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5
5화. 그 애가 뭔가 달라졌어 (1)
“김리듬. 너, 진짜 어딘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뭐?”
점심을 같이 먹던 정선율이 저 말을 꺼내자, 나는 얘가 갑자기 어딘가 이상해졌나 싶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가 달라져?”
“아니. 표정이 더 당당해진 것 같아서.”
“표정이?”
“어. 얼굴에서 의기소침함이 사라졌다니까. 원래 김리듬은 쭈구리가 어울리는데 말이지.”
이 개같은 친구 놈의 말에 나는 ‘하하하. 너 같은 놈도 내 친구구나.’ 라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하이고. 김리듬 차례가 끝났으니 이제 내가 제물로 오를 차례구나.”
“넌 보나 마나 난도질이다, 정선율.”
“으. 나도 《겨울바람》 한번 깔끔하게 치고 싶네.”
“열심히 해. 빡세게 연습하면 보람을 거둘 거야. 칼바람 나락 같은 데서 보이지 말고.”
“김리듬 선생님. 아무리 예술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휴식은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염병을 한다, 아주.”
정선율은 아직 내 연주의 변화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정윤성도 내게 이렇게 귀띔해 줄 정도였으니까.
[네가 어제 친 《겨울바람》은, 진짜 재능 있는 애가 아니면 그냥 좀 치는 것처럼 들릴 거야. 아직 거기 담긴 소리의 차이가 귀에 꽂힐 나이는 아니니까.]아는 만큼 들린다, 라.
그렇다면.
‘이민아는 내 연주를 듣고 뭔가를 알아챈 걸까?’
그녀는 내 옆 테이블에서 자기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연신 그녀의 분위기를 맞춰 주려 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먹는 데만 집중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재미있는 모습 보여 주기를 바랄게. 그러면 이만.’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마치 이건, 그녀가 나를 자신의 라이벌로 인정해 준 것 같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나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졌으니까.
그래. 내가 입학 시험을 치른 바로 그날.
그녀의 연주 실력을 내 귀로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맞서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네?”
[생각을 줄여.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지나고 보면 대부분 별것 아닌 것들이라고.]그래. 이 망령의 말이 맞다.
[그런데, 대체 감사 선물은 언제 줄 거야?]“뭐라고요?”
[네가 어제 친 《겨울바람》 말이야. 이 마에스트로 정윤성 님의 도움으로 이루어 낸 일이잖아. 최소한의 존경심 정도는 보여야 할 것 아냐.]“아…… 네에…… 존경심…… 존경…….”
잘 아시네요.
“존경합니다, 마에스트로. 아. 주. 많. 이. 요.”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진심인데요?”
[첫인상하고 많이 다르네. 아주 능글맞아.]“오늘 유독,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 느낌…….”
[그러면, 그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연습을 하러 가실까. 자, 빨리 연습실로 가라고.]늘 시곗바늘 움직이듯 똑같이 가던 연습실인데.
그 연습실의 일상이 다르다.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짓눌린 듯 보이던 일상의 때를 싹 벗기고 다른 색으로 교체한 느낌이다.
[기대해라, 김리듬. 이제부터, 내가 직접 너를 하나하나 뜯어고쳐서 재조립해 줄 테니까.]“저는 자동차 부품이 아니에요, 마에스트로.”
[어쨌건, 너는 아직 많이 부족해. 아니, 모든 게 다 부족해. 그러니 그만큼의 연습이 필요해. 기본적인 스케일, 트릴, 화음,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부점리듬, 겹리듬을 하나하나 다시 연습해야 한다고.]나를 질책하는 그의 표정에서 어느새 평소 보이던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아프지만 정확한 질책에, 나는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주섬주섬 다음 과제곡을 꺼냈다.
[베토벤의 소나타 21번 다장조, 작품번호 53번.]일명 《발트슈타인》 소나타.
베토벤이 빈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후원자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한 곡.
24개의 조성 중 가장 밝은 다장조를 사용했고.
거대한 구성과 광막한 악상이 빛나는.
오직 베토벤만이 건축할 수 있는 빛의 제국.
