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고난을 뚫고 별들의 나라로 (1)
‘김세린의 오후 2시’ 후폭풍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컸다.
“김리듬! 숨겨 놓은 언양불고기는 어디 있는가!”
“맞아! 절. 대. 해. 명. 해!”
“김리듬은 언양불고기에 상처받은 우리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라! 해소하라!”
어디서 자꾸 개소리가 들린다.
초여름이라서 그런가.
나는 목소리만 큰 다른 녀석들 대신, 이 사태의 원흉인 한 녀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정선율. 넌 거기서 뭐 하냐?”
“김리듬은 자폭하라! 자폭하라!”
뭘 자폭해.
결국, 나는 회유 작전으로 나갔다.
“알았어, 알았어. 다 같이 구워 먹자.”
“크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역시! 선혈의 피아니스트! 김리듬밖에 없습니다!”
오랜만에 듣네, 이 별명.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진저리가 쳐졌는데.
그건 그렇고, 이 간신배들.
애초에 언양불고기가 목적이었던 거냐.
우리 집에도 없는 로봇청소기 돌리는 것들이.
“대신, 정선율은 제외다.”
“아니! 왜! 왜 나만 빼는 건데!”
“왜긴 왜야. 주동자가 너니까 그렇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정선율.
네놈의 얄팍한 수는 이미 간파했다 이거야!
아니나 다를까.
이 갈대 같은 것들은, 바로 내게 들러붙었다.
“맞습니다, 김리듬 님! 이게 다 저 사악한 정선율 놈의 책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선율을 타도하라! 타도하라!”
눈물 나게 아름다운 피아노 전공의 우정이다.
뭐, 이런 게 다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어?
* * *
“후우.”
이제 계절은 6월이 코앞이고.
시원한 하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예전 쇼팽의 ≪겨울바람≫을 쳤을 때처럼.
아이들 앞에서 전공 실기를 해내야 한다.
‘이번 전공 실기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손가락을 쩍쩍 벌려야 하는 난코스가 무진장 많은, 브람스의 곡 중 가장 어려운 곡이다.
[보여 줘라, 김리듬.]그러나 이제 나는, 좌절을 모르는 김리듬!
“우와아아앜!”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2학년 1학기 전공 실기가 끝이 났다.
얼마 전 전공 실기 마지막 연습 때, 내 연주를 들은 최선희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내게 꺼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니, 리듬아?’
‘네. 말씀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한참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으셨다.
‘이제는…… 내가 너를 평가해도 될 자격이 있는지, 적잖이 의심이 든단다.’
‘…….’
‘어쩌면, 지금 네가 있는 이 공간이, 이 학교라는 공간이, 너를 계속 가두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야.’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순간적으로 정말 깜짝 놀랐지만.
그녀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나는, 이제 너무 많이 성장해 버렸으니까.
‘사실, 선생님.’
‘얘기하거라.’
‘어쩌면, 제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웃자랐다는 생각은 해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더없이 훌륭한 연주를 해내는 제자의 모습은, 스승으로서 최고의 자랑거리니까.’
‘선생님…….’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었단다. 너는 어떤 모습으로 있건 나의 자랑이야.’
그런 선생님은.
무대에서 내려온 나를 바로 반겨 주셨다.
“수고했다, 리듬아.”
나는 그런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 *
숨 막히는 무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린다.
이 열기로 충만한 6월 초의 시간에.
“김가인, 거기서 좀 비켜라. 김리듬이 불편해하지 않나.”
“아니거든요? 김리듬은 내가 너무 편해서 이러는 거거든요?”
“둘 다 제발 좀 사라져…….”
연습실의 나는, 김가인과 임지호 사이에 포위당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김리듬.”
“왜?”
“곧 기말고사라고! 중요한 청음 시험까지 포함한!”
“그런데 그 준비를 왜 여기서 하는 건데!”
“몰라! 여기 오면 집중력이 높아져!”
모른다면서 잘도 말하네!
