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파리의 예고생 (4)
아직 전화를 끊지 않은 전수정은, 내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생각을 단호하게 자르듯 말을 이었다.
― 그런 김에, 최근에 찾은 크리스 커틴슨의 연주를 보내 줄게.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응. 고마워.”
나는 투룸에 도착하자마자, 전수정이 내게 보내 준 크리스 커틴슨의 연주를 틀었다.
[이거, 정말 의외인데.]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그의 연주는 정교하면서도 좀 딱딱한 전형적인 ‘콩쿠르 스타일’인데.
[자기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었군.]마치, 변증법의 원칙처럼.
정(正)에 반(反)을 합쳐서 합(合)을 도출하듯.
‘진짜 희한한 스타일이다.’
독특하고, 톡톡 튀면서도.
유치한 듯 유치하지 않은.
정말, 맛깔나는 연주다.
[어쨌거나, 긍정적으로 바뀌기는 했네.]“경쟁자가 늘…… 아, 아니에요.”
[그래. 경쟁자가 하나 늘기는 했지. 하지만, 어쨌거나 네 연주가 사람 하나 또 살린 거 아니겠니.]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 마에 선생님.”
[응?]“이왕 이렇게 된 거, 크리스 커틴슨을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직 미완성인 네 과제들을, 크리스 커틴슨을 이용해서 완성해 보자고?]“바로 그거죠!”
나는 윤성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 타인의 시각으로 연주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그가 아닌가.
하지만.
[한번 해 봐.]그는 맥 빠질 정도로 쉽게 내 제안을 승인했다.
* * *
정작, 문제는 크리스 커틴슨 본인이었다.
“[미안해, 리듬 킴. 정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프지만, 나는 이제 너와 함께할 수 없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저기, 어째서?]”
“[이제부터 나는, 스페인에서 열리는 에두아르도 산체스 콩쿠르에 참석해야 하거든.]”
아, 산체스 좋지.
나도 참 좋아하는, 스페인의 명 피아니스트…….
“[그러면 리듬 킴! 내 행운을 빌어 줘! 반드시 우승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그는 허망하게 떠나갔고.
[어휴, 도움이 안 되네, 도움이 안 돼.]나는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 * *
민아와 같이 파리에 온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녀는 피아노에 앉아 자신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끝까지 연주했고.
“후우.”
“수고했어. 여기 물.”
연주를 마친 후, 나를 올려다보았다.
감상평을 밝히라는 뜻이다.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다.
‘비평하기 싫은데.’
깐깐하게 지적하면, 연습한다고 잠을 안 자고.
그렇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고 하면, 나를 들들 볶아 댄다.
덜컹.
다행히도, 바게트 봉지를 품에 안은 황정희 선생님이 투룸에 들어오면서 고심의 시간도 끝이 났다.
“자, 오늘의 양식이야. 다들 받아.”
“우와. 바게트! 감사합니다!”
“하아. 선생니임.”
“어째서 김빠진 느낌이 드는데, 민아야?”
“빵만 한 달을 먹으려니 적응이 힘들어서요.”
“그래도 적응해야지. 그런데, 예전 연주 여행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 잘 적응했던 것 같은데?”
“그때야, 이것만 끝내면 한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리듬 군이 곁에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아.”
“하하하.”
그녀는 커피포트로 시선을 돌리고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는 좀 줄이는 게 어떠니, 민아야?”
“전 커피 못 마시면 죽어요, 선생님.”
원래 피아니스트라는 인종들이 상식과 조금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민아는 그중에서도 참 별나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너희들에게 의뢰할 일이 있어.”
“무슨 의뢰요, 선생님?”
“응. 리사이틀 대타를 뛰어야 한단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본 후.
바로 황정희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둘 중에 누가 대타를 뛰고 싶니?”
“저요!”
“저요!”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제 경쟁자의 불꽃 튀는 시선으로 변했다.
“하는 수 없지. 가위바위보를…….”
“좋아. 가위바위보로 결판을 내자.”
“대신,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페이지 터너 하는 거다?”
그리고, 리사이틀 대타를 놓고 벌어진 가위바위보의 승자는 바로…….
“이예쓰! 이예쓰으!”
“이건 말도 안 돼, 진짜.”
“좋아. 리사이틀 대타 주인공은 김리듬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리사이틀 대타죠?”
“어떤 리사이틀이긴, 리듬아.”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당연히, 필리프 로제 교수님이지.”
나는 그 자리에서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고.
대신, 민아의 표정에는 활기가 돌아왔다.
* * *
“여기서 리사이틀을 한다고요?”
“그래. 사이요 궁전에서.”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사이요 궁전.
나는, 오늘 저녁 8시에.
여기서, 로제 교수님을 대신해서.
리사이틀을 완수해야 한다.
리사이틀 전까지는 자신만만했지만.
정작 당일 저녁, 연주회를 앞둔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연주 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 미치겠다.’
떨리는 손가락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 앞에서 라벨을 연주해야 한다니.’
이 까다롭고 뒷공론 심한 인간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연주해야 할 레퍼토리는, 바로.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
놀랍게도, 로제 교수님이 저번에 내게 내 주신 과제의 맨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레퍼토리다.
내 앞에 놓인 피아노는.
프랑스의 상징 같은, 플레옐 피아노.
심호흡을 하고, 손가락을 푼 후.
가볍고 우아한 전주곡을 연주한다.
[이승의 풍경이 아니라 저승의 풍경이지.]붕 뜬 느낌을 주는 화음들.
아름답거나, 공허하거나, 가벼운 느낌이 아닌.
