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Napoleon's genius son RAW novel - Chapter (15)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14화(15/547)
(14) 1790년 1월, 동인도회사에 투기도박을 걸다
파리는 그야말로 격동의 와중이었다.
“세상에, 여기가 어디니?”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오는 길, 예상보다는 평온했다.
아직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파도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지는 않은 탓일까.
그러나 파리만은 단연, 들끓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국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저택이 빈 집으로 나올 정도로.
대저택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조세핀을 보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 아르투아 백작님이 갖고 있던 저택 중 하나죠.”
“아르투아 백작님? 설마, 국왕 폐하의 동생?”
“예, 혁명이 시작되자마자 해외로 날랐거든요. 지금쯤 이탈리아 어딘가에 있을걸요.”
아르투아 백작, 국왕의 막내 동생, 그리고 왕위 계승서열 3위.
후일 원역사에서는 샤를 10세라는 이름으로 정말 왕위에 오른다.
당연히 유진 입장에서는 피해야 할 미래다.
왜냐하면 유진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샤를 10세는 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진은 그런 이야기를 굳이 조세핀에게 꺼내지는 않았다.
“뭐,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에요. 지금 상황에선 좋은 저택에 있으면 더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폴리트가 꽤 애썼어요.”
먼저 파리로 달려와 저택부터 구한 이폴리트가 상기된 얼굴로 조세핀 앞에 섰다.
“고맙다, 이폴리트.”
“아, 아뇨. 마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후후,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있니. 신세는 다 갚아야 하는 거지.”
새빨간 얼굴로 이폴리트가 히죽거리며 뭔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순간, 유진은 이폴리트를 내버려두지 않고, 걷어찼다.
두 사람이 혹시라도 사귈 가능성, 유진은 모조리 차단할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이폴리트를 거세해서라도.
“아야! 으아악, 유진! 너!”
중요 부위를 걷어차여 펄쩍 뛰는 이폴리트를 무시하며, 유진이 조세핀에게 일렀다.
“자, 그럼. 푹 쉬고 계세요. 필요한 생활비는 제가 드릴 거고, 우선 당분간 생활을 봐줄 사람은 구해놨어요.”
“어머나, 철저하구나. 그런데 어디 가니?”
“그야, 파리로 돌아왔으니까, 해야 할 일이 있죠.”
조세핀을 집 안에 넣고, 이폴리트를 끌어낸 유진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잇히이이잉!
타고 온 마차의 말이 울었다.
지나가던 말에 부딪친 탓이다.
복잡한 파리의 거리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가는데 3개월, 오는데 3개월, 도합 반년.
평시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파리는 뒤집어진 뒤였다.
거리 곳곳을 누비는 빨간모자와 국민위병대를 보면 실감난다.
이미 파리의 권력은 왕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오슈가 웃으며 물었다.
“이야, 수완 꽤 좋구만? 우리는 보수 받고 물러나면 되나?”
“앞으로 어쩔 겁니까, 오슈 씨?”
“글쎄, 보아하니 근위대는 완전히 해산된 거 같고. 할 줄 아는 건 군대일 뿐이니 국민위병대라도 입대해야겠는데?”
유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선택이죠. 이런 시대에는 군이 가장 안전할지도 몰라요. 물론 고위장교가 되어야겠지만.”
게다가 오슈는 본래 혁명기에 출세하는 군인이다.
아마도 유진은 정확히 모르지만, 대단한 군사적 재능이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전직 근위대 하사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슈가 고개를 기울이다 씩 웃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말이야. 유진, 너 뭔가 예측하고 있는 거지?”
“뭘요?”
“전쟁 말이야.”
유진이 눈을 부릅뜬 찰나, 오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터질까? 일단 왕은 힘을 잃었고, 국민의회는 지금 전쟁을 벌일 돈이 없을 텐데.”
정말 오슈는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이 시점, 아무도 전쟁을 예측하고 있지는 않다.
심지어 전쟁을 일으킬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전쟁만은 피하고 싶어한다.
영국이라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제 막 혁명을 일으킨 국민의회 의원들은 전쟁은 생각도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만다.
오슈는 이 전쟁을 예측한 게 아니라, 유진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다고.
유진은 가만히 있다 입맛을 다셨다.
조금은 말해줘야 할 상황이다.
혁명의 영웅이 될, ‘장군’ 오슈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회는 귀족들을 전면 적대시할 수 밖에 없어요.”
“뭐?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장 국민방위대 장군만 해도.”
“일시적이에요. 결국 라파예트 장군은 오래 못 버텨요. 성품이 너무 온화해요.”
