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
24화. 황제의 협주곡 (2)
쇼팽의 발라드는, 그 자체가 음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서사시.
특히 가장 유명한 사단조의 1번은,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 ≪콘라트 왈렌로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낸 걸작이다.
[이 곡은, 아주 특이한 화음으로 시작하지.]주요 조성인 사단조의 나폴리 6화음인 내림가장조로 시작하는 기막힌 이질감.
마치, 작곡가가 관객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느낌이다.
― 이 음악의 장르는, 음으로 만들어진 선홍빛의 환상입니다. 이 장르에 초대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 서두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음악은 서사시의 실타래를 뽑기 시작한다.
음울한 G단조의 색채가, 14세기의 낭만과 격정과 사랑과 파멸을 천천히, 무차별적으로 그려 낸다.
평원을 새까맣게 덮는 리투아니아의 적군과 맞서는, 독일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왈렌로트의 생애가 펼쳐진다.
[그는 전쟁을 하고, 사랑을 하며, 죽음으로 돌진한다.]문학이라는, 또 음악이라는 초월적인 환상 안에서 14세기 리보니아와 19세기 폴란드의 경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주인공 콘라트가 독일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희미해져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쇼팽은, 이 콘라트의 운명에서 러시아에 대적하는 조국 폴란드의 운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운명에 가혹하게 휩쓸리는 주인공과.
형형색색의 깃발이 평원의 전장에 나부끼는 모습.
피로 물든 영광의 전투와, 그 영광의 덧없음을 기념하는 전장의 시체들.
그리고, 주인공 콘라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알도나의 사랑뿐.
[그 모든 것이, 언어가 아닌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감정을 장악하고 지배하지.]왜 말 한마디 해 주지 않는 음악이 이토록 강렬한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모름에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째서 광기 어린 사단조의 1주제와 아름답고 매혹적인 내림마장조의 2주제 사이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서사시에 정해진 결말이 있듯이.
음악 또한, 정해진 파멸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을.
[독일 튜튼 기사단은 결국 리투아니아군에 무참하게 패배하고 만다.]프레스토 콘 푸오코(매우 빠르고 미친 듯한 격렬함으로)의 피날레에는, 작곡가가 상상할 수 있는 광기의 정수가 전부 담겨 있다.
[알도나는 피신을 거부하고.]불길하게 덜컥거리는 왼손의 반주 위에서, 오른손이 무려 42음계의 처절한 상승으로 감정을 몰아친 후.
72음계의 추락으로 감정을 문자 그대로 ‘파멸’시킨다.
그리고, 두 차례의 황량한 상승 아르페지오가 있고.
[결국 콘라드는 자살로 스스로의 결말을 지어 버리지.]불협화음이 난무하는 포르티시시모의 난타와 함께, 이 선홍색의 음시(音詩)가 끝을 맺는다.
“후우.”
연주를 마친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 단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긴장한 표정의 단원.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단원.
흥미 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단원도 있지만.
내 시선은, 유준혁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일단 박수로 내 연주의 평을 대신했다.
“좋은 연주였어, 김리듬. 확실히, 전수정이 왜 너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은 연주였어.”
“그거참 고맙…….”
“그런데 말이지, 김리듬.”
그는 내가 원하지 않는 사족을 붙였다.
“아주 조금 아쉽네. 아직 한 가지가 빠져 있거든.”
그는 바로 다른 단원들을 바라보았고.
다른 단원들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맞아. 좋은 연주였어.”
“그래. 좋은 연주였는데…….”
“아쉽게도, 뭔가 하나가 빠져 있어. 아직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뜨뜻미지근한 반응들은.
“그래도, 그것만 해결되면 정말 대단하겠네. 솔직히,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그러게. 유준혁이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해 보라고 해서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대단하잖아.”
나는 전수정에게 답을 알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답은 못 알려 줘, 김리듬. 그건 네가 스스로 알아내야 해.”
“그게 너희들이 나한테 주는 과제야?”
“예기치 않은 추가 과제지. 그러면, 앞으로 2주 동안 연습 열심히 해. 기대할게.”
그녀의 시선은, 이제 내가 30분 전 들어왔던 문 쪽을 향했다.
말을 보탤 필요 없는 축객령이었다.
* * *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대체 내 연주에서 어떤 결점을 캐치했길래, 다 같이 한목소리로 ‘단 한 가지가 빠져 있다’는 말을 하는 걸까.
“마에스트로. 나한테 부족한 게 대체 뭘까요.”
[전부 다. 모든 것.]“아니, 그런 식으로 뭉뚱그리지 좀 말고요.”
[정말 알고 싶어? 지금 너한테 뭐가 부족한지?]“네. 정말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알고 싶은 게 그거에요.”
[그러면, 일단은 양재동의 연습실로 가자. 거기 가서 차근차근히 알려 줄 테니까.]“알겠어요. 일단은 연습실로 가죠.”
전수정이 나를 지원하겠다는 조건으로 빌려준 양재동 연습실은, ‘연습’이라는 관점에서 최고였다.
특히,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윤성과 같이 마음껏 연습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오. 피아노가 한 대 더 와 있네?]“협주곡 연습을 하려면, 오케스트라 파트를 반주해 줄 피아노가 한 대 더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협주곡 연습을 도와줄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구할 생각인데?]“일단은 정선율 이 녀석한테 SOS를 좀 쳐 볼 생각이기는 한데…….”
정선율.
나를 도와주고 멘탈까지 케어해 주는 좋은 친구.
