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쇼팽 콩쿠르 파이널 (1)
잊고 있던 얼굴들.
항상 떠들썩하고, 활기차며.
상큼하면서도, 발랄한 얼굴들.
그 얼굴들을 보는 순간.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잘 지내는 모양이네. 안녕. 반가웠어. 그러면 이만.”
그 순간.
녀석들의 모습이 한층 더 떠들썩해졌다.
― 야, 잠시만! 잠깐만!
― 맞아! 얼굴 보자마자 이러기야?
“얼굴 봤으면 됐지, 뭐. 잘 지내는 모양인데 나는 인사만 하고 빠지는 걸로…….”
기다렸다는 듯, 녀석들은 바로 내게 울분 섞인 외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 이 배신자! 또 내빼려는 거냐!
― 맞아! 비트레이어 리듬 킴!
어허! 조하란! 심기준!
내가 너희 둘 다 얼굴 봐 놨어, 어?
― 오, 그런데 ‘비트레이어 리듬 킴’ 구호 좋은데? 이번 쇼콩(쇼팽 콩쿠르) 파이널 캐치프레이즈 어때?
[민심을 완전히 잃었구나, 김리듬.]‘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정 마에 선생님.’
지금 누구한테 민심 운운하는 거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마다 단원들과의 사이 최악이어서 스트라이크까지 겪었다는 양반이.
아, 내가 이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냐고?
‘당연히 전수정이지.’
전수정이 참 많은 걸 알더라고.
윤성이 끝까지 입도 뻥긋 안 하는 자기 자신의 비화라든가, 비화라든가, 비화 같은 것들 말이지.
어쨌거나, 떠들썩한 재회 인사를 마친 녀석들은.
갑자기 밑에서 악기를 꺼내서는 외쳤다.
―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할까?
― 좋아!
무엇을?
화면의 각도가 조금씩 변하면서.
점점 더 많은 단원들의 얼굴을 담는가 싶더니.
― 잘 보여? 우리 전임 지휘자님?
어느새, 화면은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 그러면, 시작하자고.
녀석들이, 연주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콘서트마스터 자리에 앉은.
이경민의 지휘에 따라.
홀스트의 《행성》 중 가장 감동적인.
의 선율을 연주한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모습보다 한층 더 감동적인 모습으로.
바이올린의 곁에, 첼로가 와 선율을 더한다.
선율에 선율이 겹치면서.
그 곁에 베이스가 선다.
비어 있던 선율들을 채워 나가는 모습으로.
비올라까지 모인 현악의 합주가, 공간을 채운다.
물방울이 모이듯, 그렇게 응집되는 연주자들.
트럼펫과 호른. 트롬본과 튜바.
기쁨을, 더 큰 기쁨으로 재창조하는 음악이.
너희들이, 하나둘씩 내 주위에서 공전을 시작한다.
한없이 거대해져, 완성되어 간다.
홀스트의 ≪목성≫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너희들이 나의 주위를 공전하는.
이 우주의 교향악이 완성된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그들은 스스로를 자축했고.
나는 눈에 물막이 끼는 것을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 박수로 녀석들의 축전에 감사를 표했다.
“정말…… 너희는…….”
대단한 녀석들이야.
나는 마지막 말만큼은 속으로 삼켰다.
― 하하하! 김리듬, 설마 우냐?
“안 울었거든?”
― 그런데 김리듬. 긴장 안 돼?
― 맞아. 나는 떨려서 못 칠 것 같은데.
“긴장이라……. 물론 긴장되지.”
갑자기 조하란이 급발진을 한다.
― 거짓말하지 마! 긴장할 리가 없어!
― 맞아! 어떻게 그게 긴장한 사람의 솜씨냐고!
조하란, 정말 대단한 아이.
1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도, 꼭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떠드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소음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소우현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한마디 했다.
― 이봐요, 지휘자님.
녀석은 묘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더니.
작정한 듯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 반드시, 우승해서 돌아와요. 우승 못 하면, 그냥 돌아오지 마! 거기서 살라고!
