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피아니스트의 매니저
꼬리를 내린 박만영이 추한 뒷모습을 끌며 사라지자마자, 이명석 본부장은 우리에게 사과했다.
“김리듬 군, 이민아 양. 본의 아니게 이런 모습을 보여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본부장님. 대처 정말 잘하셨어요.”
민아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야릇한 만족감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전부터 저 인간의 지저분한 소문은 얼핏 들었지만, 심각함을 인지한 것은 얼마 전부터였습니다.”
[거짓말이야. 이명석 본부장 정보망이 얼마나 넓은데.]“전속계약을 맺지 않았던 것이 정말 다행이지요. 썩은 싹을 일거에 잘라낼 수 있었으니까.”
[이거 봐. 애초에 다 알고서 전속계약 안 맺은 거야. 이명석 이 양반이 몰랐을 리가 있나.]나는 윤성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명석 본부장의 얼굴에만 집중했다.
“사실, 그가 재직 중인 학교 내 파벌 싸움을 조금 이용했지요. 악을 쓸어내는 방법은, 다른 악을 이용하는 것 말고는 없으니까.”
[이독제독이라. 그래. 현실적으로는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는 하지.]“어쨌거나, 어린 거장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린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학교 내 파벌 싸움을 이용했다, 라.
반대로 생각하면, 이명석 본부장은 마음만 먹으면 박만영을 언제든 파멸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명진 원장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도대체 이 형제는, 음악계의 어두운 뒷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형제가 쌍으로 껄끄러운 인간들이야.’
그 순간.
웃는 인상으로 전환된 이명석 본부장의 눈동자가, 나의 시선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런데, 김리듬 군.”
“네. 본부장님.”
“쇼팽 콩쿠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DVD 예선은 얼마나 준비되었습니까?”
아, 역시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이미 검증을 거쳤습니다.”
“마에스트로 최시현에게요?”
“역시. 이미 알고 계셨네요.”
“극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연주를 듣고 나서, 흥분을 못 이겨 잠을 설쳤다나, 뭐라나.”
에이, 설마요.
그 최시현이?
“그러고 보니, 유니버설의 김철환 상무님과 얼마 전에 통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네에?”
“리듬 군에 대한 평이 인상 깊더군요. 그렇게 겸손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또라이는 이 자리에 앉은 이후로 정말 처음 본다고.”
“크흡!”
아니. 요즘 들어 목이 좀 심하게 칼칼하네.
에어컨 바람이 세서 그런가.
“아, 마지막 구절은 농담입니다.”
“본부장니임…….”
그런 농담, 저는 들어 본 적도 없다고요!
이명석 본부장은 편하게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사실, 때가 되기는 했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김리듬이라는 이름의 명품을, 이제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관리할 시기가 온 것 같아서요.”
워딩이 심상치 않다.
“김리듬 군 옆에는 이제 ‘진짜’ 매니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매니저.
나를 매니지먼트할, 매니저.
‘내 곁에 매니저가 붙는다는 얘기는.’
마치, 이제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예고생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저는 항상 민아 양의 옆에서 세심한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황정희 선생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매니저니까요.”
나는 민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황정희 선생님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노고를 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체계적인 스케줄 관리 및 연습 프로그램 관리.
콘서트를 앞둔 피아니스트의 체력 관리.
식단 조절에, 심지어 운동량까지.
“그리고 저는 김리듬 군의 옆에는 그와 필적할 만한 매니저, 아니, 그 이상의 매니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생각이에요, 본부장님.”
민아야?
“우리 리듬이한테는 최고의 매니저가 꼭 필요해요. 공연장을 예약하고, 세계 곳곳에 깔린 스케줄을 맞추고, 기 센 공연장 지배인과 호텔 지배인들에 맞서거나, 때로는 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리듬이를 완벽하게 서포트할 매니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이죠, 민아 양.”
둘이 무슨 합이라도 맞추셨어요?