[《발트슈타인》이라. 개인적으로 너한테는 음침한 《템페스트》나 《열정》 같은 곡이 더 어울리는데.]“왜죠?”
[원래 너처럼 잡생각이 많은 애들은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하나쯤은 있거든.]“…….”
[크흠. 장난이야. 연습 시작하자.]어쨌거나, 그렇게 연습이 시작되었다.
연습을 시작한 지 채 5분도 안 되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엉망으로 연습을 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왼손 화음연타 또 그렇게 친다! 균일하게! 피아니시모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셋에 들어가야지! 화음만 정확하게 맞춰도 음악이 나아져. 그렇지, 셋에 들어가서 다음 마디 하나에 끝!]무서울 정도로 귀기 서린 청력이다.
사소한 실수 하나, 잘못 짚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그냥 두고 넘기는 법이 없었다.
[《발트슈타인》에는 느린 악장이 없지. 대신 2악장에 아주 느린 서주가 붙어 있어.]그는 엄격한 스승이자.
[불협화음의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모든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순간…….]나를 정확한 기점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었고.
[그 불협화음의 안개가 걷히면서, 거대한 힘을 품은 론도* 주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천히. 고점에 도달할 때까지 힘을 더 비축해.](*3개의 주제 A/B/C가 A-B-A-C-A-B-A 형식을 갖추는 악곡. 주로 소나타 형식의 마지막 악장에 쓰인다.)
제정신일 정도로 음악에 미친 광인이었다.
[더 선명하게! 명쾌하게!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곡 분위기를 너무 어둡게 만들지 말고! 그렇지. 그렇게.]색과 음의 향이.
빛과 소리의 내음이.
나에게로 천천히 스며들어 재조립된다.
[됐어. 이제 마지막으로 치는 김에 녹음을 하자.]“녹음한 걸 직접 들어 보라고요?”
[그래. 녹음하는 것만큼 객관적인 평가도 없지. 잔실수 정도는 허용해 줄 테니까, 끝까지 쳐.]이미 해가 떨어진 지 한참 지났다.
저녁도 빵으로 대충 때운 터라 허기가 졌지만.
그래도 마지막 연습만큼은 거를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악장을 마친 찰나.
“저기, 학생.”
“네?”
연습실 문 사이로, 수위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연습실 문 닫아야 할 시간이야.”
“죄송한데, 10분 정도만 부탁드릴게요.”
“허, 참……. 알았어. 빨리 끝내.”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2악장 연습까지 마치고는, 재빨리 가방을 싸서 연습실을 나섰다.
* * *
집에 가는 길에,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친 《발트슈타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어때?]“끄응. 부끄럽네요.”
[손목 힘 하나 제대로 못 써서 피아니시모가 흐트러지고, 손가락은 자꾸 미끄러지고, 조금만 도약이 나오면 음악이 부자연스러워지고. 그게 지금 네 연주야.]들으면서 얼굴이 화끈해지기는 처음이었다.
정윤성과 함께 하면서 귀가 트인 탓일까.
전에는 잘 들리지 않던 실수들이 귀를 거쳐 뇌에 콕콕 박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네 연주에도 장점은 있어.]“그게 뭔데요?”
[때린 만큼 피아노를 울리게 하는 정직함.]“장점이 아니잖아요, 그거.”
[장점이야. 그만큼 못 울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너는 적어도 가르치는 만큼 성장한다고.]“제가 정말 그런 유형일까요…….”
[어? 정류장 지나친다.]“어, 어어? 잠시만요! 저 내려요!”
나는 붐비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밀쳐 내면서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기시감도 안 느껴지는 광경.
다만, 전에 이런 일이 생기면 당황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약간 다르다.
[인마. 너는 내가 벨 역할까지 해 줘야 하니?]“고마워요. 정윤성 씨.”
인사는 최대한 짧게 하고, 나는 내 머릿속 뇌파의 전압을 음악에 맞춰 놓은 채 걸어갔다.
* * *
나는 정윤성의 도움을 받아 가며, 때로 엄한 질책을 받으며 계속 연습에 매진했다.
