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37
37화. 두 번째 마스터클래스
고민이 사라지니, 행동이 당당해졌다.
‘때로는 대담하게.’
묵색의 붓으로 선율선을 슥슥 그어 나가다가.
‘때로는 섬세하게.’
빛으로 꽃을 그려, 검은 물 위로 떨어뜨린다.
절묘한 교직만이 이 곡을 완성시킬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담아라.]두텁고 거칠기만 한 질감의 첼로 음향이.
부드럽고 묵직한 벨벳이 되어 간다.
실크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질감을.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짙은 원색을.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트럼펫의 음향을.
‘피아노에 담아 흩뿌려야 한다.’
다채롭게 폭발하는 악기들의 폭죽을.
피아노로 옮겨 그대로 발산해야 한다.
[좋아. 연습을 재개하자. 결과물이 좋으면 받아들이고, 그르면 바로잡아 줄 테니까.]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정말 난곡이다.
해결되었다 싶으면 다시 벽이 나타나고.
파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색다른 함정들이 솟아나 나를 가로막는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단련하는 곡이지만.
‘오히려 좋아…….’
이것들을 겪으면 겪을수록, 좌절감과 낙담 대신 호승심과 도전 의식이 샘솟는다.
더 부딪치고 싶다.
온몸으로 돌진해, 정면에서 충돌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나는, 이 정도로 몰입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시간을 잊고 음악에 침식한 지 한나절.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했어.]“후우. 더 하고 싶어요.”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마스터클래스를 위해서라도, 오늘의 너는 반드시 쉬어야만 해.]“아, 드뷔시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일단 라흐마니노프를 잠시 제쳐 놓고.
내일 마스터클래스 준비를 위한, 마지막 드뷔시 연습에 돌입했다.
* * *
마에스트로 최시현의 두 번째 마스터클래스는.
첫 수업 같은 파국 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그의 화려한 꽃남방이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두 번째 시간이네요.”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그의 저 패션 센스는 대체…….
“다들, 이번 시간에 같이 할 곡 예습해 오셨죠? 어떤 곡인지 기억하시죠?”
“드뷔시의 ≪영상≫입니다, 마에스트로.”
“네, 좋아요. 안 했다고 대답하면 제가 굉장히 곤란해질 차였는데, 이규재 학생이 대답 잘 하셨습니다.”
그는 첫날과는 다르게 바로 피아노에 앉았다.
“자,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빔 프로젝터 가동해 주세요.”
바로 빔 프로젝터가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했다.
어두운 강당에서, 빔 프로젝터의 이미지만이 찬란하게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보이시나요? 이 그림들이? 이게 어떤 그림인지 아시죠?”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입니다.”
“맞아요.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무섭게 집착하며 그린 루앙 대성당 연작들이죠.”
그는 불변하는 대상에 시간이 입혀지는 ‘인상’을 천천히 올려다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모네는 칙칙하고, 무겁고, 어두운 돌덩이에 시간이 입혀지면서 찬란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를 전부 자신의 그림으로 남기려 했습니다. 새벽의 안개가 반쯤 먹어 치운, 뼛가루같이 스산한 성당부터, 아침의 분홍빛 광채가 투사되면서 천천히 살아 숨 쉬는 듯한 성당, 그리고 정오의 찬란한 황금빛 성당까지. 이 불변하되 돌변하는 순간들을 캔버스에 고정시키려 분투한 거죠.”
시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모네의 그림은 사라지고 강당의 불이 다시 켜졌다.
“이 순간적인 인상. 색채와 뉘앙스의 예술이, 바로 오늘 연주하려는 드뷔시의 핵심입니다.”
그는 천천히 감정을 조율하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드뷔시는 말이죠. 음이 하나하나 살아나서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연속된 심장의 박동처럼 말이지요.”
어느새, 강당은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88개의 건반을 어떻게 누르냐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드뷔시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영상≫ 1집의 첫 곡, ≪물에 비친 그림자≫는 말이지요. 드뷔시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우리가 발로 누르는 페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보면대에 놓인 그의 악보는, 원래 음표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갖 색깔의 펜으로 각주와 첨삭이 가득 가해져 있었다.
‘사투가 느껴지네.’
너무도 쉽게, 천재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 같은 저 사내도.
사실, 오랜 시간 저렇게 치열하게 음악에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동질감을 주었다.
“자, 일단은 페달을 쓰지 않고 이 물의 움직임을 한번 표현해 보도록 할게요. 잘 들어 보세요.”
그는 정말로, 페달을 하나도 쓰지 않고 연주했고.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저게 페달을 쓰지 않은 소리라고?’
만지면 손에 묻어날 것처럼 생생한 소리의 입자가.
공기와 천천히 부딪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이 파동을 공유하는 정윤성도,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연주를 듣다 한마디 했다.
[이건 사기야, 정말로. 저 녀석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존재라고.]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연주가 끝나 있었다.
건반에서 손을 뗀 시현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인 우리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떤가요, 여러분? 연주가 어떻게 들리나요?”
“울림이 적습니다, 마에스트로.”
“하하. 맞아요. 페달을 전혀 쓰지 않고, 단순히 건반만을 눌러 연주를 했기 때문이지요.”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페달을 쓰면서 ≪물에 비친 그림자≫를 연주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니까, 집중해서 듣도록 하세요.”
그의 왼손이 첫 5도를 누르는 순간.
돌처럼 감각 없던 음악에 시간이 입혀졌다.
그저, 무감각할 정도로 단일한 파란색으로만 칠해진 수면에 정오의 황금이 색칠되었다.
‘닿고 싶다.’
