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세라핀즈의 안유경입니다 (1)
3월의 끄트머리는, 새싹을 마구 돋게 만든다.
길가에도, 가지 끝에도.
심지어 건반 위에도.
나는 폰이 진동하는 줄도 모르고 연습했고.
잠시 물을 마시려고 일어선 순간, 부재중 전화의 목록을 보고 경악해서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미안, 민아야. 연습 중이었어.”
― 흐음. 그래도 저녁에는 시간 되지?
“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로?”
― 후후후.
왜 의미심장한 웃음을?
― 알았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전화가 끊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이하다.
“정 마에.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너?]“부끄럽지만, 네.”
[됐고. 마무리 연습이나 해. 어차피 저녁이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하지만, 나에게 마무리 연습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
폰이 다시 격렬하게 진동했으니까.
수신자는,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전화를 걸지 않았던.
친숙하지만 낯선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안유경 씨.”
― 김리듬 군, 잠시 통화 가능해요?
어째서일까.
촬영할 때나 아닐 때나, 항상 명쾌하고 또렷한 음정으로 그늘 한 점 없이 맑던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오늘은 회색 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하게 들리는 느낌은.
“당연하죠. 말씀하세요.”
― 으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계속 주저하면서 쉽게 운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어색할 정도의 침묵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 김리듬 군.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 * *
고작 5분도 안 되는 짧은 통화였지만.
안유경의 통화는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첫 번째는, 그녀가 꺼낸 통화의 목적.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진득하게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우리 소속사까지 직접 올 수 있겠어요?’
그녀가 내게 와 달라고 부탁한.
그녀의 소속사, YJP 본사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정 마에.”
[왜.]“혹시, 내가 거절해야 했을까요?”
[여기까지 와 놓고서 그게 무슨 헛소리야. 설마 너, 여기까지 와 놓고 그냥 돌아갈 생각인 거냐?]“아니요, 그건…….”
[그리고, 들어 보고 거절해도 늦지 않아. 아무리 안유경이 너한테 도와 달라는 말을 꺼냈어도, 그게 너와 맞지 않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그건 그렇죠…….”
“김리듬 학생, 맞나요?”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쉽게 다가가기 힘든 인상의 남성이 있었다.
비쩍 마르고, 날카롭고.
그래. 약간 성마른 인상이다.
재킷 차림은 구김이 조금 있어서.
마치, 며칠 퇴근 못 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 맞는데요. 그런데 누구시죠?”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인상과는 다른 명함 지갑에서, 빳빳한 명함을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JYP 3팀장 박호산.
“거기는 3팀장이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상 ‘세라핀즈’ 전속 매니저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당황해서 급히 허리를 숙이려다가, 너무 저자세로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만 살짝 숙였다.
“방금 전에, 우리 유경이…… 아니, 안유경 씨한테 전화 받으셨죠?”
“네. 받았습니다.”
“따라오시죠. 유경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회사 입구에서 외부인 출입증을 받고는.
박호산 팀장을 따라 회사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부터 나를 반긴 것은.
대문짝만하게 걸린, 박현성의 대형 패널.
[이야. 박현성 아주 출세 가도를 달리네.]저것만으로도 현재 YJP 내에서 그의 입지가 얼마나 높은지 알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회사가 총력을 기울인 블록버스터 영화 ≪회색지대≫의 주연 배우다.
이제 영화 개봉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촬영은 이미 다 마쳤고, 지금은 시사회를 앞둔 기간이라 초긴장 상태일 것이지만.
만일, 영화가 정말 미친 듯한 흥행을 한다면.
‘당연하지. 나는 곧 천만 배우 박현성, 할리우드 스타 박현성으로 우뚝 서게 될 테니까.’
성탄절 예술제 직전에 내게 해 준.
오만할 정도로 자부심 넘치던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진실이 될 것이다.
“박 팀장, 안녕.”
“안녕하세요, 김 팀장님.”