물론 김가인의 말처럼.
청음 시험은 집중력이 중요하다. 평소에는 기가 막히게 음정을 잘 듣다가, 사소한 변수에 평정심이 흐트러져 청음시험을 망쳐 버린 음악 전공생의 이야기는 이 바닥에서 너무 흔하니까.
“야, 임지호. 넌 그거 못 느끼냐? 김리듬하고 같이 뭔가를 하면, 안 되던 튜닝이 기가 막히게 잘돼요!”
“제발 쪽팔리니까 그만 좀 해라.”
“아니, 내가 쪽팔려? 어?”
“당연하지.”
최소한 상종하고 싶지는 않지.
“김리듬. 너는 또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런데 왜?”
“그냥, 임지호한테 잘하라고.”
“이보세요. 저, 요즘은 습관성 콘혐 안 합니다만?”
찔리는 게 있나 보지?
갑자기 급발진하는 걸 보니.
“정말 안 하고 있어? 확실해?”
“당연하지. 솔직히, 요즘은 그냥 양 선배하고 가끔 뒷담 까는 정도밖에 안 했어.”
“언젠가는 죽이겠다…….”
“어머, 옆에 있었네? 몰랐지잉.”
저런 뻔뻔함은, 가끔 배우고 싶을 정도다.
“잡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청음 테스트 마치고 가자. 김리듬한테 방해 안 되게.”
“알았어.”
“참고로 나는 준비 끝났다. 바로 덤벼라.”
“오호. 패배를 추가하고 싶나 보군요오?”
그런데.
“……이겼다.”
이 청음 시험 테스트에서.
오늘의 가장 큰 반전이 일어났다.
“이겼다. 내가 이겼어.”
“축하해, 임지호.”
녀석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이겼어! 김리듬! 드디어! 반년 만에! 저 지긋지긋하고 사악한 혼종을 꺾고 내가 승리를 쟁취했다고!”
“그래. 정말 정말 축하해. 너의 쾌거야.”
올해 초, 김가인과의 청음 시합에서 패한 후.
마치 저주라도 받은 듯.
김가인에게 내리 연패하던 임지호가.
그녀를, 드디어 반년 만에 꺾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 청음 시험의 벌칙은 바로…….
‘24시간 동안, 임지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건 해야 한다!’
좌절하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지호에게 묻는다.
“저어기, 임지호오.”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목소리다.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그녀의 질문에 대한 지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우효오오오―!”
힘내라, 김가인.
지금까지 네가 차곡차곡 쌓은 업보.
이제부터, 차근차근, 확실히 갚아야지.
* * *
숨 막히게 무더운 6월이다.
하지만 결명자차 한 모금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책상에 엎드려 있으면, 이게 천국이지…….
“김리듬. 내 말 듣고 있어?”
”어어? 당연하지이. 잘 듣고 있어어.”
는 그런 거 없다.
지금 나는, 전수정과 함께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다음 목표를 논의하는 중이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학기말 고사고, 학기말 고사가 끝나면 바로 여름방학이잖아?”
“그렇지.”
“물론, 너와 나를 포함한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방학은 매우 중요한 기간이지. 미래를 결정할 연습에 매진해야 할 시간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김리듬.”
도대체 뭘까.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이렇게 신중한 빌드업을 까는 것일까.
“나는 이번 여름 방학에 우리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가 아주 중요한 일에 매진했으면 좋겠어.”
“구체적으로 무슨 일?”
“바로, 음반 발매야.”
[와. 전수정 진짜 빠꾸 없네.]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윤성이 가로챘다.
“잠시만, 전수정. 잠시만.”
오케스트라 투자와는 별도로.
이건 좀 다른 문제다.
“음반 발매는 콘서트 준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 그렇지?”
“나도 잘 알고 있어.”
“아,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그래서,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녀는 내게 태블릿 PC를 들이밀었다.
“대충 보니까 견적 나오지, 김리듬?”
당연하지.
