주 남았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저기, 김리듬.”
왜 멈춰 세운 걸까.
녀석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아는데.
“잠깐 시간 돼, 김리듬?”
“네?”
“내 연주를, 잠시 들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