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카스타 디바, 정결한 여신이여 (1)
다음 날 오후.
나는 거짓말처럼 풀린 날씨에 맞게.
브이넥 셔츠에 니트 가디건을 걸친 채.
CJV 홀에서 민아를 계속 기다렸다.
― 어디야? 다 왔어?
대답이 없다.
‘왜 없지?’
설마, 나 읽씹을……?
“왘!”
“엄마야!”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어 보니.
나와 똑같은 니트 가디건을 걸친 민아였다.
“푸하하하핫! 김리듬 표정 봐!”
“흐지 믈르그…….”
이런 장난은 심장에 좋지 않다고!
“놀랐으면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니야. 팝콘 좀 살까?”
“팝콘 좋지.”
“콜라는?”
“제로콜라로.”
“오케이. 주문받았고요.”
나는 팝콘통과 제로콜라를 든 채.
박현성이 보내 준 최고의 좌석에 앉아.
민아와 함께하는 첫 영화 감상을 개시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아와 같이 보러 간 ≪회색지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 최고였다.
박현성의 연기 수준은 이미 곁에서 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극초반에 관객을 압도하는 부분.
빗줄기로 흐려진 거리를, 담배를 태우며 노려보는 부분에서 게임이 끝났다.
[박현성 비흡연자 아니었냐? 저건 도저히 비흡연자가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닌데.]‘어떤 면에서요?’
[지금 박현성, 담배를 속담으로 피고 있잖아. 연기를 입으로만 머금다가 뱉는 게 아니라, 폐까지 들이켠 다음 자연스럽게 코로 뱉는다고. 저건 진짜야.]그런데 이 양반.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어쨌거나, 영화 속의 박현성.
아니, 범죄자 ‘이신우’는.
마치 자조하듯, 수시로 읊조린다.
[“나에게는 출구가 없어.”]그는, 이제 자신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목적.
형제와 친구들을 위한 복수를 위해 움직인다.
피와, 폭력과, 범죄와, 비극으로 얼룩진 이야기가 스크린 바깥으로 쏟아지는데도.
그 충격적이고 역동적인 영상미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흐르는 음악들이, 나와 민아를 사로잡았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영화의 모든 움직임과 언어는.
음악의 흐름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치, 음악을 틀어놓은 후 그 리듬에 맞추어 촬영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까지다. 이신우.”]이신우의 복수를 위한 최종적인 목적이자.
온갖 부패와 폭력으로 얼룩진 카르텔의 얼굴인.
원로배우 최경영이 연기하는 정회연이.
벗어날 수 없는 최후의 전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여기서 죽어라.”] [“어. 그럴 거야.”] [“……뭐?”] [“그런데 말이지, 정회연.”]그의 손에 들려 있는 특수 배트는, 이미 그가 짓이기고 온 조폭들의 피로 새빨갛게 도색한 상황.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그리고.
그 순간부터 원 테이크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그랑기뇰 클라이막스와.
같이 흐르는, 슈미트의 ≪노트르담≫ 간주곡.
[“너도, 나와 같이 가야 해.”]폭력으로 얼룩진 영화의 끝마무리는.
[“허억, 허억, 허억…….”]피투성이가 된 채, 마침내 복수를 마쳤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빛을 향해.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걸어가다가.
마침내 빛을 마주한 순간, 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 가는 이신우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끝이 난다.
“…….”
“…….”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빠져나갔지만, 나와 민아는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진짜 먹먹하다.”
“그렇지? 폭력적인 줄로만 알았는데, 흡입력이 말도 못 하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박현성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내게 자신했던 것처럼, 정말로 천만 배우이자, 할리우드 스타로 곧 우뚝 서게 될 것이다.
“≪회색지대≫, 칸 영화제 공식 초대 선정이라.”
“진짜? 실화냐?”
“실화야. 정말 무지막지하네.”
마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폭죽이 터지듯.
박현성과 ≪회색지대≫는 한국의 모든 스크린과 매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의 정점은 김석희 대기자가 쓴, 기사의 탈을 쓴 영화 평론이었다.
제목부터 읽고 싶어지게 만든 기사의 퀄리티는, 영화의 모든 것을 조각조각 해체한 후 박현성이라는 연기의 신에 대한 찬사로 그것을 재창조했다.
나와 윤성은 연습실에 틀어박힌 채 폰 화면에 빠져들듯 붙박여 기사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기사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빠져들었지만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낱낱이 절개해 드러내고 있었다.
김석희의 기사를 빙자한 평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유의 간결함으로 빛을 발했다.
기사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 * *
김석희 대기자의 기사를 보고 난 후, 나는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우아한 예술에 천착하는 것만이 예술가일까?’
아니다.
안유경과 박현성은, 내게 그 명제와 배치되는 예술가가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것이 예술인가?’
정작 윤성은, 내 고민에 1도 공감하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건 예술이 아니라 중2병이지.]“뭐요?”
[그런 중2병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연습 더 하고 음악 더 들어.]“그런데, 정 마에. 그거 또 듣는 거예요?”
그는 요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89년 빈 신년음악회 영상물에 푹 빠져 있다.
아침부터 폴터가이스트로 한 번 틀어 주고.
자기 직전에 시청하는 버릇 때문에.
저기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 외우게 되었다.