고맙다, 소우현. 아주 고마워.
* * *
녀석들과의 화상 채팅이 끝난 후.
나는 전수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산만하지?”
“정신 나갈 것 같아.”
“그래도, 다들 하나로 뭉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 이제 내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굴러야 할 테니까.”
어이구.
“자, 그러면 이제 파이널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시작해 볼까. 협주곡을 위한 준비를 말이야.”
협주곡의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연주한 독주곡과는 다르다.
이전과는 다른 통제력을 요구하면서도.
젊은 쇼팽의 열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야 한다.
‘동시에, 오케스트라와 맞서야 하지.’
100개의 소리와 맞서면서.
그 100개의 소리 위에서 노래해야 한다.
나는 오랜만에 윤성에게 부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 마에 선생님.”
[그래. 시작하자.]그의 폴터가이스트까지 동원한 연습이.
이제 시작된다.
괴이할 정도로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 반서준과.
우승이라는 목표를 똑바로 바라보는 민아.
아직 천재성을 놓치지 않은 리칭윈 사이에서.
우승을 쟁취하기 위해.
* * *
1악장의 고뇌와 비통함.
그리고 그것을 뚫는 열정.
‘아름다운 봄의 달빛 아래서 꾸는 꿈’과도 같은.
2악장의 칸틸레나.
그리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 채.
순수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지막 3악장 론도 비바체까지.
모든 연습을 마친 순간.
나는 이사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 오랜만이야, 리듬 군.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 자주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쇼팽 콩쿠르는 잘 지켜보고 있어.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기말 실기에서 만점을 맞은 애제자를 대하듯.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자는 폭신이즈 사이에 파묻힌 채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 사과할게 하나 있어, 리듬 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바르샤바에 직접 가서 응원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직접 가지 못할 이유가 생겨 버렸거든.
그녀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이유가 그녀의 동생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 우승을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면, 이만.
“감사합니다.”
이제, 쇼팽 콩쿠르 파이널을 앞둔.
마지막 밤이 저물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방문객이.
내 마지막 순간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김리듬. 오랜만.”
“희재 선배!”
그는 귀한 와인을 품에 안은 채.
나를 직접 찾아왔다.
“아니. 여기까지 굳이 오신 이유가?”
“산 지오베제 품종 포도로 빚은 이탈리아 와인이야. 같이 한잔하려고 가지고 왔지.”
“저 아직 미성년자거든요?”
“이제 마셔도 되지 않나?”
어허!
“그렇다면, 혼자 마시도록 할게. 사실 이 포도에는 멋진 별명이 있거든.”
“그게 대체 뭔데요?”
“‘제우스의 피.’”
좀 오글거리는 별명인데.
“아. 청금석에 대한 멋진 비유를 찾았는데, 그걸 들려주고 싶어서.”
“당장 뉴욕으로 돌아가세요.”
[그래. 부정 타니까 돌아가.]미쳤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중증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비유를 내게 들려주었다.
“‘하늘이 지구에 떨어져 돌이 되었다.’”
그는 조율이 잘 된 악기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김리듬. 모든 긴장과 불안은, 이 자리에 내려놓도록 해. 내일, 너는 최고의 연주를 해낼 테니까.”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내게 행운을 가져다준 많은 사람들처럼.
그 또한, 내게 진실된 사람이었으니까.
“고마워요, 희재 선배.”
* * *
드디어 10월 17일의 아침이 밝았다.
프레데릭 프란치스코 쇼팽의 기일이자.
쇼팽 콩쿠르 파이널의 날이 온 것이다.
“정 마에 선생님.”
[긴장되냐?]“네.”
[그래. 솔직하게 인정해라. 자기 자신에게는 거짓말하지 말아야지.]이상할 정도로 심장 박동이 고요하다.
마치, 마지막 순간을 준비라도 하듯.
조용히 세면을 마치고, 아침을 먹으려던 나는.
갑자기, 순수한 질문을 떠올렸다.
“정 마에 선생님.”
[또 왜?]“혹시,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연주회의 마지막 화음을 기억하세요?”
