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밤의 가스파르 (2)
황당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잠시 화장실 핑계를 대고 연습실을 빠져나와서는, 바로 정윤성에게 한 마디 따졌다.
“이봐요, 정윤성 씨. 뭐라고요? 해 볼 만해? 빌드업만 잘 해 주면 우승?”
[당연하지. 난 지금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거야.]“미쳤습니까, 고스트? 지금 멀쩡한 애 콩쿠르 본선 망칠 일 있어요?”
[왜 이게 이민아의 콩쿠르를 망친다는 거지?]아, 진짜 너무 당당하고 뻔뻔해서 말이 안 나오네.
“정윤성 씨. 시드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평범한 국내 콩쿠르가 아니에요.”
[나도 우승해 봐서 알아.]이런 젠장. 그랬었지.
내가 요즘도 매일같이 보면서 지나치는 이 인간의 초상화 밑에, ‘시드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이라는 약력이 당당하게 적혀 있다는 것을 잠시 깜빡했다.
나는 문득, 지금의 이민아보다 어린 나이에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의 피아니스트 실력이 어땠을지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아니, 나야말로 실제 거기서 우승해 봤으니 더 정확히 알지. 오히려 이민아가 냉정한 판단을 내렸고, 지금이야말로 더는 늦지 않은 적기라는 걸 말이야.]“어째서요?”
[보통 콩쿠르를 준비하는 선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똑같은 스타일로 학생들을 가르쳐. 정확하고, 기계적이고, 실수 없는 스타일로 말이지.]“당연히 그렇죠.”
[그게 극대화된 게 천슈메이 스타일이야. 애초에 평생을 그렇게 훈련받았고, 그렇게만 생각하는 아이의 스타일이라고.]“하지만 뛰어나잖아요.”
[콩쿠르 최적화 스타일이지. 지금 이민아의 학원 선생도 똑같은 콩쿠르 최적화 스타일을 민아에게 주입하는 중일 테고.]“그렇…… 겠죠.”
[그렇지? 그러면 똑같은 스타일로 경쟁하면 누가 이기겠니?]“천슈메이가 이기죠.”
[그러면, 천슈메이와 똑같은 스타일로 경쟁을 붙는 게 의미가 있을까?]“하지만 너무 위험한 모험이잖아요. 이게 실패하면 이민아처럼 이제 막 비상하려는 애한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요!”
[아마 아닐걸?]“어째서요?”
[내가 그렇게 해서 우승했으니까.]“그건 당신이 천재여서 그런 거잖아요!”
[이민아도 천재야. 적어도 내게 근접할 수준은 돼.]아, 진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반박을 못 하겠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이건 투자의 법칙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야. 아니, 인간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통하는 원칙이지.]“그게 민아일 필요는 없잖아요.”
[본인이 선택한 거야.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윤성은 무모할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다.
뭔가에 홀렸나 싶을 정도로.
[김리듬. 지금 이민아는 하루 이틀의 변덕으로 저러는 게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연습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 거라고.]“모험으로 추락하느니 차라리 안정적인 2등을 취하는 게 나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낸 거냐?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는 중요한 도전을 할 찰나에?]정곡을 찌르는 그의 한 마디에, 순간 내 입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래.
내가 이 망령과 처음 대면한 날.
나는, 내 입으로 직접 저 말을 꺼냈다.
그의 눈빛은 내게 이렇게 캐묻고 있었다.
‘너는 지금, 그 말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 있어?’
내 입이 그렇게 닫혀 버리자, 그는 팔짱을 낀 채 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건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김리듬. 지금의 이민아는 너한테 가르침을 청하는 게 아니야. 나한테 가르침을 청하는 거라고.]“솔직히 말해 봐요, 정윤성 씨. 당신, 이민아가 당신 스타일을 듣고 본받는 게 기특해서 이러는 거잖아요.”
[……아닌데?]아니라고?
그러면, 왜 내 눈을 외면하면서 대답을 하는 건데.
[아무튼, 말싸움은 그만하고 결정을 내리자고. 장본인께서 밖으로 나오실 것 같으니까.]덜컥.
“거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안 들어와?”
“알았어. 갑니다. 가요.”
민아의 채근에, 연습실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나는 이제 그녀의 입에서 어떤 폭탄 발언이 나올지 몰라 긴장했다.
“확실히 갔다 왔지? 또 내빼는 일 없기를 바랄게.”
“걱정 마.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일단은, 내 연주를 좀 들어 줘. 아직 완성이 안 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나는 더는 토 달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악보를 펼치고는, 바로 연주에 돌입했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야. 감정을 순식간에 잡고 연주를 하잖아.]나는 윤성의 평가에서 냉정함을 느꼈다.
민아의 연주는 그 정도 표현에 그칠 연주가 아니다.
‘아득하다.’
첫 음을 듣는 순간 그려지는 빗방울, 빗방울들.
창문 밖에서 나를 호명하며, 유혹하며, 현실로부터 이격시키는 옹딘(운디네)의 속삭임.
그 환상이, 그 환영이 경이롭다 못해 절망적인 격의 차이로 다가온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느꼈던 그 차이가, 한때 좁혔다고 생각하던 그 차이가 다시 한번 나를 엄습한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세포 수준부터 자신과는 다른 존재다.
나를 지금까지 우쭐하게 만들었던 자잘한 성과들을.
그녀는, 전부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서 도약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내게 넘을 수 없는 벽…….
“어떻게 생각해, 김리듬?”
“응, 어?”
