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한편 한국에서는 (1)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음악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비톨드 루토스와프스키가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은, 그중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음악으로 맺어진 지음(知音)인 안제이 파누프니크와 함께 1930년대 폴란드 음악계를 빛낸 신성이었다.
폴란드의 시민이자 쇼팽의 후예인 두 사람은, 그러나 2차대전이 벌어질 때 폴란드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나치는 폴란드를 신속하게 점령했고.
그들은 카페에서 연주하다가 게슈타포 장교에게 붙들려 머리에 총알이 박힐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살기 위해서는 연주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작곡하고, 편곡하고, 압수당하고, 소각되고, 살아남은 음악 중 압권으로 꼽히는 곡이.
“[바로 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죠. 독특하지만, 멋진 선곡이군요.]”
그의 냉철한 시선이.
두 제자의 손가락에 고정되었다.
“[그러면, 시작하세요.]”
둘이 연주하는 불꽃 튀는 음악이.
응접실의 화사함을, 치열하게 변화시킨다.
나의 화음이 너의 화음과 교직되고.
나의 시간이, 너의 시간과 교차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네가 나, 김리듬이 될 수 없듯.
‘너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며, 서로의 음악을 듣고 있어도, 나는 네가 될 수 없어. 네가 내가 아니듯.’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음악이다.’
오래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떠난 옛 음표들이, 우리를 이어 주는 끈이 되어 준다.
‘음악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결국 음악이란, 서로의 간격을 맞춰 가면서, 서로의 소리를 겹치면서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펼쳐진 격렬한 5분의 탄주는.
“브라비!”
이 연주의 유일한 청자의.
열렬한 기립 박수를 받으면서 끝이 났다.
* * *
로제 교수가 우리를 위해 차린 크리스마스 만찬은, 레스토랑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파파야 오일을 끼얹은 홍합 수프에.
양념과 머스터드를 곁들인 돼지고기 스테이크까지.
우리는 황홀한 기분으로 저녁을 음미했다.
그렇게, 즐거운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내던 중.
“[마드모아젤 리.]”
“[네, 교수님.]”
“[저번에 내가 얘기한 건은, 아직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요?]”
그 순간.
나는, 식탁의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민아의 표정이 굳는 것을 바로 캐치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의사 표현을 하려 했지만.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로제 교수는 더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마드모아젤 리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후식으로 산딸기 타르트는 어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을 수 없었고.
저녁 식사는 그렇게 묘한 어색함 속에서 끝이 났다.
* * *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 있었다.
지하철에서는 참을 수 있었지만.
투룸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민아야.”
“왜?”
“도대체…… 교수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대답했지만.
결국은 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교수님이, 나한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참가를 추천했었거든.”
반 클라이번 콩쿠르.
쇼팽 콩쿠르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콩쿠르지만.
나는 그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에 나가지 말고, 대신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참가하라는 얘기야?”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지.”
“어째서?”
“글쎄. 교수님 머릿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네.”
그녀의 표정은 지쳐 있었다.
“하아. 아무튼,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좀 그래.”
“…….”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 마스터클래스 수업 때.
민아에게 이런 제안을 한 이유를.
교수님에게 반드시 묻겠다고.
* * *
크리스마스부터 잔뜩 흐린 파리의 겨울 날씨는, 결국 신년이 되기 직전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와 민아는 투룸 밖으로 싸락눈을 뿌리는 바깥 날씨에서 등을 돌린 채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다.
먼저 연주를 마친 민아는, 오만하고도 도도한 자태를 유지하면서 내게 물었다.
“김리듬. 내가 누구?”
“시드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준우승자.”
민아는 내게 헤드락을 건 후, 라이벌링을 낀 손으로 머리를 득득득득 긁기 시작했다.
“아아악!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꼭 매를 벌어요, 응?”
나는 미친 듯이 탭을 하면서 그녀의 자비를 빌었고, 그녀는 속이 풀릴 때까지 두피 마사지를 계속한 후에야 나를 풀어 주었다.
“다시 한번 묻는다, 김리듬. 내가 누구?”
“알았어! 쇼팽 콩쿠르 우승 유력 후보!”
“후후후. 진작 그랬어야지.”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
“김리듬 네 전화야.”
신년을 앞두고 내게 걸려 온 전화.
희재 선배다.
― 파리 생활은 잘 보내고 있어, 김리듬?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 흐음. 역시 내가 옆에 붙어 있었어야…….
“됐거든요?”
정말 일관성 측면에서는 놀라운 인간이다.
그렇게, 희재 선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 잠시만. 김리듬.
“왜요, 선배?”
―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정 마에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나는 결국 전수정에게 연락을 걸었고.
― 걱정하지 마, 김리듬.
“어떻게 걱정을 안 해.”
― 그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이미 희재 선배에 대한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켜 놓았거든.
