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연주회가 끝나고 난 뒤
희성예고 정기연주회 촬영이 끝나고 6시간 후.
TBS 교양국 편집실.
“잠깐. 저거 뭐야, 대체?”
“그러게. 이 영상은 왜 이렇게 블러가 많지?”
화면마다 자꾸 나타나는 흐릿한 형체들.
특히, 유독 김리듬을 찍은 영상 주위에 그런 형체들이 많았다.
이를 모션블러로 판단한 편집기사는, 심한 컷들은 쳐 내고 살릴 수 있는 컷만 모아 보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 잠시만, 잠시만.”
민한기 PD의 2인자로 은근 그와 죽이 잘 맞는 오윤구 AD는, 화면에서 일렁이는 형체들을 지우려는 편집기사를 결국 제지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모션블러 아니야.”
“에이, 선배. 이게 모션블러가 아니면 뭐예요.”
“아니라니까. 촬영할 때는 분명히 아무 이상 없었단 말이야. 신형규. 네가 직접 확인했잖아.”
“네, AD님. 이상 없었어요.”
이제 입사 석 달 차인 초짜 VJ 신형규가 바짝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게 모션블러가 아니면…….”
강정환 편집기사는 올해 초 민한기 PD에게 ‘지금까지 일주일 편집한 거 다 날려야 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팔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설마, 선배. 저거…….”
오 AD는 강정환 편집기사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귀신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게 귀신이야!”
“진짜라니깐? 아니, 비웃지 말고 들어 봐. 요즘 촬영한다고 학교에서 먹고 자고 하잖아. 그런데 화장실에서 내가 들었다니까? 귀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뭘 들었는데요?”
오윤구 AD는, 목소리를 착 깔고 대답했다.
“강정환은, 올해가 끝날 때까지 또 솔로다…… 야,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다고!”
“진짜 이 양반을 확!”
“그런데, 이거 어쩌죠? PD님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아, 한기 형 지금 3일 연속으로 밤새우고 숙직실에서 자는 중이라 깨우기 좀 그런데.”
“그래도 불러와야죠.”
결국, 오윤구 AD가 숙직실에서 자던 민한기 PD를 깨우는 임무를 맡았다.
비몽사몽으로 불려 온 민 PD는 오 AD가 건네는 커피를 한 잔 받아 마시면서 목을 뚜두둑 소리 나게 풀고는, 카메라에 찍힌 유령의 형상을 계속 돌려 보았다.
“실수 아니지? 블러도 아니고?”
“아무리 확인해 봐도, 이건 모션블러 절대 아니에요.”
“그러면, 진짜 유령인가?”
“네? 유령이요?”
“아니, 희성예고 학생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이런저런 얘기들 많이 듣거든? 그런데, 그 학생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있어.”
“뭐, 연습실 유령 어쩌고 아니죠? 설마…….”
“야. 스포일러를 해 버리면 어떻게 하냐. 김새게.”
한밤중에 연습실에 나타난 유령보다는 ‘이번에 찍은 영상들 다 날려.’라는 직장상사의 지시가 더 무서운 방송국 사람들답게,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얘들아.”
“네, 민 선배.”
“진짜 유령이 찍혔으면, 활용해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요?”
민한기 PD의 입에서, 간결한 대답이 나왔다.
“답은 바로, 저번에 지원 확정된 CG다.”
* * *
연주회가 끝난 지 며칠 후.
우리 집에 사소하면서도 큰 변화가 하나 생겼다.
“리듬아. 박현성이라는 분이 우리 집에 새 TV를 보내시고, 설치기사님까지 오셔서 설치를 끝냈던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네?”
집에 있던 TV가 커졌다.
켜진 게 아니라, 커졌다.
커진 TV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룰루 궁 받았네.’
그리고, 우리 집 TV에 룰루 궁을 쓴 장본인은.
바로, 나와 같이 드라마를 찍은 남주 박현성.
가전제품을 중고장터에 하나씩 팔아서 시세차익을 노리라는 뜻인가.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바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라마 촬영 직후 새 영화 섭외를 받고 준비 중이라 들어서, 박현성 본인에게 전화를 직접 걸기는 꺼려지니까.
