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박소영 선배의 사정 (1)
색채가, 풍경이, 감정이, 형이상이.
나의 몸에서 천천히 풀려나와.
피아노의 건반을 통해 음악이 된다.
[화음의 공명에 유의해라.]D♭와 F의 공명을.
G♭과 A의 공명을.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그런 공명을 완성해야만 한다.
[레가토를, 그렇지. 페달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어째서, 드뷔시를 연주하면서.
페달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하는가.
드뷔시의 음악은 페달이 생명임에도.
‘너무 많은 페달 사용은, 결국 음향을 지저분하게 섞어 버리니까.’
[드뷔시는 자신이 작곡한 음악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 않았어. 자신이 창조한 작품이 완전하게 연주되는 것을 원했다고. 어설픈 감상주의나 과도한 페달링이 아니라.]풍부하면서도 완전한 음의 조직들.
정교하고 흠 없는 구성.
선명하면서도 명징한 화성적 색채들을.
‘오직, 짜임새를 이용한 미묘함만으로.’
마치 은으로 이루어진 비단을 가지고.
바느질을 가하지 않고.
손상시키지도, 훼손시키지도 않은 채.
천의무봉의 터치로 완성하는 음악.
나는, 그렇게 ‘미드나잇 인 파리’를 완성한다.
* * *
드디어 이 야밤의 음악 여행도 마지막 곡까지 왔다.
‘마지막 곡. .’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만들어진.
간결한 동작을 추구하는 춤곡.
궁정 무용의 우아함과.
시골 춤의 거친 활기와.
파리 특유의 경쾌함을 모두 융합한.
17세기 프랑스를 사로잡은 춤곡이기도 하다.
[앞의 미뉴에트와 이 파스피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뭐지?]‘싱커페이션의 유무죠.’
[잘 아네. 그리고,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악보를 향한 내 눈이.
곡의 특징을 바로 잡아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논 레가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쉼 없는 빛처럼.
끊임없이 내리쬐며, 부딪치며, 반사하는.
밤의 자수와도 같은 월광의 음악.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음악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
허공에 하늘거리는 거미줄처럼, 가늘게.
하늘하늘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야 한다.
‘에올리안 선법으로 기본 밑바탕을 그렸지만, 그 위에 붓질한 프리지안 선법이 인상적인 화성.’
그 선법들이, 기묘한 선율에 우울한 색채를 잠시 더했다가 바로 거두어 간다.
[홀로 노래하던 밤의 음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른 선율로 곧 2중창을 이루지.]이 2중창은 곧 정교하게 계산된 루바토와 엮이면서 더 다채로운 음향을 발산한다.
복잡성과 정서적 긴장도를 높여 가며.
감정을 천천히 고양시키던 음악은.
[독일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발이 아닌, 경쾌함과 기쁨의 클라이맥스로 이어지지.]Joyeuse(주와이외즈).
프랑스인을 상징하는 감정이자.
가장 독특하고, 격렬한 활기를 내포한.
프랑스 특유의 기쁨을.
‘좋아. 이제 카덴차만 넘기면.’
마지막 코다만이 남아 있다.
[첫 박의 섬세한 강조를 잊지 말고.]도리안 선법을 사용한, 10마디의 코다가.
끝없는 생명의 흐름과.
단순하고 부드러운 정서가 결합한.
자유로움.
‘이게 바로, 진정한 미드나잇 인 파리지.’
“와우! 브라보!”
마지막 음표를 내려놓는 순간.
나는 두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 *
‘미드나잇 인 파리’를 즐긴 다음 날.
나는 혼자 투룸에 있었다.
마침 수업이 일찍 끝났고.
크리스 커틴슨같이, 나의 앞길을 방해할 만한 녀석들도 보이지 않아서.
혼자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좋아. 오늘은 민아도 늦게 들어오니까, 연습하기에는 딱 좋은 날이군.’
그런데.
악보를 펼쳐 놓고.
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그 순간.
딩―동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가.
한껏 끌어올려진 내 집중력을.
파삭 깨트려 버렸다.
‘도대체 누구야?’
이 시간에 딱히 올 사람은 없다.
민아는 저녁 즈음에야 집에 올 테고.
김우진 실장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라고 했으니, 민아와 같이 올 것이다.
그러니.
‘잘못 누른 거겠지. 투룸에 찾아올 사람은 없잖아?’
나는 그렇게 여기고, 다시 눈앞의 악보에 집중하려 했지만.
딩―동, 딩―동, 딩―동
문밖의 인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미친 듯이 집요하다.
딩―동, 딩―동, 딩디디디디디디디디띧디디디디디띵동동띵동!
결국, 참지 못한 나는 피아노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진짜! 누구야! 대체!”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는.
바로 문 쪽으로 뛰어갔다.
“도대체 누가 대낮부터 이렇게 남의 집 벨을……!”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아, 안녕? 김리듬? 오랜만이야.”
매력적인 용모와는 별도로.
약간 맛이 간 듯한 표정.
전에는 못 보던 안경을 쓴 채.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소영 선배?”
“역시, 여기 있었구나. 수현이 걔가 알려 줬어.”
희성예술고등학교 미술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미친 삼인방, ‘디센스’의 일원이자 최연장자인.
(전) 사진 전공 박소영 선배였다.
아니, 그런데 잠시만.
선배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 있는…….
“선배. 그런데,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분명히 서울에서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그녀가, 어째서 파리에?
그 순간.
“으아아앙. 김리드음……!”
그녀가, 갑자기 무너지듯 내 품에 안겼다.
