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61
61화. 반서준의 콩쿠르
“허어어…….”
나는 지금 피아노 건반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있다.
“허으어으어어…….”
진짜, 거짓부렁 하나 안 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이다.
‘아니, 드라마 촬영 진짜 미친 거 아냐?’
대본이 수정되었다는 말만 듣고는 몰랐는데.
이 정도로 사람 피가 마르도록 집요하게 철야 촬영이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드라마 촬영이라는 게, 원래 무수한 철야와 새벽 촬영으로 완성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김리듬, 정신 차려. 나 따라오면 안 돼!]“그럴 일만큼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된 건 네가 만들어낸 나비효과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해.]“말도 안 되는 소리이…….”
[생각을 해 봐, 김리듬. 네가 박현성한테 계속 멋진 연주를 들려줘서 각성을 시켜줬잖아.]“물론 그렇죠.”
[박현성이 너 때문에 각성했는데, 같이 연기하는 김세린, 안유경은 영향 안 받겠니? 셋이 같이 미쳐 날뛰면서 대본을 뚫고 나오니까, 당연히 백아현 작가도 대본을 수정한다는 초강수를 두는 거라고!]…….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무한 철야 촬영이, 사실.
제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결과라는 겁니까?
사실 지금의 나는 간신히 시간을 짜내 연습을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건반 위에 뻗어 있었다.
까톡.
“누구야, 대…… 아, 민아구나.”
오랜만에, 민아에게서 먼저 톡이 왔다.
얼마 전에 내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죽 시청한 그녀는, 호들갑을 떨면서 손가락에 새 살이 돋는 각종 연고와 최고급 치료용 테이프를 보내주었다.
나도 그녀의 그런 정성에 감동해, 요즘 맛보고 감동한 예가체프 커피를 선물로 보내고도 모자라 새로운 선물을 찾는 중이다.
톡의 내용을 본 내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 선혈의 피아니스트 김리듬! 네가 드라마 촬영을 하게 되었다니! 히익!
나는 바로 액정을 톡톡 쳐서 답을 보냈다.
― 연주 대역이야 연주 대역 놀라지 말라고
― 그렇군 그것보다 반서준 소식 들었어?
― 아니 무슨 일 있어?
그녀가 카톡을 보내는 속도가 두 배 빨라지면서, 곳곳에 오타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 요즘 필리프 로제 교수님하ㄱㅗ 만나서 피아노 2중주 연주 논의 중인ㄷㅔ
―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받는 순간, 내 표정이 굳었다.
― 교수님이 반서준 연주 보고 그러더라. 악의가 느껴지는 기괴한 연주라고
* * *
시간을 돌려, 24시간 전 캐나다 몬트리올.
아드리안 펄롱은 이번 캐나다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크리스 커틴슨이 쓰러진 후.
이 콩쿠르의 우승후보는,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야비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곡인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마지막 음을 마칠 때까지, 그는 자신이 원한 대로 완벽한 연주를 해낼 수 있었고.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우승을 확신했다.
“다음 순서는, 13번 반서준입니다.”
한국에서 날아왔다는, 예기치 못한 ‘그 녀석’의 연주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게, 대체, 무슨 연주지?’
마치, 전설 속에서나 듣던.
머리를 자를수록, 더 많은 머리가 재생되는.
그런, 괴수 히드라 같은 연주가.
그의 손가락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기괴하고, 잔혹하며, 위압적이지만.
‘완벽하다.’
도저히, 흠잡을 수 없는 악마의 기교를.
지금 저 소년이 펼치고 있다.
‘정말…….’
반서준의 연주를 끝까지 들은 아드리안 펄롱은.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자신이 저 소년보다 먼저 연주를 끝마쳤다는 데서 다른 의미로 야비한 쾌감을 느꼈다.
만약에, 자신이 저 연주를 겪은 다음 연주를 했다면.
저 기괴한 미친 연주에 먹혀버려, 연주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 * *
“도저히 뽑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래요. 나도 그래요.”
