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
‘도대체 누구의 데드 카피지?’
나는 반서준의 연주에서 느낀 무지막지한 기시감의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잠시 미뤄야 했다.
일단은, 무지막지한 철야 촬영 때문이었고.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계속 연습도 해야 했으니까.
“정 마에에.”
[왜 그래. 귀신 되기 일보 직전이신 우리 김리듬 군.]“와, 바닥에 쓰러져서 잠들 수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 처음 알았어요.”
[운동까지 안 했으면 정말 바닥에서 잠들게 됐을걸?]“그럴 수는 없죠.”
그나마, 이 빡빡한 일정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민아가 세심하게 골라서 보낸 각종 영양제였다.
“이제 슬슬, 오케스트라 신을 찍을 때가 됐는데…….”
“짜잔! 그래서 우리가 직접 왔습니다!”
“김리듬은 살아 있는가!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가 김리듬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노라!”
“하하하. 김가인, 임지호…….”
그래.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가 드라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엑스트라 출연 신을 몰아 찍는 날이니까.
그러니.
“자! 주연 배우들 오기 전에 빨리 녹음 일정 후딱 끝내고 바로 오케스트라 신 찍읍시다! 시간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메인 마이크 설치 끝났습니다, 감독님!”
“스팟 마이크 설치도 끝났습니다!”
“목관 쪽 L+R 스테레오 설치 다 했어?”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애들 불러서 후딱 녹음시키고.
후딱 오케스트라 신을 찍겠다는.
뭐, K-드라마의 원칙에 충실한, 그런 모습이다.
뻣뻣한 목을 뒤로 당겨 푸는 나를 본 전수정은, 무슨 어닝 서프라이즈라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링거라도 맞을래, 김리듬? 내가 진짜 힘들 때 이거 맞고 강행군 소화할 수 있었는데.”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희성예술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 전수정 씨.
대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힘들면 내게 기대도 돼, 김리듬.”
“응?”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김리듬이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내게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 무더운 여름날 저녁에.
수평선이 해와 평행하면서.
지는 해를 천천히 슬라이스하던 그 시간에.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고마워, 전수정.”
그 순간.
그녀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의 짧은 그 말 한마디가.
그녀의 영혼의 입자를 바꿔 버린 듯한…….
“자, 이제 연주 신을 찍어야 할 시간이야.”
“!”
“희재 선배.”
희재 선배가 끼어들어, 우리의 아이 컨택을 깼다.
전수정이 자리로 돌아가자 희재 선배는 씩 웃으며 물었다.
“내가 방해한 꼴이 됐네. 나는 그저 리듬이가 도시락 이외의 선물을 안 받는 이유를 들으러 온 것뿐인데.”
“일종의 소원 적립이라고 해 두죠. 아 참, 다음번에는 로제 파스타 부탁드려요.”
“오케이. 기억할게.”
한희재 특) 요리 잘함.
그런 그가, 고개를 숙여 내게 속삭였다.
“박현성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인간들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어. 리허설 끝나고 바로 보내 줄게.”
구원의 여름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기민하고 그림자 같은 인간이다.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원 테이크로 끝내 봅시다!”
“그러면 김리듬. 잘해 보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한울 선배가 지휘봉을 젓는 순간.
곧 드라마에서 울려 퍼질 음향이 홀을 가득 채웠다.
그 음향이, 나를 유혹한다.
같이 섞여, 화음으로 빛나자고.
[흠뻑 빠져들 시간이다. 김리듬.]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오케스트라의 화음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정말 오래간만에 출근(?)한 학교에서는.
새로운 일정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이사장님과 독대인가요?”
“그래, 리듬아. 이번이 두 번째구나.”
아니, 이사장님.
저를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사장님께서 나를 다시 독대하고 싶다는 소식에, 이제는 쓴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도대체 이민아는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는 거지?’
틈만 나면 그녀의 연주 일정을 찾아보면서 리사이틀을 라이브로 듣거나 뒤늦게 찾아 듣는 나로서는.
대륙을 오가는 그녀의 강행군이 놀라웠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도 해 보고, 영양제도 찾아서 보냈는데 안 먹히는 거 같아요.”
[꿈이 현실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애가 그런 사소한 걱정을 듣겠니? 네 음악에 더 집중해라.]이번에는, 최 선생님 없이 나 혼자 찾아갔다.
“이사장님. 김리듬입니다.”
“들어와.”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이사장님께서는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피로에 좋은 로즈마리 차야. 한잔 들어.”
“감사합니다.”
저의 격무(?)에 대해서 이미 들으셨군요, 이사장님.
나는 한 모금을 머금어도 혀를 데지 않을 온도로 식혀진 로즈마리 차를 입에 물었다.
화사한 허브의 향이 천천히 입 안에서 퍼지면서.
매력적인 색감의 화음을 만들어 낸다.
“요즘 조금 바쁘다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반서준의 자퇴 건, 잘 처리되었다고 알려 주려고.”
이렇게 빨리?
게다가, 반서준이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찰나에 퇴교라니?
“반서준 쪽에서 먼저 학교를 제 발로 나가겠다고 통보를 했고, 나는 그걸 절차대로 처리해 준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반서준이 김리듬 학생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어쨌거나, 그녀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러면, 이제 김리듬 학생이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네. 그렇지?”
“드라마 촬영에 최선을 다해야죠.”
“성공을 돕겠다는 그런 태도, 아주 좋아.”
로즈마리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사장은, 왼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상품 바라보듯 응시하며 물었다.
“몬트리올 콩쿠르 파이널, 봐서 알고 있지?”
