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드라마 속 엑스트라 (4)
이제 우리에게는, 별다른 출결 걱정 없이 드라마 촬영에 집중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카메라 앵글에 잘 잡히도록 연주하는 법과.
녹음할 때 잡음이 잡히지 않는 스킬을 익히면서.
차근차근 준비가 되어 가던 와중.
플루트 수석 조하란이 새 정보를 물어 왔다.
“자, 여러분! 모두 집중하십시오!”
“왜, 또? 무슨 일인데?”
“방금 받은 따끈따끈한 뉴스! 우리가 찍을 드라마 있잖아? 남주와 여주에 대한 구체적인 소식이 왔어!”
“오, 진짜?”
“드디어?”
나는 대본을 미리 받아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실제 배우와 배역의 이름이 같다는 특이사항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기대를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앉아서 조하란의 말을 들었다.
“남주는 박현성 캐스팅 확정됐대. 다들 누군지 잘 아시죠? 부연 설명은 필요 없으시죠?”
“설마, 그 박현성이야?”
“진짜야? 그 박현성?”
“그런데 박현성이 누구야? 나는 처음 듣는데.”
“아니, 심기준. 너는 박현성을 몰라?”
“모를 수도 있지.”
“자, 지금부터 알려 줄 테니까, 열심히 새겨듣도록 해. 현성 오빠는 마스크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연극 무대에서 연기력도 갈고닦았는데 아직까지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두어 번 화제를 모은 게 전부라 인지도가 다소 낮아.”
그건 그렇고, 현성 ‘오빠’?
“그리고 여주는 김세린. 설마 심기준 너, 김세린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데.”
“아니, 도대체 너 요즘 뭐 하는 건데, 대체?”
“마! 자는 시간하고 연습 시간 빼면 좀 놀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옆에서 듣고 있으니까 느낌이 좀 이상하네.
아니, 사실 예고 1학년이면 심기준이 정상 아냐?
조하란처럼 박현성하고 김세린 정보 긁어모으는 대신에 말이지.
하지만.
조하란은 그런 심기준에게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아역 배우 출신에 독립 영화로 인정받은 탄탄한 연기력! 드디어 케이블 드라마 주연으로 비상할 준비가 된 차세대 한류 스타 후보! 알아 두라고!”
“그런데, 하란아.”
“네, 희재 선배.”
“박현성과 김세린이라. 둘 다 연기력은 보장되고 드라마의 주연을 맡을 만한 사람들인 건 알겠는데.”
“넹.”
“인지도가 좀 낮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은 아니겠지?”
희재 선배의 옳은 지적이 나오자마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조하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옳소! 조하란이야 넷프릭스 VVIP 회원이니까 가능한 거지, 우리는 아니라고!”
“음악에는 관심 없는 조하란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맞아! 저번에 악보 산다고 빌려간 내 돈도 갚아!”
“조하란은 채무 관계 청산하라! 청산하라!”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플루트 수석 조하란.
생각보다 굉장한 1학년이다.
물론, 그녀는 이미 얼굴에 철판을 깐 상황이었다.
“에이, 다들 시끄럽고! 그깟 인지도 때문에 시작도 안 한 드라마의 수준을 논하는 질 낮은 논의는 불쾌하니 듣지 않겠소!”
“우우우! 가서 플루트 연습이나 더 해라!”
“채무 관계 청산하라고, 빨리!”
개판이네. 하하하.
* * *
희재 선배의 지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타당해졌다.
솔직히, 연예계 쪽에는 별 관심 없는 내가 봐도.
이번 클래식 음악 드라마를 이끌고 나갈 남주 박현성과 여주 김세린은.
시청률 경쟁에서 승리하기에 인지도가 조금 낮다.
“KBC 소식 들었어? 김석우가 주연이래!”
“와, 진짜! TBS…… 괜찮겠지?”
KBC는, 요즘 잘 나가는 최고의 한류 스타 김석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는 기사로 지면을 폭격하면서 관심을 최대한 끌어모았고.
“우와. PBS 여주는 민혜정이네. 이거 진짜 쉽지 않겠는데?”
