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새로운 도전을 위해 (3)
“[쇼팽의 녹턴 13번 C단조, 작품번호 48의 1번.]”
김리듬이 쇼팽 콩쿠르에 도전장을 내민 곡은.
연주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적인 곡이었다.
“[그러면, 어디 들어 볼까요?]”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영광스럽지만 지루한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은 미국의 피아니스트 낸시 그레이엄은.
옆자리에 앉은 인물의 상태를 보고 놀랐다.
“[마에스트로.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어요?]”
“[쉿. 연주에 집중합시다.]”
에밀리오 아르날디.
과거 1960년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이자.
‘프랑스의 필리프 로제, 이탈리아의 에밀리오 아르날디’라는 평가까지 받는 피아니즘의 양대 산맥.
하지만, 연주만큼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해.
콩쿠르 심사위원 초청을 받아도 심사보다는 숙면이나 레스토랑 방문을 더 우선시하거나.
자기가 마음에 드는 연주가의 연주에는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0점을 주는 등 상식을 파괴하는 기행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애초에 심사위원으로 모시면 안 될 양반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는데.
‘그런 양반이 예선 연주에 집중을?’
낸시는, 자신도 모르게 연주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런데, 이 소년의 연주는 대체……?’
상상 이상의 도발적인 연주에.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이미 다른 심사위원들도 자세를 고쳐 잡고 이 무명의 연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잿빛의 마법…….]”
앳된 소년의 연주가.
피아노의 음으로 마법을 건다.
앳된 소년의 연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황혼을 가려 버린 잿빛의 마법을.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의 음악.’
파리에 머무르던 쇼팽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 들어간 순간의 경험과 감정을, 남김없이 녹여 낸 회색의 음악.
‘환희도, 황혼도 없는 음울한 음악이지만.’
아니, 그런 음울한 음악이기에.
기교에만 치중하는 젊은 연주가들은.
거의 대부분 ‘실패’를 겪는 곡인데.
‘마치, 하나 이상의 생을 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녹여 내고 있다.
그냥 잘하는 아이의 연주로만 생각해서 듣기 시작하던 심사위원들은, 어느새 홀린 듯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잿빛의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송가.’
이런 황혼의 순간을 빚어 내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쇼팽에게 선택받지 않고는.
아니, 쇼팽에게 사랑받지 않고는.
저런 연주를 완성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 얌전한 연주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얌전한 척하고.
미묘한 다이내믹에 집중하는 듯하지만.
핑거링도, 루바토도, 템포도, 선율선 처리도.
모두 정해진 ‘규범’을 한참 벗어난.
‘굉장히 불온한 연주다.’
파고들면 들수록 깊게 느껴진다.
이 앳된 소년의 연주는.
방금 전에 들었던 천재들의 연주보다.
한층 더 도발적인 연주다.
마치,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을, 평가하는 듯한 연주다.’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한 심사위원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연주를 떨어뜨릴 겁니다.]”
러시아 출신의 미하일 네차예프의 말이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역시 1976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자.
화려하고 장엄한 연주 실력 못지않게.
좋지 않은 뒷소문으로 유명한.
‘레드 마피아’라는 별명을 가진 피아니스트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 연주를 무슨 일이 있어도 올릴 수 있게 노력해야겠군요.]”
다른 심사위원들은 물론이고.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밝힌 네차예프조차.
그 의견을 밝힌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젊은 시절의 형형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에밀리오 아르날디가 처음으로 의견을 밝혔으니까.
하지만, 네차예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서커스 같은 연주를 바르샤바 예선에 올리면, 콩쿠르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연주 좋기만 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인지.]”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하는 사이.
다른 심사위원들도, 차례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주 확실히 좋기는 좋네요. 특히 중간부 송가 처리는 정말 탁월해요.]”
“[하지만 의문스러운 구절도 적지 않아요. 가령 반음계 처리라든가, 너무 독창적이려고 애쓰다가 독단의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엄숙하고 무거우며 진지하기만 하던 쇼팽 콩쿠르 예선 심사에, 갑자기 활기가 붙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렇게 탁월한 재주를 가진 아이를 떨어뜨린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좀 막 나가는 연주이기는 해요. 핑거링도 그렇고, 루바토도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방법이에요.]”
“[그게 바로 독창적인 해석이죠.]”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이처럼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는 예선 연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논쟁이 진행될수록.
“[그래요. 틀에 박힌 연주들만 듣는 건 이제 지겹습니다. 이 연주처럼, 약간의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연주도 본선 무대에 올려 주어야죠.]”
점점, 김리듬의 연주에 호의적인 심사위원이 늘기 시작했다.
낸시 그레이엄은 에밀리오 아르날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마에스트로께서 의견 정리를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한마디 하시죠.]”
다시 잠들 준비를 하고 있던 최고령 심사위원 에밀리오 아르날디는, 옆자리에 앉은 낸시 그레이엄의 연이은 재촉에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목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딱, 두 마디만 하겠습니다.]”
열변을 토하던 심사위원들이.
심지어, 네차예프조차.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이 연주는 합격입니다. 반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마에스트로 아르날디!]”
“[이제 다들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랜만에 바르샤바에 오니 ‘피에로기(폴란드식 만두)’나 한 접시 하고 싶구려.]”