“오, 그런데 새 연습생이야? 마스크 은근히 괜찮은데? 어디서 캐스팅했……?”
내가 아니라고 하려던 순간.
그의 표정에서, 나를 알아보는 티가 확 났다.
“대체 무슨 일이야? 김리듬이 왜 우리 회사에?”
“죄송합니다, 그럴 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나중에.”
박 팀장은 “나중에 알려 줘!”라고 외치며 멀어지는 김 팀장이라는 분을 뒤에 둔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홍보팀의 김영은 팀장님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춰 섰고.
그는 구석진 곳에 있는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유경아.”
“네. 들어와요, 오빠.”
문이 열리자.
화보보다 더 빛나는 아이돌이 거기 있었다.
‘세라핀즈’의 리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잡으며 활달하게 나를 반겼다.
순간, 강한 페미닌 향이 내 후각을 지배했다.
“어서 와요! 미행당한 거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요.”
“일단 왔으니까 커피 한잔해야죠. 참고로 YJP 카페는 더치입니다만?”
“아, 네…….”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참고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는데.”
“아, 그러면 저도 아아를…….”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솔직히, 그냥 제 돈 주고 비싼 거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그녀의 환상적인 얼굴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결국 나는 카라멜마끼아또 하나를 놓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는 안유경의 모습은.
‘화보집이 따로 없네.’
드라마를 같이 찍었을 때는 정말 몰랐는데.
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 눈부시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거지?
‘게다가, 시원하게 안 뻗은 부분이 없어.’
그렇게, 반쯤 넋을 놓은 채 사무실에 앉아 그녀의 외모를 감상하고 있으려던 찰나.
“저기, 리듬 군.”
“네? 아, 네.”
그녀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방금 전에 전화로도 얘기했지만, 저는 리듬 군의 도움이 간절해요.”
“안유경 씨.”
“말씀하세요, 김리듬 군.”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간단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아마, 우리 ‘세라핀즈’는 곧 마지막 콘서트를 하게 될 거예요.”
첫마디부터 충격이었다.
“네? 그게 무슨?”
“뭐, 길게 말하자면 끝이 없지만,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초대형 콘서트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는 얘기는…….”
“네. 아주 중요한 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할 예정이죠. 혹시, 김리듬 군과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가 거기에 동참해 줄 수 있겠어요?
그녀의 차분한 어조와는 180도 다른.
너무나 묵직하고, 위험한 청이어서.
나는 일단 거절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세라핀즈’의 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같이 콘서트를 하자는 제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4인조 걸그룹 ‘세라핀즈’.
배우 전문 매니지먼트인 YJP에서, 수상할 정도로 성공한 거의 유일한 걸그룹.
‘잘 뜨지 못한다’, ‘만년 유망주’, ‘이상하게 운 없는 그룹’ 등 불운의 상징처럼 언론에서 다뤄지지만.
그래도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걸그룹 중에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걸그룹이다.
그런 걸그룹의 리더가.
나를 직접 불러, 이런 제안을 했고.
사실 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안유경 씨.”
너무 리스크가 크고.
우리 오케스트라와는 맞지 않는 일이다.
“저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과 슬픔이 스쳤다가.
다시 원래의 유쾌함을 되찾았다.
“어라? 나, 차인 건가요?”
“예? 아아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제가 어떻게……!”
“흐으음. 솔직히 당황스럽기는 하겠죠. 제가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저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와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거죠?”
“네.”
그녀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바로 휘어지고.
입술에,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그게, 나를 찬 이유라 그거죠?”
“아니, 저기, 안유경 선생니임……!”
“아쉽네요. 저는 김리듬 군의 음악에 담긴 힘을 듣고, 느끼면서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유쾌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러면, 와 줘서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이만 가 봐도 좋아요.”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 * *
단호하게 거절한 것과는 별개로.
나를 보내는 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과 묘한 슬픔이 엉켜 있었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 콘서트라니?’
설마, ‘세라핀즈’가 해체한다는 뜻일까?
