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80명의 피아니스트 (4)
“[안녕하세요.]”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천슈메이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사람의 목소리 중 가장 밝은 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화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이어지는 그녀의 태도였다.
“[이민아, 맞죠?]”
“[그런데요.]”
“[꼭 만나고 싶었어요. 당신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민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꼭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나는 비겁하게 피하기만 했어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사과를 마친 천슈메이는.
고요하게 민아의 눈동자만을 응시했다.
마침내, 굳은 채로 멈춰 있던 민아의 입가가 조심스럽게 풀어지며,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참 기분이 묘하네요.]”
“…….”
“[죽을 때까지 절대 사과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이런 식으로 사과를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내가 너무 늦은 건가요?]”
“[아니, 딱히…….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평범하게 민아의 차가운 말투로 들렸을 말이지만, 나만큼은 잘 안다.
지금 그녀는 정말로 감정에 혼선이 왔다는 것을.
“[그리고 사과와는 별개로, 우리가 굳이 길게 얘기를 나눌 입장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네요.]”
“[어쨌거나, 이만 가 보세요. 저희는 이제 연습을 할 시간이라서요.]”
“[그래요. 선의의 라이벌이 되기를 바랄게요.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 이런 전개, 이제는 익숙해.
하지만 라이벌 선언을 직접 듣는 것은.
이민아만으로도 충분하다.
* * *
어쨌거나, 천슈메이가 그렇게 떠나고 난 후.
크리스 커틴슨이 내게 속삭였다.
“[리듬 킴. 천을 아는 거야?]”
“[응?]”
아아.
천슈메이를 가리키는 거구나.
“[잘은 몰라. 두어 번 만났던 게 전부야.]”
“[그렇구나. 조심하는 게 좋아, 리듬 킴.]”
“[응? 왜?]”
“[저 여자. 벨라도나 같은 여자거든.]”
나도 그건 잘 알아, 크리스.
그러나 크리스와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쇼팽 콩쿠르 바르샤바 예선이 시작되었으니까.
“[세계 각지에서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딱딱하고 각진 인상의 여인이, 마이크를 들고 안내를 시작했다.
“[이제 곧 시작될 쇼팽 콩쿠르 최종 예선은, 총 160명의 스크리닝 오디션 합격자 중 80명을 골라내는 시험입니다.]”
또렷하면서도 힘 있는 발성에 실린 예선 소개 내용은, 우리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스크리닝 예선 합격자 160명 중, 열 명은 쇼팽 콩쿠르 협회에서 공인하는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이번 바르샤바 예선 면제권을 얻고 본선에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기 모인 스크리닝 예선 합격자는 150명이며, 그 중 70명만이 쇼팽 콩쿠르 본선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선 진출을 위한 바르샤바 예선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신이 노력한 최고의 연주를 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퇴장한 후.
드디어, 바르샤바 예선이 시작되었다.
* * *
연습을 마친 나는 대기실에 앉은 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를 모니터링했다.
마침내, 그 녀석이 나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겨 버렸으면 좋겠다. 김리듬.]나는 반서준을 향해 독설을 뱉는 윤성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주어진 곡은.
지금 녀석의 성향과 아주 잘 어울리는.
‘쇼팽의 연습곡 올림 다단조, 작품번호 10의 4.’
마침내, 녀석의 연주가 시작된다.
화려하다 못해 어지럽고.
난해하다 못해 숨이 막히며.
격렬하다 못해 섬뜩하며.
처절하다 못해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는 곡을.
‘미친 템포로 치고 있어.’
게다가, 단순히 빠르기만 한 연주가 아니다.
힘, 분절, 강약 조절, 음색, 페달링까지.
그야말로, 힘과 완벽함을 모두 가진.
음악의 절대성과 완전성에 대한, 노골적인 탐욕으로 가득한 연주.
나는 확신했다.
녀석의 수준은 이미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다.
[솔직히, 김리듬. 이거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윤성은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지금 저 반서준 놈이 치는 쇼팽은, 그 누구라도 통과시킬 수밖에 없는 연주야.]우승을 자신하던 녀석의 말은.
절대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데, 뭔가 이상해.’
아주 옛날, 녀석이 참가한 몬트리올 콩쿠르 파이널 때 들었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에서 느껴진 묘한 위화감이.
전보다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뭐지?’
그러나 나의 위화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반서준의 연주가, 그 순간 끝났으니까.
그리고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브라보!”
심사위원들의 박수가 터졌다.
그렇게, 반서준의 연주는.
우리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긴 채.
막을 내렸다.
[미친놈은 미친놈이야. 안 그래?]‘……그러게요.’
결국,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녀석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 * *
미친 폭주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한 반서준의 차례가 지나가자, 지루한 순간이 다가왔다.
물론 그 지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색다른 개성을 지닌.
다른 피아니스트가 마침내 무대에 올랐으니까.
‘천슈메이.’
당신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 번째지만.
나는 아직도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나만의 능력이.
“정 마에 선생님.”
[어쩌려고?]“나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진심을 알아내겠어요.”
나는 화면을 통해 그녀의 연주를 경청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 천슈메이.’
≪겨울바람≫을 연주하기 위해 자세를 잡은 그녀의 시선은, 오직 피아노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 당신의 진심을 들려줘.’
진심이 담긴 음악을 들으면.
그녀의 과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진심이 담긴 음악이.
공기를 뚫고, 내 귓가를 때리는 순간.
