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68
68화. 촬영의 계절은 끝나고 (1)
드라마 촬영 일정.
정기연주회 리허설 일정.
기타 수업 등등.
빡세고 무자비한 일주일에 지쳐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달달한 휴식일이 내게 왔다.
오전에는 어머니 대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해 놓고.
오후에는 연습 시간 전까지 잠시 쉴 생각이었는데.
― 오늘 시간 비지?
악마 같은 박현성이 내 금 같은 휴식 시간을 무참히 앗아 가려 한다.
‘모르는 척하자. 모르는 척.’
나는 핸드폰 알람도 끄고, 이따 있을 연습 시간을 대비해 누워서 체력을 비축할 생각이었지만.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바로 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 나와. 청담동으로.
“저기, 박현성 선생님……!”
― 오늘 시간 비는 거 다 알아. 이미 예약 완료했으니까, 바로 청담동으로 튀어 와.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나요?”
― 없어.
“하아. 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 청담동에 스텔라 네일샵이 있어. 거기로 와.
“제가 손톱 관리를 해야 할 이유는 알겠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요.”
― 피아니스트답지 않게 거친 손가락이라는 건 잘 아네. 그러다 손톱 깨지는 일도 생긴다고 들었는데?
윽.
예전에 손톱이 깨져 본 경험 있는 나로서는.
예상외의 타이밍에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박현성의 한마디를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정윤성까지 동조했다.
[박현성이 예리하네. 받으러 가.]“아니, 그 시간에 연습해야 한다니까요!”
[건강한 손톱에서 건강한 연주가 나오는 거야. 지금 네 손톱 상태를 봐라. 이게 피아니스트의 손톱인가.]“…….”
그래서.
“여기구나.”
나는, 기어이.
박현성이 나를 위해 예약한 스텔라 네일샵에.
손가락과 손톱 관리를 받으러 오게 되었다.
네일샵에 박현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전화로 지시를 받은 듯 원장님이 바로 나를 맞이했다.
“저기…….”
“아, 우리 박현성 씨가 예약해 둔 학생 맞지?”
“네에. 맞습니다.”
“이쪽으로. 바로 시작하자고.”
프리패스였다.
유명 연예인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어머. 얼굴하고 다르게 손가락이 너무 거칠다. 손톱 상태도 부실하고. 일단은 손톱 양옆의 거스러미 정리부터 시작할게.”
“그렇게 해 주세요. 하하.”
나는 영혼 잃은 표정으로 사장님께 손톱을 맡겼다.
그런데, 받으면 받을수록 이거 뭔가 느낌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같은 피아노과 애들 중에 은근 네일샵에서 손톱 관리받는 애들이 많았지.’
자기 손톱은 쉽게 깨진다면서 손톱 영양 공급에 집착하던 선배가, 저번 오디션 때 겨룬 적이 있던 2학년 백도희 선배였던가.
‘백도희 선배. 내년 한국문화일보 콩쿠르 도전한다던데.’
이민아와 반서준 등등, 쟁쟁한 후배들에 다소 밀리는 느낌이기는 해도, 백도희 선배는 입학할 때만 해도 희성예고를 제패할 인재였다고 한다.
신입생 대표 연주까지 했을 정도니까.
뭐,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인재다.
그렇게 맛있고, 맵시 있는 연주는 쉽게 듣기 힘들다.
‘현악기 애들도 손톱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지.’
임지호도 손톱에 세심하게 신경 쓰는 타입이고.
내가 보기에는 희재 선배도 은근히 신경을 쓴다.
다른 애들은 선배가 찬 시계에 놀라지만.
나는 시계보다 선배의 손톱에 더 눈길이 간다.
“좋아. 다듬을수록 좋아지는걸? 이런 손톱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건 예의가 아니야.”
“새겨듣겠습니다.”
영양제를 먹지 않고 손톱에 양보하는 작업과.
매끄러운 큐티클까지 발라 주는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나는, 몰라보게 달라진 내 손톱에 감탄했다.
“오오. 이게 제 손톱이에요?”
