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63
63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
“야, 이거 먹으라고, 이거. 우리 세린 누나가 광고한 이 보이차를 마셔야지. 드라마를 위해서.”
“싫어. 나 결명자차 먹을 거야.”
“안 돼, 김리듬!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서! 세린 누나가 24시간 동안 광고에 전념했을 보이차를! 한 병이라도 더 팔아 줘야 한다고!”
“개똥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정선율.”
여러분. 친구를 잘 만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런 친구를 만나게 되니까요.
“그리고, 빵 먹을 거면 박현성 씨가 친히 광고까지 하신 이 데니시 먹어! 이상한 잡배우가 광고한 거 먹지 말고!”
“…… 빵으로 한 대 쳐도 되냐?”
지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두 가지다.
1) 얘한테 준 김세린 씨 사인 도로 뺏을까?
2) 두 사람은 왜 이렇게 광고를 많이 찍었어요?
“그런데 정선율. 왜 김세린 씨는 ‘세린 누나’고, 박현성 씨는 ‘박현성 씨’야?”
녀석은 대답 대신, 15분 전에 나한테서 받은 사인지를 슥 들어서는 구석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저번에 이 녀석이 종이에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정서해서는, 나한테 꼭 이대로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바로 그 문구였다.
“봤지? 보이지? 내가 왜 세린 누나라고 하는지?”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만 물어볼게.
“그러고 보니 너, 조금 있으면 2학기 전공 실기 해야 하잖아. 연습은 잘하고 있어?”
“아,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했을 거다. 아마도.
정선율은 저번 학기에 가까스로 실기 꼴찌를 면했다.
물론, 녀석의 저번 학기 말 실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위권이었고.
방학 내내 기를 쓰고 연습을 해서 실력을 끌어올렸다…… 고 한다.
[퍽이나. 이 녀석이 정말로 실력을 늘리려고 독을 품었으면 방학 때 네 얼굴 한 번 안 봤을 거다. 이 녀석은 좀 판판이 깨져 봐야 정신을 차려.]물론, 머리로는 정윤성의 말에 100% 공감한다.
내가 들은 정선율의 연주는.
‘학기 말 수준하고 달라진 게 전혀 없어.’
단순히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건반만 두드린다고.
그게 연습이 되는 게 아니다.
메트로놈 템포를 느리게 맞춰 놓고.
악보 전체를 전부 끼워 맞춘 후.
천천히 템포를 빠르게 바꾸며 곡을 완성해야 하는데.
지금의 정선율은, 이제 그게 안 되는 것이다.
‘확 독하게 한마디 할까?’
라고 생각했다가, 바로 그만두었다.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선생님과 선배들이 이미 충분할 정도로 했을 테니까.
“아니, 그런데 풀 수업 실화냐? 학생들 엑스트라로 잔뜩 뽑아서는, 이 장면 저 장면 들이밀면서 수업까지 풀로 때리는 거 실화냐고? 어떻게 생각해, 김리듬?”
“왜 나한테 그래. 나도 일개 배역인데.”
“넌 중요 배역이니까 그렇지!”
“중요 배역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무슨 놈의 중요 배역이 얼굴 한 번, 대사 한 마디 안 나오고 손만 출연하냐?”
“네 손이 드라마의 흥행을 좌우한다고! 요즘 너 장안의 화제인 거 몰라? 마에스트로 최시현은 틈만 나면 네 얘기 하고, 네 동영상 틀어 놓고 너 따라 하는 예고생도 있다더라.”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들이다.
아니. 나를 따라 하는 애들이 있다고?
“나를 따라 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진짜 몰랐어? 요즘 네 스타일 여기저기서 애들이 보고 따라 하는 경우가 꽤 많아. 그래서 학원 선생들이 그렇게 싫어한다더라. 김리듬처럼 치지 말라고.”
“선생님들이 고생이 많으시네.”
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고 싶지만.
뭐, 내가 그런 것까지 따질 시간이 있기는 한가.
당장 오늘 저녁에도 촬영 겸 박현성 옆에 붙어서 음악 강의를 빙자한 작은 콘서트를 해야 할 판인데.
