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카스타 디바, 정결한 여신이여 (4)
녀석이 이경웅 변호사가 시킨 대로 반성문을 작성해서, 인터넷에 직접 올리는 것을 본 후에도.
전수정은 마지막까지 내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냥 매장시키자.”
“그건 안 돼, 전수정.”
“개심시킨다고 개심할 종자가 아니야.”
“전수정. 작년이었다면 나도 쟤를 아작을 내려고 했을 거야. 작년이었다면.”
“그러면, 지금은 왜 안 되는데?”
“흐음. 내가 너무 유명해졌으니까?”
나는 이 말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직접 하게 되리라고는.
작년 이맘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나도 이제 나름 유명인사잖아. 이미지가 중요한 입장에서, 저런 애 고소 때려서 이미지에 타격 입고 싶지 않아.”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아, 우리 리듬이. 이렇게 물러터져서 정말 세상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아니, 전수정. 그건 좀…….”
[솔직히 그건 맞지. 무르다 못해 아주 녹아내려. 나 같으면 민형사 동원해서 아작을 냈을 텐데.]나는 정 마에가 하는 말까지 싹 무시했다.
사실, 그런 말조차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 때문이지만.
뻐근한 목과 어깨를 풀면서도, 나는 바로 다음 일을 생각했다.
“그런데, 신혜경 선생님은…….”
“전혀 신경 안 쓰시더라고. 그런 거짓 루머 따위가 대체 뭐가 중요하냐면서.”
“그건 정말 다행이네.”
마스터클래스 때도 어렴풋이 느낀 것이지만, 신혜경 선생님도 대인배의 풍모가…….
“아 참, 장현예고의 문규형이 우리를 꽤 도와줬어.”
“어? 그래?”
“애초에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우리가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던 것도 걔가 우리를 도와준 덕이야. 정성이 대단하더라고. 직접 반박글까지 만들어서 올려 주고.”
그녀는 씩 웃으며 자신과 문규형이 주고받은 카톡 내용을 내게 보여 주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줄까? 얘, 원래 네 안티였어.”
“잉?”
“뭐,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자격지심 때문이겠지. 그런데 작년 네 라흐마니노프 콘서트를 본 다음부터 개심했다고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던데?”
개심이라니.
내가 무슨 종교라도 되는 거야?
그런데, 얘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희미하다가.
갑자기, 확 하고 떠오른다.
“아! 나 얘 만난 적 있어!”
“사인을 해 준 적이 있었지. 그렇지?”
“응.”
작년 지휘자 오디션 2차전 직전에.
나는, 내 연습실 앞에서 기다리던 이 녀석에게 직접 사인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사인해 줄 때만 해도, 그냥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내게 진심인 사람들이 적지 않구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봐 주고, 나를 응원하고.
‘나를 사랑하는구나.’
갑자기, 없던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 알겠다. 내 연주의 힘.”
[에휴.]“그 반응은 대체 뭐죠, 정 마에? 제자의 성장이 지금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성장 같은 소리 하네. 너, 조금 이따가 나한테 우는소리 하지나 마라.]그렇게, 나를 둘러싼 근거 없는 음해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이 났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 안녕하세요, 김리듬 군. 신혜경 선생님의 매니저 황민오입니다. 이번에 준비할 선생님의 콘서트 프로그램입니다. 부디, 철저한 준비 부탁드립니다.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고 몰입하는 선생님을 대신해, 나는 매니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콘서트 레퍼토리도 매니저가 직접 전달했는데, 레퍼토리를 받는 순간 나는 내가 잘못 보았나 싶었다.
“저기, 정 마에.”
[왜?]“이번 기회에, 저번 프라하 때처럼 빙의 한 번만 더 좀 어떻게 안 될까요?”
[닥쳐. 안 해.]“아니, 진짜!”
[내가 분명히 한 시간 전에 경고하지 않았냐? 나한테 우는소리 하지 말라고.]“아니, 이 레퍼토리는 대체…….”