유진은 원역사에서 향후 벌어지게 된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라파예트 장군이 밀리는 걸 필두로, 군에서 귀족들을 몰아낼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귀족들이 망명한다.
그런데 군에서 귀족들이 차지하는 계급이 뭘까?
오슈가 눈을 크게 떴다.
“장교가 없어지겠군!”
그 말에 마르소와 엘리, 고미, 투르네도 이쪽을 보았다.
모두 전직 하급군인들이었던 이들이다.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유진은 싱긋 웃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되면 평민 부사관들이 사관으로 승진할 수 밖에 없죠.”
“좋아. 기회야! 어, 그런데 부탁할 게 있는데.”
“당분간 자금이라면 제가 대드리죠. 물론 마르소 씨는 놓아두고 가시고.”
그러자 마르소가 눈을 크게 떴다.
“나? 나는 왜?”
유진은 후일, 방데에서 명성을 떨칠 청년 장군을 보다 피식 웃었다.
“그야 당신은 당분간 군대 돌아갈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어, 그렇긴 한데.”
“어차피 백수인데, 당분간 우리 쪽 일이나 도와요. 마르세유에서 봤죠? 소시에테 만드는 거.”
마르소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지금은 장군이 아니라, 군에 염증을 느낀 청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유진은 당분간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이폴리트 수준에서 대처할 수 없는 고등 레벨의 일손이 말이다.
마침, 전직 하사 프랑수아 세베르 마르소는 사실 변호사 자격자기도 하다.
“뭘 할 생각인데? 설마, 나도 밀수하라는 건 아니지?”
관심을 보이는 마르소를 향해, 유진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은행을 만들 겁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하나의 회사로 만드는 거죠. 물론 소시에테 드 보아르네는 그 계열사가 될 거예요.”
바로 18세기 말 최고의 사업, 은행 창업이다.
***
그럼 왜 유진에게 마르소가 필요할까?
이는 무역회사 소시에테 드 보아르네를 앙투안 드 다마스에게 맡긴 것과 같은 이유다.
아직, 유진은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고작 아직 8살 밖에 되지 않은 나이.
아무리 이 시대 프랑스가 법제가 미비해도, 아이는 법적 권리가 없다.
“세상에! 유진 드 보아르네! 너, 뭐하는 놈이야!”
이를테면 집에 돌아오자 분노한 부친 알렉상드르가 펄쩍 뛸 만큼 어리다.
알렉상드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사실 당연하다.
누구라도 이제 막 9살이 될 어린애가 대서양을 혼자 다녀오는 걸 찬성할 부모는 없다.
조세핀이야 너무 급한 상황이니 정신없이 같이 왔을 뿐이다.
화를 주체 못한 알렉상드르가 유진을 보자마자 때리려던 찰나였다.
아주 빠르게 마르소가 손을 잡아채 막아섰다.
“윽, 넌 또 뭐냐?”
“아, 보아르네 자작님. 송구합니다. 이 미천한 몸은 프랑수아 마르소라고 합니다. 전직 프랑스 육군 하사죠.”
“하사? 그런 놈이 왜 감히 날 막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야 이제는 방크 드 보아르네의 직원이니까요?”
“뭐라고?”
“보아르네 은행의 부사장, 프랑수아 세베르 마르소를 소개하죠, 아버지.”
다음 순간, 같이 따라온 전직 사병 루이 투르네가 짐짝을 올려놓았다.
-쩔렁! 쩔렁! 쩔렁!
바로 금화 더미다.
그동안 유진이 벌었던 돈 일부를 레카미에 은행에서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 돈을 들고 도망가지 않은 것만 봐도, 마르소나 투르네의 신의를 알 수 있달까.
반대로 신의 없고 탐욕스런 부친, 알렉상드르는 군침을 흘렸다.
모두 가치 단위가 높은 루이 금화.
은화로 따지면 10만 리브르는 될 것이다.
“이게 뭐냐?”
“마르티니크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돈이죠.”
“뭐? 마르티니크? 아니, 로즈의 집에 그 정도 돈이 있었나?”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마르티니크에서 가져왔다고 오해하는 게 돈의 출처를 설명하기 편하다.
유진은 굳이 해명하는 대신, 향후 계획을 말했다.
“이 돈의 절반으로 은행을 시작할 겁니다. 혁명기, 물가가 폭등하고 정부가 돈이 없을 때, 이걸 다룰 은행은 아주 중요한 조직이죠.”
그 말에 탐욕에 홀려 있던 알렉상드르가 잠시 정신을 차렸다.
이제 막 9살이 될 아이가 은행을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네가? 유진, 넌 아직 8살이야!”