“…… 네.”
“인간이 할 수 있는 연주는 아니야. 적어도, ‘반서준’이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연주는 아니지.”
잊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희성예술고등학교의 이사장.
이 학교가 평범한 예술고등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물론 경이롭고, 섬뜩하고, 무서운 연주지. 하지만 나는 반서준을 버리고 김리듬을 택했어.”
“어째서죠?”
“흐음. 반서준의 연주와는 달리, 우리 김리듬 학생의 연주는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는 연주라서?”
“저기, 이사장님.”
“묻고 싶은 게 있다는 표정이네?”
“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은 하나였다.
“이사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그녀는, 부드럽지만 냉정하게 대답했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어. 남들보다는.”
내 시선이 문득 그녀의 책상으로 닿았고.
그녀와 닮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누군가의 사진이.
거기 놓여 있음을 처음 알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반서준은…….”
“그 아이를 받아 줄 곳은 어디에나 있지.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자. 너무나도 매력적인 존재니까.”
그럴 것이다.
원서만 넣는 순간, 그를 받아들이려고 혈안이 된 세계적인 음악원이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면서, 선을 넘으려고 하는 학생을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아.”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김리듬 학생. 그런 연주, 위험할 정도로 중독적인 연주보다, 더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겠어?”
“저는…….”
고민했다.
어떤 대답이, 그녀에게 가장 잘 닿을 수 있을까.
“저는, 그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 연주를 듣고 행복하거나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래서, 이번 드라마 촬영을 기회로 음악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나는 로즈마리 차를 한 모금 더 삼키며, 그녀가 꺼낼 다음 주제를 기다렸다.
“혹시, 김리듬 학생.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어?”
“네. 물론이죠.”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있다.
내가 정윤성을 만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 시스템이며.
정윤성을 만난 후에는, 그에게서 그 시스템의 세부적인 내용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으니까.
“베네수엘라의 클래식 음악 육성 프로젝트. 생계 때문에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가난해서 음악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모으고, 지원을 받으며 시작했지.”
“우여곡절이 많은 프로젝트였습니다.”
“맞아.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고, 폭력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 손에 악기를 쥐여 준다? 모두가 그 프로젝트가 실패할 거라고 입을 모아 외쳤어.”
그러나.
“그 아이들의 손에 악기가 쥐여지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지.”
처음 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모인 단원은 고작 여덟 명이었다.
연주회장도 없어서 지하 주차장과 공장에서 연주를 해야 했지만.
불과 2년 후, 그들은 어엿한 청소년 악단이 되어 처음으로 해외에서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작 여덟 명의 음악가로 시작한 시스템이, 35년 후에는 221개의 음악교육 센터와 6천 명의 음악교사, 145개의 청소년 관현악단으로 발전했으니까.”
“…….”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또는 그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못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 거야.”
“설마, 이사장님…….”
이제야 그녀의 복안이 확실히 눈에 들어온다.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를 만드신 이유가, 한국의 ‘엘 시스테마’를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빙고. 김리듬 학생은 이해력이 빨라서 좋아.”
나는 확신했다.
전수정이 물론 뛰어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만큼의 판짜기 실력은, 앞으로도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내용은 드라마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지.”
“어려운 음악가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그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후반부 대본을 받아 봤으니, 김리듬 학생도 잘 알 거야. 후반부의 주요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말이야.”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하는 주인공 박현성.
그는, 실력은 있지만 가난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는 ‘대의’를 품고 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도와주고 싶어요. 저는, 항상, 선생님의 편이니까요.’
그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선생님, 뭐든 저한테서 구해요. 다른 것들은 잠시 놓아두고.’
다름 아닌, 안유경과 손을 잡아야 한다.
“김세린이라는 ‘사랑’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라는 ‘대의’. 박현성은 계속 노력하고 번민하지만, 결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해.”
“지금 저와 이사장님의 관계 같네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녀가 차를 내려놓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음악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싶다, 라. 이번 드라마 촬영에서 그런 기회가 있을 거야.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그런 것들을 떠나서도, 이번 드라마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네?”
“대형 블록버스터 드라마와 로맨스 드라마 사이에 끼인 클래식 음악 드라마. 마이너한 소재에, 검증된 베테랑 제작진과 아직까지는 탑이라고 하기 힘든 배우들로 구성된 출연진. 만일 이런 드라마가 다른 두 드라마를 꺾는다면, 모두가 판타지라고 하겠지.”
잊고 있던 현실이 스멀스멀 밀려드는 기분이다.
KBC와 PBS는, 정말 폭격을 하듯 광고에 혼신을 다하고 사이트 지면을 자신들의 기사로 채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정말,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해낸 후.”
“조용히 천명을 기다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미 드라마 촬영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
“이제 고작 1주일 남았네. 첫 방영 날짜까지.”
“그러게요.”
“본방 사수 할 거야? 아 참, 이건 좀 낡은 말인가?”
“그 시간대에 회식이라서요.”
“그러면 식당에서 보겠네. 몇 프로 나올 것 같아?”
시청률이라.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청률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정말 판타지스러운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저는 20퍼센트에 걸겠습니다.”
“그러면, 나도 김리듬 학생의 안목을 믿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이사장실을 나오자마자 정선율에게서 톡이 왔다.
녀석이 보내 준 것은, 다름 아닌 최시현의 인스타 캡처였다.
― 이제 1주일 남았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나는 #일단 #닥치고 #볼거임 #김리듬도 #나온대
이거, 정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는 느낌이다.
“실패하면 안 되는데.”
나는, 이 말을 하면서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