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19
19화. 반짝이는 자, 반짝이게 하는 자 (2)
하지만, 진짜 사건은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전수정을 한번 만나 봐라, 김리듬.”
나는 불쑥 찾아와서는 대뜸 맥락도 없고 의도도 불분명한 이 말을 던진 임지호 때문에 숟가락을 들다 말고 몇 초를 정지해 있었다.
아니, 밥 먹다 뜬금없이 갑자기 뭔 소리야?
라고 묻기 직전에, 녀석은 뒷말을 덧붙였다.
“그쪽에서 너를 먼저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그래.”
“왜?”
지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답했다.
“김리듬. 너는 나처럼 별의 순간을 만들 줄 아는 재능이 있는 녀석이다.”
이 녀석이 하도 별의 순간, 별의 순간 해 대서, 나도 그 단어를 검색해 본 적이 있다.
Eine Sternstunde.
아이네 슈테른슈툰데.
독일어를 직역하면 ‘별의 순간.’
의역하면, ‘운명적인 순간.’
“그러니, 나는 네가 음악가에게 필수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다.”
아니, 맞는 말이기는 한데요.
부연 설명 좀 붙이면서 대화하시라고요, 임지호 씨.
“전수정은 너를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다.”
“아니, 잠시만. 무슨 스폰서야? 그리고, 학생이 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어쨌든, 한번 만나 봐라. 너한테 도움이 될 테니.”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그럴 이유는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걔가 누군지도 몰라. 같이 연주를 해 본 적도 없어. 그런 애를 무턱대고 만날 수는 없고, 만난다고 해도 그런 지원을 무턱대고 받을 수도 없어.”
지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답했다.
적어도, 내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전수정은 사람을 능력치로만 평가한다. 그러니 네 능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해라.”
그 순간.
드르륵, 하고 교실 문이 열리고.
“이 반에 김리듬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누군지 나한테 알려 줄 사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왠지 이름도 얼굴도 알 것 같은 이 묘한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어쨌거나, 그녀의 등장에 우리 반 애들 중 절반 이상이 나를 바라보거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 마침 임지호도 같이 있네.”
그녀는, 뒤에 대동한 건장한 남학생과 함께 내게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바로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응시하는 사람을 스캔하는 듯한, 아니 판독해서 가치를 매기는 듯한 눈빛이 참 인상적인 여자아이였다.
“네가 김리듬이지?”
“맞아. 그런데 누구세요?”
“아, 소개가 늦었네. 같이 따라온 애는 서강준이고, 내가 바로 전수정이야.”
자기소개가 참 당당하시네요.
한편, 같이 따라온 건장한 남학생은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비실해 보이는데. 나는 솔직히 아직도 의문이야, 전수정. 얘가 잘할 수 있을까?”
“그거야 테스트를 해보면 알지.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속눈썹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몸을 끌어당겨서는, 내 신상 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김리듬. 희성예고 피아노과 1학년생. 피아노는 여섯 살 때부터 시작했고,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음. 예중 때는 최하위권의 성적이었고, 희성예고 입학 성적도 최하위권이었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 전공 실기 때부터.”
“이거 불법 아냐? 내 신상 정보를…….”
“걱정하지 마. 전부 다 합법적으로 알아낸 거니까.”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덧붙이며 대답했다.
“어쨌든,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별거 아니야. 김리듬, 나는 너를 지원해서 이익을 창출하고 싶어.”
이렇게 자본주의적인 말로 접근해 오는 경우는 17년을 살면서 처음인지라,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거절한다면?”
“아르바이트, 그만하고 싶지 않아?”
와, 이건 상상도 못 했네.
이민아를 빼면 아무도 모르고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를, 이렇게 쉽게 들킬 줄은.
“아, 걱정 마. 나는 지금 너의 성장세를 감안할 때, 음악과 연습에 더 집중해야 할 시간에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흘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니까.”
“남의 뒷조사부터 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만은 않아 보이는데.”