“곧 9살이 될 거예요. 아버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제가 성년이 될 때까진 아버지 이름으로 운영할 테니까.”
“뭐? 내 이름?”
눈을 굴리던 알렉상드르는 불현듯 돈을 보며 외쳤다.
“잠깐. 그럼, 나머지 절반은?”
절반은 자본금이라 치자.
그럼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될까?
유진은 은화 더미를 슥 밀어 주며 웃었다.
“당연히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실 아버지의 정치자금이죠.”
알렉상드르는 눈을 굴렸다.
은행은 이 18세기 말에는 문자 그대로 벤처 사업이다.
고수익, 고배당, 그러나 고위험이 기다린다.
아무리 신동이라 불려도, 어린애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돈, 너무 아깝다.
“우선 5만 리브르예요, 아버지.”
그 순간 도박꾼 알렉상드르는 냉큼 돈을 쥐었다.
“좋아! 네 맘대로 해라, 유진! 역시, 넌 신동, 아니 천재야!”
돈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나가는 알렉상드르를 마르소는 한심하게 보았다.
어떻게 아들과 아버지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러다 마르소는 문득 생각난 점을 유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돈은 진짜로는 다 어디서 난 거야? 설마 다 번 거야?”
“당연히 일부는 빌린 거죠. 레카미에 씨와 베어링 행장한테.”
“맙소사. 너, 이 상황에서 이거 갚을 수 있겠어? 왕실도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데?”
그러자 유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마르소. 정작 바스티유에 갔던 건 당신인데, 왜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하죠?”
“뭐, 처, 철이 없다니.”
“이제 어른이 될 시간이에요. 마르소.”
유진은 냉정하게 말했다.
“돈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돈으로는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시대가 와요. 레카미에도 베어링도 그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을 가입한 겁니다.”
나아가 사실 빌렸다지만, 베어링이든 레카미에든 손해 본 게 없다.
왜?
실은 이 돈의 출처는 결국 프랑스 왕실이 발행한 국채 수수료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면,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유진이 팔아치운 국채가 이 돈의 출처다.
그런데 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왕실의 금융거래는 일시 정지되었다.
결국 레카미에도, 베어링도 왕실에 지불해야 할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있다.
바로 그 대가가 바로 이 돈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돈을 꼭 유진에게 줄 필요는 없다.
만약 혁명기에 유진이 훨씬 더 거물이 될 거라 생각한 게 아니라면.
그 점을 헤아리며, 유진은 싱긋 웃었다.
“이 유진 드 보아르네에게.”
물론 유진은 거물이 될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
그럼 어떻게 혁명기에 일개 아이가 거물이 될 수 있을까?
“자네가 예측한 대로 됐군. 유진 군.”
사실 가장 알고 싶고, 마음이 급하고, 달아오른 쪽은 레카미에였다.
유진이 레카미에를 만나자고 했을 때, 쏜살처럼 달려온 이유다.
파리 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 2층.
그곳에서 유진은 레카미에를 보며 웃었다.
“자금은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니, 나야말로. 이전에 자네 덕분에 오를레앙 공작과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했잖나? 그 덕에 우리 은행이 폭도들로부터 무사했어.”
“적당한 시기에 줄을 잘 서셨군요. 곧 바꾸셔야겠지만.”
오를레앙의 몰락을 예언하는 듯한 말이다.
레카미에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비범한 도박신동은 실로 도박에 능하다.
그럼, 이번 도박은 어떨까.
“그럼, 누가 정권을 쥘 것 같은가?”
유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격변기에는 권력자를 잡는 것보다, 몰락할 자를 가리는 게 더 낫습니다.”
“참, 이럴 때보면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군. 그래, 몰락할 자는?”
“오를레앙 공작.”
레카미에가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아까 한 말에서 예상했지만, 정말 그랬던 것이다.
유진은 오를레앙 공작이 몰락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사실 몰락할 이유를 찾는다면 많다.
왕국 제일의 귀족, 부자, 나아가 왕위 승계권자.
혁명 상황에서 몰락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단지 혁명파 지식인들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지금도 유력한 의원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까?
그때다.
“이게 아시냐 채권 지폐인가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카미에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레카미에의 지갑에 들어 있는 ‘아시냐’ 지폐를 유진이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이쪽은 레카미에의 전공 분야다.
바로 국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가 발행한 채권이자, 지폐.
교회 토지를 담보로 하는 증서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레카미에는 미소지으며 유진에게 자랑하듯 설명했다.
“그래. 자네도 들었나 보군. 국민의회는 지금 재정난을 교회 토지 몰수로 해결하기로 했네.”