정말, 전수정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해내는 아이다.
― 그리고 내가 붙여 놓은 경호원이 희재 선배를 항상 보호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대.
아.
― 어쨌거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 바로 너한테 연락을 하라고 할 테니까.
그리고, 곧 희재 선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 김리듬, 미안. 새 폰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깜짝 놀랐잖아요, 선배.”
― 하하하. 어쨌든 나는 지금 뉴욕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로제 교수님 마스터클래스 잘 듣고 쇼팽 콩쿠르 준비도 열심히 하고…….
“물론이죠.”
― 그리고 식단은 항상 균형 있게. 채소와 과일을 먹기 힘들겠지만 항상 찾아서 먹는 수고를 잊지 말고. 잠은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자고…….
“아, 진짜! 이 양반 왜 이래!”
미국 가서 미국물을 먹더니 사람이 한층 더 이상해진 게 확실하다.
* * *
신년을 앞둔 나는 전수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와! 김리듬이야! 김리듬이다!
내가 이래서 이 타이밍은 피하려고 했는데.
김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전수정의 전화가 확실한 것 같다.
“다들 잘 지내지? 한국은 별일 없고?”
― 사실 큰일이…… 읍읍!
― 아무 일 없어. 이만 끊을게.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런데.
막바지에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나는, 아주 나중에야 김가인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거였군, 바로.]기사의 내용은 짤막했지만.
그 기사가 던져 준 충격은 컸다.
[동아그룹 전격 세무조사 착수]* * *
나는 바로 전수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정작 그녀는 눈썹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야.
“어떻게 걱정을 안 해?”
― 하아. 이래서 김가인 입단속을 시켰어야 했는데.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섬뜩한 기분이 느껴지는 경험은 참 오랜만에 해 본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 익명의 투서가 정치권에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회사가 세무조사를 조금 받게 된 거고.
나는 ‘어떻게 하지?’라는 말 대신.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누가 꾸민 일이야?”
― 아, 물론 조사를 했지. 생각보다 쉽게 나오더라고.
“배후가 있어?”
― 응. 박수인. 신혜경 선생님이 은퇴할 때 그렇게 미쳐 날뛰던 성격 파탄자.
[아, 그놈이었군.]그녀는,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걱정하지 마. 김리듬.
“응?”
― 이제 곧, 여론이 반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전수정의 1원칙.
나를 따르는 자에게는 금융치료를.
그리고 2원칙.
나를 적대하는 자에게는 법률치료를.
지금 한국에서는, 그것이 진행되는 중이다.
― 차분히 지켜봐, 김리듬. 이제부터, 한국에서는 재미있는 발골 작업이 진행될 테니까.
전수정의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가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전화를 끊고 올려다본 윤성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피바람이 불겠네. 뭐, 애초에 잘못은 감당 안 되는 싸움을 걸어 버린 쪽에 있겠지만.]“대체 뭐가 혼자 그렇게 재미있어요, 정 마에.”
[당연히 재미있지. 이제부터 전수정이 한바탕 시원하게 칼춤을 출 시간인데.]“이해가 안 가니까 차근차근히 설명해 주세요.”
그는 팔짱을 낀 채 장광설을 풀기 시작했다.
[자, 음악계에는 파벌이 있어. 이건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지.]“그건 저도 알아요.”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도 파벌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자기 연습하기도 바쁘고, 기껏해야 리허설 때 신경전 정도를 파벌 싸움이라고 하지는 않지.]“네. 그렇죠.”
[하지만 성악가들은 좀…… 결이 달라. 해외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유독 국내는 성악가 파벌 싸움이 심하지. 그런데, 신혜경 선생님이 은퇴하면서 그게 터져 버린 거야.]결국 그가 설명해 준 이번 사태의 원인은.
“그러니까, 신혜경 선생님이 은퇴한 성악계의 공백을 박수인이 장악하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동아그룹에 대한 지저분한 뒷소문을 내서 정치권이 움직였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거지.]하. 지. 만.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 김리듬.]윤성은 태연해도 너무 태연했다.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나.
소설을 읽는 독자처럼.
[어차피 전 회장도, 전수정도, 언젠가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을 거야.]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전직 지휘자 귀신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다.
[아마 녹취로 터뜨릴 거다. 애초에 박수인은 녹취로 걸릴 만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다녔으니까.]“그런데, 정 마에 선생님.”
[응?]“그 모든 사안에 대한 녹취가 있다면, 도대체 그 녹취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그는 내 의문을 바로 풀어 주었다.
[그건 생각보다 쉬운 문제야. 이 모든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고,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그녀’가 가지고 있겠지.]“‘그녀’라고요?”
[그래. ‘그녀’다.]윤성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듯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 움직일 거다. ‘그녀’는, 손해 보는 것만큼은 죽어도 원치 않는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