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3
3화. 나의 친애하는 적 (1)
분명히 어제까지, 내게 ‘정윤성’이라는 이름은 이름만으로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그는.
악의와 사악함, 호기심과 의뭉스러움이 난잡하게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보기만 해도 멀리하고 싶은 사내였다.
자, 그러면 까다롭고 여러모로 성격 나쁘지만, 친절한 악우와 친애하는 적 사이를 오고 가게 될 그가 내게 내린 첫 레슨은 무엇이었을까?
[자, 그러면 이제 숙면부터 취해.]“네?”
그래. 바로 이거다.
숙면.
나와 동거(?)하게 된 귀신 정윤성의 첫 지시는, 귀신치고는 너무 현실적이라 내가 되물었을 정도였다.
[충분한 휴식은 음악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 푹 자고 푹 쉬어야 연주가의 재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거야! 자, 오늘은 일단 푹 자!]“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내일은 쉬어야겠네요.”
[왜?]“손가락을 다쳤으니 연습 제대로 하기는 글렀어요. 아무리 테이핑을 감은 채로 한다고 해도, 도저히 100%를 발휘할 수가…….”
[아마 손가락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멀쩡해져 있을 거야.]참으로 허황된 말이지만.
묘하게 믿고 싶어지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잠들기 직전의 내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잘 자, 김리듬. 내일부터는 세상이 조금 더 즐거워질 테니까.]* * *
잠에 빠져든 나는 아주 긴 꿈을 꾸었고.
그 꿈의 영화관은 정제되지 않은 과거를 상영했다.
지금은, 나 혼자만이 기억하는.
아무도 없는 밤바다를 적시며 소멸하는 눈송이처럼 휘몰아치는 그 기억들.
‘넌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어.’
당신과 같이, 기뻐함과 슬퍼함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축제처럼, 여행처럼 항상 새롭게.
날마다, 상승의 연주회를 함께 하던.
‘선생님과 약속하자. 반드시, 위대한 음악가가 되어 다시 만나기로.’
그 달콤하고, 짜릿하고, 아릿한 꿈들.
그 과거에 감정을 이입하고, 눈물을 흘릴 즈음.
나는 꿈에서 깨었고.
꿈의 영화관이 닫히면서, 기억들도 모두 흩어졌다.
* * *
[일어나, 김리듬!]“헉!”
늘 나를 깨우던 어머니의 익숙한 목소리가 아닌, 뜬금없는 외간 남자의 목소리를 모닝콜 삼아 일어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당해 본 사람만이 알리라.
게다가 그 남자가 반투명한 귀신이라면, 더더욱.
“아이씨, 깜짝 놀랐잖아요!”
“아, 놔…….”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울어서 부은 눈시울을 비비면서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아주 긴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 모르겠다. 일단은 씻어야지.’
대충 세수라도 하려고 피곤함이 전혀 가시지 않은 몸을 끌고 욕실 불을 켠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상처가 없어졌어?’
어젯밤의 손가락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번을 다시 들여다봐도 깨끗하다.
혹시 몰라 구부렸다 펴 봐도, 조금도 따끔하지 않다.
“전혀 안 아프네?”
[내가 말했잖아. 싹 나을 거라고.]“정말이네요. 그런데 정윤성 씨?”
[마에스트로라고 불러야지.]“지금처럼 계속 제 옆에 계실 건가요?”
[나도 안 그러고 싶어. 일단은 네가 성장해야 조금이나마 멀어질 수 있다는 것만 얘기하자. 얼른 씻어.]“윽.”
즉, 그의 말은 내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면 빨리 음악적으로 성장하라는 뜻인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상처 없는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기분이 핏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같다.
마치 오늘은, 어제와는 단절된 새 미래라는 느낌이.
내친김에 머리까지 싹 감고, 물기를 털면서 나오니.
식탁 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쪽지가 밥과 계란프라이, 오이소박이와 함께 놓여 있었다.
─ 바빠서 오늘은 일찍 나간다. 밥 차려 놨으니까 먹고 가렴. ─
“잘 먹겠습니다, 엄마.”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아침을 입에 욱여넣고 있으니, 식탁 위에서 부유하는(귀신은 식탁에 앉을 수 없으니) 정윤성이 내게 물었다.
[맛있냐?]“당연하죠.”
[그래. 아침은 든든히 먹어야지.]“원래는 대충 라면 먹을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연주하고 싶으면 라면부터 끊어.]“예술고 1학년생은 라면 먹을 시간도 없는 존재…….”