왜 이렇게 입이 잘 맞지?,
“그런데 본부장님, 김리듬 수준에 맞는 매니저라면 신중하게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고민 중입니다. 누가 가장 적당할지.”
이게 무슨 소리야!
정작 본인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이건 시간이 걸릴 사안이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하죠.”
* * *
누가 내 매니저가 될까?
아니, 누가 내 매니저로 적당할까?
나는 내 매니저가 될 만한 인물들을 떠올리다가, 몇 달 동안 잊고 있던 인물을 기억해냈다.
“정 마에 선생님.”
[응?]악보를 폴터가이스트로 뒤적거리던 윤성이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제 매니저 있잖아요.”
“네. 동아악기의 김우진 실장님이요.”
동아악기 일반영업부 1실장 김우진.
음악계 사정에 정통하며, 음반사 및 클래식 음악계 매니지먼트사 쪽의 업무도 빠삭한 인물이다.
게다가, 작년에 노민탁 그 인간을 제압할 때 보여 준 뛰어난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까지.
최고의 매니저 재목이라 할 수 있다.
[김우진 실장이라. 그 정도면 괜찮지.]“역시 그렇죠?”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어.]“그게 뭔데요?”
[바로, 김우진 실장의 의향이지.]앗.
[과연 그 양반이, 안정된 자기 직장을 접고 선뜻 네 매니저를 하겠다고 나설까? 보수도 불안정하고,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너의 매니저 일을?]“저기요?”
[네 매니저 하나 잘 뽑겠다고 멀쩡한 남의 인생 말아먹을 수는 없잖아.]제기랄!
맞는 말인데, 반박할 수가 없어서 열받네.
[그런데 정말 김우진 실장이 네 매니저를 해 줬으면 하는 거냐?]“그 이상의 선택지가 안 떠올라서요.”
[그렇다면, 키는 전수정이 쥐고 있는 셈이군.]“그렇죠.”
[그러면, 이제부터 넌 무엇을 해야 되겠니?]“가야죠. 전수정한테.”
이제부터는 설득의 시간이닷!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꺼낸 매니저 건을 조용히 듣기만 하던 전수정의 대답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괜찮아, 김리듬.”
“응?”
“그냥, 내가 하라고 하면 되니까.”
안 돼, 제발!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전수정, 절대 안 돼! 너 갑질 논란으로 훅 가고 싶어? 난 너하고 최대한 오래 보고 싶단 말이야!”
“뭘 그렇게 걱정해? 김 실장님이 거절하면 그냥 거절당하는 거지.”
전수정, 너.
쿨해도 너무 쿨한 거 아냐?
어쨌거나,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 한 통을 넣었고.
15분 후 도착한 김우진 실장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동아그룹과 그녀의 힘을 체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우진 실장님.”
“하하하. 리듬 군은 날이 갈수록 얼굴이 좋아지시네요. 본받고 싶습니다.”
실장님은 다크서클이 진해지셨습니다.
도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겪으시길래…….
“자, 그런데 무슨 중요한 일이 있으셔서 일과 중인 저를 여기까지 호출하셨는지요?”
전수정은 바로 내게 눈치를 주었다.
‘지금 바로 말해.’라는 뜻이지만.
생각만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내가 결심을 굳혔을 때.
“저기, 김 실장님.”
“네. 리듬 군.”
“매니저 일…….”
“하겠습니다.”
아니, 제발 김 실장님!
좀 끝까지 듣고 대답을 하라고요!
“괜찮습니다, 김리듬 군.”
“괜찮다뇨?”
“사실, 얼마 전에 회장님께서 제게 특명을 내리셨거든요. ‘김리듬 군의 매니저를 하면서 그를 지켜보고 보호하게.’라고 말이지요. 하하하하하.”
내 시선이 바로 전수정에게로 굴러갔고.
나는, 그녀가 저런 식으로 웃음을 참는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크흐흡…… 김리듬 표정,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 * *
매니저 건은 의외로 쉽게 처리되었다.
