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쇼팽 콩쿠르 2차 본선 (2)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시간이 상대적임을 깨달을 때가 있다.
라르고나 렌토, 아다지오의 음악을 연주할 때는.
시간이, 정해진 흐름보다 느리게 흐른다.
반대로 알레그로나 프레스토로 흐를 때는.
정해진 규율을 넘어, 시간이 줄달음친다.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상은 후자였다.
쇼팽 콩쿠르 2차 본선을 앞둔 내게.
시간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마치 흘러내리듯이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저번 같은 긴장감은 덜한 기분이야.’
대신, 긴장감보다 더 강렬한 사명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고개를 들어보니, 파리에서의 일을 완전히 마치고 뒤늦게 바르샤바로 온 김우진 실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김우진 실장님.”
“저 없이 1차 본선을 완벽하게 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네에. 일은 다 끝내고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의 그 짧은 대답에는, 지금까지 난마처럼 얽혀 있던 일을 완벽히 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결기가 배어 있었다.
“이제,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일망타진했으니까요.”
“다행이네요. 정말로.”
“자, 그러면 움직이실까요?”
기다렸다는 듯, 나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17번, 김리듬. 15분 후면 2차 본선 연주를 시작해야 합니다.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좁고, 길며, 복잡하고.
온갖 무대 장치와 전선이 늘어져 있는.
이, 낡고 어지러운 느낌의 무대 뒤를 걸어.
나는 무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수갈채가 나를 향해 쏟아진다.
* * *
심사위원 자리에 앉은 에밀리오 아르날디는, 굳은 표정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은 앳된 얼굴의 한국인 소년을 보면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친구인 빌헬름 폰 노이만이 저 소년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칭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 아이를 볼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니까.’
자신이 가장 빛나던 그 시절.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그 감각을, 되살려 주는 아이니까.
‘자, 오늘은 과연 어떤 연주들로 우리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생각인지. 어디 보여 줘 봐.’
마침내, 소년의 손아귀에서.
강렬한 감7화음이 터져 나오면서.
김리듬의 본선 2차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케르초는.
1차에서 들려준 거칠고 격렬한 어둠의 광시곡이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뱃노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다섯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피로 그린 오선지.’
존재하지 않는 혈향이.
지금, 그의 연주 끝에서 감도는 느낌이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차이점을 바로 감지한 듯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1차 때와는 전혀 다른데?’
‘단순한 빛과 어둠의 2중주가 아니야.’
‘연주마다 다른 환상으로 침잠하는 것인가.’
수십 년을 음악에 매진한 거장들도 하기 힘든 재주를, 저 어리고 여린 소년이 능히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저렇게 느린 템포로도.’
엄청난 긴장감을.
아니, 긴장감을 넘어선 압도감을.
자신의 스케르초 연주에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이 시간을 조율하고.
시간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시간을 창조할 수 있다고 선언이라도 하듯.
“[허허허…….]”
아르날디는 묘한 호승심을 느꼈다.
자신의 육체가, 시간을 거슬러 회귀해.
저 소년의 나이와 비슷한.
쇼팽 콩쿠르 우승을 거머쥘 시기로 돌아간다면.
저 연주를 뛰어넘을 황홀한 창조를.
능히 해낼 수 있을 텐데.
‘유수처럼 흘러가는 세월이, 참으로 아쉽군.’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클래식 음악은 늙어 가고 있다고.
오래전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오래전의 음악이니까.
그럼에도, 지금 저 소년의 연주는.
말라붙은 나무에 경이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놀라움을, 이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사소한 비평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연주를, 마치 쇼팽이 미소 짓는 듯한 연주를.
이제 어디에서 듣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곳은 쇼팽 콩쿠르 본선이다.
절대로, 이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 * *
그 어느 연주보다 느렸음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 스케르초 2번 연주가 끝난 후.
두 번째 곡인 왈츠 5번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만족한 눈치지만.
에밀리오 아르날디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스케르초 이상을 보여 주어야지.’
저 아이는 그 기적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다.
‘자, 펼쳐 보여라.’
네가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것들.
네가 살아온 그 모든 날짜들을.
펼쳐 보여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르날디의 눈앞에.
무수한 새들의 이미지가 창조되었다.
“[!!!!!]”
처음에는 자신의 노안이 잘못 본 것인가를 의심해서 눈을 비비려고 했다.
그러나, 잘못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무수한 새들의 이미지는, 분명히.
저 소년의 손끝에서 창조되고 있다.
‘색청으로 인한 공감각이야.’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의 재능을 잊고 있었다.
음에 색채를 입히는 경이로운 감각을 등한시하거나, 아예 그 방법조차 모르는 얼치기들의.
시끄럽게 쾅쾅거리기만 하면 음악이 되는 줄 아는, 그 질 나쁜 연주들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아이는.
명징한 색채로 이루어진 공감각의 세계를.
이 공간에 불러들인다.
‘정말 경이롭군.’
새벽에는 어스름이 되고.
아침에는 밝음이 되며.
