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29
29화. 나는 김리듬이다 (3)
오디션이 끝난 후에도 나는 쉴 틈이 없었다.
일단은, 기말시험 준비에 충실해야 했다.
전공 과목인 음악만 해도 시창/청음, 전공 실기, 음악 이론 셋인데다.
여기에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까지 푸짐하게 얹어 주셨으니, 공부해야지.
정선율과 함께 연습실에서 영어 시험 범위를 들여다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하, 진짜 머리에 쥐 난다. 쥐 나. 내가 고작 영어 공부 따위나 하러 예고에 온 거냐?”
“뭐, 다 쓸데가 있겠지. 나중에 해외 진출하게 되면 영어는 필수잖아.”
“저는 해외 진출 같은 거 안 할 건데요, 김리듬 선생님? 내수용 피아니스트 될 건데요.”
“관객들이 퍽이나 너 같은 내수용 피아니스트 좋아하겠다, 인마.”
“마! 내수용 좋아할 수도 있지!”
“응. 없어. 돌아가.”
“쳇.”
그렇게, 고개를 처박고 영어 단어장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선율이, 또 벌떡 고개를 쳐들고 창문 밖을 보면서 한마디 했다.
“벌써 여름이네.”
“그러게.”
“이번 여름방학 때 너,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멤버들하고 같이 합숙 리허설 한다면서?”
“응. 아마 거기 틀어박혀서 연습만 할 것 같아.”
“그런데, 그거 사실상 마스터클래스라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그렇다고 그러더라. 어떤 선생님들이 오실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지만. 전수정이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사실 전수정은 강사진을 공개했다. 우리에게만.
‘보안 엄수를 하도 강조해서 말이지.’
나는 거장 피아니스트 최시현만 잘 알지만.
나머지 강사진도 세계적인 거장이니, 마스터클래스의 질은 엄청날 것이다.
물론, 검증을 통과한 소수의 학생만 갈 수 있지만.
‘그런 엄청난 마스터클래스를, 오디션 우승 보상으로 무료 참여하게 되다니.’
몇 달 전만 해도 꿈이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다.
펼쳐 놓은 영어 단어장으로 눈을 굴리던 정선율은, 평소답지 않게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김리듬, 저기 말이야…….”
“응? 왜?”
“……아니야. 아무것도. 공부나 하자.”
녀석은 그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했고, 그래서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 * *
“하아암. 그러면 수고해라, 김리듬. 난 먼저 간다.”
“응. 수고했어.”
혼자 남은 나는 바로 실기 시험 연습에 집중했다.
어머니에게도 미리 카톡을 드렸다.
― 엄마 저 오늘 밤은 연습실에서 자요 신경 쓰지 말고 일찍 주무세요
― 그래 몸 조심하고 내일 아침 잘 챙겨먹고
― 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꼭 보내야 하는 말을 덧붙였다.
― 엄마 사랑해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 그래 고마워
나의 기말 전공 실기 곡은,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유명한 ≪터키 행진곡≫이 있는, 바로 그 곡이다.
[모차르트는 어렵지. 타고나지 않으면, 아니, 타고나더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는 곡이야. 그 이유는 무엇일까?]“이미 완벽하게 직조된 곡이기 때문에, 역으로 연주자의 개성을 거기에 끼워 넣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 이제는 툭 던지면 답이 척척 나오는구나. 그러면, 모차르트를 연주해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방법은 두 가지다.
애초에 모차르트를 연주하기 위해 타고났거나.
아니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거나.
“정마에.”
[왜.]“생각을 좀 해 봤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는 아닌 것 같아요.”
[나도 알아.]“뭐 하나 쉬운 게 없군요, 정말.”
[그러니 노력할지어다! 통통 튀는 개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어서!]그래.
노력하자.
지금의 나, 김리듬은.
노력한 만큼 성장하고 진화하는 피아니스트니까.
