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여름방학 마스터클래스 (1)
모든 것이 끓어오르는 계절이 왔다.
길가의 잡풀도.
눈앞의 건물들도.
아침나절의 높디높은 구름도.
전부 끓어올라 증발할 것 같은 계절이다.
이런 계절의 푹푹 찌는 아침 여덟 시에, 나는.
“어, 미치겠다.”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우리를 합숙 장소로 태워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문이 굳게 닫힌 학교 앞, 땡볕이 아주 잘 드는 곳에서.
인내심의 심지를 다 태워 버린 나는 서강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강준.”
“왜, 김리듬.”
“우리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좀 속 시원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왜긴 왜야. 우리 오케스트라의 어떤 첼리스트께서, 마클(마스터클래스) 전에 빨리 모이면 추가 점수가 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으니까 그렇지.”
모두의 시선이, 아까 전부터 필사적으로 우리의 눈초리를 피하는 김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봐?”
“…….”
“아니! 다들 동의했잖아! 일찍 모이기로! 그러면 된 거 아냐?”
“그래. 그래서 이렇게 많은 애들이 일찍 왔지. 첼리스트 김 모 씨가 퍼뜨린 ‘늦게 오면 불이익이 있다’는 가짜 뉴스 때문에.”
“…….”
와, 저 얼굴 뻔뻔한 거 봐라.
내가 앞으로 김가인 말 믿으면 사람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30분이 더 흘렀을까.
쿠르르르. 끼익.
아침부터 익어 가는 우리를 비웃듯. 우리를 실어 갈 관광버스 두 대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다.
“자, 빨리 짐부터 실어! 김가인도 같이 실어 버려!”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저거 저거, 첼로도 못 했으면 어디 오지에다가 갖다 버렸을 텐데.”
“그러게. 또 첼로는 오지게 잘해서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정말.”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녀가 이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입지와 위상을 지녔는지가 훤히 보이는 듯하다.
나는 단원들의 짐 나르기를 도와주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출발한다.”
“흐아아! 드디어 출발이다!”
“자, 출발 기념으로 같이 동행하는 성악과 분들 노래 한 곡 해 보시죠!”
“김가인.”
“네?”
“시끄러워.”
“네…….”
어쨌든.
드디어, 출발이다.
물론, 일찌감치 곯아떨어진 다른 단원들과 다르게 나는 가면서 잘 수 없었다.
[쇼팽 연습곡 Op.10의 1번. 이번 마스터클래스 때 이 난곡을 마스터해서 네 스탯을 오각별로 만들자. 우선 연주법부터 미리 전부 숙지하고 가야겠지?]“어제 123번 얘기했잖아요.”
[그만큼 중요하니까.]이 망령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있겠냐고.
[이 곡의 진정한 난코스는, 오른손 손가락 4번과 5번 사이의 도약이 갑자기 넓어지는 중반부 이후야. 이럴 때는 어떻게 연주해야 할까?]“새끼손가락이 미리 가서 건반을 누른다는 느낌으로 연주해야죠. 어제 456번 얘기해서 잘 기억합니다.”
[바로 그거야. 까다로운 반음계 패턴, 리듬 패턴을 전부 미리 머릿속으로 쳐 봐야지. 곡에 감정을 담아서 연주하는 건 그 다음이 되어야 하고.]음악을 강하게 만드는 기교와 기술을 철저하게 완비시킨 후.
[이 곡에서 무엇이 느껴지니?]“터질 것 같은 낭만. 넘실거리는 대양의 파도.”
[네가 생각하는 감정의 필터는?]“다장조 기반의 레드화이트와 코발트블루, 그리고 반음계 기반의 다크 브라운이요.”
[좀 더 어두워야 하지 않을까?]“아니요. 지나치게 어두운 감정의 필터는 오히려 균형을 해칠 수 있어요.”
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감정과 색채, 다이내믹으로 음악을 완결한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균형과 조화.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부드럽지 않으면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마에스트로 정윤성의 쇼팽 연습곡 강의를 수강하다 보니.
“바다다! 드디어 다 왔어!”
버스 차창 밖의 풍경은, 어느새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동해안으로 필터를 갈아 끼운 후였다.
* * *
전수정을 위시한 주최 측에서 잡아 놓은 숙소는, 고성의 쾌적한 고급 콘도였다.
희재 선배와 그녀를 비롯한 주요 학생들은, 미리 숙소에 와서 준비를 마친 후였다.
물론, 우리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제 곧 마스터클래스 강사진이 발표되겠네.”
일단, 나를 비롯한 피아니스트는 최시현이 가르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최시현.
정윤성과 같은 학년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세계를 평정한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전업한 정윤성과는 달리, 최시현은 피아니스트로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고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젊은 거장이 되어 있다.
나는 윤성에게 그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친했어.]‘정말요?’
[녀석에 대한 공략법이라도 얻을 요량이라면 아직 일러. 녀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연주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놈이라서.]‘그래도, 힌트 정도는 줄 수 있잖아요.’
[자기 같은 놈을 좋아하기는 하지. 가령, 나 정윤성 같은?]‘성격 나쁘고 변덕스러운 인간을 좋아한다는 말이로군요.’
투닥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안내 방송이 들렸다.
― 지금 막 도착하신 학생 여러분에게 안내 방송 드립니다. 30분 후인 오후 1시에 희성예고 송수현 이사장님의 환영 인사말이 있을 예정이니, 학생 여러분들은 모두 짐을 각자 숙소에 놓으신 후 대강당으로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좋아. 그러면 일단 짐부터 방에 던져 놓자.]나는 바다가 잘 보이는 숙소에 짐을 둔 후, 바로 대강당으로 향했다.
