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96
96화. 리듬과 선율의 2중주 (3)
저주물이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윤성이 후련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제때 없애 버려서 다행이다. 만일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떻게든 저주의 잔편이 새어 나와 너와 정선율을 해치려 들었을 거다.]‘반서준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요.’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을 끝낸 후에 해도 늦지 않아.]나는 저주물이 사라진 곳 앞에서 굳어 버린 선율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선율, 괜찮아?”
“으, 응? 어, 괜찮아…….”
녀석의 표정이, 울먹이는 듯하더니.
곧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반서준,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대체 나한테 뭘 보낸 거야?”
“저주물을 보낸 거야. 나뿐만 아니라, 너도 해칠지 모르는 위험한 저주물.”
“세상에…… 진짜 또라이 아냐?”
“그 또라이 때문에 나도 위험한 적이 있었거든.”
방금 전까지는, 정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는데.
이제는 깃털처럼 가볍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선율.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연습할래?”
그런데, 녀석의 표정은 나처럼 가볍지 못했다.
“어, 연습? 해야지. 연습. 오늘부터, 하자.”
“그래도 괜찮겠어?”
“하자. 빨리 가서 하자! 그동안…… 제대로 못 했으니까…….”
주눅 든 녀석의 표정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이 상태로 오늘 연습은 무리다.
“걱정하지 마. 일단 오늘은 쉬어. 너,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잖아.”
“그건 그런데, 그러면 시간이 5일밖에…….”
“5일이면 충분해. 넌 할 수 있어.”
“못 할 것 같아. 아니, 난 못 해.”
“할 수 있어.”
나는, 나의 친구에게 건넬 수 있는 믿음의 최대치를 담아 말을 이었다.
“넌, 정선율이니까.”
* * *
하지만, 윤성은 나와 다른 생각을 품는 것 같다.
[자네, 인간을 믿나?]“정 마에. 그건 대체 무슨 헛소리예요?”
[아니. 그렇게 정선율 보내 놓고, 후속 조치도 안 취하고 그냥 애를 믿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네요. 오늘의 선율이는 제 시각에 연습실 앞에 있을 테니까.”
[너, 정말 호구 아니야? 응?]“네. 당신의 말은 완벽하게 틀렸어요, 마에스트로.”
내 손가락이 가리킨 그 끝에는.
연습실 앞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선율이가 있었다.
난 바로 윤성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역공을 가했다.
“저것 봐요. 내 말이 맞잖아요?”
[야. 사실, 너. 나 모르게 정선율하고 둘이 짰지?]“어? 들켜 버렸네요. 사실 저와 정선율은, 님 같은 귀신도 모르는 텔레파시가……”
[킹받는 얘기 하지 마라. 폴터가이스트로 확 그냥.]“김리듬! 기대해라!”
원래대로 돌아온 선율이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말이야! 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연습을 거듭해서! 이 곡을 완벽하게 마스터해 왔다 그거야!”
“잘됐네. 그러면 바로 시작할까?”
내가 확신한 대로.
녀석은, 자세도, 표정도, 집중력도 전부 달라졌다.
그렇게 안 되던 연습도, 시작 두 시간 만에 전곡을 처음으로 완주할 정도로 나아졌다.
“오, 정선율. 좀 치는데?”
“마, 내가 원래 좀 쳤다! 지금까지 실력을 숨겨서 그렇지…….”
네. 지금까지 ‘정선율이 실력을 숨김’ 잘 들었고요.
[좋아. 이제부터 진정한 연습 시간 시작이다.]“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템포 올리고 연습 해야지?”
지금까지는 튜토리얼이었습니다, 정선율 씨.
진정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요.
당신은, 연습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4시간에 걸친 지옥의 연습이 끝나고.
“김리듬, 너어. 지금까지 계속, 이런 연습을 해 왔던 거냐…….”
나는 4시간 만에 모차르트 대신 인생의 노화과정을 마스터한 선율이의 모습을 보면서 킥킥 웃었다.
“오늘은 좀 빡세게 했네. 내일도 빡세게 해야지?”
“살려 주세요오…… 여긴 지옥이야아…….”