“이번 드라마, 성공할 것 같아.”
“응?”
“내가 감이라는 게 있잖아, 김리듬. 이번 드라마. 대박 칠 것 같다고.”
“그래. 고맙다.”
빈말이 아니라서, 진심이라서 더 고맙다.
* * *
드디어, 가을과 함께 운명의 그날이 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첫 방영일이.
그날 전상국 감독은 모든 촬영을 일찍 끝내고.
양재동의 고깃집으로 모든 스태프와 출연진을 모이게 했다.
무수한 수정을 거쳐 집요할 정도로 완벽한 원고를 보내 주시던 백아현 작가님도 친히 여기를 방문했다.
“아이고, 백 작가님! 오셨습니까!”
“다른 날은 아니더라도, 오늘만큼은 꼭 와야죠. 우리 드라마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날인데.”
전상국 감독은 백아현 작가를 상석에 앉히고는.
맥주 대신 소주가 가득 든 맥주잔을 들고 외쳤다.
“자, 백아현 작가님까지 오셨으니! 이제 시청률 내기 투표를 백아현 작가님으로 마치도록 하죠!”
얼마 전부터, 스태프들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최고 시청률을 놓고 내기를 시작했다.
참고로, 전상국 감독은 14퍼센트에 걸었고.
박현성과 나는 20퍼센트.
김세린은 15퍼센트.
대부분의 제작진과 출연진은 12-13퍼센트에 걸었다.
백아현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며 선언했다.
“20퍼센트에 걸죠.”
“백 작가님. 그거 아십니까? 여기서 20퍼센트에 건 사람이, 작가님을 제외하고 두 명뿐입니다.”
“한 명은 알 것 같은데, 다른 한 명은 누구죠?”
그녀의 시선이, 바로 박현성에게로 떨어졌다.
“네. 한 명은 작가님 예측대로 바로 우리 주인공 박현성 씨고요. 다른 한 명은 박현성의 분신이자, 연주 대역! 희성예고 1학년 김리듬입니다!”
“우오오오! 보이지 않는 손 김리듬!”
“푸하핫! 촬영 감독 아저씨! 손은 무조건 보여야지! 이럴 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라고 하셔야죠!”
“인마, 얼굴이라고 하려고 했어!”
어째, 분위기가 좀 지나치게 화기애애한데?
이러다 첫방 시청률 꼴아 박고 침울해지는 거 아냐?
“이리 와, 김리듬! 아, 아직 한잔할 나이가 아니지.”
“왜 애를 괴롭히고 그래, 박현성! 이쪽으로 와요.”
“하하하하…….”
“그런데, 솔직히 말해 봐요, 김리듬 학생. 박현성 싫죠? 자꾸 불러내고, 연주해 보라고 하고.”
“뭐? 김리듬? 내가 싫어?”
이건 정말이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수준의 난제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뭐, 딱히 좋지는 않죠.”
“빠하하핫! 거봐, 박현성! 김리듬 학생은 너. 를. 싫. 어. 해. 알아들어?”
“아, 이거 열 받네? 확 촬영 펑크 내? 어?”
“에휴. 고기나 드세요. 박현성 씨.”
박현성과 김세린.
둘 다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수고했다.
이런 긴장이 풀어진 장난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그러면 저는, 잠시 화장실에…….”
“어, 김리듬? 설마, 지금 도망치려는 거야? 응?”
“아니거든요?”
“도망치면 안 되지. 이제 곧 있으면 우리 드라마의 첫 방송이 시작되는데.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내빼서야 되겠어? 어?”
“어차피 내뺄 수도 없거든요? 매니저 형님이 집까지 태워 주신다고 해서.”
“아, 역시 우리 창선이 형이야.”
“다들 조용히 해! 이제 첫방 시작한다!”
드디어, 광고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그렇게 떠들썩하던 고깃집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기적을 맛보았다.
마치, 내가 전에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을 때만큼.
강도 높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마침내, 광고가 끝나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밑에 선 남녀가.
드라마의 스타트를 끊는, 첫 대사를 주고받는다.
─ 벨라스케스의 . 이 그림을 아세요?
─ 안다고 해도, 묻고 싶어지는데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원하지만.