[지금 내 앞에서 시간 타령을 하는 거냐, 응?]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말이야, 연습할 시간도 없어서 매일 4시간씩 자면서도 절대 라면은 안 먹었어! 몸 관리 안 하면 너, 절대 집중해야 할 순간에 집중 못 해! 라면 먹으면서 연습하면 몸 다 버린다고!]이 귀신이, ‘라떼는’을 입에 달고 사는(아니, 죽은) 초특급 젊은 꼰대라는 사실을.
아니, 그런데 뭐 이렇게 현실적인 귀신이 다 있어?
무슨 귀신이 식습관까지 일일이 간섭을 하냐고!
“아, 나는 모르겠고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야. 어차피 난 너한테 붙어 다니거든?]아, 정말 어제까지 품고 있던 존경심이 실시간으로 용해되는 것 같다.
나는 대충 밥을 먹고 재빨리 교복을 걸치고는 학교 가는 정류장으로 달렸다.
* * *
하필, 오늘은 첫 시간부터 화성학 수업이다.
“오늘 분석할 곡은 멘델스존의 《가사 없는 노래》 Op.30의 1번이다. E♭장조, 안단테 템포의 섬세하고 유려한 곡으로…….”
가뜩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 졸린 내용이 한가득인 화성학 수업을 듣고 있자니 진짜 미치겠다.
결국 나는, 선생님의 수업을 자장가 삼아 고개를 떨구고 입학 후 처음으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
“김리듬!”
[김리듬!]“헉!”
사람과 귀신이 스테레오로 내 귀청을 때리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네, 네. 선생님!”
“아주 잠이 잘 와, 응?”
“죄, 죄송합니다…….”
“그러면, 여기 앞에 나와서 이 화성 분석 문제 한번 풀어 봐라.”
같이 수업 듣는 아이들의 반은 나를 비웃었고.
나머지 반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내 옆자리에 앉은 선율이는, 당연히 전자와 후자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어휴, 이딴 것도 친구라고.
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나와서는, 선생님이 내미는 마카를 넘겨받았다.
그런데.
‘어라?’
분명히 처음 접하는 곡인데.
익숙한 느낌이 든다.
아니, 그걸 넘어…….
‘이거, 너무 쉬운 곡이잖아?’
나는 더 생각하지도 않고, 마카로 거침없이 곡의 화성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E♭장조의 으뜸화음(I).’
슥. 스슥.
‘3마디부터는 딸림7화음(V7)으로 화음이 바뀌고, 바로 부속화음인 2도화음의 1전위(ii6)로 넘어간다.’
스슥. 스슥.
‘ii6화음을 유지하던 4마디는 돌연 중개화음으로 이어지고, 5마디부터는 다시 딸림7화음. 그리고 6마디에서 으뜸화음으로 복귀.’
스슥.
흠잡을 데 없는 문제 풀이를 끝내고 돌아서자.
모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모습이 보였다.
“저기…… 선생님? 다 풀었는데요.”
“어? 어, 그래.”
선생님은 흠,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졸지 마,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정선율, 네가 나와서 풀어 봐.”
“헉!”
“빨리 안 나와?”
“네, 네에. 갑니다…….”
나는 결국 문제를 못 풀어 선생님께 구레나룻 제초를 당할 위기에 처한 선율이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뭐지?’
화성을 분석하러 앞으로 다가간 순간.
곡이, 스스로 ‘자신을 이해시킨’ 듯한 이 느낌은?
‘혹시, 이 양반 때문인가?’
나는 내 머리 왼쪽 45도 위 허공에서 드러누운 채 ‘애들 팔자 좋네’라는 표정으로 수업을 바라보는 정윤성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한껏 나태함을 과시하기만 했다.
* * *
‘좋아. 그러면 연습을 시작해 보실까.’
나는 희성예고에 입학하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천문학적인 학원비를 댈 수가 없으니, 그만큼 학교 방과 후 연습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럴수록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과의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지만.
내게는 이게 대안이 없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어제까지는 말이다.
[쇼팽의 연습곡 《겨울바람》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왼손에 있어.]세상 어디서도 못 구할 최고의 음악 교사가 옆에서 실시간 지도 편달을 해 주니, 국밥이라도 한 그릇 뚝딱한 것처럼 든든하다.
