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밤의 가스파르 (4)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지금까지 전혀 다른 스타일로 연습하고 있었어요.”
민아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정희는 들고 있던 색연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너, 지금 대체 뭐라고…….”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선생님.”
잠을 못 잔 게 100% 확실한 그녀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있고, 피부는 평소와는 다르게 꺼칠했지만.
눈빛만큼은, 정희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민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네.”
“일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니? 이건 콩쿠르 본선이야. 네 아집으로 망칠 무대가 아니라고.”
“저도 알아요, 선생님.”
“그런데, 대체…….”
“선생님. 제가 과연 천슈메이처럼 친다고, 천슈메이를 꺾고 우승할 수 있을까요?”
순간, 정희는 제자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입이 딱 닫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 지금 비친 자신의 제자는, 너무 낯설어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모범적인 가면을 벗어던진 낯선 무언가…….
“도대체 누구야, 이민아.”
“네?”
“너한테 지금 이런 바람을 불어넣는 게 대체 누구냐고. 내가 알기로는, 희성예고에는 그럴 만한 선생님이 거의 없을 텐데.”
“그게,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믿기지 않는 연주를 들었거든요.”
“그게 누군데?”
정희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이 나오기를 빌었지만.
“김리듬이라는 아이예요.”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오자, 내심 실망했다.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스카르보》만이라도.”
정희는 지금이라도 민아의 고집을 꺾고 싶었다.
선생이라면, 더군다나 비인간적이고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이 바닥의 선생이라면 학생을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둘 다 잡을 자신 있니?”
“네?”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기준. 네가 생각하는 음악성. 둘 다 잡을 자신이 있냐고.”
“물론이죠. 선생님.”
그녀는, 자신은 뛰어난 선생이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제자의 고집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뜨린 색연필을 다시 집어서는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 엄격하게 평가할 거다.”
“네.”
“그러면, 시작해.”
민아는 바로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난곡 중의 난곡. 《스카르보》.’
라벨이 피아니스트들을 고문하기 위해 썼다는 얘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만큼 잔인한 난이도의 곡.
솔-솔#-레#…….
밤의 기괴함.
밤의 변덕스러움.
밤의 장난기.
밤의 요사스러움을 응축한 듯한 요괴 스카르보.
Oh! que de fois je l’ai entendu et vu, Scarbo, lorsqu’à minuit la lune brille dans le ciel comme un écu d’argent sur une bannière d’azur semée d’abeilles d’or!
오! 스카르보여, 한밤중에 은화 같은 달이, 흩어져 있는 하늘빛 깃발을 황금 꿀벌 빛깔로 비추는 것을 내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는지.
괴이하나 공포스럽지 않고.
악마 같으나 두렵지 않은 존재.
음침한 음계와 사건의 전조 같은 동음 연타가 끝나면, 요괴의 한바탕 장난질이 시작된다.
Que de fois j’ai entendu bourdonner son rire dans l’ombre de mon alcôve, et grincer son ongle sur la soie des courtines de mon lit!
내 골방 그늘에서 그의 웃음소리와, 내 침대 커튼의 비단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종잡을 수 없고.
형용할 수 없으며.
따라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함.
그래, 허깨비.
이 곡은, 잡을 수 없는 허깨비를 붙잡아 현실로 옮겨 놓는 것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불가해한 곡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 어려운 일을 지금 해내고 있습니다.
Le croyais-je alors évanoui? le nain grandissait entre la lune et moi comme le clocher d’une cathédrale gothique, un grelot d’or en branle à son bonnet pointu!
그 녀석은 사라졌는가? 그럴 리가, 녀석은 대성당 첨탑인 양 부풀고 또 부풀어 달빛을 가리고 뾰족한 모자에서 금으로 만든 종이 울리네!
미친 듯한 트레몰로와 싱커페이션(당김음)이 얽히는 가운데, 오른손의 18음 아르페지오와 왼손의 22음 아르페지오와 뒤엉켜 허깨비의 음악이 폭발한다.
Mais bientôt son corps bleuissait, diaphane comme la cire d’une bougie, son visage blêmissait comme la cire d’un lumignon, –et soudain il s’éteignait.
이내 녀석의 몸이 파래지더니, 촛농처럼 투명해지네. 얼굴은 꺼져가는 양초마냥 창백하고─ 이내 사라졌어.*
(*알루와즈 베르트랑, ≪스카르보≫)
그렇게 한바탕 난장을 펼치던 허깨비의 음악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들며 자취를 감춘다.
연주를 끝낸 민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선생을 바라보았고.
정희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선생님?”
“민아 너, 정말 욕심 많은 아이구나. 너무할 정도로.”
민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이어지는 정희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이런…… 미친 연주를 기어이 해낼 줄이야…….”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밤을 박명으로 걷어 낸 새벽처럼 천천히 밝아졌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끝까지 가 보자. 이 스타일로 천슈메이를 박살 내 보자고.”
“물론이죠.”
“그러면, 첫 곡 《옹딘》부터 해 보자.”
본선 파이널까지 이제 남은 시간 2주일.
이제 남은 것은, 결승점까지 전력 질주 하는 것이다.
* * *
정윤성이 빙의한 후유증(빙의통이라고 해야 하나?)이 사라지기 무섭게, 나는 연습을 재개했다.
감정 표현을 키우기 위해 그가 제시한 연습곡은, 바로 베토벤의 《비창》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
하지만, 연습을 시작하기 무섭게 그는 나를 쥐 잡듯이 닦달했다.
