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녹턴을 연주하는 시간 (3)
엄청난 제안이다.
아니, 엄청나다 못해 무시무시한 제안이다.
‘고작 고2, 열여덟 살의 나이에.’
세계적인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제작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쇼팽 콩쿠르 우승보다도 더 대단한 제안이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이뤄 낸 일들은, 동년배의 예고생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것들뿐이지만.
성좌라 불릴 자격이 충분한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직접 만나서, 음악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하는 동시에.
관리까지 관여하는 유니버설 뮤직의 입장에서.
자신은, 아직 일개 학생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계약을 제안하고 있다.’
나는 윤성에게 물어보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내가 직접 결정해야 할 문제다.’
그렇게, 나는 긴 고심과 짧은 침묵 끝에 대답했다.
“상무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 저는 지금 당장 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만.
그는 내가 성급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만류했지만, 더 길게 생각한다고 내 답변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김철환 상무님. 직접 전화까지 걸어 이런 중요한 제안을 해 주신 점은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몇 초 동안의 침묵 후.
상대의 말이 들렸다.
― 제가 전화로 제안을 드린 게 불편하다면, 직접 만나서라도…….
“아니요. 직접 만나더라도 아마 제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직은 어설프니까요.”
소설이건, 수필이건, 음악이건, 미술이건.
오직 시간만이 채워 줄 수 있고.
오직 시간만이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막 완성한 탓에.
인공의 냄새로 가득한 건물이 아닌.
세월이 자연스럽게 착색시키고 완성시킨.
그런 형태의 ‘완벽함’이 내게는 아직 없다.
“상무님께서 제 가치를 알아봐 주시고 높게 평가해 주시는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 시간만이 줄 수 있는 난숙이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알아들었습니다.
역시 초대형 음반사의 중역답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요.”
― 말씀하세요.
“지금 당장 어설픈 신동의 쇼팽 녹턴을 녹음하는 것보다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쇼팽 녹턴을 녹음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 치기에 대한 비웃음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 좋습니다, 좋아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미래의 쇼팽 콩쿠르 우승자님.
다행히, 나쁘지 않게 받아들인 것 같다.
― 김리듬 군. 끊기 전에 한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아쉽지만, 이 조언만큼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유니버설 뮤직의 조언이라면 제가 당연히 귀담아들어야죠.”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김리듬 군. 당신의 연주는 정말 뛰어납니다. 유니버설 뮤직, 최소한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의 이 김철환 상무의 이름을 걸고 하는 얘기입니다.
“정말 감사한 얘기…….”
―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지만, 아직은 최고라고 하기에는 힘든 점이 있습니다.
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지금까지의 유쾌함과는 전혀 다른 건조함이 느껴졌다.
― 포커 패로 치면 풀하우스라고 해야겠지요. 아직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까지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풀하우스에서 멈추지 말고.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되어라.
나는, 그의 마지막 조언을 그렇게 이해했다.
“상무님의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 그러면, 이만 끊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 *
김철환 상무는 김리듬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번호를 바로 저장했다.
언젠가,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을 그 번호를.
“이거, 생각보다 더 물건인데.”
“어떻게 되셨어요, 상무님.”
옆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박상우 대리가,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되긴. 차였지.”
“세상에. 이걸 거절했다고요?”
“더 놀라운 게 뭔지 아냐? 이 김리듬이라는 녀석, 나중에 자기가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되면 그때 계약을 하자는 거야. 또라이지?”
“와, 생각한 것보다 더 또라이네요?”
박 대리는 상사의 표정을 능숙하게 읽으면서 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계약을 검토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상무님?”
“물론, 저 정도의 천재는 겸손할 필요가 없지. 겸손해서도 안 되고. 하지만 말이야.”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방금 전까지 짓던 부드러운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녀석, 유니버설로 데리고 오고 싶어. 지금 계약을 하지 않으면, 저런 음악성과…….”
그의 시선이, 지금도 숫자를 미친 속도로 경신하는 영상의 조회수 칸에 닿았다.
“스타성을 가진 인재를, 영원히 놓칠 것 같으니까.”
“저기…… 상무님.”
“왜.”
김철환 상무는 박 대리가 잽싸게 타 온 커피 잔을 받으면서 물었다.
“김리듬이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되겠다고 공언했다고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당연히 어렵지.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김리듬에 대한 고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냉정하게 딱 잘라 대답했다.
“쇼팽 콩쿠르는 수천만 명 중의 단 한 명, 아니, ‘70억 분의 1’의 재능이 가려지는 곳이니까.”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천재들도, 본선에서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곳이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지금 현재, 저 아이의 우승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더군다나, 역대 최고의 우승 후보라고 꼽히는 리칭윈이 있는 이상 김리듬의 우승 가능성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지.”
“하아, 걔는 그냥 상식 이외의 괴물이던데요.”
리칭윈.
지금 세계 음악계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세계 음악계의 신성.
철강 공장 출신의 평범한 노동자 집안 부모를 두고 있지만, 이미 3살부터 음악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5살 때 첫 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
7살 때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쇼팽 콩쿠르라는 자신의 인생 최대 목표를 향해 최고의 페이스로 질주하고 있는.
사실상 콩쿠르 우승 0순위 후보다.
“만일, 김리듬과 리칭윈의 우승 가능성을 두고 누군가 내기를 하라고 하면 모두 후자에 걸겠지.”