“그럼. 정말 공들인 결과물이라고.”
지금까지 손톱은, 그냥 건반과 부딪치지 않게 수시로 바짝 깎아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던 나로서는.
환골탈태를 한 결과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 *
희재 선배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는 내 손톱을 보자마자 한마디 척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청담동 스텔라 네일. 맞지?”
“아니! 어떻게 그걸?”
“나도 거기서 자주 받거든. 사장님이 수더분하시지?”
“부정할 수가 없군요.”
역시 이 사람, 자기 손톱에 진심이다.
그는 오른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내게 손짓했다.
“자, 그러면 일단 한울이부터 만나러 갈까?”
“네. 그러시죠.”
오늘은 일정이 빡빡하다.
오후 한 시에 한울 선배를 만나서 앞으로의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한 후.
바로 거기서 촬영장으로 달려가, 오후 세 시부터 마지막 화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TBS 측에서 무수한 연장의 요청을 불러 댔는데도, 전상국 감독과 백아현 작가가 단칼에 잘랐지.’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시청률 20 퍼센트를 돌파한 화제의 흥행작을.
깔끔하게 16화 완결로 끝낸다는 결기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물론, 다들 한계이기 때문에 끝내는 거지만.’
출연진도, 제작진도, 심지어 엑스트라도.
지독한 철야 작업 때문에, 이제 다들 체력의 한계에 부딪쳐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저번 촬영 때는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이 아무 이유 없이 코피를 흘려 촬영이 잠시 멈춘 일도 있었다.
“여어, 이쪽이야.”
에서 만난 한울 선배는, 피로에 찌들고 죽어 가는 평범한 고3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굳이 우리를 만나려 희성예고 근처의 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다행히 딱 맞게 왔지?”
“그래. 희재 너답게 딱 맞춰서 왔어.”
피곤한 얼굴의 한울 선배는, 대입 수시 실기 과목인 차이콥스키 교향곡 총보를 펴 놓은 채 우리를 맞았다.
그는 나와 희재 선배의 얼굴을 슥 훑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리듬. 너, 곧 있을 ‘아르스 노바’ 지휘자 오디션에 응모할 생각 없냐?”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는 뻐근한 목을 뒤로 홱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오케스트라를 사람답게 만드는 일은 어떻게 끝낸 것 같은데, 후임자 찾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래도 나하고 전수정이 후보를 추리는 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정기연주회 끝나면 진짜 다 손 떼고 대학 진학에 올인해야 하는데.”
한국예고 지휘과 3학년 강한울 선배.
우리 학교 강일준 선생님의 사촌이자.
조금 신경질적이어도, 책임감 강한 초대 지휘자.
“다가올 할로윈 날에 있을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나는 지휘자를 물러나야 해. 그리고 11월부터 새 지휘자 오디션 공모를 시작하지. 한희재하고 전수정이 알아서 한다지만, 이 오케스트라를 처음 맡은 입장에서 최소한의 뭔가는 좀 하고 물러날 생각이야.”
“네. 잘 알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가 지휘를 속성으로 배워서라도 입후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건 다른 후보에 대한 모욕 아닐까요?”
“크흠. 연주력이나, 기타 여러 가지를 따져 봤을 때.”
그는 희재 선배와 눈을 한번 마주친 후.
내게 폭탄선언을 했다.
“김리듬. 우리는 네가 지휘로 직종을 바꿔서 이 오케스트라를 맡아 줬으면 좋겠어.”
“저는 피아니스트인데요.”
“둘 다 하면 되지.”
이제 희재 선배가 나섰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양수겸장이잖아. 자기 PR하기도 좋고, 넌 실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또 돈 얘기 하려고 그러죠?”
“물론. 인건비를 아낄 수 있으니까.”
“하하하. 젠장할.”
나는 이들이 인건비를 아끼려는 이유를 며칠 전에 전수정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다.
‘투자 중인 해외선물들의 변동성이 너무 큰 상황이라서 말이지. 채권 만기 시점까지 이번 위기를 잘 넘기게 되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일단은 그 위기를 넘기는 게 중요해. 그러니 잠시 긴축이 필요해.’