[≪터키 행진곡≫에서는 소리를 통통 굴린다는 개념으로 쳐야 해!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튀지 말고! 베토벤이나 쇼팽의 개념이 끼어들면 안 돼!]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밤의 잔향이 들어온다.
그 잔향을 열 손가락에 집중시켜.
피아노 건반 위로 굴러다니게 만들면.
그게 바로, 모차르트의 소리겠지.
[잘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툭. 투둑.
손가락과 건반 사이를 가로막는 질퍽한 느낌 때문에, 나는 결국 연주를 멈추고 말았다.
뚝. 뚝. 뚝.
“이런, 젠장.”
왜 코피가 터졌지?
코에서 한번 터진 핏줄기는, 휴지로 막으려고 해도 쉽게 막아지지 않았다.
[자, 여기 휴지.]“아아…….”
폴터가이스트가 도움이 될 때도 다 있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한참 전에 자정을 넘겼다.
“금방 멈출 거예요…….”
[아니, 쉬어. 너, 요즘 너무 무리했어.]“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안 돼. 집에 가서 자.]“집에 가서 잘 바에야 연습 더 할 거예요.”
[어휴. 무식한 놈.]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곡만큼은 지금 끝내야 한다.
“하아. 끝났다.”
마침내. 새벽 3시를 15분 남겨 놓은 시각에.
나는 드디어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고.
바로 연습실 구석의 소파로 기어가 기절해 버렸다.
* * *
[김리듬!]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지금 아침 일곱 시 반이야! 빨리 일어나!]“이런 젠장!”
드디어, 운명의 기말시험 날이 왔다.
점점 후끈해지는 초여름 공기를 헤치며, 나는 학교 정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후우.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어째 턱걸이로 합격했던 입학시험 때 생각이 나는데.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그 입학시험 때의 얼어붙은 공기와 입김, 불안과 기대, 초조와 기쁨이.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 멀게 느껴질수록 좋다.
그만큼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
교실 책상에 안착하기 무섭게, 시험지를 가지고 들어오신 최선희 선생님이 우리에게 통보하셨다.
“자, 이번 기말시험에는 폰을 걷도록 하겠다.”
“아, 왜요. 선생님!”
“맞아. 저번에는 안 걷었잖아요!”
“그 폰을 걷지 않은 중간시험 때, 폰을 이용한 부정행위가 터진 일은 다들 까먹은 거니?”
아, 그런 일이 있었지.
반서준한테 붙은 애 중에 김석구라는 놈이 있었는데, 저런 짓을 하다가 걸려서 0점 처리 당했다.
최 쌤의 날카로운 일침에 불만은 잦아들었지만.
가장 먼저 폰을 제출한 나와는 달리, 꼭 안 내는 녀석들이 몇 명 있다.
그렇다면, 최 쌤은 과연 어떻게 이 폰들을 찾아낼까?
“시리야!”
이 말을 외치기 무섭게.
녀석들이 숨겨 놓은 폰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최대한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내라고 할 때 내지 그러셨어요, 다들.
하지만, 선생님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빅스비!”
아까 전 ‘시리야’ 공격으로 걸리지 않았던 애들의 폰이 또 우수수 걸려들었다.
“푸흣! 크크크큭……!”
선생님의 시간차 공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기어이 빵 터지고야 말았다.
“자, 웃지 말고 시험 시작해라.”
‘좋아. 그러면 시작해 볼까.’
킥킥거리기 좋은 아침의 해프닝과 함께.
내 희성예고 첫 학기의 마침표가 될 기말시험이 시작되었다.
* * *
기말시험 일정은 빡빡하다.
오전 기타 과목 시험 후, 오후는 전공 시험.
“그러면, 시작하렴.”
“네, 선생님.”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해 앉아 있던 최선희 선생은, 김리듬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을 들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무서운 성장세야.’
그의 연주는, 자신이 어릴 적.
