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06
206화. 파리의 예고생 (1)
운영 선배는 인천공항 2터미널 앞에 나를 내려 주면서 캐리어까지 친절히 빼 주었다.
“그러면 잘 다녀와, 김리듬.”
“고마워요, 선배.”
공항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손짓하는 민아가 보인다.
“김리듬! 여기야!”
그녀의 곁에는 어머니도 있었다.
나는 웃으며 민아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어?”
“정확히 10분 기다렸지.”
“미안. 그러면, 엄마.”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어머니는 바로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잘 다녀오렴.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그럴게요, 엄마.”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이제 출국 수속 해야지.”
수화물을 넘기고.
출국 수속을 밟기 시작하는 순간.
“김리듬! 김리듬!”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정선율……?”
내 앞까지 급히 달려온 녀석은.
숨을 고르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벽이며.”
아, 이 말.
기억이 난다.
작년, 바로 이맘때.
내가 이 녀석에게 건네준 말이니까.
나는 미소 지으며 녀석에게 화답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약대가 되어 준다.”
“역시. 기억하고 있네?”
“당연하지.”
내가 너에게 건네주었던 말을.
내 자신이 잊어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쪽팔린 일일 테니까.
“잘 다녀와.”
“고마워.”
나는, 녀석의 주먹에 내 주먹을 맞댄 후.
마침내 게이트를 넘어.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 * *
파리에 도착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와 민아가 투룸을 잡은 곳은.
파리 남쪽 교외의 빌레쥐프라는 지역이었다.
서울로 치면 성남 정도의 위치인 곳.
그곳에서 시작된 우리의 파리 생활은.
“젠장할! 바퀴벌레가!”
“원래 파리 투룸이 바퀴벌레가 좀 많지.”
“태연한 말 그만하고 빨리 잡아!”
아주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나는 아침부터 바퀴벌레를 잡느라 파김치가 되었지만, 민아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악보만 보고 있었다.
“아후. 머리가 가려워 죽겠네. 어떻게 감으면 감을수록 떡이 지는 느낌이지?”
“원래 파리 물이 그래. 석회수라.”
“피부도 거칠거칠한 느낌이야.”
“그러니까, 내가 쓰는 세안팩 같이 쓰자고 했잖아.”
“아니. 그것만큼은 사양할게.”
이 모든 사태에도.
민아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김리듬 네 악보는 이상할 정도로 늦네. 원래 이 정도면 도착하고도 남는데.”
“항공사에 다시 문의하려고. 망할 에어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나는 파리에 대한 환상 대부분을 버렸다.
‘그러고 보니, 희재 선배도 전화로 그랬었지.’
이왕 파리에 갈 생각이라면.
모든 환상은 한국에 두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충격이 좀 심할 테니까.
‘라고 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 * *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최대한 시간을 내서 파리의 공연들을 보고 다니려고 했다.
그. 러. 나.
― [안내방송 드립니다. 본 지하철 7호선은 이 역에서 잠시 정지할 예정입니다…….]
‘왜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지?’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여기서 내려서 뛰지 않으면.
오늘 연주회를 들을 수 없다.
“와! 살르 플레옐!”
살르 플레옐.
오페라 극장을 겸하는 파리의 많은 오케스트라 홀과는 달리, 처음부터 콘서트 전용으로 지어진 공연장.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좋냐, 김리듬? 눈이 반짝반짝하네.]“당연하죠. 제 소원 중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홀’ 도장 깨기도 있었는데…….”
[와, 진짜 응원하고 싶지 않은 도장 깨기다.]그리고, 마침내 연주가 시작된다.
파리의 소리는 다르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정말…….
[정말 최악이네.]슬프게도, 사실이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파리 오케스트라의 장점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이건 프로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아니야!’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쩌다 세계적인 파리 오케스트라가.