하지만, 그는 저번처럼 내 몸에 들어오지 않은 채 연습을 개시했다.
[《겨울바람》의 멜로디는 바로 여기, 너의 왼손 엄지로 만드는 거야. 왼손 엄지로 프레이즈(악구)를 만들어서 선율을 완성시켜야 해.]“네.”
[그러면, 선율선을 어느 단위로 따야 할까?]“어…… 이음줄이 있는 두 마디 아닐까요?”
[그렇지. 그러면, 일단 왼손 선율선부터 완성하자.]난삽하고 두서없으며, 의미 없는 노력만 흩뿌리던 나의 연습에 날카로운 날이 달렸다.
그 칼날들이 음악에 선을 죽죽 긋기 시작한다.
칼날 같은 선들이, 무자비한 냉혹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 이제 그 유명한 오른손 반음계 하강을 연습해야지. 오른손을 올려서, 아니, 그게 아니야!]내가 오른손을 올리자마자 그의 호통이 떨어졌다.
[로테이션이라는 게 있어. 손바닥이 보일 정도로 손을 세워서 치는 방법이야. 손바닥을 왼쪽으로 드러내고, 오른쪽으로 드러내고, 그렇지. 그렇게.]그가 가르쳐 주는 방식은 극히 생소했다.
그렇게 치려니 근육들이 바로 긴장했고, 곧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후우.”
[길게 칠 필요 없어. 일단 한 마디 정도만. 그렇지. 그렇게 완성하면, 이제 다른 악구에도 적용하는 거야.]그는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법을 잘 알았다.
[부점리듬 흐트러진다! 머릿속에 리듬을 새겨! 이름값을 하라고! 뇌가 기억하고 오른손이 준비하고 있어야 삑사리를 안 내는 거야!]엄격하지만, 이 정도면 버틸 만하다.
아니, 오히려 고마울 정도지.
틀릴 때마다 손등을 때리던 내 두 번째 피아노 선생.
나를 방치하다시피 버려두면서 ‘너 이거 계속하면 돈이나 빨아먹을 거야.’라고 악담하던 중학교 때 피아노 선생을 생각하면, 선녀나 다름없다.
그는 냉정하고, 예리하며, 정확하게 나를 교육했다.
[페달은 나중에 써도 돼. 지금은 정확하게, 네가 만드는 소리가 정확한지만 듣고 확인하면 돼.]나는 그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연습 과정을 짚어 나갔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분명히 어제보다 더 많은 연습을 했는데.
손목을 찌르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이네. 그만큼 연습량을 더 늘려야지.’
[자, 생각보다 잘 따라오네. 그러면, 이제는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가 보자.]“네. 좋아요.”
나는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겨울바람》의 첫 음계를 눌렀다.
* * *
“오늘도 정말 잘했다, 민아야. 곧 콩쿠르 시작이지?”
“네. 선생님.”
“그러면, 이만 하교하려무나. 내일 보자.”
“네.”
짐을 챙기고 하교하는 민아는, 문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다른 연습실의 소리들을 소음으로 느꼈다.
‘지겨운 소리들.’
한심하지만, 지적하고 싶지 않다.
더는 타인과 연관되는 일은 싫으니까.
그런데, 모퉁이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
누군가의 쇼팽 연주가 그녀의 영혼을 흔들었다.
엉망인 기교와 빈들거리는 음색에도.
그것들을 순간적으로 압도하는 강렬한 ‘음악’이.
저 연습실에서 들렸다.
‘대체 누구지?’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그 연습실로 뛰어갔다.
‘우리 학교에 저런 애가 있었나?’
혹시, 자신도 모르는 전학생이 왔나?
그녀는 연습실 사이에서 그 연주를 찾았지만.
자신을 매혹하던 그 소리는 이미 그친 후였다.
“이런, 아르바이트하러 갈 시간이잖아.”
덜컹, 하고 문이 열렸고.
“헉!”
연습실 밖으로 나온 그는 그녀와 부딪칠 뻔했지만.
그녀는 그의 교복에 달린 명찰을 놓치지 않았다.
“너였구나. 김리듬.”
“이민아?”
그는 경계하는 듯한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안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미안하지만, 비켜 주겠니? 난 이만 가 봐야 하거든.”
“아, 그래.”
자신과 같이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듯한 표정.
하지만, 민아는 표정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다른 쪽이었다.
“분명히, 순간적으로 소리가 달라졌는데.”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