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쇼팽 콩쿠르 1차 본선 (3)
나는 직감했다.
음악이 아니면 살 수 없고, 음악이 아니면 숨쉴 수 없으며, 음악이 아니면 호흡할 수 없는 삶을 살아 본 이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직감이다.
‘나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고행과도 같았던 지난 3년의 시간.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을 통과한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길은.
높고, 곧으며, 올바르다.
‘나는, 왕좌로 나아갈 수 있다.’
다들 똑똑히 들었지?
이제,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아.
‘상대가 그 누구건 상관없어.’
이 쇼팽 콩쿠르는.
완벽한 나의 대관식 무대가 될 거야.
[자, 아직 1차 본선은 끝나지 않았어.]윤성의 말이, 나를 바로 진정시켰다.
환호와 박수갈채에 답례한 후.
바로 자리에 앉은 나의 머릿속은.
다음 음악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찼다.
[연습곡으로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는 야상곡의 시간이다.]야상곡으로 표출되는 밤은.
연습곡으로 표출되는 밤과 다르다.
밤의 잔인함과 어두움, 음울함이 노출되던 연습곡의 세계와는 다르게, 야상곡의 밤은 잔잔한 평온이 흐르는, 물에 반사되는 달빛의 세계니까.
그리고, 내가 선택한 야상곡의 밤은 바로.
‘야상곡 12번 사장조, 작품번호 37의 2번.’
2개의 주제가 번갈아 나오는 발라드풍의 곡.
그중에서 2번째 주제는, 뱃사공의…….
‘뱃노래 특유의, 미묘한 흔들림.’
과거에, 민아 앞에서 연주를 했던 때보다.
더 고요하면서도 황홀한 음악이.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을 스며들게 한다.
‘마요르카섬의 그 광경을, 여기 풀어 놓는다.’
따뜻하면서도 어두운 밤의 물결을 저으며.
배가 지난 뒤 물결을 따라 고이는 빛무리.
배에 탄 모든 이들은 휴식을 취하지만.
오직 뱃사공만은, 잠을 쫓으려는 듯 밤새 노래를 부른다…….
‘조르주 상드가 시로 풀어 낸 그 광경을.’
다시 말하면, 시로 굳어진 그 음악을.
비로소 피아노를 통해, 음악으로 풀어 버린다.
미묘한 반음계와 비밀스러운 활력이.
건반 위에서 일렁이다가, 춤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미묘함보다는 활력 쪽에 더 기운 연주로.
그래, 내가 과거의 기억과 접했을 때.
쇼팽이 내게 들려준.
그의 야상곡 연주를, 여기 그대로 재현한다.
‘김철환 상무님. 만일 당신이, 지금 이 연주를 듣고 있다면.’
내 연주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될 겁니다.
지금의 내 연주는, 당신의 말처럼.
풀하우스를 넘어선.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거머쥔 연주라는 것을.
* * *
같은 순간, 대한민국의 서울.
김철환 상무는 팔짱을 낀 채 김리듬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연주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침내, 마요르카섬 앞바다의 야상곡이 끝나고.
앳된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를 받는 순간.
김철환 상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기어이,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거머쥐는군.”
“네? 상무님?”
옆에서 김 상무의 눈치를 보고 있던 박상우 대리가 스리슬쩍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지만, 김철환 상무는 바로 눈빛 레이저를 그에게 쏘았다.
“박 대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시간 많아 보이는데, 내가 지시한 건 다 끝냈나 보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끝납니다!”
바로 몸을 돌려 자기 업무를 재개하려는 박 대리의 등 뒤로, 김철환 상무의 웃음기 섞인 말이 던져졌다.
“그리고, 이번 바르샤바 출장 준비는 다 되었나?”
“아, 물론입니다. 상무님.”
“알았어.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그런데 상무님. 정말 김리듬 군이 저희의 계약 요청에 응해 줄까요?”
“응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게 만들 거고.”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생각이니까.”
* * *
나는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무관심 반, 호기심 반이던 관객들의 반응은.
이제 내 손에서 어떤 기적이 창조될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런 관객들의 기대를.
마지막 순간까지 배신해서는, 절대 안 되겠지.
‘그래. 마지막 《뱃노래》의 시간이다.’
황혼의 시간으로 빛나는 쇼팽의 가장 찬란한 음악을.
이전의 음악들이, 악마 같은 밤과 찬란하고 황홀한 밤의 양극의 이미지를 번갈아 선사했다면.
이제는, 모든 어둠이 거품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오직 빛만이, 찬란한 빛무리만이.
나의 피아노 위에서 차고 넘쳐서.
뱃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햇살처럼.
신성한 오후의 황금 같은 시간처럼.
증류도를 높이고, 불순물을 걸러 내어.
거기에 시간과, 향과, 신성함을 입힌.
신의 음료인, 넥타르의 음악을.
[이 연주회장에, 차고 넘치게 해라.]드디어 모든 연주를 마친 순간.
나에게 빛과 환호성이 쏟아진다.
내 뒤에서, 윤성이 오직 내게만 들리는 박수갈채와 찬사를 보낸다.