학교에 남아서 연습할 수 있는 날은 가장 늦은 시간까지 연습했고,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은 이동하는 내내 무릎을 건반 삼아 손가락의 감각을 계속 익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손가락 꼬인다. 특히 오른손 4번, 5번!]사흘이 지나고.
[자, 이제 페달도 밟아 가면서 같이 하자.]닷새가 지났다.
연습을 시작한 지 6일째 되는 날, 내 연주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다.
“또 한 단계 더 발전했구나.”
“……!”
“잔실수가 거의 없어졌어. 이대로만 하면 되겠다.”
최 선생님이 내 연주를 이렇게 칭찬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이 곡을 어려워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흡수하는 데 성공했구나. 아무래도 연습하는 레퍼토리를 더 늘려야겠다.”
“선생님. 좀 봐주세요.”
“앓는 소리 하지 말고. 넌 지금 바짝 치고 나가야 해. 앞으로는…… 그래. 콩쿠르 준비도 해야지.”
“정말요?”
“지금 성장세로 보면, 가능할 것 같다. 저번 전공 실기에서 무려 21위를 하지 않았니.”
내가 칭찬받는 동안 가만히 있던 윤성은, 교습이 끝나자마자 내게 다가와서는 이죽댔다.
[이제 알겠지? 연습은 네가 몰랐던 것, 미지의 것들을 흡수하고, 그것들과 충돌하면서 너 자신을 넓혀 나가는 과정이야.]“그렇죠.”
[이제 내가 존경스럽냐, 김리듬?]“감사합니다. 마. 에. 스. 트. 로.”
사실, 나는 이 《발트슈타인》을 어려워했다.
이렇게 당당하고, 웅장하며, 화려하고, 밝은 곡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정윤성이 나를 그 틀에서 끌어올렸다.
선율이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
[자, 이제부터는 한 단계 더 높여 볼까?]“네? 저를 높인다고요?”
[그래. 이제는, 사람들을 홀려야지.]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 * *
민아는 오늘도, 우연을 가장해 ‘그 녀석’이 연습하는 연습실 앞을 지나치려 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 녀석’만큼은, 아주 조금 다르다.
‘오늘은 얼마나 더 성장했을까.’
입학할 때는 꼴찌라고 그랬던가.
하지만, 녀석은 첫 전공 실기에서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아마 순위를 매긴다면 20위권은 무난할 것이다.
그리고 이민아가 보기에, 그 녀석의 성장세는 고작 20위권으로 멈출 수준이 절대 아니다.
“우와, 이거 실화냐?”
“말도 안 돼. 저게 김리듬이라고?”
연습실 앞에 모여서 연주를 듣는 아이들이 보인다.
항상 서늘하게 다물어져 있던 민아의 입술이 픽 열리더니, 그 입술에서 ‘칫’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감정은, 자기만 독점하던 좋은 풍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긴 어린아이의 감정이었다.
“얼마나 연습하는 거야?”
“몰라. 아까 전부터 틀어박혀서 연습만 하고 있어.”
“와. 저건 진짜 집념이다, 집념. 난 저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저 소리 들려? 전에는 소리가 진짜 작았는데, 이제는 연습실 밖으로 쨍쨍하게 울린다니까.”
“에이. 그래도 아직 멀었지. 아직은 이민아는커녕 반서준 수준도…… 어어.”
그 말을 하던 1학년생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이민아가, 연습실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정윤성은 연습실 바깥의 풍경이 흐뭇했다.
‘남들이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기가 막힌 연주를 해.’
자신의 수제자(?) 김리듬이, 지금 자신이 지시한 목표를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그가 무슨 연주를 하건 아무런 관심도 없던 학생들이, 어느새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음악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어제 듣던 소리가 아닌데?’
본인은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지만, 사실 요 며칠 사이 김리듬의 연습실 앞에는 살금살금 걸어와 그가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려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자, 이제 누군가 미끼를 물어 주면 되는데.’
“여기서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누군가 정윤성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윤성은 연습실 바깥을 한 번 슥 살펴보고는.
리듬을 띄워 주기 딱 좋은 대어가 걸린 것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