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nted Foreword Genius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성탄절 예술제는 연극과 함께 (1)
다시 한번 말하지만, 12월은 1년 중 가장 바쁘다.
우리들은 향상연주회를 끝내자마자 바로.
내년에 우리들이 있을 위치를 결정하는.
학기말 청음시험에 뛰어들어야 했다.
“어으으. 김리듬, 어떻게 하지? 나 청음시험 망치면 반 더 떨어지는 거 아냐?”
“걱정하지 마. 열심히 잘 하고 있잖아.”
녀석의 청음 수준은 실기보다 훨씬 괜찮다.
까다로운 증6화음도 곧잘 듣고 맞히니까.
컨디션만 좋다면, 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자, 잘 들으세요, 정선율 학생님.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벽이며.”
나의 벌어진 손가락들이, 건반을 깊게 눌렀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큰 도약대가 되어 준다. 이건 무슨 화음이야?”
“시끄럽고요. 지금 누른 화음은, 으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고민하던 녀석의 입에서, 곧 답이 나왔다.
“내림가장조의 증6화음!”
“정답입니다! 아쉽게도 상품은 없습니다만?”
“개같네. 비켜 봐. 지금부터 잔혹한 문제 난도로 너를 침몰시켜 버릴 테니까.”
그리고, 녀석은.
괴랄한 화음 13개를 누르는 대로 전부 맞혀 버린 나의 실력에 격분하며, 연습실 냉장고 안에 남은 커피를 전부 약탈해서는 유유히 사라졌다.
* * *
드디어, 학기말 청음시험 당일.
“어떻게 됐어?”
일찌감치 시험을 끝내고 나온 나는, 뒤늦게 나온 선율이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바로 이 질문부터 던졌다.
그런데, 녀석의 침묵이 길어진다.
설마?
[아니야. 저거 얼굴 보라고.]침묵하던 녀석의 얼굴에 썩소가 그려지고.
손가락이, 천천히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인다.
“2학년에는, A반 승격 가능할 것 같아.”
“됐어! 그렇지!”
“야, 김리듬. 너 솔직히 말해 봐. 나 청음시험 망칠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지?”
“아니야. 그럴 리가, 하하.”
쳇. 이래서 눈치 빠른 예고생은…….
그렇게 청음시험을 클리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던 차에, 나는 녀석의 새 포부를 들을 수 있었다.
“나, 2학년 되면 한국문화일보 콩쿠르에 나갈 거야.”
“잘 생각했어.”
“이제는, 정말 더 잘하고 싶어. 열심히 해야지.”
나는 진심으로 정선율의 도전을 응원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열심히.
선율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약대이자 디딤대가 되어 줄 것이다.
* * *
오늘은 밤새 내린 폭설이, 꽃이 져 버린 자리에 대신 눈꽃을 뿌리고 갔다.
겨울의 진정한 의미는, 언젠가 그 엄혹한 계절이 끝나고 피어날 봄꽃에 맺혀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런 눈꽃이 가득 핀 날에 전수정이 나를 불렀다.
“김리듬. 혹시, 금요일에 시간 비어?”
“아, 그날은 연습실에 있으려고.”
“흐음.”
전수정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연습이 주목적은 아닌 것 같고, 민아 콘서트를 라이브로 볼 생각인가 보네?”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사실은, 나도 은근히 고대하고 있거든. 우리 민아와 필리프 로제 교수님이 같이하는 연주회가 얼마나 멋질지 말이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민아와 필리프 로제 교수님의 듀엣 연주회가,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래 연주회는 11월에 치르기로 되어 있었지만.
― 어쩔 수 없었어. 로제 교수님도, 나도 한 완벽주의 하잖아? 어떻게든 더 좋은 연주회 만들려고 피아노 조율 다시 하고 조율사 해고하고 연주회장까지 바꾸고 나니, 연말에야 간신히 연주회를 치르게 되네.
‘하하하하.’
완벽주의자와 완벽주의자가 만나 벌어지는 흔한 일들이 연이어서 터져 버리는 바람에, 12월로 늦춰졌다.
이 짧은 통화만으로도, 연주회 준비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지독하고 무자비했을지가 눈에 선하다.
“완벽주의자끼리 연주회 준비를 했으니, 아마 그 사이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갈려 나갔겠네. 그렇지?”
“그렇다고 그러더라.”
“민아하고 계속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아. 그 교분이 더 깊어지면, 언제고 민아를 직접 불러서 같이 콘서트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
역시, 목적은 그거였구만.