그렇게, 벙찐 나머지 심사위원들을 남겨놓은 채 마에스트로 에밀리오 아르날디는 자리를 떴다.
당연히, 나머지 심사위원들은 혼돈 상태였다.
“[낸시. 가서 좀 말려요.]”
“[내가 어떻게 말려요?]”
“[아니, 최소한 그럴듯한 의견은 만들어서 제출해야 할 거 아니에요! 당장 붙들어서 데려와요!]”
“[잠시만요.]”
낸시는 옆자리 심사위원을 제지시킨 후, 마에스트로 아르날디가 남겨 놓고 간 의견서를 살폈다.
황당할 정도로 짧고 간단한 발언과는 전혀 다른.
아주 길고 유려한.
그러면서도 정교하고 냉혹한.
DVD 예선 연주들에 대한 평가서가.
거기 빼곡이 적혀 있었다.
‘자는 척하면서 이미 다 써 놓은 거였어?’
역시, 거장이 괜히 거장이 아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마에스트로 아르날디는 이미 예선 통과자 명단을 다 작성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낸시, 당신 의견은 어때요?]”
“[제 의견이라…….]”
그녀는, 이제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일단, 좀 당황스러웠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역시 그렇죠?]”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저 녹턴 연주를 앞으로도 계속 듣고 싶어요.]”
합격으로 중론이 넘어가는.
마지막 한 방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예선은 아시아 쪽 피아니스트들이 약진을 넘어 침공을 해 오는군요. 이거 참…….]”
“[원래 쇼팽 콩쿠르가 그렇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예전에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이 쇼팽 콩쿠르를 지배하다시피 했지만…….]”
낸시 그레이엄은, 그 말을 하면서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인 네차예프를 한번 슥 바라보고는 하려던 말을 끝맺었다.
“[세상은 항상 변하는 법이니까요.]”
* * *
나는 지금.
뜬 눈으로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긴장된다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나.
커피를 마셔도 맛을 모르고.
밥을 먹으면 모래를 씹는 듯한.
그런 기분?
[김리듬. 너 요즘 다크서클이 좀 짙다?]“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정 마에 선생님.”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별일 없었지만, 유럽은 얼마 전까지 전염병으로 홍역을 제대로 치렀다.
그래서,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라는 대사건이 아니고는 변경되지 않던 쇼팽 콩쿠르 일정마저 대폭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3월에 치를 DVD 예선을 한 해 앞당긴 10월에 치른 것이다.
“그래도 전염병이 점점 잦아드는 추세라 다행이네요. 내년 본선은 무리 없이 치를 수 있겠죠?”
[그거야 지켜봐야 아는 거지.]그 순간.
뭐 해, 라는 소리와 함께 민아의 톡이 울렸다.
[민아는 결과를 받은 모양이네. 너도 확인해 봐라.]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결과 창을 눌렀다.
DVD 예선을 통과한 160명의 명단 중.
내 이름, Rhythm Kim은…….
[여기 있다.]있다.
내 이름, Rhythm Kim이.
합격자 명단에 있다.
나는 멍하니 그 이름을 보다가.
윤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통과, 맞죠?”
[그래. 이제는 바르샤바 예선이다.]“통과죠? 정말이죠? 통과죠?”
[그래, 김리듬.]나를 내려다보는 윤성의 눈동자에는, 이제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네가, 너의 연주로 일면식도 없는 저 콧대 높은 심사위원들을 설득한 거야. 그들의 인정을 받은 거…….]“흐윽…… 흐흐윽…….”
[김리듬! 왜 울어?]“너무 좋아서요…… 흐윽…….”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참기 힘들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오버랩되는 것도 있지만.
이 짧고 간결한 이름을 여기 새기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반복했던가.
[김리듬. 진정 좀 해.]“후우. 다 울었어요.”
[아직 덜 운 거 아냐?]“아니거든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내 시야에 비친 것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는 윤성이었다.
“하아. 이제 진정이 됐으니 민아한테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어. 나야.”
― 김리듬. 너 설마 울었어?
“어, 아, 아니.”
― 아니긴. 예선 통과에 너무 감동받았구나?
“그러는 너는?”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당연히 합격이지.
“오, 좋아. 그러면, 우리 이 기쁨을 자축…….”
― 아니, 자축은 조금 나중에. 지금은, 연습을 해야 할 시간인 것 같아서 말이지.
“…….”
전화가 끊겼고, 나는 다시 뚝 떨어진 표정을 한 채 새카매진 화면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표정을 면밀하게 관찰하던 윤성이 물었다.
[김리듬. 조울증이니?]“음악 연주에 몰입하면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아닌 것 같은데.]“그건 그렇고, 정 마에 선생님.”
[왜.]“제 경쟁자가 될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지금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글쎄다. 직접 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너보다는 태연하지 않을까?]“큭!”
[너무 좌절하지 말고. 보통 이런 중요한 무대를 통과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반응은, 크게 네 가지 성격으로 갈리지.]“오. 마에스트로 정윤성의 피아니스트 유형 분석이에요?”
[그렇다고 치자. 첫 번째는…….]나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는, 바로 유아독존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