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91
91화. 사상 최강의 영상감독 (2)
“좋아요. 이제 민 감독님의 편집 방향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죠.”
나도, 민한기 감독도 자세를 고쳐 잡고, 전수정의 입에서 떨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음대로 찍으세요.”
“네?”
“뭐라고?”
[뭔 소리야, 이거.]세 명의 표정에 떠오른 감정이 똑같았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맞지?
이건 뭐, 다시 듣기를 누를 수도 없고.
“찍고 싶은 대로, 민 감독님이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다 하세요. 저는 1도 터치하지 않을 테니까, 찍어야 할 소재 선정부터 최종 편집권까지, 전부 가지세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저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막 나가도 되나 싶은데.
≪희성예고 음악천재≫ 때부터 민한기 PD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적잖이 시달려 본 나로서는, 일단 기대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후후후. 좋습니다. 좋아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흘리는 눈앞의 곰같이 큰 사내를 보니, 더더욱 그런 근심 걱정이 짙어진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음향이지만, 저의 본령은 영상과 촬영과 편집이죠.”
“아주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민한기 감독님.”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작정하고 막 나가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야. 이건 좀 말려야 되지 않나 싶은데.]나도 정윤성처럼, 지금이라도 당장 이 미친 짓을 말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수정은 민 감독과 악수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대가 아주 커요, 민한기 영상감독님.”
* * *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분명히 방금 전에는 아침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밤이 오고, 침대에 뻗어 버렸다.
― 김리듬. 김리듬.
‘응?’
나는 누군가의 부름에 눈을 떴다.
눈앞에 비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수정인데.
조금 많이 유교적이지 못한 복장에.
채찍까지 든 많이 유교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 김리듬. 연봉 1억에 너를 영입하겠어. 내가 호출할 때마다 내게 매도당하는 조건으로. 나쁘지 않지?
‘히이이이익!’
사력을 다해 도망치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희재 선배의 뒤통수에 대고 구원의 손길을 청했다.
‘희재 선배! 도와주세요! 수정이가! 수정이가!’
그런데.
왜 계속 똑같은 구간을 반복하는 기분이 들죠?
― 아, 김리듬. 내 루프 지옥에 온 걸 환영해.
아니, 이건 좀 아니지!
― 횟수를 보니 앞으로 107번 남았네. 루프로 108번뇌를 채울 때까지는, 넌 여기서 절대 못 나가.
‘저, 여기서 나갈래요.’
―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아니, 저기요. 그 대사는 제발!
미친 듯이 탈출하려고 애쓰던 나에게.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당도했다.
― 여기 있었구나. 김리듬.
‘이민아! 나 좀 살려 줘!’
― 그래. 나랑 같이 올라가자.
천사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그녀는.
나를 안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면서 속삭였다.
― 김리듬. 그렇게 전수정의 채찍이 좋았던 거야? 희재 선배의 감금이 좋았던 거냐고.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 이제 됐어. 앞으로는, 나랑 같이 영원히 피아노를 치게 될 테니까.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야.
‘흐아아아악!’
나는 몸부림치다 그만 그녀를 놓쳐 버렸고.
바닥없는 허공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히에에에에엑!”
[김리듬. 왜 그래?]눈 떠보니 현실이다.
낯선 천장도 아니다.
초겨울 새벽의 이른 시각.
어설픈 박명(薄明)이 창밖으로 비치는 시각이다.
“허어어어…….”
[왜 그러냐고. 악몽이라도 꾼 거야?]아직도 생생하다.
전수정. 한희재. 이민아.
이 인간들이, 나를 놓고 벌인 무시무시한 악몽이.
“네. 악몽을 꿨어요.”
[쯧쯧. 일이 많으니 그렇지. 멘탈 관리 좀 해야겠다. 아니,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러는 건데?]“그게요. 전수정이, 연봉 1억을 줄 테니 저를 마음껏 매도하겠다고……!”
이 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후 한 시간 동안, 나는 정윤성의 집요한 폭소와 비웃음에 시달려야 했다.
[프흐흡. 프히히힛. 킥킥. 크크큭.]“…….”