“예? 교회요? 아니, 교회에서 반발할 텐데요!”
“응? 아, 이폴리트 군인가? 하하, 이런 시국에 반발한다고?”
불쑥 옆에 앉아 있다 끼어든 이폴리트를 보며 레카미에가 창 밖을 보았다.
“저렇게 될 텐데.”
창밖, 붉은 모자의 상퀼로트들이 행진하며 외치는 중이었다.
“외쳐, 나는 귀족을 증오합니다!”
“제3계급 만세!”
“국가의 배신자들을 몰아내자! 혁명 만세!”
문제는 그들이 앞세운 사람들이 바로 수도사, 수녀,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이란 거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로 토지 몰수에 반항하고, 교황을 저버리지 않고, 국민의회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거부한 이들이다.
이른바 비선서파 성직자들.
혁명정부가 지극히 탄압하고 있는 이들이다.
“비선서파 성직자인가요? 말로는 들었는데.
“그래. 혁명파로 넘어온 친구들은 무사하지만, 저 친구들은 저 꼴이야. 성직자만이 아니지. 도망간 귀족들의 하인들도 비슷해. 차라리 폭도, 아니 시위대에 가담했다면 우대받을 것을.”
“괜히 충실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당했네요.”
혁명의 시대, 어설프게 옛 질서를 지키는 일들은 죽는다.
아주 약삭빠른 이들이 오히려 살아남기 쉽다.
그러나 유진에게는 조금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눈앞의 은행가, 거래 관계를 지킬 줄 아는 노인처럼.
유진이 슬쩍 눈앞의 아시냐 채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폐는 사지 마세요.”
“응? 아, 그러지. 사실 계속 가치가 폭락중이라. 돈을 종이로 찍다니, 참 몹쓸 짓이야.”
“당분간 곡물에 투자하시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올해는 풍년이지만, 내년은 다시 힘들어질 테니까. 응?”
문득 가치가 오를 쪽을 유진이 얘기하던 찰나였다.
거리 쪽에서 술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시선을 돌리던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는 얼굴이 보인다.
“시민들이여!”
한때는 그저 힘없는 일개 연사에 불과했던 변호사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실권을 쥔 국민의회의 주요 인사로 급부상했을 정치인이다.
나아가 시대를 한때 쥐고 흔들 집권자가 될 자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광장에 서 있었다.
“오오, 로베스피에르 씨다!”
“의원님, 제 청원을 들어주십시오!”
“민중의 영웅이여!”
달려가는 시민들을 보다, 레카미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저 친구. 요새 한창 국민의회에서 주목받는 의원이군. 뭐라더라, 자코벵 클럽에서도 꽤 강경파로 주목받는다던데.”
아직은 그저 유망주일 뿐.
하지만 시대의 격변은 저 26살짜리 청년을 제일의 권력자로 만든다.
그것도 적도, 동료도, 결국은 자기 자신조차도 죽이는 공포정치의 참살자로.
그 중에는 유진의 부친, 알렉상드르도 있다.
유진은 로베스피에르를 보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까이 하면 위험하고, 너무 멀어지면 더 위험한 실권자가 되겠죠.”
반드시 미래를 바꿔야 한다.
이미 유진은 거물이 되지 않으면 죽을 처지다.
왜냐하면 원역사와 달리 왕실의 시동이 되었고, 또한 왕실을 통해 돈을 벌었으니까.
손에 쥔 힘, 곧 금화를 이용할 시간이 왔다.
***
아무리 모든 게 급변하는 시대라도, 안정적인 금속이 있다.
바로 [금]이다.
-쩔렁! 쩔렁! 쩔렁!
책상 위로 금화가 쏟아져 내린다.
금이 부딪치는 소리는 의외로 맑다.
마치 연주회의 명연주자가 연주하는 악기라도 듣는 듯, 앙투안 드 다마스가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문득 눈을 뜬 다마스가 씩 웃으며 눈앞의 금화를 세는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이야, 내가 갖고 왔지만 정말 듣기 좋은 소리군요?”
마르소는 피식 웃다 대꾸했다.
“앙투안, 밀수가 잘 되나 봅니다?”
“뭐, 적당히. 마르티니크 출신 사람들 정착금 줄 정도는 되죠, 마르소. 신고는 안 할 거죠?”
“하하핫! 회사는 달라도, 소시에테나 방크나 둘 다 ‘보아르네’ 아닙니까?”
소시에테 드 보아르네와 방크 드 보아르네.
소시에테는 배로 [밀무역]을 하고, 방크는 그 무역물품을 금전으로 바꾼다.