최종 순위 선정을 위해 모인 몬트리올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들은, 모두들 무거운 표정으로 동의했다.
“반서준. 이 한국에서 온 고작 열일곱 살 아이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정말 악마적인 연주를 펼쳐냈습니다.”
묘한 껄끄러움이 심사위원들 사이에 맴돌았다.
그 반서준의 에이전시가, 천슈메이 사건 당시 천슈메이의 에이전시였던 조슈아 창이기 때문은 아니다.
필리프 로제 교수의 폭로로 주최 측에서 조사가 들어갔지만, 석연치 않게 묻혀버린 호주 시드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스캔들의 여파 때문도 아니다.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악마 같은 연주였습니다.”
바로, 반서준이 펼쳐 보인 연주.
그 연주 때문이었다.
“기교는 정말이지, 흠잡을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무명이었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그래요. 기교는 완벽합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해요. 사소한 실수가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쉽사리 다음 말을 내뱉기 힘들었다.
‘괴이할 정도로 기계적이다.’
마치, 실이 매달린 채로.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서 연주하는 듯한.
그런 연주였으니까.
* * *
그때, 민아와 황정희 선생은 필리프 로제 교수의 초대를 받아 그의 파리 자택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초대에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필리프 로제.]”
“[별말씀을. 마드모아젤 리. 오히려 더 일찍 초대하지 않은 것을 내가 사과해야 할 판인데요.]”
필리프 로제 교수의 초대를 받은 황정희 선생님은, 그가 직접 만든 뵈프 부르기뇽의 맛에 깜짝 놀랐지만.
정작 민아 본인은, 놀라운 뵈프 부르기뇽을 먹으면서도 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무려 18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간 시드니에서, 그렇게 놀라운 연주를 들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에스트로에게 정말 감사하죠.]”
“[사실 잊고 싶은 기억입니다, 나에게는. 그 이후로 콩쿠르 심사위원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전부 거절하고 있어요.]”
“[아…….]”
“[콩쿠르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는 더 즐거운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로제 교수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 이제는 민아를 향했다.
“[마드모아젤 리. 나는 당신과 함께 피아노 2중주 리사이틀을 하고 싶습니다.]”
민아의 얼굴에 천천히 밝은 감정이 퍼져나갔다.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리사이틀 일자와 리허설 일정을 잡아야겠군요. 물론 마드모아젤은 바쁘실 테니, 내년에야 가능하겠죠?]”
“[스케줄 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마에스트로.]”
“[좋습니다. 식사를 마쳤으니 코냑을 한 잔 하면서 얘기를 계속하죠. 응접실로 갑시다.]”
필리프 로제 교수는, 코냑과 거기 가장 어울리는 프로마주를 가져와 테이블을 장식하고는 티비를 틀었다.
티비에서는 마침 몬트리올 콩쿠르 파이널이 나오고 있었다.
로제 교수의 시선이, 연주를 하는 연주자를 거쳐 민아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몽레알* 콩쿠르 파이널이군요.]”
(*몬트리올의 프랑스식 이름.)
민아는 콩쿠르 결선을 시청하면서 3번 놀랐다.
첫 번째 충격은.
‘반서준이 저 콩쿠르 결선에 갔다고?’
물론 자신이 연주 일정 때문에 바빴고, 나머지 시간은 김리듬에게 쏟아부어서 더 바빴지만.
이걸 라이브로 보고야 알았다는 것은, 황정희 선생이 이런 정보를 철저히 차단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두 번째 충격은.
‘어떻게 반서준이 저런 연주를 하지?’
저건, 사람의 연주가 아니다.
적어도, 반서준은 저런 연주를 절대 할 수 없다.
‘도대체, 그동안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반서준.’
사실은, 그것보다 더 께름칙한 것은.
그가 발산하는 음향이었다.
얼마 전 프라하 리사이틀을 앞두고 선생님과 시간이 멈춘 듯한 옛 시청 광장을 거닐 때, 거기서 프라하의 명물인 거리의 인형극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화려하게 채색한 인형들이 유려하게 움직이던.