내가 고심하는 동안, 이명진 본부장과 전수정, 그리고 김우진 실장이 이미 일을 마친 것이다.
“그래서, 제가 오늘부터 여기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나의 새 매니저, 김우진 씨는 연습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부터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아, 오늘은 첫날이니까 할 일이 별로 없어요.”
“크으. 역시 제가 바라던 꿈의 직장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투두두두두두두두둑.
나는 그의 앞에 수백 권의 악보를 놓으며 말을 시작했다.
“오늘은 쇼팽 악보 정리만 해 주시면 됩니다. 발라드와 스케르초 살라베르 판은 제가 좀 난삽하게 쓴 터라 메모한 거 다 지우개로 지워 주시고요. 에키에르 판과 살라베르 판을 비교하면서 만든 노트 복사도 좀 해 주시고요. 알프레드 코르토가 쇼팽을 연구하면서 쓴 논문도 복사 부탁드리고요. 그리고 어제 도착한 새 판본 제본 작업도 부탁드리고요…….”
환한 얼굴로 들어온 김우진 실장의 표정이 점점 웃는 상으로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즐기던 나는, 느긋하게 막타를 꽂았다.
“아, 맞다. 겸사겸사 청소도 좀 부탁드려요.”
그렇게 매니저와의 첫 만남을 마친 나는, 수현 선배가 입시미술을 준비 중인 연습실을 방문했다.
“아이스티 배달 왔습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김리듬 아냐?”
선배는 얼굴에 물감이 묻은 얼굴과.
여름 태양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정말 잘 왔어! 마침 딱 아이스티가 땡기는 시간대였거든! 어떻게 알았지?”
“감이죠.”
웃음이 난다.
처음 만났을 때 그 해프닝이 떠올라서.
“하아. ‘디센스’ 3인방이었을 때가 그립네요.”
“나도 그리워. 그때는 거칠 게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소영 선배는 잘 지내요?”
“아, 너어무 잘 지내지.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아하하하.”
“맞다. 드디어 때가 왔군.”
“네.”
“후후후. 기대하시라, 김리듬.”
자신의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는 그녀의 눈빛이 광소로 물들었다.
“네 덕에 완성한 내 역작을, 드디어 너에게 직접 보여 줄 때가 왔단 말이닷! 아하하하핫!”
“역작이요?”
“응. 바로, 네 연주를 듣고 완성한 역작.”
그녀가 캔버스를 덮은 천을 치우는 순간.
마침내, 그녀가 자신하는 역작이.
우리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점과, 선과, 면과, 색채의 축제가.
내가 상상하고, 표현하던 ≪페트루슈카≫의 모습이.
캔버스 1호라는 규격 안에, 전부 다 들어가 있었다.
[이야, 남수현 생각보다 인재네. 맨날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녀서 이 정도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 마에 선생님.
그녀는 얼굴에 물감이 묻은 얼굴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전부 네 덕이야, 김리듬.”
나는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감상했다.
모든 것이 만져질 듯 생생하다.
손가락부터 천천히 물감이 묻어.
마침내, 온몸이 물들어 버리는 그런 환상이.
캔버스를 뚫고 사방으로 퍼진다.
환상에서 눈을 돌려 보니.
수현 선배의 웃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 맞다. 김리듬, 이제 다음 달이면 박지수 콩쿠르가 있거든?”
“네. 알고 있어요.”
다음 달인 7월이면, 신혜경 선생님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혜경 콩쿠르가 막을 올린다.
지수는 그 콩쿠르에 참가하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
“학교 신문에 지수 기사를 올릴 예정인데, 그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내가 찍거든. 연습하는 사진으로 말이지. 시간 남으면 구경 한번 와.”
“네. 시간 나면 갈게요.”
“아, 맞다! 우리 김리듬 많이 바쁘지? 못 오는 거 아냐?”
“아니거든요? 시간 낼 거거든요?”
은근히, 아니, 대놓고 비꼬는 말투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가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