PBS 여주는, 그 유명한 민혜정이 캐스팅되었다.
물론 박현성과 김세린이 마스크도 괜찮고 견실한 배우들이지만, 인지도가 밀려 버리면 당연히 출발선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소식들도, 우리 앞에 놓인 드라마의 미래가 장밋빛이지만은 않을 것임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TBS 기사가 너무 적어. 이대로는 쉽지 않아.]“돈을 적게 쓰는 걸까요?”
[글쎄다. 땜방 기획으로 시작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일단 사전 홍보에서 이렇게 밀려 버리면 좋지 않지.]‘클래식 음악 드라마’라는 색다른 시도에 한때 기대감이 일기는 했지만, 포탈 지면은 순식간에 KBC와 PBS 쪽 신작을 소개하는 기사들로 도배가 되었다.
KBC 쪽은 웹툰 원작을 기반으로, 아포칼립스 배경에 액션을 적절하게 섞은 블록버스터 계열 드라마.
PBS는 웹소설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조선시대 배경의 로맨스 드라마.
쏟아지는 기사의 양과, 기사에 달린 스틸 컷만 봐도 우리 쪽은 다소, 아니, 한참 모자라 보였다.
그리고.
‘현실이 그렇지.’
TBS의 기사는 간신히 포탈 연예 지면 상단을 차지하는 듯싶더니, 곧 하단으로 가라앉았다.
반면, KBC와 PBS 쪽의 기사들은 연일 연예 지면 상단을 폭격하고 있다.
“그래도,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너 첫 촬영이 금요일이지? 금요일 저녁 시간.]“네. 가서 드라마 타이틀 곡을 쳐야죠.”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웬만하면 원 테이크로 녹음하고 싶은데.”
[축 처지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좋아. 오늘도 연습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모리스 라벨의 명곡을.
‘옛 스페인의 왕궁에서 작은 왕녀가 춘 파반느에 대한 기억.’
나는 시간을 잊고 춤추는 음악과.
건조하기 짝이 없는 작곡가의 설명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는 거대한 화폭 속의 대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회화는 얼어붙은 음악이며.]“음악은 승화하는 그림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왕녀가.]“말과 언어의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기품을 두른 채, 음악과 회화에 상존한다.”
라벨이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그는 왕녀의 부재를 몽환으로 승화시켰다.
고풍스러운 선법적 음계에 실린.
느긋한 파반느 멜로디가.
현실과 꿈의 선(線)을 흔들어 버릴 때마다.
‘나는 그 양극의 경계에서 흔들린다.’
즉, 드라마 제목이자 타이틀 곡인 이 5분가량의 음악이 의도하는 것은.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희미한 몽환적인 드라마.’
대본 맨 앞장의 시놉시스도 그 점을 분명히 했다.
─ 음악은 사람을 현실에서도 꿈꾸게 한다. 파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청춘들이, 각자의 꿈과 열정, 격정과 아픔을 가지고 음악이라는 꿈으로 서로를 그리면서 마침내 하나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부푸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 시청률은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내 연습실 문틈으로, 정선율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게 보였다.
“정선율. 그냥 들어와. 왜 그래?”
“김리듬. 이번 드라마, 주연 김세린이라면서?”
“어. 그렇다던데?”
“김리듬. 내가 너하고 알고 지낸 지가 어언 4년이 다 되어 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김세린 씨 싸인 받아 달라고?”
“바로 그거지! 역시 너는 나의―”
“친구야아. 시끄럽고, 걱정하덜 마세요. 벽지에 도배할 정도로 받아 올 테니까.”
“아, 역시 김리듬이야! 요즘 많이 건방져진 내 친구 김리듬!”
그렇게, 나는 정선율의 청탁 아닌 청탁을 받았다.
[끼리끼리 논다더니.]“불만 있으십니까?”
[아니. 없고. 한 팀이 더 오는 것 같은데.]“에이, 설마……”
“김리듬은 여기 있느냐!”
“우리 ‘디센스’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포스터의 보은을 잊지 않았을 너에게, 오늘 우리가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노라!”
안 돼. 돌아가.