“그러니, 김리듬. 이왕 민아를 부를 수 있으면,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이나 재능기부 식으로 부르는 게 좋지 않겠어? 대신 원하는 걸 들어주는 식으로.”
“못 들은 걸로 할게.”
양심이 좀 적당히 없으세요, 전수정 씨.
* * *
드디어, 석 달을 기다린 그 날이 왔다.
따뜻한 코코아 한 잔에, 태블릿 PC와.
최상의 피아노 음향을 보장할 덱과 스피커까지.
이 천국 같은 환경에서, 민아의 연주회를 볼 것이다.
[레퍼토리 좋네. 너와 정선율이 했던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 슈베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까지.]준비 과정만 3개월 걸린 그 연주가.
이제 시작된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기품 있는 블랙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난 민아는.
연미복 차림의 필리프 로제 교수의 손을 잡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도 민아의 옆에서 연주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펼쳐지는 모차르트는.
색채와 루바토의 예술이었다.
[빛은 아름답고, 따뜻하며, 경이롭지만, 단조롭지.]빛이 색을 품고, 색이 빛을 발산한다.
[하지만 색을 품은 빛은,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어. 바로, 지금 들리는 이민아의 연주처럼.]연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따뜻하고 발랄하며, 밝고 화사해서.
소리에서 온도가 느껴지는 저 연주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완벽한 모차르트다.]“네. 맞아요.”
이제는, 따뜻하고 밝은 모차르트 대신.
깊고 그윽하며 슬픈 슈베르트를 연주할 시간이다.
[건반을 누르는 위치를 잘 봐라. 필리프 로제 교수도, 민아도 모차르트에서는 건반 바깥쪽을 눌러서 밝은 소리를 내지만, 슈베르트에서는 건반 안쪽을 눌러서 어두운 색채가 유지되도록 한다고. 저런 미세한 차이가, 바로 피아노에서 영혼을 끌어내는 방법이야.]아니, 그런 것들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빚어내는 연주는.
이미 모차르트이며, 슈베르트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알겠지? 넌 앞으로 저런 연주를 해야만 해. 지금의 너는, 세계 무대에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연주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박수를 치며 떠나지 않는 관객과 하나 되었다.
연주보다 더 긴 여운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 * *
이제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곧 있을 성탄절 예술제 준비를 앞두고, 이민아 연주회 정주행이나 할 요량으로.
연습실에서 연주회를 틀어 놓고 느긋하게 보는데.
똑똑똑.
“아, 대체 누구야……. 잠시만요!”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익숙한 향기와 함께 나를 껴안는 생생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김리듬.”
“이민아? 분명히 어제 아침까지…… 파리에……!”
“당연히 연주회 끝나자마자 비행기 타고 11시간 동안 달려서 여기까지 왔지. 이제 의문이 풀려?”
참으로 기묘하다.
내 태블릿 PC에서 연주 중인 그녀가.
지금 바로 내 앞에 서 있다니.
그녀는 내가 선물로 보내 준 목도리와 장갑을 벗고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아, 배고파 죽겠네. 일단 피자 좀 시켜 봐. 한국식 피자를 반년을 못 먹었더니 죽겠어.”
“아, 피자 좋지. 마침 나도 배고프던 참인데.”
내 폰으로 검색을 해 보니 지호가 어제 내게 보내 준 파인애플 피자 쿠폰이 보였다.
그것을 바로 기억에서 소거시킨 후, 역사와 전통의 서민 음식 콤비네이션 피자를 주문했다.
“으으음.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도대체 해외에서 어떤 삶을 살아 왔길래 고작 이런 피자에 이렇게 기뻐하는 거야.”
“어떤 삶을 살긴. 섬유질 없는 삶을 살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뒤에서 윤성이 킬킬거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민아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어. 진하고 기름진 연주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물리더라고. 더 진하게! 더 강하게! 더 기름지게! 이 소리를 반년을 들으니 못 살겠더라.”
“하하하하…….”
이민아는 여전히 이민아였다.
물론, 그 다음 터진 직구는 전혀 예상 못 했지만.
“김리듬. 나하고 같이 콘서트 한번 하자.”
“응?”
“정선율하고 향상연주회 잘 치렀다면서. 나하고 같이 듀엣 연주회 하는 것도, 정말 좋은 경험이 될걸?”
“그러면 나 죽어. 죽는다고요.”
“안 죽던데. 드라마 일정은 더 강행군이었다면서?”
사실 적시 자제하십시오.