나는 보았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죠?”
[그래. 늘 삑사리가 나고, 리허설 때도 삑사리가 잦던 그 ‘환희의 송가’의 마지막 화음. 신기하게도, 그날만큼은 정말 완벽했어. 그 이상 완벽할 수 없었지.]“그 연주의 실황이 남지 않은 게 정말 아쉬워요.”
[언젠가는 너도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할 시간이 올 거다. 그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항상 기억해라. 그것이, 너의 마지막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그럴 거예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내게 닥쳐올 송가의 시간을.
* * *
그러나 나의 즐거움과 다짐은.
반서준의 연주를 듣는 순간.
바로 깨져 버렸다.
비인간적으로 완벽한 연주가.
‘나와 완벽히 모든 것이 반대인 연주다.’
무대 위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기교와 음악의 괴리가, 정말 극심하군.]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연주이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최악의 연주였다.
반서준의 음악은.
이제, 그저 기교의 노예가 되어 버린.
완벽한 혼종이었다.
[그러나, 콩쿠르의 심사위원이라면…….]‘반서준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요.’
* * *
“[마지막 1분은 정말 놀랍군요.]”
에밀리오 아르날디의 말은 완벽한 반어법이었으나, 그것이 반어법임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교적으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으나.
음악적으로는 괴이한 변종이자 혼종 같은.
“[정말 대단하죠, 마에스트로 아르날디.]”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만.]”
“[네에?]”
분명히, 우승에 가장 가까운 연주지만, 아르날디는 이런 연주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반서준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아이는.
사실상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존재를.
마음껏 유린한 셈이다.
부정하고, 조롱하고, 모독한 것이다.
‘같은 한국인임에도, 김리듬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달라.’
마치, 자신은 김리듬의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는 듯.
그런 몸부림이 느껴지는 연주였으니까.
‘그러나,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이 아르날디를 괴롭게 했다.
* * *
반서준의 연주는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이어, 깔끔한 연주를 들려준 크리스티안 자이퍼와.
진한 프랑스 에스프리로 넘친.
데지레 베르나르의 연주가 끝난 후.
“[4번. 김리듬.]”
마침내, 내가 파이널 무대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혼자 무대에 서서 관객과 심사위원들의 압박을 견뎌야만 하는 1차, 2차, 3차와는 달리.
오케스트라가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이전의 무대들을 합친 고독한 투쟁이 되어야만 하는 이 자리에 앉은 나는.
[정말 지독하군.]반서준이 남겨 놓은 연주가 지닌 ‘악의’를.
똑똑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연주에 악의를 담아 여기 남겨 놓았어. 네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너를 향한 공격이 시작될 거다. 너는, 그것을 견디면서 연주를 해야만 해.]녀석이 남겨 놓은 음악은.
내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전력을 다해 나를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나도, 윤성도.
반서준이 남겨 놓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자랑스럽게 지켜보는 어머니가, 저기서 나를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엄마.’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입 모양으로 속삭인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음악에 모든 전압을 맞추었다.
[김리듬.]“네, 정 마에 선생님.”
[반서준에 대해서는 잊어라. 음악에만 몰입해. 음악은, 사람을 현실에서도 꿈꾸게 한다는 것을.]“드라마 의 시놉시스였죠.”
[그래.]이제는 나의 차례다.
[너의 인생 전부를, 건반 위에 올려라.]오케스트라를 뚫고, 반서준의 방해를 뚫고.
지난 나의 3년의 시간이 응축된.
오렌지 블루의 음악으로.
나만의 음의 건축을 완성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밀어낸다.’
유려하게, 동시에, 간절하게.
간절함이란, 바로 시간의 유한성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시간의 흐름 위에.
필사적으로 나의 흔적을 음악으로 남기는 것이다.
[새겨라. 너의 추억의 총량을.]이 비극적이면서도 찬란한 1악장의 음악에.
나는, ‘추억의 총량’을 대입한다.
시간에 시간이 덧입혀지면서.
점점 찬란한 색채를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