그냥, ‘이 세상이 아닌 무언가’의 멜로디들.
이어지는 푸가, 포를란, 리고동, 미뉴에트도.
모두 이 세상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음악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하나. 모리스 라벨은 말이야, 1차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참전 군인이야.]라벨은 거기서 문자 그대로의 지옥을 보았다.
10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62만 명의 인간을 무가치하게 갈아 넣는 지옥도를.
전쟁터에서 낙오된 라벨은,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중 버려진 성당을 보았다.
포격과 총격으로 부서진 성당 안에는.
망가진 피아노가 아름답게 놓여 있었다.
그는 버려진 성당으로 들어가.
망가진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했고.
거기서 ≪쿠프랭의 무덤≫이 꽃피었다.
[헌정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전부 다 죽은 사람들이야. 그러니, 이승의 풍경이 아닌 저승의 풍경일 수밖에.]그러나 이 아름다운 추모곡에는 슬픔이 없다.
오직, 무덤에 놓기 위해 다듬은 조화(弔花)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
‘이제, 마지막 토카타만 남았다.’
연주는 점점 격렬해지고, 거칠 것이 없어진다.
타앙!
피아노의 현이 끊어졌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악보를 넘어서는.
아드 리비툼(Ad libitum).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드리브’의 어원.
그의 언어 습관과.
놀라운 순발력과 재치를 빨아들여.
나의 ‘애드리브’를.
공연장에 풀어놓으면 되니까.
[오. 이건 나도 생각 못 했는데.]바로 윤성의 극찬이 터져 나왔다.
피아노의 현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음악을 ‘수정했다’.
‘할 수 있어.’
그 어떤 난관이 닥쳐온다고 해도.
이 곡이, 난곡 중의 난곡인 토카타라도.
나는, 연주를 무사히 끝낼 수 있다.
“Bravo!”
관객들의 놀란 얼굴과는 반대로.
전혀 동요하지 않는 윤성의 얼굴이.
교차 편집 되는 느낌이다.
얼어붙은 객석의 충격이 서서히 풀리면서.
긴장은, 환호로 전환된다.
어쨌거나 결론은.
[또다시 해냈구나, 김리듬.]대타 리사이틀, 대성공.
* * *
정신없이 파리에서의 생활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네.”
파리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는.
춥고, 배고프고, 음산했다.
“아, 느므 춥다. 진짜.”
“김리듬. 군밤 한 봉지만 사 먹자.”
“그럴까?”
초겨울 파리 최고의 명물은.
인적이 끊어진 센 강변도.
밤이 되면 찬란하게 빛나는 에펠탑도.
노엘을 준비하는 샹젤리제 거리도 아니다.
“[7유로입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시내 곳곳에 있는 군밤 장수.
카트 위에 철통을 올려놓고.
그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둥근 철판을 올려.
거기에 껍질을 쪼갠 알밤을 노릇하게 구워 종이 봉지에 담아 주는, 파리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이다.
“하아. 뜨거어~”
“어우. 강바람이 너무 세다.”
“빨리 들어가자. 날씨 너무 안 좋다.”
“밥은 먹고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이민아. 나 지금 굉장히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뭔데?”
“과연, 이 시즌에 식당들이 문을 열었을까?”
그리고.
“내 말이 맞잖아. 명절이라고 전부 다 닫았어!”
세 군데를 갔지만, 전부 닫혀 있다.
“는 열었을 줄 알았는데.”
“예약 전화를 미리 해 봤어야 했어.”
“그러게. 저녁은 다른 곳에서 먹어야겠네.”
응?
“사실, 필리프 로제 교수님이 크리스마스니까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나한테 연락을 주셨거든.”
아니, 잠깐만.
“저기요, 이민아 씨. 대체 그 중요한 소식을 왜 저만 모르고 있었던 거죠?”
민아는 몇 초의 침묵 후.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서프라이즈!”
“됐거든?”
“하지만 초대는 사실이야. 의심을 풀라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의심을 푸니.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로제 교수님하고 같이 계획을 짜 놓고서는.
* * *
우리는 바로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생초콜릿을 사서는, 라데팡스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로제.]”
“[오, 어서 와요, 어서 와.]”
민아와 같이, 필리프 로제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민아까지 동석한 자리라서 생각보다 덜 긴장되지만,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사실 크리스 커틴슨 군도 여기 꼭 오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콩쿠르 준비 때문에 스페인으로 떠났지 뭡니까. 참으로 아쉬운 일이죠.]”
정말 다행이다.
크리스 커틴슨까지 왔으면.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손님 접대를 해야겠죠? 일단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한 곡 치도록 하죠.]”
그는 바로 의자에 앉아, 바흐의 ≪주 예수 우리의 소망과 기쁨≫을 연주하며 노엘을 환하게 찬양했다.
‘아니, 이 곡이…….’
‘이렇게 멋진 곡이었나?’
필리프 로제 교수는.
가벼운 연주 하나로.
우리를 평정해 버렸다.
내가 연주할 때는 저런 연주가 아니었는데.
마치, 곡을 편곡하고 변주한 것처럼.
[불공평해. 정말 불공평해.]동의한다.
예술은 불공평함의 동의어니까.
연주를 마친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죠.]”
뭐? 이게 끝이 아니었어?
“[답례는 연주로 받겠습니다.]”
“[물론이죠. 준비됐지, 김리듬?]”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민아에게 장단을 맞춰 주기에는, 묘하게 쪽팔려서.
우리는 바로 우리만의 연주 준비를 시작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라. 멋진 곡을 골랐군요.]”
“[그렇습니다, 교수님.]”
민아는 당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면, 연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