“하지만, 그 아르바이트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지금 돈으로 나를 유혹하겠다는 건가?
“잘만 하면, 앞으로 3년 동안 네가 우리 회사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게 해 줄 수도 있어.”
내가 이런 수법에 넘어갈 인간으로 보이나!
“일단, 들어 보기나 하자.”
네.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나는 자본주의적인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말이닷!
“물론, 본격적인 제안을 하기 전에 간단한 테스트부터 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무엇을?”
“자, 지금부터 나와 여기 서강준의 인상착의만 보고 우리가 어떤 악기를 다룰지 맞혀 봐.”
당황스러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호른을 불지?”
“오호라. 어떻게 알았어?”
“입술이 약간 텄다가 아문 흔적. 호른 연주자들에게 자주 보이는 흔적이지. 그리고 그 옆은 트럼펫이지?”
“야. 설마 너도 내 입술 보고 알…….”
“호른하고 붙어 다니니까 트럼펫이겠지, 뭐.”
나는 내 옆에 있는 정윤성의 능력에.
임지호가 방금 해 준 조언을 조합했다.
‘전수정은 사람을 능력치로만 평가한다. 그러니 네 능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해라.’
그녀는 한층 흥미가 강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지호한테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이라도 들었나 보네?”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좋아. 일단 최소한의 투자 가치는 있는 것으로 판단하겠어.”
내가 무슨 우량주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은 참고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3년 전액 장학금’이라는 조건은 내게 너무 매력 있는 제안이었으니까.
나는 어느새 내 목을 잠식해 오는 갈증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고, 아침에 결명자차를 담아 온 텀블러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그래서. 내게 투자해서 얻으려는 게 뭐야? 같이 듀오라도 하려고?”
“너라는 상품을 구매해서 잘 포장한 다음에, 좋은 곳에 좋은 가격으로 내다 팔면 금상첨화지.”
“푸우우우욱! 쿨룩, 쿨룩!”
나는 그만 마시던 결명자차를 옆에 있던 서강준의 얼굴에 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서강준이라서 다행이지.
전수정 얼굴에 뱉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니, 미친! 이게 무슨 짓이야!”
“콜록, 콜록! 미안, 미안……. 지금 뭐라고?”
내가 봉변당한 서강준에게 내 손수건을 건네는 동안, 사건의 주범이자 원흉인 전수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라는 상품을 잘 포장할 생각이라니까. 그 말이 꺼림칙하면, 업그레이드를 시킨다고 해도 되겠지.”
와, 정말 이 양반, 이민아나 임지호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 놀라게 하는 분이시네.
하지만, 그녀는 1타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 다른 의미로 프로다웠다.
“우리 아버지는 동아악기를 계열사로 가지고 있는 동아그룹의 회장이야.”
“뭐? 정말이야?”
“재능 있는 연주가들을 포섭해서, 우리 회사의 악기를 쓰게 만들어라. 우리 아버지의 사명이자, 나의 목표이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동아그룹의 회장 이름이, 전 씨 어쩌고…….
“어제 네 버스킹 실력은 꽤 인상적이었어. 내가 잠시 해외 출장을 나가 있던 사이에 우리 김 팀장님이 학교에서 너라는 묻힌 인재를 발굴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이래서 김 팀장님은 신뢰가 간다니까.”
아니,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네?
어제 김우진 팀장과의 만남이, 순식간에 여기까지 직보가 되었다고?
“좋은 평가 고마워. 그런데, 해외 출장이라니?”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향 연구 때문에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 다녀왔거든. 아버지 지시도 수행하고.”
동아그룹의 회장 딸이라더니.
정말, 사는 룰이 다르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런데 네 피아노 연주, 정말 특이하더라.”
“어땠어?”
“피아노로 듣는 오케스트라 연주 같았어.”
그녀는, 내 뒤의 정윤성을 꿰뚫어 보는 듯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너의 어제 연주는, 마치 오케스트라 같은 다채로움을 지니고 있었어. 아직 조금 미숙한 기교로 말이지.”