어느새 연주를 끝낸 민아는 내게 묻고 있었다.
“내 라이벌이니까 묻는 거야. 지금의 내 연주에서 부족한 점이 대체 뭐냐고.”
“나, 그 타이틀 반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그녀의 두 눈에 어린 장난기를 보았다.
“나도 알아. 우리 희성예고에서 나를 능가할 인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네, 네. 마음씨도 소리처럼 비단결 같으시면 참 좋을 텐데요.”
“어쨌거나, 지금 내 연주에서 부족한 점이 뭐냐고?”
가만히 듣던 윤성은, 바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아직 콩쿠르 스타일을 탈피 못 해서 뻣뻣한 부분이 있어. 게다가 ‘내’ 스타일도 어설프게 적용했고. 만약 이걸 본선에 들고 가면 가볍게 나가리지.]다짜고짜 직구를 날리는 이 망령의 첫 마디에, 내 입술은 저절로 썩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담해서 마음에 들어. 이런 아이들이 성공해줘야 이 업계의 미래가 밝지. 이런 스타일이 완성만 되면 이길 수 있다니까.]죽은 사람 입에서 ‘업계의 미래’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으니 이상하지만, 아무튼 윤성의 평가는 그랬다.
“잠시만 기다려 줘. 정리를 좀 해야 하니까.”
“걱정 마. 난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언제든.”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나는 어떻게든 윤성의 평가를 최대한 다듬어서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 이민아. 이런 연주를 언제부터 연습했어?”
“콩쿠르 예선 이전부터 고민하던 거였어.”
[너를 통한 ‘내’ 연주를 들은 다음부터겠지.]뒤에서 속살거리는 망령에게 ‘제발 그 입을 좀 여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눈앞의 이민아가 불을 켜고 있어서 못 한다는 점이 통탄스러웠다.
“흐음…… 뭐라고 해야 할까. 원래 있던 스타일 대신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는 중인데, 오히려 그래서 결과물이 좀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그때였다.
내 말을 듣던 그녀의 얼굴에 파문이 일어난 것은.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아니, 그러니까 네가 원래 연습하던 아카데믹한 스타일이, 아직 다 안 벗겨진 느낌? 그래서 새로 추구하는 좀,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잡아먹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구나, 그게 부족한 거였어.”
“응?”
“대담성이 부족한 거였어. 나한테는.”
이것만 해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이어진 정윤성의 말이었다.
[네 몸을 좀 빌려줘, 김리듬.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네? 뭐라고요?’
이민아가 피아노 건반으로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나는 정윤성에게 이렇게 물었다.
[시간 없어. 이런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지금까지 너하고 같이 있으면서 내가 힘을 회복한 지금이, 이민아한테 진짜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줄 기회……]‘아니. 지금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그 순간.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다.’
“이민아.”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내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인데,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기는 처음이다.
“내가 직접 곡을 연주해 볼 게. 《옹딘》 말이야.”
“응?”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겠어?”
민아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은.
같은 목소리에 같은 말투인, 다른 ‘영혼’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
그의 대답이 내 머릿속에 울렸다.
[기억해, 김리듬. 이 학교에는 귀신이 있어.]‘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그 귀신은 연주로 끌어낼 수 있지.]민아가 자리를 비켜 주자, 내 몸을 차지한 그는 느긋하고 당당하게 피아노에 앉았다.
바깥의 날씨는 오늘 아침의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잔뜩 흐려 있었다.
“잘 들어, 이민아.”
나를 잠시 빌린 그의 얼굴에, 오만하면서도 화려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이걸 듣고 네 연주를 완성할 수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질 테니까.”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선을 피아노 건반으로 돌린 채 조용히 피아노 건반 위에 화음들을 풀기 시작했다.
귀를 간질이고 가물거리게 하는 9화음들이었다.
그 순간.
톡, 톡. 토도독.
거짓말처럼 빗방울들이 연습실의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 * *
토독, 토도독, 하면서 유리창을 때리던 소리는 어느새 투둑, 투두둑 하는 본격적인 빗줄기가 되었고.
“Écoute! Écoute!”
“들리나요! 들리나요!”
소리는 빗방울의, 물방울의 부름으로 변해, 민아를 불렀다.
이 소리는, 창밖에서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저 귀신 들린 듯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에서 피아노를 거쳐 이 연습실을 채워 버리는 부름인지.
민아는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C’est moi, c’est Ondine qui frôle de ces touttes d’eau les losanges sonores de ta fenêtre illuminée par les mornes raouns de la lune.”
“저 음울한 달빛이 비추는 수정 같은 유리창에 물방울을 흩뿌려 울리게 하는 것은, 바로 나, 나 운디네랍니다.”
어느새, 음악은 시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바로, 라벨이 이 음악을 쓰면서 열광하고 침식당한 알로와즈 베르트랑의 그 시, 《밤의 가스파르》가 되어 있었고.
또한, 음악은 그 시가 불어넣고 초래하는 환상이 되어, 창밖의 운디네가 흩뿌리는 물방울들의 환영을 그녀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Et mon palais est bâti fluide, au fond du lac, dans le triangle du feu, de la terre et de l’air.”
“나의 궁전은 깊은 호수 속 불과 흙, 공기의 삼위일체 속에 물로 만들어져 있지요.”*
(*알루와즈 베르트랑, ≪옹딘≫)
음악을 머금고 자란 귀기 어린 환상이.
실체를 갖추고 그녀를 유혹한다.
물방울과 빗줄기의 광시곡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