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드뷔시의 연습곡 (2)
나는 바로 연습을 재개했다.
크리스 커틴슨을 옆에 앉혀 놓은 채.
‘지금 이 녀석.’
아주 짧은 관찰만으로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난점을.
바로 간파했다.
그는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 악보에서 답을 뽑아내듯 바로 설명을 개시했다.
“[손가락을 수직으로 세우고 누르면, 연속되는 두 음에 고른 무게를 분배할 수 있지.]”
“[이런 식으로 말이지?]”
“[응. 그렇지. 이어지는 레가토는, 좀처럼 부드럽게 치는 게 힘들어. 이 딱딱해지는 레가토를 보충할 가장 좋은 방법은…….]”
“[페달이겠네. 적절한 페달링으로, 딱딱해지기 쉬운 음향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거지.]”
“[바로 그거야! 어떻게 바로 알았지?]”
네가 힌트를 뿌리다시피 했으니까요.
크리스 커틴슨, 이 녀석.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킹받게 하는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좋아. 완벽해. 역시 리듬 킴이야.]”
“[됐고. 이제 배고프니까 타르트나 먹자고.]”
한바탕 연습을 끝낸 우리는, 한 테이블에 앉아 사과 타르트를 도살하기 시작했다.
“[어때, 리듬 킴. 우리, 서로 마음이 맞는 것 같지?]”
“[그건 전혀 모르겠지만, 이 타르트는 맛있네.]”
“[아, 역시 그렇지? 샤틀레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 타르트 집까지 가서 사 온 보람이 있어.]”
그렇게 무심한 듯 부지런하게 타르트를 해치우던 내게, 녀석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리듬 킴. 혹시, 반서준이라는 녀석을 알아?]”
무심코 탄산수로 입을 가져가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모르지는 않아. 그런데, 왜?]”
“[다른 녀석은 몰라도. 그 녀석만큼은 반드시 꺾고 싶어서 말이지.]”
지금 녀석이 짓는 표정은.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크리스 커틴슨과.
조금, 많이 달랐다.
“[사실 작년 콩쿠르 직전에 그 녀석을 만난 적이 한 번 있었거든.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주 불쾌한 경험이었어. 그리고, 녀석을 만나고 며칠 후 나는 쓰러졌지.]”
“…….”
“[나는 미신이나 오컬트 같은 건 믿지 않지만, 그 녀석만큼은 예외라고 봐. 기회만 된다면 그 녀석을 무너뜨리고 싶어.]”
환하게 맑기만 한 그의 표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낯선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
나는 짧은 고민 후 대답했다.
“[그래. 좋아.]”
적의 적이라면, 친구와 다름없는 존재니까.
“[자, 그러면 우선 리듬 킴의 드뷔시 연습곡부터 해치워야겠네. ‘4도를 위하여’는…….]”
“[반음계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야.]”
“[……응?]”
이 정도로 도움을 받았으면서.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면서 유동하는 반음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음향이 제멋대로 섞여서 지저분하게 들리기가 쉽거든. 내가 보기에, 크리스 너는 청각도 나름 예민한 것 같은데. 그런 쪽으로 더 섬세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연주하면 더 좋을 거야.]”
* * *
로제 교수는, 세 번째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 김리듬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이제 드뷔시의 ≪연습곡≫만이 남았네요. 그렇죠?]”
“[네, 교수님.]”
“[이 마지막 레퍼토리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연주했으면 해요. 어떤가요?]”
사실상, 공개 연주회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하지만.
공개 연주회의 장점은 명확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다음 수업 때 봅시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온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천재들 앞에서.
정말, 날고 기는 희한한 어린 고수들이자.
모두가 경쟁자들인 녀석들 앞에서.
내가 2주 동안 노력한 결과물을.
지금부터, 연주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자, 어떤 결과물을 들려줄까?’
로제 교수는 리듬의 눈빛을 보고 속으로 조금 놀랐다.
눈빛에 담긴 그 ‘혼’의 차이는.
타인히 쉽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아니,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도저히 김리듬이라고 믿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로제 교수는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 * *
가슴이, 심하게 요동친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사소한 실수 하나도.
미묘한 음정 변화도.
전부 캐치할 수 있는 천재들 앞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로제 교수님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까.
‘없다고 생각하고, 연주하면 된다.’
마침내 나는.
나만의 음악을, 여기 풀기 시작한다.
다섯 손가락의 음악을.
3도로 이루어진,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의 음악을.
문득, 윤성이 예전에 내게 해 주었던 말이 기억난다.
─ 리듬아. 너는 재능이 있어.
‘나한테 재능이 있다고요?’
─ 그래. 너한테는 재능이 있어.
‘정 마에 선생님. 나한테 무슨 재능이 있는데요?’
─ 너는 너 자신을 속이지 않아.
‘그게 재능이에요?’
─ 잘 들어 봐. 가령, 어떤 예고생이 ‘오늘 하루는 8시간 연습을 해야겠다’라는 목표를 세우고 연습을 한다고 치자. 그걸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 것 같니?
‘대부분 지키잖아요. 아닌가요?’
─ 아니. 20%도 안 돼.
사실, 그때만 해도 이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내 주위의 학생들은, 나보다 실력이 나은 녀석들인 동시에, 연습량도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대부분은 하기 싫어서 하지 않고, 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아. 그러다가 정작 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하고 싶은데도 하지 못한다고.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다들 피아노 앞에서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 대부분은 무수한 이유를 들어서 하지 않아. 오늘은 손목 아픈데. 친구가 놀자고 하는데. 썸 타고 싶은데. 부모님이 싸워서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데. 오늘은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하고 싶은데.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서 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대부분은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는다.