하지만, 녀석은 지금 기말시험 준비에 기타 잡다한 과제곡 준비까지 겹친 상태라 지금 당장 부를 수는 없는 상태다.
“뭐, 안 된다고 하면 나 혼자서라도 연습해야죠.”
“에이. 마에스트로가 어떻게 도와줘요.”
[지금 귀신 무시하는 거냐? 너 그러다 큰일 난다?]“아니, 저주 걸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요. 어떻게 도와줄 생각인데요.”
그는, 새로 들어온 피아노 건반 위에 마치 기대듯 앉은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악기에는 영혼이 스며들 수 있지.]그는, 이제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는, 건반 위로 투명하고 긴 열 손가락을 조심스레 얹었다.
[그리고, 나는 너와 같이 있을수록 점점 더 많은 사물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고.]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눌렀다.’
♬―!
귀기 어린 소리가 연습실을 진동시켰다.
글자도 아니고, 색채도 아닌 것이.
귀로 들어와서는 오감을 휘젓는다.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내가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그가 지금 자아내는 쇼팽의 연주는.
나의 몸을 거쳐 흘러나온, 그때 그 ≪밤의 가스파르≫ 연주만큼이나 경이로웠다.
살아 있는 사람의 연주와는 달리, 자신의 템포에 자연스럽게 루바토*를 넣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곡을 연주하면서 리듬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겼다가 놓으며 템포를 유동적으로 만드는 연주법.)
그렇기 때문에, 귀신의 연주임을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연주.
그 한바탕의 귀신 놀음이 끝났을 때, 그는 마치 귀신에 홀려 얼이 빠진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면서 킥킥 웃었다.
[자, 귀신 들린 피아노 연주를 들은 소감이 어때?]“포, 폴터가이스트?”
[흔한 연습실 괴담이지. 아무도 없는 피아노가, 갑자기 자기 멋대로 연주를 하는, 그런.]“정말 폴터가이스트 맞죠? 그렇죠?”
[응. 그런데…….]이런 젠장.
그는, 지금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캐치한 후였다.
[아, 갑자기 기분 나빠졌어. 안 도와줄래.]“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할 거잖아. 나한테 도와 달라고 SOS 칠 거잖아.]“물론 그렇죠. 도와주세요!”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흐음. 도와줄까, 말까…….]정말, 저번처럼 내가 그를 건드릴 수만 있었다면, 딱밤이 아니라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한다면, 너를 도와줄게.]뭔가 불안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네 몸을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해 줘.]아, 역시 이거였군.
* * *
어쨌거나, 나는 바로 그와의 연습을 위한 이런저런 준비를 개시했다.
“이걸 꼭 해야 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이 공간을 ‘괴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고 생각해.]나는 그의 지시대로, 여기저기에 오망성과 기타 께름칙한 문양들을 공책에 그려 붙여야 했다.
“이거 무슨 악마 소환하는 느낌…….”
[유명 록밴드들도 다들 그러잖아. 원래 뭐든지 이런 부적 좀 붙여 줘야 연주로 버프도 받고 그러는 거야.]“저는 지금까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연주란 말이야, 김리듬.]그는 자신이 지시한 대로 각종 표식들이 잘 붙었는지 확인을 마친 후,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영혼에 신을 내리고 모시는 과정이야.]그의 표정과 소리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반박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만 붙이면 끝이죠, 마에스트로?”
[아니. 거기보다 좀 더 아래. 그렇지, 됐다. 이제 연습 시작하자.]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이 연습실에 아무도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 꼴을 남에게 들켜서 악마 숭배자 소리 듣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자, 이제 ≪황제≫ 협주곡을 연습하면서 너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 가도록 하자.]“물론 그런데요. 마에스트로.”
[왜?]“그 유준혁이라는 애는, 왜 나한테 쇼팽의 발라드를 한번 쳐 보라고 한 걸 까요?”
[네가 생각하기에는, 걔가 왜 그랬을 것 같니?]“글쎄요. 제 역량이 보고 싶었던 걸까요?”
[그런 단순한 목적이라면 그냥 협주곡 한 파트를 떼서 너한테 쳐 보라고 했을 거야. 이유를 생각해.]“흐음…….”
왜 유준혁은 내게 쇼팽의 발라드를 치게 했을까.
쇼팽의 발라드, 특히 1번은 피아노 전공생들이라면 누구나 마스터해야만 하는 곡.
그만큼,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연습하는 곡이며.
자연스럽게 연습 과정이 스며들 수밖에 없는 곡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연습 과정을 거쳤는가?
‘내게는 ‘울림’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울림’을 키우는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음악은 ‘울림’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것.
그리고, 큰 ‘울림’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협주곡의 다른 특징은, 바로…….
“나 자신을 특징지을 수 있는 개성.”
[빙고. 김리듬.]정윤성은 빙긋 웃으면서 피아노에서 떠올랐다.
[네 쇼팽의 발라드 연주는 나쁘지 않았어. 크고 울림도 좋았어. 하지만, 협주곡 연주는 크게 울리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속된 말로 ‘똘끼’가 빠져 있다는 얘기야.]“남들을 미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없다는 말이에요?”
[맞아. 바로 그거야.]그는 다시 피아노에 앉은 후, 내게 눈짓으로 연습을 시작하자는 지시를 했다.
[악보는 머릿속에 있지?]“……네.”
[자, 이제부터 그 ‘똘끼’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해 보자. 이걸 완수한다면, 너는 이번 오디션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자.]그렇게.
나는 귀신의 도움을 받아, 나 자신의 연주에서 ‘똘끼’를 만들어 내는 연습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