나도, 이제는 이런 기획안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올 정도로 내공이 쌓였으니까.
“이거, 크라우드펀딩이잖아.”
“맞아.”
이미 인지도는 충분하게 쌓였다.
작년 드라마 촬영 때부터 시작된.
이사장님과 전수정의 플랜대로.
우리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 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유명해. 그러니, 이제는 이 유명세를 역으로 이용할 시간이야.”
우리의 첫 음반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이라.
‘우리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구나.’
“물론, 원래 목적은 잊지 말아야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라는.
공익성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갈 것이다.
“이미 학부모회 회장님께도 연락을 드렸지. 김리듬과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음반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에 힘을 보태 주시지 않겠느냐고.”
“뭐라고 하시디?”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던데?”
사실상 확답을 받아 온 셈이다.
“크라우드펀딩 얼굴마담은 내가 하고?”
“지휘자 겸 홍보대사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써줬으면 좋겠네, 김리듬.”
“뭐, 그러시다면야.”
계획서를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특이한 점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레퍼토리가 비어 있어?”
“당연히 비워둬야지. 레퍼토리는.”
“응?”
“레퍼토리는, 단원 모두가 같이 정해야 하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전수정이 어떻게 표변할지.
* * *
어쨌거나, 전수정은 공언한 대로 단원들 앞에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레퍼토리를 선정할 시간이야.”
이제부터는 레퍼토리 선정의 시간이다.
“자, 일단 연주하고 싶은 곡을 얘기해 봐.”
“제가 또 이런 건은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태도는 마음에 드네, 김가인. 그래서 하고 싶은 곡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혁명!”
김가인, 지금 너 큰 실수 하는 거야.
지금 전수정 표정을 보라고.
“아, 물론 쇼스타코비치 좋지. 나도 하고 싶은 곡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김가인은 지금.
자본주의의 정점인 재벌 회장님의 장녀 앞에서.
공산주의의 대표 작곡가를 거론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녀석도 그 치명적인 실수를 눈치챘는지.
슬슬 전수정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지, 김가인.”
“으, 응.”
“쇼스타코비치를 녹음하려면, 우리가 전부 그 곡에만 달려들어서 한 해를 다 써도 못 해. 그 정도는 알지?”
“그, 그래도…….”
“그리고 말이야.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녀가, 웃었다.
“우리 오케스트라 대관료하고 악기값, 의상비를 대려면 동아악기에서 바이올린을 몇 대 팔아야 하는지 알아?”
“죄, 죄송합니다……!”
초여름의 무더위를 박멸시키는 오싹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김가인을 간단하게 제압한 전수정은, 다른 단원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제 다들 아시겠죠? 제가 왜 이번 크라우드펀딩에 이렇게나 필사적인지를?”
“넵.”
필사적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쯤 되면, 솔직히 인정해야지.
사실 우리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점이, 바로 전수정이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에 들이는 공로다.
“하지만, 어쨌거나 추천을 했으니 명단에 올려야지?”
“아, 아니요. 빼 주세요오…….”
“아니야.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봐. 나는. 정말. 폭넓은. 의견을. 듣고. 싶으니까.”
전수정은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얘기했지만.
김가인의 급발진 이후, 우리의 첫 녹음곡이자 크라우드펀딩 후보곡은 딱 두 곡이었다.
1)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작품번호 67
2)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작품번호 95
[정말 안일하고 무난한 선택이다, 야.]윤성의 평가는 신랄했지만 정확했다.
일단, 드보르자크를 주장하는 대표는 서강준이었다.
“새로 순항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어울리는 진취적인 기상! 신세계로 나아가는 그런 멋짐! 어?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아?”
“나쁘지 않네.”
그리고 베토벤을 꺼낸 대표 주자는 임지호였다.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모두가 아는 곡이 가장 어려운 법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도전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좋아. 의견 수렴했고.”
양측의 의견을 종합한 전수정은.
탁 소리나게 수첩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투표로 정하자.”
곧바로 단원 투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