정오에는 푸름이 되고.
일몰에는 불꽃이 되다가.
밤중에는 마지막 깃을 허공으로 날리며.
칠흑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잠자리에 드는.
그,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무수한 새들의 이미지들이.
그의 손끝에서, 피었다가 져 버린다.
‘그래. 바로 이거야.’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폴로네이즈만 남았군.’
* * *
심사위원들의 부드러운 눈빛도.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도.
지금 내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모든 세포가 음악에 맞춰진.
음악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당한 상태니까.
[폴로네이즈는 불꽃이며 빛이다.]윤성이 내게 속삭인 이 명제는.
아마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혁명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꽃.
찬란한 윙드 후사르의 갑주에 반사된 태양빛.
그것이 바로 폴로네이즈의 속성이니까.
나는, 다름 아닌 민아의 작년 연주를 통해.
폴로네이즈가 불꽃이며 빛임을 깨달았다.
[피아니스트란 존재들은, 아니, 예술가란 존재들은, 신의 불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들이니까.]토해 내라.
네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신의 불꽃을.
‘장엄한 빛의 군대를, 건반으로 재현해라.’
영광으로 가득한 그들의 영웅적인 과거가.
현실의 음악에서 찬연하게 빛이 난다.
휘황찬란한 말과, 번쩍이는 랜스의 날.
그들이 전장에 도착하면, 적들조차 숨을 죽인다.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이 울려 퍼지면.’
햇빛을 받은 수천 자루의 기병도가 번쩍인다.
역사도 아니고, 책도 아닌.
지축을 흔드는 기병대의 진격이.
포화 속으로, 전장 속으로 돌진해서.
적들을 짓밟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우와아아아아앜!]”
마침내 음악을 내려놓고 일어선 내 귓가에, 엄청난 함성이 몰아닥친다.
* * *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심사위원들은, 바로 열띤 토론을 개시했다.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맞아요. 하나가 아닌 여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있어서, 곡마다 영혼이 바뀌면서 다른 피아니스트가 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선 때만 해도 나는 이 아이에 대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점점 존재감이 커지면서 본색을 드러내는 느낌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의해요.]”
이런 반응을, 김리듬과 정윤성이 노리고 짠 빌드업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심사위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만장일치는 드문 법.
“[하지만 스케르초의 연주는 너무 느렸어요. 상궤를 벗어날 정도로.]”
“[그 정도도 허용하지 못한다면 콩쿠르 심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기계를 판별하는 감별사가 아닙니다.]”
“[네차예프 씨는 할 말 없습니까?]”
아르날디는 몸을 돌려.
침묵만 하는 네차예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침내, 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안 듭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그냥. 모든 게 다. 템포도, 루바토도, 음색도, 페달링도, 아고긱도. 다 마음에 안 든다 이 말입니다.]”
대놓고 트집을 잡으려는 그의 말에, 아르날디를 비롯한 다른 심사위원들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어쨌든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통과시킬 것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뭐, 그런 소수 의견을 존중은 합니다만…….]”
그렇게, 아르날디는 ‘네 의견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결정의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열띤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리듬의 통과 여부를 결정했다.
* * *
“하아암.”
“그렇게 피곤해, 김리듬?”
“아. 원래는 오늘도 풀로 취침할 생각이었는데, 리칭윈의 연주를 도저히 놓칠 수 없어서 말이지.”
원래 나는 2차 본선 연주를 마치고 민아의 연주를 들은 후, 다음 날 하루 종일 쉴 계획이었지만.
리칭윈의 연주를 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이.
결국 나를 깨워, 여기까지 이끌고 나왔다.
“[그런데, 지금 리칭윈 멘탈이 정상이 아니라는데. 과연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크리스의 말에, 나와 민아가 바로 귀를 쫑긋했다.
“[아니. 이건 내가 아는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지금 리칭윈 히스테리가 말도 못 하게 심하대. 그래서 자기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중국 예술인대표단장인 왕린이 직접 찾아왔는데도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거야.]”
나는 윤성을 흘끗 바라보았고.
윤성도 바로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의 정보가 뜻하는 바는 확실했으니까.
‘지금 리칭윈의 멘탈은 위험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나올 거라고 봐.]”
“[어째서?]”
“[리칭윈은, 설령 자신의 연주가 무너진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죽는 쪽을 선택할 인간이니까.]”
그의 멘탈이 위험 수준인 것과.
그가 연주를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끼이이이익.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리칭윈이 천천히 피아노를 향해 걸어간다.
[그래. 리칭윈은 저런 인간이지.]그의 인성에 대한 얘기는.
이미 지겹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저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대단한 존재다.
‘그가 파이널까지 연주를 끝낼 수 있기를.’
그리고, 그가 발라드 4번으로 자신의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나와 윤성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연주가…….’
[휘청인다.]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온 신경을 집중시키지 않고서는.
들을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나와 윤성은 분명히 ‘들었다’.
한없이 완벽하게만 여겨졌던 리칭윈의 연주가.
분명히, 휘청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