저 새파랗게, 투명하게, 황금으로 발산하는 소리들을.
양손으로 만져서, 물들어 버리고 싶다.
화려한 아라베스크로 요동치는 물결을 선사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는 호수.
그 투명한 음색이, 우리를 음악 속에 가두었다.
‘아, 제발 끝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여름날의 물장난은 짧고.
연주는 마지막 피아니시시모로 끝나야만 한다.
“잘 들으셨죠?”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으로 이 고요를 깨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연주였으니까.
* * *
어쨌거나 그의 연주가 끝이 난 이상.
이제는, 우리의 초라한 연주를 무대에 올려 비평을 들어야 할 잔인한 시간이 왔다.
“자, 그러면 이제 저의 연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첫 화음에서 페달의 사용법은 어땠나요, 이규재 학생?”
“페달을 미리 누르고 있되, 너무 길게 지속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페달은 풍성한 음향을 만들기 위한 전제 조건이지만, 지나치게 오래 밟고 있으면 소리가 전부 섞여서 지저분해집니다. 어느 순간에는 페달에서 발을 떼고 소리를 다시 섞어야만 하죠.”
무미건조한 설명으로는 그렇겠지.
저건,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
“그러면, 제 연주의 스타카토 처리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 봅시다. 김리듬 학생?”
“슬러 안에서 건반을 쓸어 당기듯 연주했습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드뷔시의 스타카토를 끊어 치면 소리가 아주 이상해집니다.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렇게, 연주에 한참 못 미치는 설명이 지나간 후.
마침내 우리가 이 곡에 도전할 시간이 왔다.
온갖 끔찍한 소리들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전시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는 얘기다.
“한동우 학생. 갑자기 튀는 음이 있네요. 이건 왜 그런 거죠?”
“아, 치다 보니까 흥이 좀 나서…….”
“아, 흥 좋죠. 좋아요. 하지만, 음악가에게는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누구 한번 맞혀 볼래요?”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냉정함입니다.”
“정확해요, 김리듬 학생.”
그는 다시 우리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 음악가에게는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과 냉정함이 의외로, 아주, 많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내림마장조의 프레이즈를 금빛 물고기라고 칭합시다.”
그는, 방금 전 한동우가 쳤던 것처럼 그 프레이즈를 다소 성급하고 튀는 음 많게 연주했다.
“어떻게 들리나요? 조금 성급하죠?”
“네에…….”
“그리고 조금 어수선하게 들리기도 하네요. 이런 음을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감정을 차근차근 쌓아 나가면서 빌드업을 하다가, 비등점까지 끓어오른 감정을 한 번에 폭발시키면서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이죠.”
왜일까.
이렇게 평온한 곡을 연주하려는 그가, 갑자기 맹수처럼 보이는 이유가.
광기 어린 눈을 사냥감에 집중시키고.
온몸의 근육을 수축해 힘을 폭발시킬 준비를 하지만.
정작, 너무도 조용하고, 평온한 태도로.
온몸을 이완한 채 기다리는 맹수가 거기 있었다.
수면 아래서 잠복하는 금빛 물고기를, 완벽하게 낚아채기 위해 기다리는 것.
그러다, 자신이 바라는 최상의 순간이 오는 순간.
‘아, 그냥 미친 것 같다.’
그는 5초도 안 되는 연주로 사냥감을 낚아챘다.
그는 눈앞의 목표물에 발톱과 이빨을 박는 본능과.
그 본능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이성을 겸비한.
문자 그대로의 괴물이었다.
‘하지만.’
경이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저 ‘소리’와 ‘연주’가 탐이 난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이런저런 학생들이 나와서 차례차례 연주를 하고.
최시현은 그 학생들의 문제점을 꼼꼼하게 짚어 주면서 한결 나은 연주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김리듬 학생. 앞으로 나와서 연주를.”
피아노 의자를 조절하고, 손을 푼다.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거울처럼 투명하고, 영원한 것만 같은 고요함에.
불변을 깨 버리기 위한 돌을 던진다.
“……!”
내가 일으킨 파문이, 피아노를 중심으로 천천히 원형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점은 선을 일으켜서 면을 희롱하고.
그 면은 다시 선을 갈무리해서, 점으로 수축한다.
‘반음계에 주의하면서.’
급속하게 휘청이는 아르페지오의 흐름도.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도약도.
까다로운 반음계 연주도.
나른하고 잔잔한 여름날 오후의 수면으로 만들어야 한다.
‘뛰어들고 싶은, 몸으로 느끼고 싶은 물.’
내가 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파랗다.
나는 정오의 황금빛 수면이다.
나는 굽이치고, 물결치다가.
마침내 잠잠해지는 호숫가다.
‘오른손 아르페지오보다 훨씬 느린 왼손 아르페지오에 주의하면서.’
모든 흔들림이 멎고, 거울처럼 평온해진 물에 마지막 그림자가 점점이 비추어지면서 곡이 끝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민아가 왜 ‘용을 그리면서 마지막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냐’고 내게 물었는지.
연주를 마친 나는 최시현을 올려다보고.
그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감정을 보았다.
“흠, 흠. 훌륭한 연주였어요. 김리듬 학생.”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이 정도면 됐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Summa cum laude(수석 합격)를 주어야 할 것 같네요.”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에.
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자, 다들 수고했습니다. 그러면, 아쉽게도 이제 마스터클래스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네요.”
그는, 짧지만 강렬한 기억들을 주고받았던 자신의 학생들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세요. 피아노의 음향은, 당신의 영혼에 비례한 만큼만 울린다는 것을.”
최악의 인상을 주며 시작한 마스터클래스의.
가장 완벽한 끝맺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