허허허. 지금까지 낭비한 시간을 만회하려면.
이 정도 강도의 연습은 각오하셨어야죠.
* * *
5일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날짜는, 드디어 향상연주회 당일을 가리켰다.
“정선율, 괜찮아?”
“어? 어어…… 여기가 어디지?”
“정신 차려, 정선율! 여기 대기실이야!”
“아, 맞다. 대기실…….”
애가 지금, 위험할 정도로 심하게 긴장했다.
“정선율. 연습 때처럼 하면 돼. 연습 때처럼.”
“연습 때, 연습 때…….”
[김리듬. 너 말 잘못한 것 같은데.]정말이지, 윤성의 말처럼.
그게 선율이의 트라우마 버튼이 된 것 같았다.
“어으으으…… 연습 때의 나는…….”
“정선율! 정신 차려! 죽으면 안 돼!”
“김리듬. 하나만 묻자.”
“응? 뭐?”
“나, 연습 때 잘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당연하지. 너만큼 연습 때 잘하는 애가 누가 있어?”
“그렇지. 연습 때의 나는 최강이지…….”
“3번 팀. 1학년 김리듬, 정선율 듀오 준비하세요.”
“네, 갑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우리의 모차르트를 연주할 시간이.
나는 기름 안 친 기계처럼 삐걱삐걱 걸어가는 선율이의 손을 잡고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객석 보지 말고 피아노만 봐. 안쪽에 앉고.”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피아노에 앉았고.
나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무대를 훑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눈빛에 이런 생각들이 담겨 있다.
‘솔직히, 이건 너무 격차가 큰 연주 아냐?’
‘구멍이 너무 큰데. 아무리 김리듬이라도 이걸 메우는 게 가능할까?’
‘괜히 발목 잡혀서 김리듬 내신 팍 깎이는 거 아냐?’
그래, 다들 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
정선율이 얼마나 피눈물 나게 노력해 왔는지를.
나와 녀석이, 지금까지 같이 일군 노력의 결과를.
‘보여 줘, 정선율.’
내가 신호를 주자.
신뢰와 우정으로 엮인 모차르트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화사하고 발랄한 모차르트의 포르테가 기분 좋게 연주회장을 때리자, 객석의 전수정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의 서강준에게 한마디 했다.
“다행히, 큰 구멍 없이 잘 진행되네.”
“그러게. 나는 저 정선율 때문에 김리듬까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정선율과 김리듬 사이에는 엄연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어.”
“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정선율은 김리듬을 잘 알아.”
예상치 못한 말에, 강준의 표정이 바로 묘해졌다.
“반대 아냐? 김리듬이 정선율을 잘 아는 게 아니고?”
“지금 연주에서 들리고 있잖아.”
정선율은, 뒤처질 듯 뒤처질 듯 뒤처지지 않는다.
물론 김리듬은 모차르트를 너무 쉽게 연주하지만.
모두가 내심 기대한, 정선율이 묻히는 일은.
연주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정선율은 말이지, 아슬아슬하게 빌빌거리면서 김리듬을 따라가지만, 김리듬이 들어오라고 판을 깔면 그 타이밍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물론, 김리듬의 소리는 환상적이다.
순은으로 빛나는 광채를 풍성하게 발산하는.
그 ‘김리듬 사운드’로 무대를 압도하면서도.
둔한 듯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선율의 소리를 잘 붙잡아, 완주를 목표로 같이 뛰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김리듬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때로 정선율을 배려해 템포를 약간 늦춰 주는 것은.
오직 김리듬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래도, 리듬과 선율의 듀오는 나쁘지 않다.
“진정한 친구란 저런 것이지.”
그렇게, 김리듬과 정선율은.
진정한 우정과 신뢰로 단단하게 엮인.
리듬과 선율의 2중주로 향상연주회를 마무리하고.
부러움과 의외라는 반응이 섞인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 * *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서강준은, 내게 이렇게 코멘트했다.
“닉값 하는 연주였어, 김리듬.”
나는 따봉으로 화답했다.
그거면 됐다.
김리듬과 정선율이.