분명히 몇 달 전까지는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였는데…….
그 순간.
“어, 민아야.”
― 받는 속도가 미묘하게 늦네?
“아하하. 지금 밖에 있어서.”
― 밖에? 누구 만나는 중이야?
“어…… 아는 분이, 갑자기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하셔서. 잠깐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 아하. 그러면, 이제 본심을 드러내도 되겠군.
응?
― 기뻐해라, 김리듬. 내가 무려, 너를 위해 유럽에서 갈고 닦은 요리 실력을 뽐내기로 했다 이거야!
그저, 감동.
감동에, 감동에, 감동이 빗발친다.
“크흑……!”
― 그래. 바로 그거야. 나의 요리를 먹고 마음껏 감동받고 그 감동을 음악으로 옮기라고!
나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한테 잘 대해 주는 이유가 뭘까?”
― 얘 또 헛소리하네. 빨리 와. 비밀번호 알지?
* * *
‘비밀번호는 03290409.’
나는 민아의 연습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식탁 위에 놓인 장바구니를 지나쳐서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 그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려 했지만.
“김리듬. 들어왔으면 거기 있는 재료 정리 좀 해.”
이런.
여러분, 이래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앞에서 잠입하는 것이 힘든 겁니다.
수상할 정도로 청각이 좋으니까요.
어쨌거나, 나는 바로 장바구니를 풀어서는.
베이컨과 파스타 면, 토마토소스, 양파, 버섯, 마늘, 파슬리 등등을 인덕션 옆으로 옮겼다.
“계란은 냉장고에 넣을까?”
“응. 가운데 칸에.”
손을 다 씻은 민아는 찬장에서 커다란 야스리를 꺼내서는.
스윽. 스윽. 스슥. 스스윽.
거기에 부엌칼을 갈기 시작했다.
“…….”
묘하게 긴장된다.
방금 전에 안유경 씨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저 칼날의 방향이 내 명치를 향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냄비에 물을 올리고, 팬과 올리브유도 준비해서 마늘 볶을 준비를 해야…….’
“양파 좀 줄래?”
“넵. 여기 있습니닷.”
나는 껍질을 까고 씻은 양파를 그녀에게 대령했고, 그녀는 말없이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그 틈에 나는 미리 올려놓은 물이 끓는 것을 확인하고, 거기에 바로 파스타 면을 투척했다.
‘파스타 면은 7분에서 9분 정도 끓인다.’
민아가 양파에 이어 버섯을 써는 동안.
나는 미리 달궈진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거기에 편마늘을 볶았다.
한국인의 심성을 자극하는 냄새가 부엌 안에 확 끼치자, 잊고 있었던 식욕이 미친 듯이 끓어오른다.
“김리듬. 여기.”
“응.”
그 틈에 마늘은 노릇한 냄새를 내며 익어 갔고.
나는 거기에 미리 썰어 놓은 양파를 투척했다.
치이이익!
마늘과 양파의 화음이 어우러져 맛있는 소리를 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음색이 살짝 볶일 찰나.
버섯과 베이컨을 넣고 한 번 더 볶아 주면서.
이태리식 화음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자.
“토마토소스 뚜껑 땄어?”
“당연하지. 여기.”
바로 투척!
저녁 식사가 차근차근 준비되어 가는 동안.
나는, 그제야 내 몸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페미닌 향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키면 진짜 큰일 난다.’
다행히 파스타 면을 투척한 민아는 이제 냄비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라,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됐다.”
“오, 냄새 좋은데?”
마침내, 긴장감 넘치는 파스타 조리가 끝이 나고.
완성품이 각자의 그릇에 담겨.
식탁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런데, 김리듬. 혹시 향수 써?”
“아, 김가인이 요즘 페미닌 향수를 써서, 하하. 같이 연습했는데, 향이 정말 진하더라고.”
“흐음. 그렇단 말이지?”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 첫 번째.
뒤집어씌울 만한 상대에게 재빨리 뒤집어씌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