몇 초 후, 활달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김리듬 학생! 오랜만! TV 잘 받았어요?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갑자기 집에 TV가 와서…….”
― 아, 현성이가 보내는 작은 선물입니다! 현성이가 김리듬 학생 연주를 듣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꼭 보답하고 싶었다고 해서요. 어머님도 화질 좋은 TV로 자기 드라마 좀 잘 봐 달라고 하시네요. 하하.
아니, 저기요.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만.
― 사실 현성이는 더 큰 TV를 보내려고 했는데, 제가 이 정도로도 클 거라고 필사적으로 말려서 그 사이즈로 간 겁니다. 하하.
“하하. 그것참 감사합니다.”
― 아, 그리고 혹시 몰라서 드리는 얘긴데, 반송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성이가 그러더라고요. 만일 보낸 TV를 반송시키는 순간 더 큰 선물을 준비하겠다고요. 하하.
이렇게 무서운 협박은 난생 처음 받아본다.
하하하! ‘선물을 거절하면 더 크고 웅장한 선물을 보내겠다!’는 협박이 이렇게 처절하게 들릴 줄이야.
그러니 어쩌겠는가.
“정말 감사합니다. 박현성 씨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 주세요.”
* * *
“리듬아. 이거 혹시 부정한…… 그런 거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엄마.”
어머니는 몇 번이고 선물의 부정 여부를 물으셨지만, 맹세코 그런 일은 없다.
“그러면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 리듬이 덕에 TV도 바꾸고, 아들 하나 잘 키웠네?”
“그, 그러면 드라마 시청할까요?”
TV를 바꾸고 나니까, 방영되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때깔이 다르다.
“화질이 정말 좋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전상국 감독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영상미를 뽑아내는지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화의 장면들은, 최고의 드라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안유경은 퇴장했지만, 박현성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해외 출국을 강요한다.
출국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에 외압을 넣을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까지 더해진다.
결국 현성은 오케스트라의 미래를 선택한다.
단원들은 현성의 집으로 가서 그를 막으려 하지만, 현성은 이미 방을 빼고 출국 준비를 마친 상황.
오케스트라는 결국 김세린을 임시 지휘자로 세워 공연을 준비하고, 현성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지만.
― 기사님, 차 돌려 주세요.
― 네?
그는, 결국 방향을 돌려 돌아간다.
오케스트라에게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만 할 곳으로.
― 15분 후에 공연 시작입니다. 모두들 준비하세요.
모두가 착잡한 표정으로 무대에 서고.
마침내, 박현성에게 선물 받은 지휘봉을 든 김세린이 무대에 서는 순간.
관계자가 급히 달려와서 김세린에게 속삭이고.
― 관객 여러분들께 안내 방송 드립니다. 연주회 일정에 변경이 생겼습니다. 이번 연주회의 지휘를 맡을 지휘자가 변경되었습니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당신이 포디엄으로 들어온다.
세린은, 들어오는 얼굴을 향해 웃음과 울음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 잡아요, 마에스트로.
자신의 지휘봉을, 돌아온 현성에게 건넨다.
― 자, 그러면 시작할까?
그렇게, 박현성의 지휘봉 끝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펼쳐지고.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 마지막 콘서트가 끝난다.
“…….”
“…….”
나도, 어머니도 먹먹한 감정을 참으며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들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남은 이야기는 에필로그.
마지막 연주회를 지휘하고, 해외로 떠난 박현성은.
─ 벨라스케스의 . 이 그림을 아세요?
콘서트를 앞둔 옛 궁전의 홀에서.
─ 안다고 해도, 묻고 싶어지는데요.
김세린과 재회하고.
─ 꼭 음악 같아요. 얼어붙은 음악.
─ 음악이요?
─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요.
1화의 장면을 조금 다르게 반복하며.
─ 옛 스페인의 왕궁에서, 작은 왕녀가 파반느를 춘다. 그녀는 시간을 잊었다. 모든 배경은 희미해진다. 마치 거울 너머로 왕녀의 춤을 지켜보는 옛날의 왕과 왕비처럼.
마침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
─ 나도 마찬가지예요, 선배.
─ 그러면, 이제 연주회장에서.
─ 우리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 낼 시간이죠.