[넌 악보는 잘 기억하면서 왜 내가 해 준 말은 전부 다 까먹는 거냐?]“기억하고 있거든요?”
[내가 말했지. 바람에 실려 오는 소리들을 놓치지 말라고. 스스로 바람이 되어 음표가 적힌 노트를 휘감아야 한다고.]서로에게 몸을 부비며, 서로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는 새들의 소리를 음악으로 옮겨라.
비창 2악장.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 한 몸이 되어 늘 함께 날다 한날한시에 죽는 비익조 같은 곡.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그렇지. 더 다채롭게, 더 섬세하게.]한바탕 연습을 끝낸 후, 나는 손에 찬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깨끗한 하늘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쯤 민아, 비행기 타고 호주로 가는 중일 텐데.”
[걱정되냐?]“아니요. 전혀.”
[걱정 말라니까. 민아가 이길 가능성이 높아.]“그런데, 마에스트로.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어떻게 그렇게 굳게 확신하는 거예요? 민아가 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심사위원 명단을 보니까, 감이 오더라고.]“네?”
[심사위원 명단 못 봤어? 거기 필리프 로제 교수가 있더라고. 그 양반, 튀는 애들 좋아하거든.]“그러면, 민아한테 당신 스타일을 강요한 이유가…….”
[내가 설마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민아한테 바람을 넣었겠어? 다 알아본 다음에 벌인 짓이야.]기가 찬다.
그게 다 전략이고 계략이었단 말인가.
“당신이란 귀신은 진짜…….”
[어쨌거나 잘될 거야. 그럴 만한 인재니까.]“됐거든요?”
하여간, 속이 시커메서는.
* * *
“벌써 벚꽃이 다 떨어졌네요. 구경도 제대로 못 했는데.”
[벚꽃 걱정할 시간에 네 음악을 더 걱정해야 하지 않겠니? 리듬아?]“어휴. 감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네, 진짜.”
이제 저녁노을과 같이 하교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귓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흐르는 빌 에반스의 음악은 이 노을의 시간을 레드화이트와 연초록으로 화려하게 덧칠한다.
윤성은 내게 최대한 다양한 음악을 들을 것을 주문했다.
[클래식 음악 한다고 클래식 음악만 듣지 마라. 다양하게 들어야 그만큼 더 쑥쑥 크는 법이야.]“웬일로 사리에 맞는 말씀을 하시네요?”
[이게 다 너를 육성하는 과정이야.]이제는 이 양반이 이렇게 가끔가다 맞는 말을 할 때마다 그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학교 앞 사거리를 돌아 지하철역 쪽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이거 피아노 소리인데?]“버스킹이라도 하나 보네요.”
[아, 그 길거리에 고물 피아노 갖다 놓고 대충 연주하는 거?]“진짜 자꾸 그렇게 감성 없게 굴 거예요?”
[나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야. 그런데, 저 연주자 상태가 좀 심각하네.]퇴근 시간에 유동 인구가 많은 곳답게,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버스킹을 듣고 있었지만.
나는 윤성의 말에 속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저렇게 치는 거 아닌데.’
두 대의 피아노를 놓고 연주하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는, 둘 다 피아노가 아까운 실력이었다.
내가 지난 한 달간 윤성과 같이 엮이면서 향상된 것은 실력만이 아니었다.
흔히 청음이라고 하는, 음을 듣는 능력은 정말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듣기만 해도 누가 옆방에서 연습 중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이 정도면 나름 능력인 셈인데.
‘아, 손가락이 근질거리네.’
내가 대신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터졌지만, 나와 윤성의 입가에는 저절로 썩소가 지어졌다.
“자, 여러분. 그러면 이제 블라인드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피아노는 각각 4천만 원짜리 고급 피아노와, 850만 원까지 중고가형 피아노입니다!”
“우와, 진짜야?”
“가격 미쳤다.”
“여러분. 이 피아노의 소리를 듣고 가격을 맞히실 수 있는 분 혹시 계신가요? 아무도 없으세요?”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데? 저걸 어떻게 맞혀?”
“맞히시는 분께는 상품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전해 보세요!”
그 순간.
[김리듬.]“왜요?”
[저 버스킹, 어디서 하는 건지 알 것 같아.]“나도 알 것 같은데요.”
[이거 기회다. 가라. 가서 네 능력을 보여 줘.]“이렇게 갑자기 급발진해도 되는 걸까요?”
[뭐 어때. 이제는, 충분히 그럴 실력이 되잖아?]나는 천천히 그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
“오, 학생. 희성예고 학생 맞죠?”
“네. 맞아요.”
“이름이?”
“김리듬이에요.”
“아, 김리듬 학생. 블라인드 테스트 도전하실 거죠? 각각 4천만 원짜리, 850만 원짜리 피아노니까 듣고 맞히면 됩니다.”
“혹시, 눈가리개 있나요?”
“네?”
“눈 가리고 맞혀 보려고요.”
주위 반응이 아까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정말 괜찮겠어요, 김리듬 학생?”
“네. 괜찮아요.”
“여러분. 여기 희성예고 김리듬 학생이 눈을 가리고 피아노를 맞혀 본다네요. 다들 박수 주시겠어요?”
나는 방금 전까지 한심한 연주를 들려주던 그의 인도를 받아 피아노에 앉았다.
자, 그러면 어디 한번 즐겨 볼까.
이제부터는, 도약과 비약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