유진이 귀국한 후 고작 반년.
그렇지만 밀무역과 환전을 겸한 영업은 날로 성업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밀무역 쪽이 주된 수입원이 되어 버렸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쪽은 단연 말 없는 선장, 니콜라스다.
그러나 금전거래는 아무래도 ‘사장’인 다마스가 담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환전할 밀무역 물품과 금전을 파리로 가져오고, 다시 밀거래할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그때 마르소가 문득 물었다.
“한데, 손님은 잘 들어 오셨습니까?”
이번 밀항은 이전과 조금 다르다.
물품만이 아니라 사람도 실어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다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출국은 세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지만, 입국은 쉽더군요.”
“혁명 정부는 아무래도 해외로 도망가는 것만 잡긴 하겠죠. 흐음, 그래도 곧 오신다니 준비를 해야겠네요.”
“잘 준비해 주세요. 참, 제가 가져갈 물건은?”
방크 보아르네의 부행장, 마르소는 빙긋 미소 지으며 금화를 들고 일어났다.
“곧 가지고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커피나 한 잔 하시지요.”
커피가 일상으로 대접되는 곳.
그러니까 이곳은 카페다.
나아가 새로 생 제르맹 구역에 들어선 은행, 방크 보아르네의 건물이기도 했다.
유진이 설립한 방크 보아르네는 건물 1층 전체가 카페다.
이것은 유진의 아이디어다.
현대의 은행들이 대부분 1층에 카페를 운영하는 걸 본딴 거랄까.
의외로 이 시대에도 들어맞는 점도 있다.
왜냐면 18세기에도 카페는 사업가들이 사업을 논의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점원이 가져온 커피를 다마스가 홀짝일 찰나였다.
문득 누군가 장년인이 구석에서 잎사귀 하나를 들어 보이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호오, 이거 진짜 ‘아메리카’ 산 담배인가?”
잠시, 다마스는 체할 뻔 했다.
다름아닌 다마스가 가져온 밀수품이 바로 저 담배다.
원역사 현대야 일상으로 거래되는 물품이지만, 이 시대 담배는 그야말로 사치품이다.
세금이 잔뜩 달라 붙는데다, 원산지가 주로 신대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독성 강한 담배는 이 시대에도 인기다.
미국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담배세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어쨌든 혁명이 시작된 후, 부쩍 담배 밀수도 늘었다.
다마스와 니콜라스 쉬르쿠프가 밀거래하는 주된 품목도 담배다.
문득 담배를 운운하는 남자 앞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유진의 보좌역, 이폴리트 샤를이었다.
“쉿, 우리가 아는 거래처에서 가져 온 겁니다.”
“정상적인 경로는 아니겠구만, 흐흐.”
“아시죠? 이건 아무도 모르는 거. 정가의 절반 가격입니다. 아니, 요새 시세로는 10프로 가격일 수도 있죠.”
그야 밀수품이니 당연한 얘기다.
당장 세관의 관세가 붙지 않으니까.
허나 밀거래 물품을 사들이는 저 중년 남자도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았다.
물건을 살피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전부 사지. 대신, 우리 상회에 독점 공급해주게.”
“좋습니다, 무슈 레베이옹.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시게 되겠군요.”
“후후, 요즘 같은 격변기에는 신사업에 늘 진출할 준비를 해야 하지.”
레베이옹, 다마스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장 밥티스트 레베이옹.
프랑스 최대 제지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무려 3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해 벽지와 종이를 팔아 치우는 남자다.
프랑스 최초의 기구를 만든 종이도, 레베이옹이 전적으로 댔다.
혁명 직전에는 이 사업가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지금도 혁명 정국인 프랑스에서 사업을 하는 중인 것이다.
이제는 아예 담배 밀수품까지 손대려는 걸까.
그 모습을 흘깃 보다 모른 척 다마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자, 아시냐 채권입니다.”
마르소가 종이더미를 들고 나오며 웃었다.
아시냐 채권, 곧 국민의회가 발행하고 있는 채권이다.
이 채권을 네덜란드 호프 은행으로 넘기는 게 다음 항해의 목적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경지대는 어수선하고 육로가 거의 막힌 상태다.
그래서 호프 은행으로 채권을 보내는 일도 밀수선, 산 마리아호가 필요한 것이다.
원역사에서, 베어링스 뱅크가 저 유명한 루이지애나 매각 거래를 할 때도 이렇게 배로 채권을 운반한다.
다마스는 무거운 금화 대신 가벼운 채권을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거래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시오. 목숨이 가장 중요하단 걸 잊지 말고.”