“그러면, 여기서 연주를 하자. 사실 장소는 상관없으니까. 어디서든 너와 같이 연주하면 그만이지.”
“좋아. 그러면, 얼마 전에 갈채를 받았던 모차르트를 한번 해 볼까?”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모차르트로 재회를 자축했다.
공기 속으로 잘게 퍼져 분해된 후.
태양의 광채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커피의 향과 조금씩 섞여 방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음악은.
비록 소리는 조금 낮을지라도 지극히 아름다워서.
나는 연주하는 내내 환상적인 색청을 겪었다.
“아, 이게 바로 김리듬의 음색이지.”
“도저히 못 따라가겠네. 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러면, 이제 진짜 목적을 털어놔도 되지?”
“무슨 목적인데?”
“사실, 귀국독주회를 하기 전에 시간이 좀 남거든.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학교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에 성탄절 예술제를 하는 걸로 아는데. 맞지?”
“응. 맞아.”
기말고사가 끝난 지금, 전교생은 성탄절 예술제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요즘 ‘디센스’ 3인방 얼굴 보기가 힘들다.
성탄절 특선 무용 공연을 준비하는 무용부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고.
“그런데 음악부 쪽은 예술제 준비를 더 늦게 시작했을 거란 말이야.”
“그렇지. 지금 한창 하고 있기는 한데…….”
“나도 한몫 거들게. 내 피아노 연주로.”
“그건 좀 생각해 보고.”
“왜?”
그녀는 어떻게든 나와의 크리스마스 깜짝 콘서트를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어제 전수정의 제안도 마음에 걸리고.
“칫. 그러면, 내일 같이 등교하는 건 되지?”
“아, 그건 문제없지.”
* * *
다음 날, 민아는 화려하게 희성예고에 복귀했다.
“어이고, 민아 아냐? 그래, 귀국독주회 준비로 바쁠 텐데, 여기는 어쩐 일로?”
“당연히 찾아뵈어야죠, 선생님. 애들 얼굴도 볼 겸해서 왔습니다.”
귀국한 민아에게 순식간에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가는 곳마다 그녀를 반기는 인파에 밀려, 나는 동복 단추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예술제는 희재 선배가 총괄하던데. 한국음대 진학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말이지.”
“응. 그렇지.”
희재 선배와 연관점이 없던 민아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저주가 풀린 것 같다.
그런데, 이 양반 루프지옥 탈출은 참 좋은데.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몰라서 내심 불안하다.
사실, 이번 성탄절 예술제도 그냥 무난하게 캐럴 연습으로 채워질 줄 알았는데.
‘아쉽지만, 예정이 많이 바뀌었어.’
선배가 대형 프로젝트를 들고 나타나면서 바뀌었다.
‘연극이요?’
‘응. 그것도 음악, 미술, 무용, 연기가 합쳐진.’
‘대애박. 그거 26일까지 가능이나 할까요?’
‘충분히 가능해. 걱정 말고, 나를 믿어.’
선배가 유례없는 확신을 하니 더 불안하다.
“그러면 난 이만 가야겠어, 김리듬. 여기, 희재 선배한테 너 좀 잘 봐 달라고 준비한 뇌물도 있으니까, 학생회실에 들러서 가져다 드려.”
“알겠습니다. 임무를 잘 완수하지요.”
민아가 갈 때까지 전력으로 손을 흔들어 준 나는, 곧 희재 선배가 예술제를 준비하는 학생회실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대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생회실 테이블은, 온갖 과자 부스러기 사이에 난삽한 A4 용지들이 널린 전쟁터였다.
준비한 선물을 내려놓고 나가려는 찰나.
맨 위의 종이 한 장이 내 시선을 강탈했다.
아, 이건 못 참지.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놉시스를 읽었고.
호기심과 궁금증 가득하던 내 표정은, 시놉시스를 따라 내려가면서 점점 일그러지다 못해 울상이 되었다.
[한희재 이거, 내 기어이 이럴 줄 알았다.]“으으으. 이건, 안 돼…….”
입에서 저절로 흐느낌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기분이 어때, 김리듬?”
“히이익!”
희재 선배의 무서운 미소에 나는 얼어붙었다.
“시놉시스를 봐 버렸구나, 김리듬.”
“서, 선배. 이 연극은 대체…….”
“이미 늦었어. 되돌릴 수 없어. 이미 이사장님의 결재까지 다 받았거든.”
“왜…… 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절규했다.
“왜 연극 주인공인 예수님이 3대 500을 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