선생님의 매니저인 황민오가 전해 준 레퍼토리는, 방대하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슈베르트의 가곡 3곡.
모차르트의 콘서트 아리아 1곡.
슈만의 가곡 3곡.
브람스의 가곡 2곡.
베르디의 콘서트 아리아 1곡.
푸치니의 콘서트 아리아 1곡.
마지막으로,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까지.
무려 12곡으로 이루어진.
예상 시간 80분의 대형 콘서트.
[죽어라 연습해라. 그거 말고는 답이 없어. 지금부터 신혜경 선생님의 모든 연주 영상을 보면서 그녀의 발성, 호흡, 템포, 습관을 전부 익히고, 거기에 완벽하게 맞춰 가는 버릇을 들여.]“그런데 말이죠, 정 마에.”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에 같이 합을 맞춰 볼 성악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고?]“그렇죠! 잘 아시네요!”
[파트너라면 있잖아. 우리 학교에.]“……에?”
그 순간.
바깥의 4월 풍경처럼 환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학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성악 천재가.
* * *
김리듬이 성악 파트너를 떠올린 그 순간.
희성예고 성악 전공 부동의 원탑.
‘희성예고 최고의 프리마 돈나’라고 불리는.
성악 전공 2학년 박지수는.
고민이 깊었다.
‘아이 씨. 어떻게 얘기하지?’
그는, 저 멀리서 움직이는 김리듬을 보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사실, 이 고민은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김리듬이 신혜경 선생님의 콘서트 반주를 맡을 예정이야.’
전수정에게 이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그는 어떻게든 김리듬과 마주칠 기회를 잡으려 했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김리듬의 일정 때문에.
우연을 가장한 조우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회가 없어.’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내일부터 김리듬은 콘서트 리허설 준비로 학교에 안 나온다는 얘기를 이미 전해 들었다.
지금의 지수에게는, 거절당하는 순간 플랜 B 따위는 정말로 없는 상황…….
‘좋아. 딱 가서 얘기하는 거야. 성악 파트너 제안을 던지고, 대신 청강을 부탁하는 걸로…….’
그런데.
김리듬의 눈동자가, 자신과 마주치는 순간.
“거기 있었구나, 박지수!”
‘응?’
녀석은,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뛰어와서는.
턱하니 자신의 손을 잡고.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요오.”
세상에서 둘도 없을 간절한 표정으로, 뜬금없는 간청을 하는 것이 아닌가.
* * *
사실, 윤성은 내게 ‘박지수한테 들러붙지 말고 딜을 해야 한다’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지만.
나는 녀석을 보자마자 간청 모드 버튼을 누르고는, ‘너 아니면 안 돼!’를 거의 10분 동안 떠들었다.
그런 간청 끝에, 묘한 표정을 짓던 녀석의 입술이 움직였다.
“좋아. 도와줄게.”
“정말?”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그는, 남자도 반할 정도로 고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의 리허설 과정을 청강할 수 있게 도와줘.”
그렇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계약이 성립되었다.
* * *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과.
실전에서 부딪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박지수라는 뛰어난 성악가의 반주를 맡은 지 10분 만에 성악 반주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깨달았다.
“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합을 맞추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수는 노래를 부를 때를 빼면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자신의 폰에 직접 글을 써 가며 의사 전달을 했다.
지금 우리가 합을 맞춰보는 곡은.
콘서트 레퍼토리의 첫 곡인.
슈베르트의 가곡 ≪봄에 대한 믿음(Fühlingslaube)≫.
“Die linden Lüfte sind erwacht(부드러운 바람이 잠에서 깨어나네)…….”
겨우내 닫혀 있었던 감정들이.
창문을 여는 순간 은혜처럼 우리를 찾아와.
부드럽게 간질이고, 차분하게 자분대면서.
따뜻한 미소를 얼굴에 그린 후 지나가는 곡.