연습하는 시간이 1천 시간을 넘기고.
5천 시간을 넘기고.
1만 시간을 넘기게 되면.
관성과 책임감, 의무감만이.
연습을 하는 원동력이 되어 버린다.
그런 무감동한 연습에서.
과연 무엇이 나오겠는가?
─ 그리고, 의자에 앉는다고 그게 다 연습인 건 아니야. 딴생각, 쓸데없는 생각, 잡생각으로 정작 연습에 열중해야 할 에너지를 잡아먹고.
호기심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지독하고 고된 피아노와의 대면만이 남는 것이다.
그가 하는 얘기는, 그래, 단순히 젊은 꼰대가 할 수 있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어느 분야에도 통하는 인생의 정론이었다.
─ ‘하루 8시간을 연습한다’는 목표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아무 의미 없이 피아노만 뚱땅거린다는 의미가 아니야. 진짜 하루의 1/3을 피아노에 바친다는 의미라고. 너의 1/3을 말이야.
그렇다.
나는, 적어도 연습에서만큼은 거짓말한 적이 없다.
─ 아까 말한 ‘8시간 연습’을 지독할 정도로 정직하게 지키는 놈은, 내가 짧은 전생을 살면서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어. 그중에 네가 있는 거고.
‘그냥 평범한 노력이에요. 그 정도는 해야 하니까.’
─ 그래서 내가 너의 효율을 높여 주는 중이잖아. 다른 사람의 8시간과 너의 8시간을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만들어 주는 중이라고. 그걸 몰라?
그래.
다른 사람들의 8시간과.
나의 8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그 소리는.
바로, 퇴적된 질의 차이가 만든 시간이다.
♩♩♩♪~
음악이 진행될수록.
몇몇이 자세를 고쳐 앉는 게 보인다.
‘지금부터 놀라면 안 되지. 이제 시작인데.’
‘3번 ‘4도를 위하여’.’
부드럽고, 유연한 음향 곡선으로 이루어진 곡.
그 곡선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모방하거나.
부분적인 전위를 이루거나.
페달 포인트나.
리듬적 음형 고정에 의해.
활동적으로 변한다.
음악은, 그 화려한 시간을 회상하듯.
아련한 오스티나토의 메아리로 끝을 맺는다.
‘4번 ‘6도를 위하여’.’
쇼팽의 6도 연습곡에서 출발했지만.
마치, 천천히 고치를 짜면서.
전혀 다른 형태로의 우화를 꿈꾸는 곡.
‘하지만 손가락이 뻣뻣해지기 쉽고.’
피로해지기도 쉬운 난곡이다.
손가락으로 한 손의 두 성부를 동시에 완전한 레가토로 확보하는 기교는, 프로 피아니스트에게 꼭 필요한 기교이지만.
‘이런 연습은, 손가락을 다치기 쉽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기교를 연습하다가 자주 부상을 당한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접속음으로 건반에 단단하게 받쳐야 하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게 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 엄지나 약지에 손의 중심을 둔 채로, 자기 자신에게 알맞은 손가락으로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드뷔시가 손가락 번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손가락을 넓게 벌리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어떤 피아니스트는 엄지와 중지로 그 부분을 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피아니스트에게 알맞은 손가락 번호는, 1-4가 아니라 1-3이 될 것이다.
손가락이 긴 피아니스트에게 억지로 좁은 번호를 강요하거나, 손가락이 짧은 피아니스트에게 억지로 큰 번호를 강요한다면, 연습의 효율은 둘째치고 손가락을 다치기 쉽다.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결정이 아니야.’
가장 완벽한, 자신만의 방법을.
오직 나만을 위한 길을.
찾아가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후우.”
한숨을 돌린 후, 어느새 호기심과 긴장이 담긴 녀석들의 표정을 훑는다.
‘아직, 다들 놀라기에는 일러.’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니까.
‘5번 ‘옥타브를 위하여’.’
순수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각지고 딱딱한 악센트가 중요한.
‘도무지 예측이 쉽지 않은, 변덕스러운 곡.’
자, 다들 듣고 있지?
내 최종적인 목표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야.
지금 내 몸은, 파리에서 학생들과 겨루고 있지만.
나의 정신은, 이제 올가을에 치러질.
쇼팽 콩쿠르 본선을 향해 있다고.
‘이제 이 곡만 마치면, 전반전 종료군.’
6번. ‘여덟 손가락을 위하여’.
쉼 없이 움직이는 무궁동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추구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엄지손가락을 머릿속에서 지우게 한다.’
음악이, 강제적으로 양손의 엄지를 뺀 나머지 여덟 손가락의 연주를 추구하게 만든다.
이 점은 윤성도 내게 지적한 적이 있다.
[엄지손가락이 없다고 생각하고 연주해야 해. 그냥 양손 엄지가 잘려 나가서 없다고 생각하라고. 그래야 ‘여덟 손가락을 위한’ 연주가 가능하니까.]기능성과 목적은 전혀 다르지만.
마치,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처럼.
피아니스트에게 독특한 패널티를 부여하고도.
그런 점에서, 역으로 예술성을 도출하는.
‘열두 개의 연습곡 중, 가장 독특한 곡이지.’
그렇게 여덟 손가락의 연주를 끝냈을 때.
나의 시선은 크리스 커틴슨을 향해 있었다.
‘조금 놀란 모양이네.’
그렇다면, 나머지 여섯 곡의 연주를 들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놀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