이 정도까지 무너졌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파리의 ‘진짜’ 현실이지.]윤성은 냉정한 표정으로,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오케스트라를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창설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움직인 정부, 오직 돈만 보고 온 후 1년 만에 떠나 버린 책임감 없는 지휘자들, 아무런 동기 부여를 못 받는 단원들까지. 파리 오케스트라는 태생부터 문제였고, 이제 그 문제가 고질이 되어 어느 누구도 쉽게 고치지 못해. ‘그’ 뉴욕 필보다 심하지.]“동기 부여가 싹 사라지네요.”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마라. 머지않아, 제대로 된 파리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으러 갈 테니.]* * *
다음 날 저녁.
나는, 파리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의 공연을 보러 출발했다.
[어이, 김리듬. 내가 파리 생활에 대한 조언 하나 해 줄까?]‘뭐요.’
[밖에서 물 많이 마시지 마라. 파리는 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화장실 찾기 힘드니까.]‘…….’
내 마지막 환상까지 잘게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버리는 윤성의 냉혹한 한마디였다.
‘커피의 이뇨 작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휴먼.’
그리고, 마침내.
민아와 윤성이 번갈아 경고한.
그 위기가 오고야 만다.
‘화장실!’
아무리 찾아도.
파리에는 화장실이 없다.
이 추운 계절에, 내 등은 이미 식은땀 범벅이었다.
내게 손짓하며 따라오라는 금발 청년.
‘정 마에 선생님.’
[당장 따라가.]‘아니, 따라가고는 싶은데, 혹시 저를 납치하려는 그런 건 아닐…….’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따라가기나 해.]그를 따라간 곳에는.
놀랍게도, 금속 재질의 공용 화장실이 있었다.
“실 부 플레(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금발 청년은.
그렇게 나를 화장실로 안내한 후, 사라졌다.
잠시만,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는데……?
“Pardon(잠시만)……!”
하지만.
그는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 마에 선생님.”
[응?]“대체 누구였을까요, 방금 전 그 청년은.”
[그러게나 말이다. 분명히 낯이 익은데.]* * *
그렇게 낯선 청년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후 어제와 같은 살르 플레옐에 도착한 나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공연을 기다렸다.
‘느낌이 다르다.’
분명히 같은 공간인데.
다른 오케스트라가 공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일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멋지고, 우아한,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정수를 아직도 간직한 오케스트라지.]게다가, 이 프랑스의 근사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오늘의 지휘자는 바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 도이치.’
그야말로, 프랑스와 독일의 근사한 융합이다.
[레퍼토리도 기가 막히네. 라벨의 ≪볼레로≫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까지.]박수갈채를 받으며 포디엄에 올라선 그가, 콘서트마스터에게 눈짓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즐거운 음악을 시작해 볼까요?’
그리고,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는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
마법은, 작은북의 리듬에 실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시작한다.
연주가로서의 직업병이 있는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딱 둘이다.
‘작은북 고생하세요. 앞으로 700번입니다.’
이게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과연 마에스트로 도이치는, 이 연주를 리허설 하면서 작은북을 얼마나 쥐 잡듯이 잡아 댔을까?’
≪볼레로≫는 작은북이 정말 힘든 곡이다.
똑같은 리듬을 700번 쳐야 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밑바닥까지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으면.
반드시 연주가 흐트러진다.
‘그리고, 그 작은북이 제시하는 기본 리듬 위에 악기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하니까.’
낮게 깔리는 작은북 리듬 위에 악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어온다.
‘자. 이제부터 기억력 테스트 시간입니다. 제가 순서를 알려 드릴 테니 잘 기억하세요.’
처음은 플루트 독주. (볼륨 15)
그다음은 클라리넷 독주. (볼륨 20)
그다음은 바순 독주. (볼륨 25)
그다음은 피콜로클라리넷 독주. (볼륨 30)
그다음은 오보에 다모레 독주. (볼륨 35)
그다음은 플루트와 약음기 낀 트럼펫. (볼륨 40)
그다음은 테너 색소폰 독주. (볼륨 45)
그다음은 소프라니노색소폰 독주. (볼륨 50)
그다음은 호른, 피콜로, 첼레스타. (볼륨 55)
‘보통은 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하지.’