“왜, 왜 이래요. 선배!”
“김리드음! 나, 다시 돌아갈래애……!”
그렇게, 소영 선배는 오래된 영화의 대사로 비통한 심정을 표출하면서 내 품에 안겨 울었다.
* * *
나는 바로 그녀를 위한 만델링을 한 잔 타 주었다.
“고마워, 김리듬.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소영 선배. 도대체 파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흐음. 크흠.”
그녀는 몇 번 목을 풀고는.
자신이 파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홍인대에 수석 합격한 얘기는, 이미 남수현한테 들어서 알고 있지? 그렇지?”
“네. 이미 들었어요.”
그 얘기를 할 때, 수현 선배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는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아주, 1년 내내 사람을 비웃어 대더라고. 자기는 치덕치덕 그려서 한 큐에 홍인대 입학에 성공했는데, 너는 아마 힘들걸? 이러면서 말이야. 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내가 진짜 아트 나이프라도 사서 푹푹……!’
‘진정해요, 선배.’
어쨌거나, 그녀는 홍인대 수석 합격에 성공했고.
교수들의 총애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게 자신에게 독이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른 채.
“교수님들은 한결같이 나한테 파리 유학을 추천하더라고. 이미 기본기는 완성되어 있으니, 더 넓은 곳을 지향하는 게 좋겠다면서.”
그리고 주위의 응원 끝에 파리 보자르라 불리는, ENSBA 편입 시험에 성공한 것이다.
“처음에는 날아갈 듯 기뻤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독이 될 줄은 몰랐어.”
전 세계의 유학생들이 모이는.
파리 보자르에 와서야 깨달은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학생들과.
자기 자신의, 넘을 수 없는 벽의 차이를.
“내가 일주일 걸려야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을, 그 애들은 고작 3일 만에 완성해. 내가 3일 걸려야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은 고작 하루 만에 완성하고. 적어도 기본기만큼은, 국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진짜’들이 모인 파리에 와서야 깨닫게 되더라고.”
그녀는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선언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는, 그저 바닷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에 채는 모래알이었구나.”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게도 너무 익숙한 감정이니까.’
무수한 천재들을 질투하고.
그들을 뛰어넘고 싶었던.
과거의 나 자신의 모습들이.
지금, 그녀의 모습과 소름 돋게 같았으니까.
마치 기분 나쁜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입맛이 썼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야, 김리듬.”
“네, 선배.”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녀의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그 소식 들었어. 네가 남수현한테 큰 도움을 줘서, 남수현의 홍인대 입학 수훈이 되었다는 사실.”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확신했지.”
“뭘 확신해요?”
“너에게는, 진정한 창조력이 있다는 사실을.”
“네? 창조력이요?”
“그래. 창조력. 너는 세계를 창조해. 그게 음악이건, 미술이건 중요하지 않다고.”
“선배. 혹시…….”
나는 순간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파리 유학과.
날고 기는 천재들과의 격차에 좌절해.
살짝, 접지 불량이 되어 버린 선배의 정신 상태를…….
“그러니, 나의 구원이 되어 줘. 김리듬.”
“뭐요? 구원?”
“그래. 너의 음악을 들으면, 내 영감이 더 채워질 거야. 너만이, 내 그림을 완성 시킬 수 있을 거라고!”
“선배!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그딴 거 없어, 이 인간아!
내가 무슨 마시면 창의력 충전되는, 마르지 않는 샘이냐고!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선배. 일단 돌아가요. 천천히…….”
“괜찮아, 김리듬.”
그녀는 창문 밖을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내 원룸은, 네 피아노 연주를 잘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거든. 바로 저기야.”
“미친!”
이 인간, 미친 게 틀림없어!
아니, 그런데 잠시만.
내 머릿속에 갑자기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저기, 선배.”
“왜?”
“혹시, 저번 주 금요일에 르 그랑 렉스에 있었어요?”
그녀의 표정에서 바로 광기가 벗겨지고,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특유의 맹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나는 그날 파리 보자르에서 수업 듣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게 왜?”
“……아니에요. 아무것도.”
우리가 영화를 본 그날.
우리를 뒤에서 미행했다는 스토커는.
최소한, 소영 선배는 확실히 아니다.
이런 쪽에서는 괴이할 정도로 솔직한 인간이니까.
“흐음. 어쨌거나 김리듬. 그러면, 앞으로 자주 올게. 항상 좋은 연주 들려주는 거 잊지 말고…….”
“당장 나가요, 소영 선배.”
“아, 그리고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실례니까, 올 때마다 ≪조르조 피자≫에서 한 판 잘 포장해서 가지고 오는 것도 잊지 않을게.”
“아, 그거라면 마다할 수 없죠.”
받을 건 받아야지.
파리 생활 두 달 만에 깨달은 철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받아먹어야 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라’가 아닐까.
* * *
어쨌거나, 나는 어떻게든 여기 남아 내 연주를 들으려는 그녀를 간신히 내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남기고 간 잔향을 잊어버린 채 연습에 몰입하던 내 등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얼어 죽는 줄 알았네.”
“어서 와, 민아야.”
피곤한 표정의 민아와.
느긋한 표정의 김우진 실장님이 보였다.
“보일러 틀어왔으니까, 일단 샤워부터…….”
“김리듬. 혹시 누가 왔었어?”
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소영 선배가 왔다 간 흔적은 전혀 없는데.
선배가 돌아가고 난 후.
깨끗하게 설거지까지 마치고.
컵도 다, 제자리에 놓았는데.
“어, 어떻게 알았어?”
민아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낯선 향수 냄새가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