계속되는 엇갈림 끝에, 한때 멀어졌던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그림 아래서 다시 만나.
마침내 하나 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
긴 대사 끝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
─ 나도 마찬가지에요, 선배.
─ 그러면, 이제 연주회장에서.
─ 우리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 낼 시간이죠.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백아현의 대사가.
두 남녀의 입에서, 음악으로 완성된다.
―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다면 천리를 멀어져도 만나게 되지만.
― 無緣對面不相逢(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정말이지, 대사가.
마치 스스로 흘러, 화면 바깥으로 스미는 것 같다.
‘이제, 두 사람은 과거이자 미래로 향한다.’
청년, 박현성은 왼쪽으로 돌아가 빠져나가고.
그녀, 김세린도 오른쪽으로 돌아가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고, 닫힌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우리는 그들의 미래이자 과거를 본다.
― 반갑다, 친구들. 내 이름은 박현성이다.
자신의 모교.
희창예술고등학교의 최연소 강사로 돌아온 박현성은.
― 나는, 너희들과 함께, 음악을 완성하고 싶다.
음악의 꿈을 품은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현성 선배?
그의 소꿉친구이자.
서로의 음악을 가장 잘 아는 사이.
희창예고의 동료 강사인 김세린과 함께.
―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둘 사이에 끼어들어 현성을 가지려는 안유경에.
― 수고해라. 박현성. 네 첫 연주회는 실패할 테니.
드라마의 필수적인 요소인.
노골적으로 박현성을 방해하려는 인간들까지.
물에 젖어 버린 악보.
없어져 버린 몇 장의 페이지들.
그런 노골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박현성은, 그 모든 음표들을 전부 외워서는.
예술고등학교에서의 첫 연주를 완벽하게 성공시킨다.
― 선배가 기적을 만든 거예요.
― 기적이 아니야. 노력의 결과일 뿐이야.
박현성은,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첫 방송의 마지막 대사들을 읊는다.
―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전문가가 알며.
―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마무리하는 김세린의 대사.
―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녀의 섬세하고 청초한 목소리가.
어느새 조용해진 식당에서 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자신의 심장을 꺼내 음악에 바칠 수 있는 이 사람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을.
그렇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첫 화가 끝났다.
“벌써 11시 10분이에요.”
첫 화는 우리의 70분도 같이 가져갔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그냥 미친 것 같다.
“아, 다시 봐도 기가 막히네.”
“역시 전상국 감독님이야! 몰입감이 장난 아니지!”
“백아현 작가님 대사는 곱씹을수록 죽인다니까.”
어느새, 식당은 원래의 떠들썩함을 되찾았다.
실시간 댓글 반응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세팝니다 : 내 70분 어디 갔음?
눈향이 : 와 고오급 음악이 제일 먼저 침몰할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블록버스터고 로맨스고 싸대기 갈기는 수준이네 그냥
이설2 : 2화 어디 갔냐고요! 2화 내놔아ㅏㅏㅏ
그 순간, 방송사로부터 시청률 자료를 전달받은 김덕한 조연출이 큰소리로 외쳤다.
“자, 자!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 첫 화 시청률 나왔습니다, 시청률! 60초 후에 공개……!”
“장난하나, 저거! 빨리 공개 안 해?”
“알았어요, 알았어! 병 내려놔! 자, 여러분. 우리 드라마가 말이죠. 알았다니깐! 분당 2.8프로로 시작해서, 5분 만에 4프로를 넘고, 순간 최고 시청률은……!”
모두가 침을 꿀꺽, 또는 꼴깍 삼키면서.
이어질 조연출의 말을 기다렸다.
“순간 최고 시청률, 5.8프로!”
“뭐? 5.8프로? 정말이야?”
“우와아앜! 5.8프로!”
“내가 뭐랬어! 15프로 갈 거랬잖아!”
식당 분위기가.
마치, 월드컵 우승한 것 같다.
5.8 퍼센트.
내가 듣기로는, 지금까지 TBS 역대 드라마 첫 방 최고 기록이 5.8 퍼센트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드라마는.
그 역대 최고의 타이기록을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