[김리듬. 너 설마 이게 질리는 거냐?]“아니요. 들으면 좋지만…….”
똑같은 콘서트를 천 번 듣는 귀신이 여기 있습니다.
이 귀신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정 마에.”
[응?]“갑자기 급성 궁금증 도져서 질문하는 건데, 정 마에는 저 영상 몇 번 정도 봤어요?”
[천 번? 아니, 오늘 또 보는 거니까 1,001번인가?]다시 봐도 놀랍다.
같은 영상물을 천 번을 봐도.
여전히 새로 보는 것처럼 뇌 세탁을 한 다음.
미친 듯이 기뻐하는 이 정신 나간 예술가가.
‘저 정도로 미쳐야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걸까?’
박현성과 안유경과는 다르지만, 그 또한 진정한 예술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면, 나는 진정한 예술가일까?’
어떤 기준에 비추어 봐도.
답은 ‘아니오’다.
‘아직 한참 멀었지.’
‘세라핀즈’와 콘서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향해 매일같이 쏟아지는.
그 미칠 것 같은 중압감을 이기는 것이다.
정말로 알고 싶다.
나는 과연 그런 중압감을 이길 정도까지 성장했는가.
‘나는, 그 펄펄 끓는 쇳물 같은 중압감을 이겨 낼 수 있는 도가니가 되었는가?’
아직 아니다.
나는 더 성장해야 한다.
더 완벽해야만 하며.
더 환상적이어야만 한다.
* * *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음악에 몰입하려는 나와는 달리, 애들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나태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최시현과의 협주곡 협연에 ‘세라핀즈’ 공연까지 쉬지 않고 내리 두 달을 보냈으니, 다들 상태가 방전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 할 수만 있다면 투명해지고 싶다.”
조하란이 또…….
요즘은 김가인보다 조하란이 더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보이고 싶어. 출결은 중대한 이슈니까.”
[저거 저거,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가끔씩은, 저렇게 조하란처럼 한없이 가볍게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김리듬. 우리 오늘 휴일 아니었어?”
“그래서 저번에 쉬었잖아. 휴일 당겨쓴 셈이지.”
“아니, 휴일이면 쉬어야지! 이거 완전 악덕……!”
“그러면, 휴일 없이 리허설만 해 볼까?”
이런 말은 웃는 얼굴로 해 줘야 파괴력이 극대화된다.
바로 애들 얼굴이 싹 굳어지는 걸 보니.
효과 하나는 확실하다.
“아니면, 우리 하란이만 나하고 같이 데뷔 독주회 할까? 고2에 데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도리도리도리도리.
말도 없이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니, 나와의 즐거운 콘서트가 진심으로 싫은 모양이다.
그렇게, 불만을 누르고 리허설을 진행하던 와중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 * *
― 축하드립니다, 김리듬 학생. ‘세라핀즈’와의 콘서트를 아주 멋지게 치렀더군요.
“이명석 본부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 하하. 일회성이나마 저희 소속사와 연을 맺은 입장에서, 소속사 아티스트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쯤 되면 수상해진다.
대체 이 양반이, 내게 왜 전화를 건 것일까?
“저기, 본부장님. 본론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는 길게 끌지 않고 즉답했다.
― 신혜경 선생님에 대해 잘 아시죠?
“물론이죠.”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다.
작년 마스터클래스에서 직접 보기까지 한 인물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 다름이 아니라, 신혜경 선생님께서 우리 김리듬 군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해 오셔서요.
그 말 한마디가.
내 하루 동안의 고민을 싹 날려 버렸다.
“네? 그게 가능한가요?”
내가 기억하기로.
신혜경 선생님은 다른 매니지먼트사 소속…….
― CAMI에서 협조 공문을 보내 주더군요.
“아, 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한 윤성을 보았다.
[일단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물어봐.]그러나 상대 쪽 움직임이 더 빨랐다.
― 아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신혜경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싶다시네요.
내가 뭔가 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차분하고 짙은 이명석 본부장의 목소리 대신.
냉혹하면서도 정결한, 그야말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전해졌다.
― 오랜만이야, 리듬 군.
“아, 안녕하세요. 신혜경 선생님.”
― 혹시, 기억하고 있나? 작년에 내가 김리듬 학생에게 했던 말 말이야.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의 해류 심연으로부터 무언가가 올라와 팟, 하고 떠올랐다.
‘썩 괜찮았어요. 내 코레페티토어를 시켜 보고 싶은 연주이기도 했고.’
내가 헉 소리를 내자.
폰 너머에서 엷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역시 기억하고 있었군.
“서, 선생님. 코레페티토어는…….”
― 코레페티토어가 아니야. 콘서트 반주지.
그녀는, 지금 내게.
코레페티토어보다 수백 배는 어려운.
선택받은 극소수의 반주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의 반주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나는 거절하고 싶었고.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의 이어진 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 아이돌과 같이 작업을 했더구나.
그녀의 질문은 부드럽지만, 그 속에 있는 송곳까지 숨겨질 만큼 부드럽지는 않았다.
― 거기서 무언가를 깨달았니?
“……네.”
― 그렇다면, 내게 증명해 보려무나.
나는 직감했다.
내게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좋습니다.”
그렇게 나는.
마에스트라 신혜경의 반주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