“물론이죠. 난 이래뵈도 그 마르티니크 폭동에서도 살아남았다구요!”
신나는 발걸음으로 나가다, 다마스는 흘깃 방크 보아르네의 금고를 보았다.
꽤 크다.
그러나 오늘 가져온 금화만으로도 10분의 1은 찰 것이다.
“이 속도면, 저 금고는 금방 채우겠군.”
그럼 다마스에게 들어올 성과급도 더 많아질 게 분명하다.
가방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마스는 보르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보르도에서 파리로 달려오는 남자도 있다.
“흐음, 파리는 볼 때마다 달라지는군. 늘 새로워.”
바로 프랜시스 베어링, 베어링스 뱅크의 공동 오너다.
옛날 같으면 북쪽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로 왔을 것이다.
허나 혁명 후, 국경 통제가 심해져 베어링조차도 보르도로 밀항을 통해 와야 했다.
수행 비서와 함께 파리 거리를 살피던 베어링이 손을 들었다.
교통마차, 18세기 도시의 거리를 갈 때 필수적인 마차다.
보르도에서 파리까지 올 때는 [역마차]라는 마차 교통을 이용했지만, 이곳에서는 다시 시내 교통마차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교통마차가 섰다.
“어디로 가십니까, 신사 양반?”
“방크 보아르네로 갑시다.”
“응? 방크 보아르네라고? 포부르 생제르맹의 새로운 명물, 그 카페 말이오?”
마차에 올라타던 베어링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십니까?”
베어링의 프랑스어는 굉장히 유창해, 마부는 외국인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떠들었다.
“알다마다. 요새, 거기 찾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그래요? 허어, 어떤 사람들이오?”
“대체로 돈 많아 보이는 친구들이지요, 쯧! 거기 집 주인이 이번에 국민의회 의원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마부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래저래 줄 대려는 자들이 많은 모양이오. 세상이 바뀌었으니!”
반대로 베어링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과연, 그냥 은행으로도 제법 번창한다는 건가.”
본래 유진이 혁명이 일어나기 전, 베어링과 진행하던 거래는 채권중개업이다.
신대륙에서 귀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은행을 설립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지만, 그저 채권중개업을 재개하려나 했다.
하지만 은행의 본래 업무, 예금 보관과 대금 대여도 제법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링을 왜 파리까지 불렀을까?
사업이 잘 된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게 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냥 날 부른 건 아니라는 건데. 흐음.”
“응? 무슨 말이오? 거기 은행에서 손님을 불렀소?”
“그렇지요, 후후. 저도 꽤나 바쁜 몸인데.”
모험을 좋아하는 은행가, 베어링이 눈을 번뜩였다.
“아마 새로운 사업을 하나 제안하려나 봅니다. 어린, 아니 젊은 그 집 주인이.”
그게 아니라면 굳이 최대 거래처를 부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위험한 혁명 시국에, 그것도 밀항으로.
***
혁명기는 모든 시계가 빨라진다.
-찰칵!
유진의 회중시계도 조금 빨라졌다.
아마도 적도를 넘나들다 보니 태엽이 조금 늘어난 모양이다.
가볍게 시간을 맞추며 유진이 황금빛 시계를 만지작거릴 찰나였다.
시계가 꽤 탐나 보였는지, 얄쌍한 중년 남자 프랜시스 베어링이 눈을 번뜩였다.
“멋진 시계군. 어디서 난 건가? 스위스제?”
“부품은 그럴지도 모르죠. 일단 국왕 폐하가 직접 만드신 겁니다. 혁명 전에 선물로 주셨죠.”
“호오, 그건 숨기는 게 좋겠군. 요새 같은 때는 왕실과는 아주 멀리 있는 게 좋지.”
여전히 탐욕스러운 눈길을 시계에 보내며, 베어링이 씩 웃었다.
“하지만 이런 증서와도 거리가 가까운 건 안 좋겠지?”
이곳은 카페 보아르네.
얼마 전까지는 보아르네 저택의 바로 옆, 귀족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시작된 후, 많은 귀족들이 그렇듯 이 집 주인도 외국으로 도망갔다.
비어버린 저택을 유진이 사들여 방크 보아르네라는 간판을 붙인 것이다.
1층은 카페, 2층은 사업 거래, 3층은 금고.
지금 베어링을 맞이한 곳은 2층이다.
예컨대 지금 아시냐 채권 증서를 만지작거리는 베어링과 같은 사업가들을 맞이하는 장소랄까.
아시냐 채권, 곧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발행한 채권이다.
담보는 당연히 교회 토지.