콘서트를 위해 방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다면 천 리를 멀어져도 만나게 되지만.
― 無緣對面不相逢(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만일 마음에 바닥이 있다면 거기에 닿을 만큼.
깊고 깊게 퍼지는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너무 아쉽네. 우리 아들 드라마가 일찍 끝나서.”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오케스트라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화면 속에서 가늘고, 우아하고, 가볍게 춤을 춘다.
마치, 시간이 영원할 거라는 환상처럼.
* * *
때 이른 서리가 11월을 얘기했다.
입김이 서리기 시작하는 계절.
손이 곱아 연습이 가장 힘든 계절.
현악기 애들이 악기 조율에 또 애를 먹는 계절.
성악부 애들이 성대 보호를 위해 최대한 말을 아끼고 톡으로 대화하는 계절인 겨울이, 드디어 왔다.
[그렇다는 얘기는, 바로.]드디어,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의 새 지휘자 오디션도 시작된다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지.]공부라는 것이!
폭발한다!
“아니, 저기, 정윤성 귀신 선생님.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이제부터 네가 공부해야 할 총보들이지.]“잉? 아니, 예고도 없이!”
[야, 너 지휘자 오디션 보기로 했잖아. 그러면, 어? 공부를, 어? 해야 할 거 아냐!]“아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 말씀은 맞는데요…….”
[그리고 네 위치를 좀 자각을 해라, 김리듬. 언제까지 학생으로만 남으려고 할 거냐.]정윤성이 갑자기 맞는 말을 하셔서,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듣게 된다.
[넌 머지않아 마스터가 되어 남들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촌음을 아껴 공부해야지.]“알겠습니다.”
하여간.
음악에 있어서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빨리 급을 높여야 내 목표도 이루고 돈도 많이 벌어서 나도 플렉스한 망령으로 지낼 거 아냐.]말을 말자, 그냥.
[그러면, 일단 지휘자의 가장 기초부터 시작을 해 보자. 우선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아날리제(분석)부터.]어제 도착한 커다랗고 따끈따끈 악보를 팔랑팔랑 펼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윤성은 내게 상세하면서도 정확하게 베토벤 교향곡 5번의 구조를 풀어 주기 시작했고.
나의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베토벤이 창조한 음향을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곡은 유명한 로 시작하지. 따따따 따―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4음 모티브 하나로 30분짜리 교향곡을 완성한다면 믿을 수 있겠니?]“일단, 1악장 1주제는 확실하고, 3악장도 의 변형이고, 4악장에서 마지막 발악처럼 다시 나타나 발톱을 박으려는 3악장의 변형도…….”
[그게 끝이 아니야. 1악장 2주제의 배경 화성을 봐. 이 배경 화성의 형태마저 의 확대형을 쓰고 있어.]“……정말 집요하네요.”
[광기란 이런 것이지.]지휘자 수업을 시작한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자, 하지만 진짜 광기는 이제부터야. 베토벤이 이 교향곡을 완성하는 데 보인 집념의 경지를 보여 줄게.]오랜만에 본다.
정윤성의 폴터가이스트는.
스윽. 스슥.
귀신의 통제를 받는 펜이, 빈 악보에 음표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2악장의 주제 동기를 완성하기 위해 베토벤은 처절하게 노력했어. 일단 주제의 첫 버전부터 보자.]몇 개의 음표로 이루어진 동기가 노트에 그려졌다.
[어때? 특징 없고 뭉툭하지?]“그렇네요.”
[그래서 베토벤은 머리를 싸매고 완벽한 2악장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어. 두 번째 버전이다.]그 옆에, 비슷하지만 다른 동기가 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수준 미달이야. 세 번째 버전도.]또 다른 동기.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버전.]각기 비슷하지만 다른 동기들이 노트를 빠른 속도로 채워 나간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열세 번째. 열네 번째. 열다섯 번째. 열여섯 번째. 열일곱 번째. 열여덟 번째.]노트 위를 프레스토로 달리던 펜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면서, 마침내 내가 아는 동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뽑힌 마지막 열아홉 번째 버전.]귀신에게 주도권을 내준 펜이 악보를 톡톡 두드린다.
[보이니? 진짜 광기란 바로 이런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