‘미숙한 기교’ 같은 단어만 뺐으면 백배는 기분 좋았을 평이지만, 어쨌거나 그녀도 내 연주를 호평한다.
뭔가, 내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삶의 궤적이 변하는 기분이 든다.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기준을 만족한다면 우리 동아그룹의 장학금을 네게 지원해 주고, 원하는 대학 추천서까지 받아 줄 수도 있어. 물론 불법 지원은 아니야.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지원은 고마운데, 한 가지만 묻자.”
“뭐든지.”
“굳이 나를 집어서 지원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우리 학교에는 나 말고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많잖아.”
전수정의 입가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몄다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 우리 학교 출신 음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 그 목록 중에는 피아니스트도 있고.”
“오케스트라?”
“이미 지휘자 후보도 추리는 중이야.”
“그렇다는 건,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야.”
전수정의 항상 긴장되어 있던 입가에, 처음으로 당찬 미소가 지어졌다.
“김리듬. 나는 내가 추진할 피아니스트 오디션의 후보로 네가 입후보하는 걸 권하고 싶어.”
“어째서?”
“내가 판단하기에, 너는 그 누구보다 높게 올라갈 포텐이 보이거든.”
“그 짧은 시간에,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당연하지.”
자부심을 넘어선 오만함.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그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세계적인 분석가에게 네 연주 영상을 분석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네 연주 테크닉, 네 분석력, 네 음악 이해력, 네 음감, 네 청음. 이 모든 것들을 말이야.”
꺼림칙함을 넘어, 조금 소름이 끼쳤다.
“뭐, 나도 바로 결정하라는 얘기는 아니야. 어쨌거나, 넌 지금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아직 ‘주목만’ 받는 단계고, 나도 성급하게 결정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그녀는, ‘하지만’에 강세를 주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추진할 피아니스트 오디션 후보에 오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생각해 봐. 그러면, 이만 가 볼게.”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어섰고.
서강준은 내게 손수건을 반쯤 던지듯 돌려주고는 그대로 전수정을 따라가 버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심각하고 시끄러워야 할 양반이 왜 이리 조용한 건지…….
[야. 김리듬.]“왜요. 정마에.”
역시, 그냥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방금 전에 온 전수정하고 서강준. 둘이 아주 깨가 쏟아지지 않아?]“네?”
아니, 지금 뭐라고?
저 둘이 깨가 쏟아진다고?
당신 뭐 잘못 먹었어?
깨가 쏟아져? 저게?
아주 이혼 소송도 깨가 쏟아진다고 하지? 어?
“그것보다 정마에. 다른 건 궁금하지 않아요?”
[응? 뭐가?]“아니. 방금 전 전수정이요. 대뜸 찾아와서는 나한테 장학금을 넘어서 피아니스트 오디션 입후보 제안을 해 왔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뭐 하실 말씀 없습니까?”
[내가 딱히 무슨 말을 해? 저거 받으라고?]“나를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를 시키고 싶어 했잖아요. 아니에요?”
[이봐, 김리듬.]그는,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보통 저런 건 말이야, 아주 근사한 플레이팅을 해 놓고 음식 속에 독을 숨겨 넣거나…….]“넣거나?”
[아니면, 아주 골치 아픈 문제를 숨겨 놓고 너한테 떠넘기려는 꿍꿍이속일 가능성이 없어.]지금 그런…… 아니, 잠깐만. 뭐라고?
뭐가 없다고?
“뭐가 없다고요, 지금?”
[받으라고. 장학금도, 그리고 피아니스트 오디션 제안도. 이런 기회가 왔는데, 그냥 걷어찰 생각이야?]“말에 페이크 치지 마시죠, 망령 양반?”
[그런데, 궁금하기는 하네.]“뭐가요?”
[저 애가 아무리 대기업 회장의 딸내미라고 해도, 저렇게 자신 있게 오케스트라 창단을 얘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어.]“뭐가 필요한데요?”
정윤성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