이름처럼 리듬과 선율의 2중주를 해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면, 난 임지호와 김가인을 보러 가야겠다.”
“같이 가자, 서강준. 나도 궁금하거든.”
개인적으로, 정말 너무 궁금하다.
나라는 브레이크 없이 급발진한 둘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지.
나는 뒤에서 주뼛거리는 정선율을 잡아끌었다.
“자, 그러면 이제 마음 편하게 김가인과 임지호의 연주회를 구경해 보실까, 정선율?”
“아, 그래야지? 참으로 기대가 되던데.”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감상한.
임지호와 김가인의, 라벨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라는 난곡 연주는.
[저걸 잘 봐라, 김리듬. 정신병자와 정신병자가 만나서 같이 미치면 저런 연주가 나오는 법이야.]진짜 센세이셔널한 연주회였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대체…….”
“미친 연주다, 진짜…….”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입에서 줄줄 흘리고 계신 최 선생님의 표정이, 이 연주회를 압축하는 광경 아닐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대기실에서 싸움 났대! 임지호하고 김가인이!”
아, 그건 절대 놓칠 수 없죠.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임지호하고 김가인의 싸움 구경 아니겠습니까.
둘은 극악의 퍼포먼스로 전교생에게 자신의 두 얼굴을 다시 한번 깊게 각인시켰지만.
연주를 끝내자마자 미친 듯 싸웠다.
“그러니까, 내가, 따로 반주자를 구해서 하자고 하지 않았냐. 대체 이게 무슨 개같은 연주냐!”
“아니, 자기가 망친 걸 왜 나한테 따짐? 응? 그러니까 내가 라벨 사운드에 맞게 하자고 했잖아!”
“템포 마음대로 주물러서 망친 건 너 아니냐!”
“아니거든요? 저는 천재라서 그 템포가 맞거든요?”
개판이네, 하하.
둘은, 때마침 대기실에 도착한 나를 원망과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건넸다.
“이번 향상연주회의 패인은…….”
“김리듬, 너의 부재였다.”
둘이 똑같은 말을 하네.
심지어, 뒤따라온 희재 선배의 분석마저 같았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둘 사이에는 항상 김리듬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맞어요, 맞어! 선배 말이 진리예요! 균형의 수호자 김리듬이 없어지니까, 임지호 통제가 안 돼서 망했다니까요!”
“희재 선배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가인, 네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허허. 둘 다 패배의 원인이니라. 허허허.”
희재 선배가 황희 정승 같은 미소로 둘을 달래는 사이, 나는 슬그머니 빠져서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향상연주회 최고점을 기록했고.
임지호와 김가인 듀오는, ‘너무 센세이셔널한 연주’를 해낸 대가로 최고점을 놓쳤다.
이렇게 나의 12월은 다시 무탈하게 흘러간다.
물론, 깔끔하게 끝맺어야 할 문제가 하나 남았지만.
* * *
12월의 뉴욕에는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내년 3월에 치러지는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조슈아 창이 구해 준 저택에서 연습 중이던 반서준은.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폰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 보내진 문자는, 정선율의 것이었다.
― 여어 반서준. 내가 보낸 선물 좀 볼래?
그는 녀석이 문자와 함께 자신에게 첨부한 영상물을 보자마자,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영상에서, 김리듬과 정선율은.
자신이 보내 준 저주물을 깨끗하게 태워 버렸다.
영상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왔다.
― 잘 지냈냐, 반서준?
“네가 직접 전화할 줄은 몰랐네. 김리듬.”
― 경고를 해 주려고. 내가 직접.
폰으로 전해지는 김리듬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반서준이 한 번도 듣지 못한 강렬한 적의를 담고 있었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반서준. 내 친구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절대 건드리지 마.
“그 경고를 듣지 않겠다면?”
― 네가 내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반서준.
김리듬은, 그에게 똑똑히 들으라는 듯.
한 음절 한 음절을 마치 씹어 뱉듯 얘기했다.
― 나는, 네가 악령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무너뜨릴 거야.
전화가 끊겼다.
쿠르릉!
투둑, 투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창문을 격렬하게 때리기 시작했고.
반서준은 폰을 바닥에 거칠게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