나는 무슨 얘기인지 잘 몰라 눈만 깜빡였지만.
다행히 전수정은, 한 줄 요약을 잊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11월까지는 돈 못 풀어.’
물주께서 돈을 못 푼다니 긴축은 해야겠지만.
‘굳이 전수정에게만 의존할 필요가 있나?’
차라리 내가, 연주 방송으로 돈을…….
“뭐, 본인이 안 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한울 선배의 말이 내 생각을 깼다.
그는 펴 놓은 악보를 덮으면서 일어섰다.
“그러면, 후보 인선 열심히 해. 오디션 참관은 최대한 할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알았어. 수고해.”
한울 선배가 자리를 뜨자, 나와 희재 선배 둘만 에 남겨졌다.
여름의 잔열이 떠돌던 초가을 날씨에, 어제부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생량(生涼)한 기분을 일깨웠다.
마치,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시간들을 즐기라는 듯.
“시간이 조금 남네. 우리, 얘기나 좀 할까?”
“중요한 얘기인가요?”
“내 얘기 조금에, 반서준 얘기 조금.”
“중요한 얘기네요. 그러시죠.”
희재 선배의 비밀은 그때 음악을 통해 전해진 기억으로 조금 알았지만,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다.
“10월이 이렇게 좋은 계절인 줄 처음 알았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제 덕인 거 아시죠?”
“알지. 그래서 음으로 양으로 우리 리듬이를 돕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흐음. 저는 전혀 못 느끼겠는데요?”
“그러면, 이렇게 얘기한다면 좀 느껴질까?”
그는 교복 주머니에서 수첩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네주면서 말을 이었다.
“구원의 여름방학 이후, 내가 학교에서 반서준 옆에 있는 악령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어떨까?”
“반서준 옆의 악령이요?”
“정확히는, 나를 유혹해서 회귀라는 지옥 속으로 끌어들이고, 학교에 남은 악령들을 부추겨서 박현성의 끔찍한 불면증을 유도하고, 김석우의 광신도인 스태프의 마음속에 악의를 불어넣은 악령이지.”
그는 내 쪽으로 수첩을 밀었다.
“이게…… 그 증거물들인가요?”
“응. 그리고 너의 것이야.”
“제 것이라고요?”
“네가 연장해 준 내 목숨이니까. 이 정도 선물로는 한참 부족하지.”
나는 수첩을 받았고.
거기에는 악령의 살아 있을 때의 행적과.
그녀가 학교에 남긴 흔적들.
그녀와 송수현 이사장님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현재 목적이 적혀 있었다.
거기까지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남은 의문은 단 한 가지였다.
“선배.”
“응.”
“지금 반서준에게 붙어 있는 악령 말이에요. 대체 학교에 있을 때 무슨 짓을 했던 건가요?”
선배는 태연한 또라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보다는, 그 악령이 대체 누구냐고 묻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건 알 것 같아요.”
“그래? 그렇다면, 그 악령의 정체가 대체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겠어?”
선배가 모아 준 정보를 보니 또렷해진다.
수첩에는, 악령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와 아주 닮았지만, 분명히 다른 사진이.
“이사장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죠. 그렇죠?”
희재 선배는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어째서 송수현 이사장님이.
반서준에게 ‘선을 넘었다’는 표현을 썼는지.
“그녀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어.”
선배는 시선을 시계로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했고, 지금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이려 하지.”
생량함으로 충만하던 계절에서.
돌연, 잔인한 싸늘함이 느껴진다.
“혹시 선배. 반서준이 순순히 학교를 떠난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요? 이대로 있으면 악령의 정체를 발각당하고, 악령이 퇴치당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 하지만 녀석이 학교를 떠나서 생긴 장점도 있지.”
“……녀석이 내게 라흐마니노프 때 같은 짓을 할 수 없다는 거겠죠.”
“좋은 대답이야. 그러면, 이제 촬영장에 늦지 않게 출발해 볼까?”
지금 시각은 2시.
5분 후에는,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