“O frischer Duft, o neuer Klang!(오 신선한 향기, 오 새로운 울림!)”
나는 악보에 적힌 대로.
오른손을 최대한 동글동글한 소리로.
왼손을 부드러운 루바토로 연주했지만.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연주를 중단시켰다.
“알았다고. 알았어.”
정말 까탈스러운 파트너지만.
그와 같이하는 연습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 * *
그렇게 철저한 연습을 끝낸 후.
드디어 실전의 시간이 왔다.
지수와 합을 더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계획대로 뭔가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지수와 함께, 선생님과 리허설을 시작할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앞에서 기다렸고.
“오래 기다렸니?”
“아닙니다, 선생님.”
마침내, 여신이 왔다.
그녀가 매니저와 함께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나는 피아노에 자리를 잡고, 지수는 악보를 준비했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레퍼토리를 살피는 그녀에게,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를 하려 했다.
“저기, 신혜경 선생님.”
“말하려무나.”
“리허설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
“김리듬.”
“네, 선생님.”
그녀는, 자신을 지금의 위치로 올린 밤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냉혹의 기품이 가득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가 시작할 리허설과 상관있는 문제니?”
“아닙니다.”
순간 잊고 있었다.
그녀에게 목이란, 생명처럼 아껴야 하는 것임을.
“그렇지? 너와 나는 여기에 음악을 하러 온 거야. 그러면, 오직 음악에 대해서만 얘기하렴.”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제 시작하자꾸나.”
나는 피아노 앞에서 자세를 잡고, 간신히 청강을 허락받은 지수 또한 페이지 터너를 위해 악보를 잡았다.
‘일단은, 슈베르트부터.’
그녀의 콘서트 레퍼토리는, 봄이라는 계절에 어울리는 가곡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Die linden Lüfte sind erwacht(부드러운 바람이 잠에서 깨어나네)…….”
그녀의 목소리가 홀에 울리는 순간.
나는, 천천히 낙하하면서 건반 위를 적시는 꽃무리의 환영을 보았다.
“O frischer Duft, o neuer Klang!(오 신선한 향기, 오 새로운 울림!)”
이제 알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신이 들렸다.
세상의 모든 감정이, 거기에서 피어났다가 지고.
그곳으로 모여들었다가 사라진다.
“Nun, armes Herz, vergiß der Qual!(이제, 가엾은 마음아, 고통을 잊어라!)”
“Nun muß sich alles, alles wenden(이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달라지리니.)”
그녀가 창조하는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설계한 구조의 아름다움이다.
우연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정교하고도 치밀한.
동시에, 성대에 피가 맺힐 때까지 노력한.
천재의 산물이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녀는 프로 중의 프로이며.
천재 중의 천재다.
어떻게.
저 목소리가 전성기가 지난 목소리이며.
저 발성이 전성기가 지난 발성이며.
저 경이로운 전신 공명이.
쇠퇴기를 맞이했다는 소프라노의 공명이란 말인가.
‘진정한 예술가란 바로 저런 존재다.’
내 반주가,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저 신적인 존재를, 완벽하게 반주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내 전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르디. 푸치니. 벨리니.
오페라 아리아와 리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신혜경이 아니면 해내지 못할 레퍼토리를.
완벽하게 반주해야만 한다.
[곡마다 다른 영혼이 되어라, 김리듬.]윤성은 쉬지 않고 나를 압박했다.
[가수가 봄을 노래한다면 너도 봄이 되어야만 해.]가수가 태양을 노래할 때는.
반주자 또한 태양의 음향을 만들어야만 한다.
또렷하되 지나치지 않게.
무엇보다, 가수의 목소리를 우선하여 움직여라.
[동시에, 반주에서 과시는 결핍이야. 저는 절대 과시해서는 안 돼.]그렇게,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시간들이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길게 지나간 후.
“오늘은, 여기까지.”
선생님의 작은 목소리가.
리허설의 끝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