[야. 그래도 연봉 1억에 그 정도 조건이면 좋네. 진짜 전수정한테 한번 슬며시 제안…….]“닥쳐.”
정말이지 이 귀신은, 내가 반드시 반말을 하게 만드는 신묘한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아. 악몽이라니. 아무래도 요즘 벌어진 일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요.”
[그러니까 건강하게 먹고, 운동 계속해. 이제 조금이라도 운동하는 효과가 느껴지지 않니?]“정신 건강은 누가 챙겨 주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예술고에는 원래 제정신인 놈이 드물다고.]우와,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에요. 하하하.
걸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등굣길에는, 잎이 다 떨어진 벚나무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다.
‘봄에는 하교하기 딱 좋은 길이었는데.’
지금은 비록 추위 속에 침묵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무들은 다시 음악 같은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등반 같은 등교를 하는데.
“안녕하세요. 김리듬 학생.”
“안녕하세요, 신형규 씨.”
아침부터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희성예고 음악천재≫ 찍을 때부터 내 주위를 졸졸 따라다니던 신입 VJ, 신형규 씨다.
원래 단기계약직으로 TBS 외주 회사에서 일하던 VJ라, 민 PD가 퇴사하자 미련 없이 따라왔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아, 민 감독님이 오늘 하루 김리듬 학생의 일과를 찍어서 편집한 다음에 영상으로 올린다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별로 찍을 게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뭔가 좀 대단한 촬영을 할 줄 알았는데.
소소한 일상을 찍는다니 뭔가 짜게 식는 느낌이다.
‘최고의 영상감독도 별거 없구만, 뭐.’
라고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여, 지휘자님.”
“어, 조하란.”
“아이고. 올해 성탄절 음악제 슬슬 시동 걸어야 하는데. 리허설 할 수 있겠어?”
“열심히 해야지. 피아노와 지휘를 병행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것 같거든.”
“우와. 포부가 크네. 기대하고 있을게!”
그녀는 왔을 때처럼, 쌩하니 사라졌다.
이런 기분. 은근히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VJ를 대동한 채, 오랜만에 들어간 교실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아, 살 것 같다.”
이제 정선율을 붙잡고, 2학기 향상연주회 레퍼토리 논의를 해야 하는데.
“여, 정선ㅇ…….”
“김리듬은 어디 있는가! 이 교실을 색출해라!”
“색출이 아니라 수색이겠지, 이 백치야.”
색출이고 수색이고 좀 다른 데로 가 줄래?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부부 소리까지 듣는 김가인, 임지호 콤비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김리듬! 급보다!”
“왜 왔어?”
“아니, 저기요. 표정 푸시고요. 우리 오케스트라도 이제 슬슬 성탄절 예술제를 준비해야 하잖아?”
“응. 그런데.”
“그래서 말이지. 성탄절 예술제를 위해 받아 놓은 중고 악보가 좀 많이 있거든?”
여기까지 들으면 음악과 예고생은 바로 촉이 온다.
무지막지한 중노동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도 싹 다 지우고 첨삭하는 작업에 동참하라고?”
“바로 그거지! 그 악보들이 좀 많이 지저분하거든. 하, 거참. 이런 일 말이야. 옛날에 한울 선배한테는 함부로 말 못 했거든? 꼭 그런 양반들은 마음속에 담아 놨다가 나중에 이상한 걸로 닦달을 해요.”
내 시선은 바로 정선율을 향했다.
얘라도 데리고 가야 뭔가 일이 될 것 같거든.
그리고, 이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고오급 저녁. 오케이?”
“알았어. 고맙다. 일단 너희들은 교실에서 나가.”
이런 식으로 딜이 가능하다는 거지.
나는 1초라도 더 내 옆에 붙어 있으려는 두 녀석을 교실 밖으로 밀어 버린 후, 문을 닫아 버렸다.
눈치 없는 VJ가 그런 내게 한마디 건넸다.
“정말 신나는 예고생의 하루네요.”
두 번 신났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
* * *
피아노 수업, 화성학 수업, 음악사 수업을 마치고.