단상 위에는 이번 여름 합숙의 기획자이자 최종 결정권자인 송수현 이사장님이 서 있었고.
맨 앞줄에는 희재 선배와 전수정이 있었다.
둘 다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침내, 오후 1시를 가리키는 알람이 울리고.
이번 합숙 리허설에서 강사진 역할을 맡을 음악가들이 하나하나 들어오자,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와, 진짜야?”
“어떻게 섭외했지?”
“이번 마스터클래스, 장난 아니네.”
나도 눈을 의심했다.
유명한 공연 동영상에서 보던 분들이 한 분씩 한 분씩,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내 시선은, 그중 젊고 오만한 인상의 피아니스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와, 쟤는 늙지가 않네. 신기할 정도야.]최시현은 이사장님과 포옹하고는 바로 의자에 착석했고, 모두 자리에 앉자 그녀가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사장님의 음성은 또렷하고 명쾌하며 깨끗했으며.
태도는 간결하고 절도 있으면서도 당당했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이런 경험이 적지 않음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왔다.
“사실, 이런 대단한 합숙 리허설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분들의 노고가 필요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양해도 구해야 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 기간을 기다려 준 학생 여러분과, 다른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와 주신 훌륭한 강사진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예의상 박수가 한 바탕 쏟아졌고, 그 박수가 그치기 무섭게, 이사장님은 본론으로 직행했다.
“음악은 모두의 것이며, 모두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저음이 적당하게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서 신뢰감을 앗아 가는 힘이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는 타인의 신뢰감을 가져가는 데 능하다는 뜻이리라.
“음악은 모두의 것이며, 모두가 듣는 것이 되어야 하지만,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일정 이상의 열정과 노력과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합니다. 열정은 음악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열정만으로는 음악을 할 수 없으니까요.”
정론이었다.
“음악은 혼자서도 연주할 수 있지만, 홀로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음은 하나의 소리밖에 낼 수 없으니까요. 결국 음악가들은 같이 모여서 연주를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들이, 같이, 모여서, 연주할 수 있다는 기적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성적인 문장 구조에 감성이 배인 단어들을 섞어 가며 자신의 포부를 밝힌 이사장님은, 이제 그 대단한 강사진을 천천히 소개했다.
“우선, 바이올린 학생들을 지도하실 마에스트라 레이첼 포저를 소개해 드립니다.”
희재 선배와 임지호를 비롯한 바이올린 쪽에서 박수가 터졌다.
레이첼 포저.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를 역임했던 거장.
그런 그녀가, 바이올린 학생들을 지도한다.
“첼로 학생들을 지도하실 마에스트로 장 포미에르입니다.”
리옹 국립고등음악원의 정교수이신 프랑스의 거장 첼리스트에.
“피아노 학생들을 지도하실 마에스트로 최시현입니다.”
“우와! 최시현!”
드디어, 가장 기대하던 최시현까지.
하나같이 쟁쟁한 강사진이다.
그 밖에도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트럼펫, 호른, 타악기 등등…… 많은 거장들이 소개된 후.
“마지막으로, 성악과 학생들을 지도하실 마에스트라 신혜경을 소개합니다.”
바로 성악과 학생들이 앉아 있는 쪽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졌다.
신혜경.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빈 슈타츠 오페라 극장.
런던 글라인드본 오페라 극장을 정복한.
세계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그녀가, 이번 합숙 리허설 강사진으로 온 것이다.
나는 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무지막지한 강사진을 섭외한 이사장의 미친 섭외력에 놀랐다.
‘우와. 이사장님,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었네.’
* * *
첫날 저녁 시간은, 이번 마스터클래스의 몇 안 되는 자유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이용해 희재 선배와 독대할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으니까.
“아니. 이런 수상하신 분이 이런 평범한 시간에…….”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 괜찮지?”
능글맞음. 순진한 척. 호기심. 그리고 장난기.
나는 이런 감정들이 얼굴에 묻어나는 선배의 얼굴을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화보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용모에.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여유와 자부심.
그리고, 절도 있고 빈틈없는 태도까지.
“내 정체를 알려고 고군분투했다고 들었는데.”
초구부터 직구를 던지시네요.
어차피 둘러대는 건 의미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있는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아, 뭐, 그랬죠.”
“표정을 보아하니, 뭐 없었나 보네?”
“이렇게 오신 김에, 흔쾌히 알려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당연히 못 알려 주지. 그런 중요한 난제를 쉽게 알려 주면 너무 재미가 없잖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내게 던진 힌트를 토대로, 답을 캐묻는 것이다.
“선배. 저번에 제게 난제를 낼 때, ‘나를 구원할 역량이 되는지 시험하고 싶었다’라는 이유를 들었죠?”
“그랬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는 식판에 담아 온 저녁을 복스럽게 먹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보다 김리듬. 이 케밥 맛있다. 많이 먹어.”
“아니, 선배. 말 돌리지 마시고요.”
아주 여우가 따로 없어.
“하하. 알았어, 알았어.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은 밝혀냈지. 그렇지?”
“네.”
“하지만 나는 지금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해서 너와 대화하고 있어. 심지어,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고 너와 대화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마치, 실재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요.”
당사자의 입으로 기묘한 비현실에 대해 듣는 기분은 정말 묘했지만.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선배는 실체화된 유령인가요?”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아니야. 난 절대 유령이 아니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사어를 덧붙였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