그러니 이 증서는 이를테면 토지 교환 채권인 셈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아시냐를 두들겼다.
“토지를 사들이는 데는 도움이 된답니다, 미스터 베어링.”
“흥, 외국인인 내게는 꿈 같은 소리군. 해서, 날 여기까지 부른 데는 이유가 있겠지?”
“꼭 이유가 있어야 친구를 봅니까? 제가 판 프랑스 국가공채, 모두 환가하고 계신걸로 아는데요? 게다가, 산 마리아 호 뱃편으로 정중히 모셨는걸요?”
서기 1790년 6월, 유진이 귀국한지 이제 반년.
유진이 [방크 보아르네]와 계열사, [소시에테 보아르네]를 설립한지도 반년이 지났다.
주된 사업은 아시냐 채권 거래.
허나 진짜 돈은 되려 [밀무역]에서 나오는 중이다.
이제 슬슬 진짜 금융 사업 확대를 노리고, 최대 ‘거래처’를 부른 거였다.
방크 보아르네에 10만 리브르를 투자한 도박사, 베어링이 피식 웃었다.
“그래, 놀랍게도 프랑스 국민의회는 이전 왕실 채무를 그대로 승계하더군. 나 같으면 모두 무효라고 했을 텐데.”
혁명은 절대왕권을 무너뜨렸지만, 부채는 무너뜨리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결국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혁명이다.
앞장서 외치는 것은 법률가, 거리를 누비는 것은 상퀼로트 하층 평민이지만, 뒷돈은 은행가들이 댄다.
왕실이 이전에 발행한 국채를 보유한 것도 다수가 은행가다.
그러니 국민의회는 채무 무효 선언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도박을 걸고 왕실 채권을 사들였던 베어링도 막대한 이익을 보는 중이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혁명 주도자들이 변호사, 공무원, 언론인, 기업가, 그리고 은행가라는 걸 잊으셨군요.”
“아하, 자네나 레카미에 같은 작자들이 이 나라의 부를 빨아먹고 있었지?”
“오해가 지극하시네요. 저야 중개거래를, 그것도 1년 정도 했을 뿐이죠.”
문득 유진이 베어링이 휴지처럼 구기던 아시냐 채권을 가리켰다.
“대폭락이 있을 겁니다, 곧.”
베어링의 손이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지?”
“가지고 계신 그 증서, 국민의회가 곧 추가 발행할 겁니다.”
“뭐라고? 아니, 토지 몰수는 벌써 다 한 거 아니었나? 설마 이번엔 귀족 토지 몰수인가?”
원래 18세기 말, 아직 유럽은 순수한 지폐는 없다.
다만 금태환증서라고 해서,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교환해주는 게 있을 뿐.
그런데 혁명을 시작한 프랑스는 빚만 45억 리브르다.
금이 있을 리 없으니 대신 담보로 잡은 게, 교회의 토지다.
그게 바로 이 아시냐, 이자율 5프로의 채권 증서다.
1장에 1000리브르.
총 발행금액은 4억 리브르에 해당한다.
당장 급한 재정난은 이걸로 해소되었다.
국민의회는 아시냐로 부채 이자, 국가 재정, 군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일 뿐이다.
특히 이미 발행된 국가공채의 만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아시냐 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다시 담보로 잡을 토지는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있다.
베어링이 말한 것처럼 귀족들의 토지, 특히 [망명자]들의 토지다.
하지만 아직 혁명 정부는 거기까지는 손대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원역사를 헤아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앞으로 하게 될지 모르죠. 하지만 당분간은 아닙니다.”
“그럼 뭐야, 대체?”
“이번엔 채권이 아니에요. 이자가 안 붙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폐죠.”
아예 담보가 없는 [지폐]로 발행된다.
현대에는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지금은 1790년이다.
전자 금융 거래도 없고, 국가 신용이란 개념도 없다.
사실 프랑스는 그런 게 있다 해도 신용이 바닥인 상황이다.
도박사지만 금융가로는 프로인 베어링이 입을 쩍 벌렸다.
“은이나 금으로 돈을 찍어내지 않고, 종이로 돈을 찍는다?”
“그렇게 놀라실 건 없잖아요? 영국의 [시티 오브 런던]에서도 100년 전부터 지폐를 찍어낸 걸로 아는데요.”
“그건 금 태환 증서야. 보유한 금이 있으니까 찍는 거지. 이건, 원래 토지로 가치를 대체하는 건데, 토지도 없다는 얘기 아닌가?”
영국의 중앙은행, [런던은행]은 이미 금태환 지폐를 발행해 왔다.