툭.
내 한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칼날 같은 바람들이, 내 살점을 훑고 지나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세차게 불러일으킨다.
이제 알 것 같다.
천슈메이의 과거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잔인하며.
‘피처럼 짙다.’
어떻게 저런 과거를 겪고도.
아직 살아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거지?
끊임없는 학대와.
가혹한 연습들로 점철된 시간.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그녀 스스로도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시간들이.
날카롭게, 듣는 이의 심장을 후벼 판다.
* * *
천슈메이의 격렬하고 폭풍 같은 연주가 끝나자.
이제 크리스 커틴슨의 차례가 왔다.
[진짜, 저 멘탈만큼은 본받아라. 김리듬.]“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실은, 나도 그러고 싶다.
쇼팽 콩쿠르 바르샤바 예선이라는.
자신의 연주 인생이 결정되는 순간.
저렇게 편안하고, 느긋한 자세로.
피아노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쉽지 않은 발라드 3번을 연주해야 하는데.’
쇼팽의 발라드 3번 내림 가장조, 작품번호 47.
하이네의 와.
미츠키에비치의 에서 영향받은.
물과, 여인과, 죽음과, 매혹의 서정시.
‘마치, 드뷔시나 라벨 같은 유연한 물의 이미지가 유동하는 아름다운 곡이지만.’
그만큼, 자신을 드러내기는 어려운 곡이다.
같은 발라드라도 유명한 1번이나, 환상곡 같은 자유로움과 격렬함을 품은 4번과는 달리.
3번은 그만큼 관객을 사로잡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연주자의 역량이 더 중요한 곡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녀석은 그런 나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
즐겁게 음악 속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지. 바로 그렇게…….’
느긋하게 음악 속을 유영하는 듯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기민하게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물과 색채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한 편의 장난극.’
오른손의 특이한 굴곡을 놓치지 않으면서.
너무 빠르지 않게, 연주를 이어 나간다.
마치, 알프레드 코르도가 이 곡을 가리켜 했던 말처럼.
‘쾌활한 우아함과, 명료한 민첩성.’
그렇게, 앞서 나왔던 연주들의 지나친 긴장감을 풀어 버리고 자신만의 페이스로 연주를 끝낸 크리스 커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짝. 짝. 짝짝짝.
심사위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 * *
“[68번 김리듬. 곧 연주 시작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내 연주를 무대 위에서 풀어놓을 시간이.
‘아, 청심환이라도 먹을걸.’
하지만 지금 후회한들 소용없다.
공교롭게도 내게 가장 호의를 보이는 심사위원과, 나를 가장 싫어하는 심사위원의 선곡은 같았다.
“[쇼팽의 뱃노래를 연주하세요.]”
무대 위 피아노로 천천히 걸어가는 걸음이 느리게 느껴지고, 주위의 공간이 일렁인다.
어지러움을 참고 피아노에 앉는 순간.
윤성이 내 귓가에 조용하게 속삭였다.
[새치 없는 영혼이 되어라. 마야코프스키의 싯구처럼.]무슨 뜻인지 알겠다.
아카데미의 규율에 구속된.
진정한 음악을 보지 못하는.
그런 육체보다 영혼이 더 늙어 버린 연주들을 모두 버리고, 새치 없는 영혼이 되어라.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제는 승화와, 최후의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니까.
♪♩―!
맑으면서도 찬란한 9도 음정이 결합한.
첫 화음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잔물결처럼 사라지는 선율들.
무수한 색채들이 물에 부딪히며 빛나는.
마치, 모네의 수련 같은 색채감을.
[오케스트라의 색채감을 발휘해라.]네가 지금 연주하는 악기는.
그 기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니까.
‘되었다.’
내 연주가,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은 것이 틀림없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러시아의 거장 피아니스트.
미하일 네차예프.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나를 싫어한다.’
그것도, 노골적인 혐오감이 느껴질 정도로.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가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싫어한들.
심사위원 한 명이 나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법.
더군다나, 그의 반대편에서 나를 이토록 굳건하게 지지하는 심사위원이 있지 않은가.
[계속 나아가라. 마지막 화음까지.]나는 빛난다.
나는 밝아진다.
나는, 승화하여 하늘의 구름으로 오르는 물방울처럼.
최후의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가 된다.
* * *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이제 오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피아니스트를 기다렸다.
그런데.
민아가 나오지 않는다.
‘나올 시간이 지났는데.’
분명히, 연주를 시작하기 10분 전에는.
이미 나와서 연습을 하면서 손을 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민아가 나오지 않는……?
끼이익.
마침내, 문이 열리면서.
긴장했던 내 심장 박동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아…… 야?’
그녀가 천천히 문밖으로 나온다.
전에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그 순간,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그러나 자리에 앉은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안심했다.
그녀는, 연습할 때와 전혀 다름없는 표정으로.
어려우면서도 난해하며,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흉하게 일그러지는 스케르초 1번의 첫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하는데 성공했다.
[저 곡을 연주하는 것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지.]그 어려운 일을.
지금, 그녀가 해내고 있습니다.
마치 저 아슬아슬한 템포와 균형 감각마저.
그녀가 의도하기라도 한 듯.
마침내, 모든 연주를 끝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창백함이 사라지고, 밝음이 드러났다.
심사위원들이 미소 지으며 박수를 보내는 동안, 그녀는 손으로 내게만 보이는 ‘OK’ 사인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