그러니까 여덟 살 때, ≪터키 행진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두근거림 가득한 시절로 그녀를 데려갔다.
‘아니, 잠시만. 두근거린다고?’
지금까지,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연주를 들으면서 두근거린 적이 있었던가.
‘그렇구나.’
이 녀석은.
무수한 학생들의 연주로 감정이 무뎌진 나를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구나.
하지만, 이제는 감정을 억누를 시간이다.
무릇 선생이라면, 학생의 연주를 냉정하게 듣고 평가해야 하니까.
“수고했다, 리듬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 * *
불같은 기말시험이, 드디어 끝이 났다.
“아아. 다 끝났다. 다 이루었어어…….”
[기말시험 하나 끝냈다고 인생 다 산 것처럼 늘어져 있네. 살판나지, 아주?]“흐흐. 이것이 바로 기말시험을 끝낸 자의 특권이죠.”
모든 시험을 끝내자마자, 나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은 연습실 안에서 늘어지게 쉬었다.
양말까지 벗어 놓고, 아주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그래. 축난 몸을 추스를 시간은 줘야지.]“안 그래도, 이제 슬슬 콘서트 레퍼토리를 진지하게 고민할 타이밍…….”
그렇게, 모든 기말시험을 끝내고 느긋하게 연습실에서 늘어져 있을 찰나에.
똑, 똑.
나는,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방문을 받았다.
“누구세요?”
“아, 역시 있었네.”
이 목소리는……?
나는 바로 연습실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 김리듬 군.”
“안녕하세요. 희재 선배.”
한희재.
내가 직접 작명한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로 낙점된, 바이올린과의 3학년생.
하지만 1학기 내내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인물.
“선물이야. 무알콜 스파클링 와인. 나이를 배려했지.”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내가 휴식에 방해가 된 건 아니지?”
“아, 아니요. 여기 앉으세요.”
그는 가져온 와인병과 잔, 과자를 꺼내 세팅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잔을 따라 주었다.
“축하해, 김리듬. 이제 어엿한 피아니스트네.”
“아직 갈 길이 먼데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정말 놀라운 연주였어. 그런 똘끼를, 실제 오디션 파이널 때까지 만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뭐, 열심히 했죠.”
그의 부드러운 음성은, 듣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녹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음성에 마음이 조금 녹은 내가, 스파클링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혹시, 귀신의 도움이라도 받은 거야?”
“풉! 쿨룩, 쿨룩!”
미친.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뭐 한잔 마실 때 공격이 자주 들어오냐.
“아니, 콜록, 콜록. 대체 그게 무슨…….”
“별거 아니야. 하하하.”
그는 스파클링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를 조금 당겨 내게 좀 더 가까이 밀착했다.
“연주를 들으면서도, 뭔가가 있구나 싶어서. 마치 귀신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 그게 무슨…….”
“우리 학교의 유명한 괴담. 혹시 알고 있어?”
알다마다.
“구교사 서쪽 끝 강당에는 망령이 있어서, 밤중에 강당 피아노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끝까지 연주하면 망령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 다만, 그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연주를 하면서 건반 위에 핏방울을 흘려야 하고, 진실되지 않은 자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으며, 나쁜 마음을 품고 임하면 무서운 저주를 받는다.”
왜 모르겠는가.
내가 바로, 그 괴담의 최대 수혜자인데.
“그러면, 귀신의 도움을 받아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아니, 전혀 모르고 있던 자신의 실력을 개화한 희성예술고등학교 피아노과 1학년 김리듬 군과.”
이제 완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내 옆의 망령에게 고정되었다.
“30도 되기 전에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망령 마에스트로 정윤성에게.”
윤성은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공동 설립자이자, 우리 학교와 연관된 괴담과 그 괴담의 해결에 무척 관심이 많은, 희성 예술고등학교 3학년 바이올린 전공 한희재가, 게임을 하나 제안하고 싶은데.”
그는, 환한 용모에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소름이 쫙 끼치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