그러니 베어링은 지폐의 편리함과 위험을 더욱 잘 알 것이다.
나아가 유진이 지금 말할 기회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프랑스의 은행가, 이를테면 레카미에 같은 사람보다도.
유진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폭락이 발생할 게 예상되는 거죠, 미스터 베어링.”
담보가 없는데 증서가 무한정 발행된다?
당연히 증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현대의 경제학자들이라면 화폐 가치 폭락과 물가 상승, 곧 초 인플레이션을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는 그런 개념이 아직 없다.
반대로 최신 금융 기법이 발달한 영국의 은행가라면 얘기가 다르다.
가만히 턱을 쓰다듬다 베어링이 이를 드러냈다.
기회를 깨달은 것이다.
“규모는?”
“8억 리브르. 아마, 1790년 9월일 겁니다.”
“정보통이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상세하군. 앞으로 3개월이라. 당장 폭락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대폭락의 와중에 큰 돈을 벌 수도 있겠군.”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단계로 투기 열풍이 불겠죠. 아마 주식 시장이 아닐까요?”
가치 대폭락은 대폭등만큼이나 투자 수익 획득의 기회다.
특히 초 인플레이션 직전에 통화량이 폭증할 때는, 일시적으로 가치 폭등 현상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주가 폭등이다.
현대 주식 시장도 그런데, 제한된 증서를 거래하는 18세기 주식 시장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사실 유진은 말하지 않았지만, 아시냐 발행은 8억으로 그치지 않는다.
1791년 초에는 6억, 다시 그 해 말에는 3억을 또 발행한다.
그 다음 해, 1792년에는 무려 7억 리브르를 재발행한다.
왜?
전쟁이 터져서.
이 모든 흐름은 혁명이 일으킨 광풍이라, 쉽게 변할 리 없다.
특히 가치 대폭락과 물가 대폭등은 필연적이다.
역사는 몰라도 금융에는 빠삭한 베어링도 이해했다.
베어링이 미간을 좁혔다.
“이런 정보를 알려준 이유가 있겠지. 대가는? 뭘 원하나?”
“추가 투자 좀 하시죠. 아마 1파운드면 곧 100 리브르를 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발행량이 늘어나면 당연하지만. 이걸로 뭘 하게? 설마 주식 투자? 어디에?”
유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
후세에 유명한 것은 당연히 영국 동인도 회사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에서는 해양 국가는 앞다투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네덜란드,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도.
물론 사실 저 유명한 7년 전쟁 때 영국에 무참히 깨져 정작 회사의 목적물인 인도에서는 상당히 쫓겨난 상태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도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존재한다.
더 놀라운 것은 프랑스의 인도 무역은 계속 성업 중이라는 거다.
유진이 타고 갔던 배의 선장, 니콜라스의 사촌, 로베르 쉬르쿠프도 지금쯤 인도에서 돌아오는 무역선에 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정보에 빠른 사람이라면 아는 게 있다.
올해, 국민의회는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박탈했다.
다른 무역업자들의 무역 자유화가 명분이다.
베어링은 그 점을 지적했다.
“거긴 망할 게 뻔하지 않나?”
“아뇨. 아직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제는 독점 무역회사는 아니지만 여전히 프랑스 배들은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인도로 갑니다. 반면 올해 4월 독점권이 박탈당했기 때문에 주가는 폭락한 상태죠.”
“허, 이건 좀 모험인데. 독점권 박탈은 회사 폐지로 이어질 수도 있어.”
바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일시적으로 그런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때문에 베어링도 그 사실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아가 사실 베어링의 말이 맞다.
서기 1794년에 원역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결국 강제 해산된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1790년이다.
주식 폭등과 폭락은 당연히 강제 해산 이전의 일이다.
유진이 아시냐를 두들기며 말했다.
“미스터 베어링, 우리는 장기에는 모두 죽어요. 지금 그때까지 주식을 들고 있을 겁니까?”
이것은 사실 미래 원역사의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이다.
장기에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러니 단기 대책이 필요하다.
주가 폭등과 폭락은 어떨까?
그야말로 초단기 대책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베어링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그래, 내가 도박하러 왔지. 장사하러 온 게 아니지! 투자하지! 우선 얼마면 되나?”
유진은 싱긋 웃으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10만 파운드. 그거면 충분합니다. 곧 1000만 아시냐가 될 테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운드]라는 거다.
즉, 프랑스의 화폐가치 폭락과 폭등에서 자유로운 외국돈.
바로 유진과 방크 보아르네가 투기에 사용할 안정 가치의 화폐다.
최소 100배의 이익을 얻을, 도박이 시작되었다.