그다음은 오보에, 오보에 다모레, 코랑글레, 클라리넷. (볼륨 60)
그다음은 트롬본 독주. (볼륨 65)
그다음은 바순을 뺀 목관악기 전원. (볼륨 70)
그다음은 피콜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1바이올린. (볼륨 75)
‘자, 헷갈리죠? 하지만 계속 갑니다. 긴장하세요.’
위의 메뉴에 코랑글레, 테너색소폰, 2바이올린 추가요! (볼륨 80)
‘자, 그다음은 클라리넷, 바순 빠지고! 트럼펫! 바이올린 전원 들어와! 볼륨은 85!’
웬만한 멀티태스킹 고수도.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까.
‘다음은 바순, 소프라니노색소폰, 트롬본 빠진 관악기 전원! 트롬본, 더블베이스 뺀 현악기 전원! 볼륨 90!’
이쯤 되면 똑같은 리듬을 600회 쳐 낸 작은북 연주자 표정이 돌덩이가 되어 있다.
‘다음은 피콜로, 플루트, 피콜로트럼펫, 트럼펫, 소프라니노색소폰, 테너색소폰, 1바이올린! 볼륨 95!’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힘을 내!
‘마지막! 여기서 트롬본 추가요! 다들 풀볼륨으로!’
악기 하나하나가 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물 한 방울의 응집력은 약하지만.
물이 뭉치면 흐르기 시작한다.
기세를 타고 계속 다른 물방울을 끌어모은다.
실개천이 냇물이 되고, 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대하가 되고, 대하가 격류가 되어서는─
쾅 콰콰콰 쾅 콰콰콰 쾅 쾅 쾅 콰콰콰 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둑을 무너뜨린다.
해일이 되어 마음의 벽을 쓸어 버린다.
콰콰과─ 콰과과과과과쾅!
“우와아아! 브라보오!”
이게 바로 볼레롭니다.
[기가 막히네, 그렇지?]“그러게요.”
하지만, 아직 메인 디시가 남았다.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태산준령 같은 난코스가 끝없이 이어지는.
슈트라우스가 쓴 가장 거대한 관현악곡.
[이 장대한 교향곡은, 일출 이전의 새벽 어둠에 잠긴 마터호른의 모습에서 시작하지.]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마침내, 찬란한 일출이 나타난다.
풀이 덮인 듯 만 듯한 황무지 한가운데에.
우뚝 선 마터호른의 모습이 보인다.
구름이 커튼처럼 산 중턱부터 위를 완전히 가리고.
거기서 안개비가 무채색으로 뿌려진다.
‘만년설을 들이켜는 느낌이야.’
목가적인 정경과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마침내, 나는 정상에 선다.
바닥을 제외하면, 오직 하늘과 나뿐인 세상에.
[수억 년의 음악이야.]‘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믿을 수 없는 확률을 통해 이 행성이라는 낙원에 태어난 우리가, 수억 년 동안 융기하고, 용출하고, 침강하고, 풍화되면서 만들어진 산악을 발견한 끝에 마침내 얻어 낸 음악이야. 그런 수억 년의 음악을 연주하는 게, 어떻게 쉬울 수 있겠니.]정윤성이라는 귀신은.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감동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중에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로 돌아가게 되면 애들을 좀 더 갈궈야지 않겠어? 조인트를 까서라도 어떻게든 이런 음악을 만들어야지.]‘닥치고 음악 감상이나 하세요, 정 마에 선생님.’
바로 이렇게 김을 빼 버려서 문제지.
‘좋아. 이제 곧 폭풍우 장면이군.’
벼락과 뇌우가 알프스를 집어삼킨다.
자연의 힘이, 인간의 나약함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마침내, 벼락을 맞은 마터호른의 꼭대기가 부서지면서, 가공할 산사태를 일으킨다.
[때린다. 부순다. 무너져 버린다.]폭풍우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다시 돌아오지만.
이제 해는 서녘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준엄한 알프스는,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대한 마터호른의 장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몰 속으로,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며.
완벽한 수미상관의 음악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