오늘 연습실 셔터 내립니다.
나는 그녀들이 태도를 애원으로 바꾼 지 한참 후에야 연습실 문을 열어 주었고.
그 상황에서도 커피 한 잔씩을 타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들의 요구사항도 사인이었지만.
그 사인의 대상이, 조금 희한했다.
“송재형 촬영감독이라는 분이 계셔.”
“그분이 정말 이쪽에서는 전설적인 분이시거든?”
“그러니까, 송재형 촬영감독이라는 분의 사인을 받아 달라, 그 얘기죠?”
“그렇지! 바로 그거지!”
“역시 말이 통해! 김리듬이야!”
“한시름 놨네! 우리는 이만 갑시다!”
“그런데 잠시만요.”
세 명의 고개가 약속이나 한 듯 내 쪽을 향했다.
“앞으로 내가 연주회 때문에 포스터를 제작할 일이 생긴다면, 그 포스터 제작을 맡아 주실 수 있나요?”
‘디센스’ 3인방 중 가장 눈치가 빠른 박소영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를 전속으로 쓸 생각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좋아. 김리듬. 우리는 포스터 제작에만 매여 있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들이지만, 김리듬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청을 들어주도록 하지.”
“좋아요. 그러면, 악수하죠.”
그렇게 우리는 계약 관계가 되었다.
* * *
드디어 금요일 오후가 나를 찾아왔다.
주인공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내가.
피아노 연주로 첫 연기를 시작하는 시간이.
[긴장하지 말고. 그냥 평상시 하던 대로 연주를 한다고 생각해. 카메라도, 지켜보는 눈들도 전부 잊어.]“이거, 생각보다 훨씬 긴장되는데요.”
[겪어 본 일이잖아. 그냥 가볍게 친다고 생각하라고. 가볍게 심호흡하고, 천천히 걸어. 그렇지.]정윤성 귀신 선생의 말대로.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떨림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피아노로 걸어갔다.
[일단은 손부터 따뜻하게 풀고 피아노에 앉아. 사소한 긴장으로도 손은 차가워질 수 있으니까.]“그렇죠. 굳어진 손부터 먼저 풀어야죠.”
나는 윤성의 말대로 한 후 무대 위에 올랐고.
바로 스태프 한 명이 내게 달라붙었다.
“오. 한 곡 치시려고요?”
“네. 손을 조금 풀어야 해서…….”
“그렇게 하세요. 아직 스탠바이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다고? 대체 뭐 하는 건데!”
“미안하다, 현성아. 잠시만. 하, 이것들은 쪼아 대고 닦달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네…….”
“그리고 이거, 디카페인 커피 아니잖아?”
“어? 아, 맞다. 내가 깜빡했…….”
“치워. 나 불면증 때문에 디카페인 커피만 먹는다고 했잖아.”
“정말 미안하다, 현성아. 내가 다시 사 올게.”
“버려. 그리고 짜증나게 하지 마.”
내가 그날 처음 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남자 주인공 박현성의 모습은.
신경질적이고 짜증을 내는.
성질 나쁜 스타의 클리셰 같은 모습이었다.
주위에서 추천해서 본 드라마와 영화 속.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인상과.
물에 어린 듯한 눈동자와는 정반대인.
그런 현실성 넘치는 스타의 모습이었지만.
[김리듬. 너 혹시 저거 보이냐?]“네. 잘 보여요.”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 할 문제인 것 같다.]나는 동시에,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그를 옭아매는.
시커먼 검댕 같은, 악령의 흔적들.
대체 어디서 옮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갈 주인공에게 은혜를 베풀 기회야. 악령의 잔재를 제거하면, 저 성격도 많이 나아질 거다.]“어떤 곡이 가장 좋을까요?”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야. 네가 연주하는 거니까.]피로에 찌들어 신경질적인 모습.
분명히, 엄청난 불면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내 머릿속에, 바로 해답이 될 곡이 떠올랐다.
“쇼팽의 ≪자장가≫가 좋겠어요.”
좋아,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저 악령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스타에게, 달콤한 잠이 되어 줄 내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