[축하한다, 김리듬.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그 순간,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심사위원들의 빛나는 눈도.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도.
그 순간부터, 내게 와닿지 않았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도.
그가 내게 건넨 칭찬 한마디에.
전부 녹아서, 스르르 사라져 버렸으니까.
나는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한 후.
윤성을 슬며시 올려다보면서.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정 마에 선생님.’
당신이 있었기에, 당신과 함께했기에.
나는,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 *
물론 감동의 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 김리듬. 너무 감동받은 거 아냐?]“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네?”
“저도 그건 알아요.”
대기실에 오자마자, 나는 40분의 연주로 달아오르고 뻐근해진 손가락을 천천히 풀면서 시선을 내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 모든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어.’
손의 뻐근함도 천천히 사라지고.
이제, 나른하고 느긋한 이완이 찾아오려는 순간.
똑, 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내 평온함을 깼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크리스 커틴슨이었다.
“[연주 잘 들었어.]”
나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너무 일찍 끝나 버리니, 오히려 초조하네.]”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일찍 끝난 김에, 우리 마드모아젤 리의 연습이나 도우러 갈래?]”
“[아니, 전혀.]”
나 김리듬에게 나만의 연습 원칙과 루틴이 있듯이, 민아에게도 민아만의 연습 원칙과 루틴이 있다.
연주가 24시간 남은 이때, 그녀는 지금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민아한테 가자고? 니트로글리세린 짊어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소리 하네.’
나는 환하게 웃는 크리스에게 바로 일침을 던졌다.
“[크리스. 나는 쉬고 싶어. 쉴 새 없이 달려오기만 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너도 아마 그럴 거야.]”
“[그래도, 맹렬하게 연습 중인 친구를 돕는 건 포기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아니. 나는 바로 저녁을 먹고 취침할 예정이야. 그리고, 너한테도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내 톡에 날아온 민아의 톡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말을 이었다.
― 내 연습 시간 방해하는 놈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자, 보이지? 요즘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니까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잖아?]”
녀석은 민아의 마음이 듬뿍 담긴 톡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했다.
“[그래. 사실 나도 배가 고팠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다음에는, 샤워하고 자야지.]”
진작 그럴 것이지.
* * *
쇼팽 콩쿠르 1차 본선은 무려 5일이나 된다.
이틀째 되는 날 연주를 끝낸 내게는.
무려 3일의 시간이 남는 셈이다.
나는, 연주를 끝내고 식사를 마친 후부터.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거의 20시간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그래서, 단잠에서 마침내 깨어났을 때.
나는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지 않은 줄 알았다.
저녁때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다시 저녁이었으니까.
내 수면 시간을 알려 준 것은 윤성이었다.
“내가 20시간을 잤다고요?”
[그렇다니까.]예전에 정선율이 하루에 20시간을 잤다는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하루에 20시간을 잘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20시간을 잔 건 바로 나였고요.’
결국, 하루를 통으로 날린 셈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중요한 연주들은 이제 곧 시작할 예정이라는 게.]“그러게요. 정말 다행이에요.”
민아의 연주도.
리칭윈의 연주도.
전부 이제 곧 시작한다.
둘 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연주들이다.
* * *
민아의 연주가 끝난 후에도.
나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기 힘들었다.
‘아, 정말…….’
그녀의 연주는, 난곡으로 유명한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2번 가단조와 작품번호 25의 1번.
그리고 음울한 녹턴 13번과.
발라드 1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조하면서도 음울한 듯…….’
아름다운 시정으로.
이 공간을 조금 더 영롱하게 만드는 연주들.
그리고 음울한 녹턴과.
‘격렬한 발라드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쇼팽과 만난 적도 없으면서도.
쇼팽과 완벽하게 교감하는.
완전무결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거, 도저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네.]”
연주가 끝나는 순간 터져 나온 크리스의 탄식 섞인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리칭윈이다.]”
마침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관객들이 고대하던 최고의 무대가 펼쳐지는 순간.
관객석에 앉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리칭윈의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적어도 나는 반서준처럼 리칭윈이 연주 중에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비열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신성한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겨루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을 테니까.
마침내, 창백한 표정의 리칭윈이 나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연주회장에 있는 절반의 표정은 굳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정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저 녀석은, 어쩔 수 없는 ‘정점’이야.]윤성조차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리칭윈의 연주는.
유일무이한, ‘절대’이자 ‘정점’이었다.
그의 첫 레퍼토리인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4번, 일명 《추격》의 첫 음표를 듣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아니, 상상 이상의 완벽한 연주를.
분명히 무대 위에서 체현했음에도.
나는 천천히 스며들어 마음속을 물들이는 패배감과 절망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그와 겨룬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아주 조그만 흠이나 미세한 미스 터치를 찾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는, 완벽에 한없이 가까운 연주.
자신의 불성실함조차 조그만 흠결로 격하시켜 버리는, 저 신성한 광기의 현현.
‘그저, 경이롭다.’
점점 커지는 초조함과 불안감만큼.
저 높은 곳에서 들리는 듯한.
넋을 잃게 하는 천상의 소리를.
시간을 멈춰 세운 채 영원히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