“당연하죠. 그게 상식이니까요.”
격차라는 것은 무섭다.
한번 벌어진 격차는 절대 쉽게 줄어들지 않으며.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비인간적인 노력과 무수한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리칭윈은, 누구보다 먼저 목표를 향해 돌진하면서 남들과의 격차를 아득하게 벌린 상태였고.
김리듬은, 이제야 정확한 방향을 잡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무수한 후발 주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게다가 7살 이후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쉼 없이 질주한 리칭윈과는 달리, 김리듬은 좌충우돌하다가 이제야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은 느낌이라고.’
심지어 아이돌과 협연까지 했던 그의 태도가, 꼰대 심사위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 격차가 좁혀질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걸까.’
정말 이상하다.
너튜브에서 ‘선혈의 라흐마니노프’라고 불리는 그의 작년 연주는 이미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런 연주를 들려주는 연주자는 쌔고 쌨다.
그런데, 고작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김리듬은 쇼팽의 녹턴 연주까지 도달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정말로, 하루에 잠자는 8시간과.
밥 먹는 시간 1시간 반.
그 외의 세수나 용변 시간 30분을 제외한.
14시간 동안 연습만 하지 않고서는.
저런 비정상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김리듬이 노력파라고 해도, 설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14시간 동안 연습을 했겠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김철환 상무의 고민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박 대리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상무님. 사실, 이미 한국인 출신 쇼팽 콩쿠르 우승자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최시현이 있으니까.”
7년 전 10월 17일.
그는 쇼팽 콩쿠르 파이널을 관전하면서 전율했다.
즐겁게 춤추듯 무대 위를 지배하면서도.
섬세한 페달링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하모니와.
빠른 템포에서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루바토를.
신들린 듯 구사하던 그 젊은 천재 최시현에게.
그는 매료당하고, 넋을 빼앗겼으니까.
“이건 제 생각이지만, 김리듬은 최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가라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려면 최시현 수준이 아니면 안 된다고 봐요.”
“그렇지…… 그렇지만…….”
김철환 상무는 불명확한 것을 싫어한다.
그는 음악에서도 모든 것은 명확하게 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투명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뭔가가 달라…….”
그는 이 어린 천재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에 기분이 나쁘면서도.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경이를 느꼈다.
* * *
전화를 끊은 후에도, 김철환 상무가 건넨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포커 패로 치면 풀하우스라고 해야겠지요. 아직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까지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단순한 격려는 아닐 것이다.
아니, 격려라기보다는.
‘아직은 아니라는 채찍질에 가까워.’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김리듬?]잠시 잊고 있었다.
항상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윤성을.
“정 마에. 혹시 김철환 상무님 알아요?”
[당연히 알지. 내가 유니버셜하고 계약할 때 직접 만난 담당자였는데.]윤성의 시선이 오늘따라 푸근해 보인다.
이제는, 내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정말로 나작리가 아니게 되었네. 아니, 나작리라고 불렀다가는 진짜 큰일 나겠어.]“이미 나작리라고 두 번 했잖아요.”
[아무튼, 쇼팽 콩쿠르 우승자를 공언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막상 다시 곱씹어 보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엄청난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제가 정말로 할 수 있을까요.”
[네가 올해 연습을 빼먹은 날이 며칠이나 되지?]“이틀이었죠. 그 리스트 프로젝트 때.”
[그래. 부담감 때문에 연습을 이틀 빼먹은 것을 제외하면, 넌 계속 쉬지 않고 너 자신을 연마해 왔어. 그것도, 무려 하루에 14시간 동안이나.]윤성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고 했다. 둔한 붓이 총명한 두뇌를 이긴다는 뜻이지. 노력하지 않는 재능은 결국 녹이 슬기 마련이고, 쉼 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닦는 노력은 언젠가 빛이 나기 마련이야.]“하지만 마에스트로. 그건 재능이 먼저 있을 때의 얘기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묻자, 김리듬. 너는 너 자신이 정말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니?]아니다.
지금의 내가 나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없는 재능을 노력으로 대체하는 성실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걱정하니?]“…….”
[타인의 시선? 잊어버려. 타인의 질투도, 그들의 쓰레기 같은 말도 전부 잊어버려. 오직, 음악과 너 자신만을 남기면 되는 거야.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다른 모든 것을 비우면 되는 거라고.]봄날 오후의 바람이 악보들을 흩날린다.
유령은, 그 햇살과 바람을 헤치며 흩날리는 악보들을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히려 중요한 건 다른 문제지.]“다른 문제라뇨?”
[가장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너의 모든 것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지.]나는 그가 답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바로, 네가 쇼팽 콩쿠르를 해야만 하는 이유다.]* * *
천슈메이의 방은 닫혀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상하이의 하늘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화사한 푸르름으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하늘을 보지 않기 위해.
커튼으로 모든 것을 가려 놓은 채.
하나의 영상만을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
까득. 까득.
미친 듯이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영상을 미친 듯이 계속 돌려본다.
무질서하게 술병들이 널브러진 방 한가운데에서.
이미 연주를 100번 넘게 돌려본 그녀의 입에서.
마침내, 옅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그 영상 속에 있는 앳된 소년 김리듬은, 자신의 연주로 쇼팽의 녹턴에 신의 숭고함을 불어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