그 짧지만 즐거운 순간이.
저 연주에서는, 기괴하게 변주되어.
민아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끽끽거렸다.
녀석은, 악마에게 실로 조종당하는 것처럼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충격은.
‘저기서, 반서준을 이길 사람이 하나도 없어.’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확정되어버린 반서준의 우승.
모든 연주가 끝나고, 우승자 발표가 있기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필리프 로제 교수가 손에 든 코냑을 홀짝이는 소리뿐.
결국, 반서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조용히 리모콘을 집어 TV를 껐다.
“[놀랍도록 정교하면서도, 악의가 배인 연주군요.]”
“[…….]”
민아와 황정희 선생은, 필리프 로제 교수의 평가에 침묵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코냑 잔을 조용히 비우고는, 민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드모아젤 리. 방금 전에 보았던 연주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경이롭지만…….]”
민아는 혼란스러웠다.
이런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괴물 같은 연주였습니다. 여러 의미로요.]”
“[저는 벨라 도나가 떠오르더군요.]”
“[벨라 도나요?]”
“[독초의 이름이지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목소리처럼, 상대를 천천히 유혹해 자신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계속 중독시켜, 결국 그 상대를 완벽하게 파멸로 몰아넣는 독초랍니다.]”
민아도, 황정희 선생도, 필리프 로제 교수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기만 했다.
“[지금, 저 반이라는 아이가 친 연주가, 바로 그 벨라 도나에 중독된 듯한 연주입니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반서준의 연주는 저 기교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농. 농! 물론, 깜짝 놀랄 기교를 가지고 있는 연주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저 연주에 사람을 감동시킬 음악이 있었습니까?]”
물론, 없다.
로제 교수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반서준의 연주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지금은 놀랍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저 연주자는 저런 연주에 중독된 것을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겁니다.]”
* * *
[결국 반서준이 우승했군. 반서준, 아니, 반서준을 조종하는 저 악령 개자식이, 유서 깊은 몬트리올 콩쿠르를 죽여버렸어! 결국!]정윤성은 길길이 날뛰며 콩쿠르 결과를 부정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반서준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며, 심사위원에게 우승 메달을 건네받고 있었다.
몬트리올 콩쿠르 심사위원들은, 혹시나 있을 부정행위 의심을 피하려 채점표까지 깨끗하게 공개했다.
― 채점은 공정했습니다.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아니, 사실. 채점표는 있으나 마나였다.
나조차, 반서준 녀석의 연주를 듣자마자 녀석이 우승할 것을 확신했으니까.
물론, 반서준에게 메달을 건네는 심사위원의 표정은 지나치게 어두워 보였다.
내 시선은, 그 주위에 늘어선 아드리안 펄롱을 비롯한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연주를 듣고 절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윤성은 철저한 독설로 콩쿠르를 혹평했다.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차이콥스키 중 가장 기분 나쁜 연주였다. 저딴 쓰레기가 차이콥스키라면 차라리 내가 두 번 죽고 말지!]기교만 따진다면, 저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분 나쁜 무감각함과.
노골적인 악의가 느껴지는, 저런 연주를.
정말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관중들은 반서준의 연주에 중독된 듯 계속 박수를 쳤다.
[어떻게 생각하냐, 김리듬. 저딴 연주로 반서준이 콩쿠르 우승 타이틀을 따 가는 모습을 보니.]“기교만 따진다면, 반서준이 우승하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저건 아니야. 저건 도저히, 음악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정윤성이 이렇게 흥분했다는 것은.
그만큼 반서준의 연주가 위협적이었다는 반증이리라.
이렇게 먼 곳에서.
영상을 통해 녀석의 연주를 듣는 나조차.
그 연주의 비인간적인 완벽함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한데?’
하지만 반서준의 연주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도, 혐오도, 증오도, 애증도 아닌.
경멸 섞인 동정심이었다.
저렇게 악마의 도움으로 펼쳐낸 ‘완벽한’ 연주가.
내게는,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따라하는 듯한.
데드 카피로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