나와 정선율은, 복도를 통해 옮겨지는 온갖 석고 조각상과 캔버스와 하프와 드럼 세트와 스피커를 피해 김가인이 일러 준 악보 보관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리듬. 거기 있는 악보 카트 좀 이쪽으로 밀어 줘.”
“알았다, 알았어.”
지휘자 되고 첫 임무가 아주 환상적이야.
‘아르스 노바’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에.
악보 정서 및 첨삭 담당원이라니.
“그런데, 어째 사람이 좀 적다?”
“걱정하지 마. 온갖 핑계를 대면서 다 빠져나갔지만, 전수정이 벼르고 있거든.”
“놈들에게 지옥의 불벼락을. 제발.”
지금 악보 정서를 위해 모인 사람은, 정선율을 빼면 정확하게 ‘아르스 노바 트리오’ 인원과 일치했다.
어쩌겠나.
해탈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어, 잠깐만. 이거 좀 심각한데? 이러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이야?”
“비올라 파트보가 낙장이 많아. 아이 씨. 다른 파트는 다 있는데. 가뜩이나 중고라서 판본도 개판이더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대답했다.
“혹시 쓸 만한 빈 악보 있어?”
“그건 있어. 그런데 어쩌려고?”
“지금 당장 여기서 그려 줄게.”
“네가? 어떻게?”
“일단 주기나 해. 그리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악보를 전해 받자마자 즉시 비올라 파트보의 낙장을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이왕 하는 김에 교정도 싹 해라. 중고 악보라서 그런지 판본이 아주 개판이야.]‘일 좀 늘리지 맙시다, 제발.’
[야.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게 차라리 나아.]나는 결국, 윤성의 말대로 판본 교정까지 싹 마쳤다.
“악보 교정 끝. 확인해 봐.”
“이거, 확실한 거 맞지?”
“바흐 신전집 판본에 맞췄으니까 확실해.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게 바흐 신전집이야. 아니, 맞을 거야.”
녀석들의 표정이 묘하다.
“역시, 김리듬…….”
“인간 악보 자판기라니까. 누르면 바로 나와.”
“볼 때마다 신기하네, 아주.”
“됐고요. 빨리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자.”
모르겠다.
이제는 카메라 앞이고 뭐고.
일단, 나부터 좀 살고 보자.
그렇게, 지루한 악보 정서 작업이 이어졌다.
정서를 계속하던 김가인이 갑자기 일어나 급발진 댄스를 추고, 나머지 3인이 그 광경을 무시하는 등 소소한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정말 지루한 작업이었다.
“아. 끝났다.”
드디어,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모든 작업이 끝이 났다.
“VJ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같이 저녁 콜?”
“아, 저는 분량 다 뽑아서 이제 갈 예정입니다.”
“네? 분량을 다 뽑았다고요?”
“네, 오늘 분량 충분한데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VJ의 뒷모습을 보며.
김가인이 내게 속삭였다.
“VJ 쉽네. 저렇게 날로 먹고.”
묘하게 사기당한 기분이다.
* * *
그리고 3일 후.
나는 다시 한번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말도 안 돼.”
VJ 신형규의 촬영과 민한기 PD의 편집 결과물은.
우리의 일상을, 기가 막힌 영화의 원테이크 장면으로 환골탈태시켰다.
올라온 영상물은 내가 교실에서 악보 보관실까지 가는 과정을, 1초의 끊김도 없는 원테이크로 처리했다.
마치, 거기에 들어가 있는 모든 장면이 하나의 우연도 없이, 섬세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역시. 기대한 대로 기가 막히게 잘 뽑았네.”
전수정이 극찬할 만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거기서 우리가 의도한 장면은 채 10%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던 작업이 안 풀린다고, 갑자기 일어나 급발진 댄스를 추는 첼리스트를 슬로 모션으로 잡고.
거기에 우아한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깐다는 생각을, 민한기 PD 말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예상한 대로야. 민한기라는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 폭발하는 타입이야.”
그게 이렇게 폭발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 같은데.
하여간, 민한기 PD의 첫 결과물은.
‘희성예고생이 스트레스를 푸는 법’이라는 부제와 함께, 첫날 조회수 1만 5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